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펴내는 [철학논집] 34집에 수록될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판본이기 때문에, 이 글에 관해 토론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철학논집]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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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정의: 벤야민, 하이데거, 데리다
I. 메시아주의적 전회?
[이 글은 2013년 3월 9-10일 도서출판 길 주최로 서울 정독도서관에서 열린 “벤야민 커넥션” 심포지엄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다소 수정ㆍ보완된 상태로 2013년 4월 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제220차 월요모임에서 다시 발표되었다. 두 차례의 발표에서 좋은 논평을 해주신 참석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아울러 철학논집의 익명의 심사위원들 가운데 두 분이 이 글에 관해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해준 바 있다. 그 중 일부는 수용하여 본문의 해당 대목에 반영했는데, 문제제기 중 일부는 필자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이유에 대해 해명해두고자 한다. 우선 심사위원 A는 “논문 제목과 내용의 일치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보이며, 결론이 용두사미 격이다. 보충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이 글의 제목이 글의 내용과 불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데리다 자신이 마르크스의 유령들 1장에서 ‘시간과 정의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하이데거와 벤야민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벤야민과 하이데거(및 데리다)의 관계를 다루는 외국의 여러 논의들도 시간과 정의의 관계를 핵심 쟁점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Fritsch 2005; Hamacher 2002, 2005; Johnson 2007; Kleinberg-Levin 2007; Weber 2009 등을 참조). 더 나아가 결론이 ‘용두사미격’이라는 심사위원 A의 주장이 어떤 근거에서 제기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 자신이 보기에 이 글 마지막에서 필자가 제기한 쟁점(특히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이라는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해방의 정치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은 현대 정치철학, 특히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이 대결해야 할 핵심적인 주제이며, 그 이유는 5절의 논의를 통해 충분히 해명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라도 심사위원 A의 주장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좀 더 상세한 해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심사위원 A는 15쪽 이하에서 논의되는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나오는 “현존자”라는 개념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현존재’라고 하는데, 굳이 ‘현존자’라 표현한 이유를 밝힐 것”이라고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현존재라고 번역하는 것은 존재와 시간에서 사용된 ‘Dasein’ 개념이며, 이 글에서 사용되는 ‘현존자’는 후기 저술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나오는 ‘das Anwesende’의 번역어다. 이는 필자가 참고한 하이데거 저서의 국역본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번역어이며, 국내 하이데거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법으로 알고 있다. 심사위원 B는 “논문에서 “메시아주의”에 대한 분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논의를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다. 한 예로 필자는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은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적 힘“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메시아주의“의 분석이 부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메시아주의,” ‘강한 메시아주의“에 대비되는 “약한 메시아주의”에 대한 논의가 필히 첨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이 문제제기를 수용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4절 전체의 내용이 메시아주의 및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논의이고, “약한 메시아주의”에 관한 벤야민과 데리다 또는 하마허의 견해 차이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약한 메시아주의에 대한 논의가 필히 첨가되어야 할 것”이라는 심사위원 B의 주장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대중적인 개론서가 아니라 전문적인 학술 논문에 관한 심사에서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사용한 “약한 메시아적 힘”의 뜻풀이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필자는 심사위원 B에게 나중이라도 자신의 논점을 좀 더 정확히 밝혀줄 것을 요청한다. 혹시 심사위원 B가 “약한 메시아주의” 개념의 지성사적 배경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가 해서 이 개념의 지성사에 관하여 각주 하나를 추가해 두기는 했다. 또한 심사위원 B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이 논문의 핵심은 벤야민의 메시아적 정치사상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 굳이 하이데거의 시간개념과 정의개념이 다루어져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필자는 1절과 2절에서 벤야민과 하이데거를 이 글에서 다루게 된 논의의 배경을 밝혔으며, 3절에서는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 1장에서 시간과 정의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을 탈구축의 대상으로 삼게 된 이유 및 쟁점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5절에서는 데리다의 유사초월론 또는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이라는 문제설정에 대하여 하이데거의 말년의 성찰이 의미 있는 이론적 통찰을 제시해주지만 그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역시 충분히 해명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심사위원 B가 이러한 논평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필자가 3절과 5절에서 제시한 논의에 대하여 좀 더 정확한 비판을 제시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이후에라도 이 점에 관한 심사위원 B의 좀 더 분명한 견해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메시아주의의 열풍이 뜨겁다. 