전출처 : balmas님의 "책 안내-트랜스토리아 2005년 상반기호"

그렇죠. 스피노자 철학에서도 "esse"라는 용어가 드물게 사용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이 용어가 당대의 철학 어휘로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지, 스피노자

자신이  이 용어를 중시하거나 이 용어에 대해 독창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닙니다.

 

esse는 원래 중세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서는 existentia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니까(그리고 그와 함께 perfectio라는 의미도 수반되죠) 이걸 본질로

이해할 수는 없겠죠. 반면 스피노자는 esse라는 단어보다는 realitas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고, esse를 realitas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스피노자가 "서구 형이상학에 맹점을 만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스피노자가 "하이데거의 서양 형이상학의 계보의 한 가지 맹점을 보여주는" 철학자라고

했죠. 제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 심지어 그 이전의 철학자들

로부터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 그리고 칸트 및 독일 관념론을 거쳐

마르크스와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모든 철학이 "존재"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보고 있죠.

 

그런데 스피노자는 "존재"의 문제, 또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이 "존재"에 해당된다고 하는 건 순전히 견강부회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제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형이상학/철학의 중심 대상으로 간주한 철학적 계보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계보는 서양 철학사의 <한 가지 계보>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의 철학 계보에는 오캄 같은 유명론자나 홉스, 로크, 흄 등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험론 전통은 들어설 자리가 없죠. 이러한 철학 계보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영향력이 떨어진다고는 전혀 이야기할 수 없는데 말이죠. 반면 스피노자는

소위 대륙 합리론의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이긴 하지만,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와는 달리

하이데거가 거의 연구하거나 언급하지 않고 있는 철학자이죠. 이는 하이데거 자신도

스피노자 철학이 자신의 철학사 계보의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얼마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방증해주는 한 가지 증거로 볼 수도 있겠죠. 또 사실이 그렇구요.

 

그러니 아무 철학자에 대해서나 "esse"나 "존재"의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고, 또 그게

철학사를 이해하는 바람직한 방식도 아니죠.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하이데거의

철학이나 1930년대 신토마스주의(자크 마리탱, 에티엔 질송)의 영향이 그만큼 후대의

서양 철학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우리나라

철학계는 일제시대부터 하이데거의 영향력이 컸으니까, 대륙 철학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철학도들이 이러한 철학사적 관점을 거의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이제 비판적 거리를 두고 볼 필요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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