서양 인문학에 밝은 전공자들만이 아니라 서양 인문학의 최신 동향에 웬만큼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 서양 인문학계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여러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메시아,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주의 또는 종말론에 관한 논의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기독교와 관련된 신학자들의 저작이나 보수적인 이론가들의 저작이 아니라, 급진적인 이론가들, 가장 좌파 쪽에 위치해 있는(또는 그렇다고 간주되는) 저자들의 책에서 이런 논의를 접하게 된다. 가령 최근 “공산주의라는 이념”이라는 제목 아래 일련의 학술회의를 조직하고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와 슬로베니아의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의 이런저런 저서에서 우리는 사건, 예외 및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적 폭력 등에 관한 논의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가령 Badiou 1993, 1997, 2009; Zizek 2003, 2006, 2009). 또한 호모 사케르(1995)라는 출세작을 통해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떠오른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의 여러 저작에서도 우리는 메시아적 시간성 및 메시아주의적 정치와 관련된 지속적인 준거를 발견할 수 있다(Agamben 1990, 1998, 1999, 2001, 2010). 그밖에도 메시아주의나 종말론 또는 정치신학에 관한 이런저런 저작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가령 De Vries 2002, 2006) 가히 메시아주의적 전회 또는 정치신학적 전회라고 할 만한 흐름이 아닐 수 없다.[또는 Hamacher 2002나 Weber 2009처럼 벤야민의 단편 “종교로서의 자본주의”(1922)에 기초를 둔 작업 역시 일종의 메시아주의적 역사철학에 대한 탐구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왜 이러한 메시아주의적인 열풍이 나타나고 있는가? 그것도 보수주의 이론가들이나 기독교 신학자들의 저술이 아니라, 가장 급진적인 정치 사상을 제시하는 좌파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메시아주의에 관한 논의가 왜 이렇게 집중적으로 표출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닌 이론적ㆍ실천적 특징들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 간략히 답변해볼 수 있다. 우선 자유주의 정치의 위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유일하게 보편적인 정치체 또는 정치 원리로 자부하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보편적인 정치적 가치가 퇴조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이주 및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과 인종주의, 민족 갈등이 확대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자유 민주주의 정체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실효성 있는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뿌리로 지목되면서, 자유 민주주의적인 정체 자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근본적인 정치에 대한 요구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와 관련하여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곧 자본주의의 종언을 어떻게 사고하고 또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 자본의 시간성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 같은 질문이 메시아주의 정치를 불러온 핵심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가 2007년 위기 이후 붕괴하거나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됨에 따라, 신자유주의의 종말, 자본주의의 종말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좀 더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메시아주의로 나타날까? 그것은 ‘종말’, ‘단절’, ‘사건’, ‘예외’ 같은 범주들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시간성이 압도적인 질서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것과의 단절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시간성,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성을 사유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마르크스주의적 시간성 개념과 현대 유럽 철학의 시간성 개념에 관한 흥미 있는 비교로는 Osborne 2008 참조.] 이 때문에 종말과 단절, 새로운 시작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전통적인 메시아주의 사상, 특히 정치신학 사상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할 수 있다. 더욱이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보편적인 해방의 계급, 곧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주체성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단절과 새로운 시작의 사건을 사유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메시아주의, 또는 종말론은 종교 내지 신학으로의 퇴보를 뜻한다기보다는 종말론의 종교, 메시아주의 신학에 담겨 있는 깊은 철학적 통찰과 그 실천적 함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그런데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사실 이미 마르크스의 저작 자체 내에 이미 이러한 쟁점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역사적 생성의 경향들과 결과들의 분석을 지향하는 시간의 정치철학(즉 ‘목적론’)과 다른 한편으로 ‘극단적’이거나 ‘묵시록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 —착취 세력과 해방 세력이 서로를 상쇄(相殺)하는 상황 —의 의미와 결말의 발본적 불확실성을 지향하는 시간의 정치철학 사이의 딜레마란, 마르크스의 작업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독해들이 외부에서 마르크스에게 투사한 딜레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발전과 반자본주의적 혁명에 관한 마르크스의 구상 전체를 가로지르고 갈라놓는 딜레마다.” Balibar 2011, 145쪽. 강조는 발리바르.]
바로 여기에서 현재 전개되는 좌파 메시아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 나온다. 그것은 이러한 메시아주의 정치가 매우 사변적인 정치학이라는 점이다. 바디우, 지젝, 아감벤과 같은 대표적인 좌파 메시아주의 이론가들 중에서 누구도 (막연하고 일반적인 정식들을 제외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국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이나 조직에 관한 구체적인 성찰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수행하는 것은 철학에서, 신학에서, 이론 내에서의 투쟁이다. 더욱이 이들의 이론적 투쟁은 경험적인 현실 구조를 다루는 사회과학과의 연계 속에서, 그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이라기보다는 주로 사변적인 역사철학이나 정치신학, 문화이론적 차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항상 혁명과 봉기, 사건, 단절을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외치지만, 그것은 사변적인 차원에서의 성찰이고 호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수행할 만한 혁명적 주체와 그 조직 형성에 관한 고민이 없을뿐더러, 이들이 단절을 외치는 자본주의 질서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관한 면밀한 분석도 수반되지 않기 때문이다.[바디우 자신은 “절대적 시작”에 기반을 둔 존재 사유, 어떤 상황에 대한 “개입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으며, 자기 자신의 부정적 의지 이외에 다른 지주 없이 상황과 절연한다”고 상상하는 관점을 “사변적 좌익주의”(gauchisme spéculatif)(Badiou 1988, p. 233)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입장과 거리를 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997년 출간된 성 바울이나 공산주의적 가설에서 바디우 자신이 정확히 이러한 종류의 사변적 좌익주의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바디우의 정치적 입장을 사변적 좌익주의로만 규정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이 점에 관해서는 Bosteels 2009 및 Sauvêtre 2011를 참조), 바디우 자신이 사변적 좌익주의에서 벗어나는 설득력 있는 이론적 입장을 제시해주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좌파 메시아주의는 ‘바깥의 정치’라고 명명될 수 있는 현대 정치철학의 한 분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진태원 2012a 참조) 넓은 의미에서 바깥의 정치에는 아감벤이나 바디우, 지젝을 포함하여 네그리, 랑시에르 등까지 포함되므로, 이들의 관점은 네그리나 랑시에르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변적 메시아주의 내지 사변적 정치학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이들의 이론이나 주장이 현실에 대한 분석과 주체 형성에 대한 성찰을 수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실천적 수동성을 조장하거나 그것을 사변적 급진성으로 은폐하거나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요컨대 현실과 실천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사변적 차원에서의 해방감으로 해소하는 식의). 따라서 메시아주의적인 정치철학이 광범위하게 등장하고 있는 현상은 주목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과 난점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도래하게 된 지적ㆍ정세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의 필요성과 동시에 한계를 꼼꼼하게 따져보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벤야민과 하이데거, 데리다에서 시간과 정의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세 명의 사상가의 연관성과 차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은, 이들 사상의 독창성과 깊이도 중요한 이유가 되거니와, 또한 이들의 사상이 우리 시대의 급진적인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에 깊은 영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메시아적인 것’ 및 정치신학의 근대적, 현대적 논의를 검토하는 최근의 한 논문 모음집의 편자들은 현재 서양 인문학계에서 거론되는 메시아주의적 전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 데리다를 꼽고 있는데, 매우 설득력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데리다의 탈구축론은 메시아적인 것에 관한 동시대 철학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으로 남아 있다.” Fletcher & Bradley 2010, p. 3.] 실제로 아감벤은 벤야민과 하이데거 철학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메시아주의 내지 종말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으며, 지젝은 벤야민의 정치신학 및 역사철학을 원용하여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급진적인 정치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아감벤이나 지젝 또는 부분적으로는 바디우 모두 데리다(및 레비나스)에 관한 비판을 통해, 또는 그에 대한 비판을 위해 하이데거나 벤야민 또는 여타 다른 정치신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이른바 ‘윤리적 전회’ 내지 그 핵심으로서 ‘타자의 윤리학’(레비나스를 중심으로 하고 때로는 리오타르와 데리다도 포함되는)에 관한 바디우, 랑시에르, 지젝의 공통된 비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들의 비판의 의미와 난점에 관한 검토는 독자적으로 다뤄볼 만한 주제다. 바디우의 윤리학에 관한 비판적 고찰로는 Balibar 2012 중 「폭력과 시민다움」 참조.] 반대로 이 글에서는 오히려 벤야민과 하이데거와 대비되는 데리다 정치철학의 강점을 제시해볼 것이다. 곧 메시아주의 및 종말론에 맞서 단절의 가능성, 사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데리다는 이를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일체의 교리들이나 심지어 일체의 형이상학적·종교적인 규정, 일체의 메시아주의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는 어떤 해방적이고 메시아적인 긍정, 약속에 대한 어떤 경험이다. 그리고 어떤 약속은 지켜진다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곧 ‘정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과 새로운 형태의 활동, 실천, 조직 등을 생산해 낼 것을 약속해야 한다. ‘당 형태’나 이러저러한 국가 형태 내지 인터내셔널의 형태와 단절한다고 해서 모든 실천적이거나 현실적인 조직 형태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확히 정반대의 것이다.” Derrida 2007, 180쪽. 강조는 필자.]이야말로 데리다 정치철학의 중요한 교훈이라는 것이 이 글을 이끌어가는 나의 기본 가설이다.
II. “너무 하이데거적이고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인: 데리다의 문제제기
데리다의 법의 힘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법의 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획기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선 보통 해체론(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탈구축[필자는 데리다의 déconstruction이라는 말은 ‘해체’보다는 ‘탈구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믿는다.])이라고 불리는 현대 사상의 주요 흐름에서 획기적인 전회를 이룩한 저작이다.[McCormick 2001은 데리다의 법의 힘, 특히 그 1부를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했던 변론과 비교하면서 법의 힘이 불러일으킨 파장을 평가하고 있다.] 법의 힘 이전까지 탈구축 이론은 미국의 문학이론계에서 폭넓게 수용되었으며, 텍스트, 문자기록(écriture), 대체보충(supplément), 산종(散種, dissemination)과 같은 여러 개념들과 결부되어 주로 문학 작품의 분석을 위한 방법론으로, 정밀한 해석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법의 힘 이후 탈구축 이론은 정치철학 및 윤리학, 법철학 등과 같은 실천철학 분야에서도 널리 수용되고 있다. 오늘 우리 주제와 관련해본다면, 법의 힘은 벤야민의 저술 가운데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를 현대 정치철학의 중심 텍스트로 위치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데리다가 법의 힘 2부인 「벤야민의 이름」에서 이 텍스트에 대하여 꼼꼼한 탈구축적인 독서를 제시한 이후, 이 책은 오늘날 벤야민 저술들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받는 글 중 하나가 되었고, 아감벤, 지젝을 비롯한 수많은 연구자들의 논평과 응용 및 변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법의 힘, 특히 그 책 2부에서 제시된 벤야민에 대한 독서는 숱한 논란과 비판을 불러왔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2부의 「서언」과 「후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책의 맨 앞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법의 힘, 정확히 말하면 그 1부는 1989년 10월 뉴욕의 카르도조 법대 대학원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2부는 참석자들에게 배포만 되고 읽지는 않았다. 2부는 그 다음해인 1990년 4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열린 “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 표상의 한계들에 대한 검토”라는 제목의 콜로퀴엄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그리고 2부 텍스트에는 새롭게 「서언」(prolegomenon)과 「후기」(post-scriptum)가 추가되었다. 2부 텍스트에 대해서만 따로 「서언」과 「후기」가 나중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꽤 특이한 일이고, 따라서 무언가 의미 있는 전언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서언」과 「후기」에는, 「벤야민의 이름」 본문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매우 단호한 평가가 담겨 있다.
우선 데리다는 「서언」에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가 “근본적 파괴, 말살, 총체적 무화(無化)라는 주제 (...) 말살적 폭력이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Derrida 2004, 63~4쪽)고 말한다. 그것은 이 텍스트가 “언어의 도착과 타락인 표상(représentation)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의회적인 민주주의 정치 체계인 대의(représentation)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며, “법을 파괴하는 신성한 폭력(유대적인)과, 법을 창설하고 보존하는 신화적 폭력(그리스적인)을 대립시키는 유대적 관점 속에 기입되어 있기”(같은 책, 65~6쪽) 때문이다. “이 ‘혁명주의적’ 논문(마르크스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메시아주의적인 스타일에서 혁명주의적인)은 1921년 반의회주의적이고 반‘계몽주의’인 대세―나치즘은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말하자면 이 조류의 표면 위로 부상하고, 심지어 ‘파도타기’를 하게 될 것이다―에 속하고 있었다.”(66쪽)
따라서 데리다는 벤야민의 이 텍스트가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주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양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단지 시간적인 차이(이 글은 1921년에 발표되었고 벤야민 자신은 1940년 자살한 반면,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모의한 반제회의는 1942년에 열렸다) 때문만이 아니라 “이 텍스트에서 중첩되는 코드들이 극히 예외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 또는 한정하자면, 단지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신화가 제거된 진정한 역사의 개시를 선포하는 메시아적 혁명의 언어에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의 언어가 접목되고 있다는 사실”(67쪽)로 인해,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후기」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이 텍스트의 논리 안에서―만약 이 텍스트 안에 하나의, 단 하나의 논리가 존재한다면―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물어볼 권리를 갖고 있지 않거나 제한된 권리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어떤 점에서는 그렇게 할 것이[다].”(128쪽) 이러한 입장에 따라 데리다는 ‘궁극적 해결책’과 벤야민 텍스트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한다.
첫째, 나치즘은 법의 신화론적 폭력의 체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법의 신화론적 폭력이 속해 있는 이 공간과 다른 장소에서만 ‘궁극적 해결책’의 특유성을 사고하거나 상기할 수 있다.”(130~31쪽) 곧 궁극적 해결책에 대해 사고하기 위해서는 법, 신화, 표상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따라서 “이 체계를 그 타자에 따라, 곧 이 체계가 배제하고 파괴하고 몰살시키려고 했던, 하지만 외부 및 내부에서 이 체계에 유령처럼 따라다닌 것에 따라 사고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독특성(singularité)의 가능성에 따라, 서명과 이름의 독특성의 가능성에 따라 이 체계를 사고하려고 시도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대표[표상]의 질서가 몰살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은 수백만 명의 목숨일 뿐만 아니라 정의의 요구이기도 하며, 이는 또한 이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름을 부여하고 기입하고 부르고 상기할 가능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31쪽-강조는 필자) 따라서 “아마도 벤야민은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모든 역사적이거나 심미적인 객관화를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어쨌든 사건을 측정하는 데에는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했을 텐데, 이런 객관화는 모든 객관화와 마찬가지로 표상 가능하고 심지어 규정 가능한 것의 질서에, 규정적이고 결정 가능한 판단의 질서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133쪽)
셋째, 그런데 문제는 규정적이고 결정 가능한, 표상 가능한 객관화는 그것이 신화론적 질서에 속하기 때문에 궁극적 해결책을 사고하는 데 쓸모없는 것이라면, 반대로 “이 질서에서 벗어나자마자 역사—와 신성한 정의의 폭력—가 시작되지만, 우리 인간은 판단들—및 결정 가능한 해석들—을 가늠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점, 곧 “두 질서(신화론적인 질서와 신성한 질서)를 함께 구성하고 한정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해석은 인간의 능력 밖이라는”(133쪽-강조는 필자) 점이다. 따라서 신화론적 질서 대 신성한 정의의 질서, 표상의 언어 및 계몽주의 대 순수한 표현의 언어 사이의 대립과 양극성이 순수하게 유지될 수는 없으며, “공약 불가능하고 이질적인 두 차원 사이의 타협”(134쪽)이 이루어져야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이질적인 질서들 사이의 타협의 숙명, 더욱이 표상[대표]의 법칙(...)에 복종하도록 명령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특유한 것 및 모든 특유성이 일반성이나 비교의 질서로 재기입되는 것을 피하도록 해주는, 표상을 초월하는 법칙에도 복종하도록 명령하는 정의의 이름에 따라 이루어지는 타협의 숙명”(134쪽)이야말로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다.
넷째, 그런데 데리다는 “마지막으로” 그가 “이 텍스트에서 발견하는 가장 가공할 만한 것, 심지어 참기 어려운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이것이 열어놓으려고 하는, 특히 ‘궁극적 해결책’의 생존자들 내지는 희생자들에게, 그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잠재적인 희생자들에게 열어놓으려고 하는 유혹이다. 어떤 유혹 말인가? 대학살을 신의 폭력의 해석 불가능한 발현의 하나로 사고하려는 유혹이다.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이 신의 폭력은 말살적ㆍ면죄적이면서 동시에 비유혈적인 것으로, 이 폭력은―다시 벤야민을 인용하자면―“내리치고 면죄시키는 비유혈적 심판”을 통해 현행의 법을 파괴한다. (...) 가스실과 화장용 가마를 생각한다면, 비유혈적이기 때문에 면죄적인 어떤 말살에 대한 이러한 암시를 깨닫고 어떻게 몸서리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학살을 하나의 면죄로, 정의롭고 폭력적인 신의 분노의 판독할 수 없는 서명으로 만드는 해석의 발상은 끔찍한 것이다.(134~35쪽-강조는 필자)
이 때문에 데리다에 따르면, 벤야민의 이 텍스트는 다의성을 지니고 있고 의미론적인 반전의 여지를 지니고 있지만, “결국 자신이 그에 반대하여 행동하고 사고하고 행위하고 말해야 하는 것에 현혹되어 혼동스러울 만큼 이와 너무 유사해져버린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벤야민의 다른 많은 텍스트들처럼 이 텍스트는 여전히 너무 하이데거적이고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이다.”(135쪽-강조는 필자)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 가운데서 특히 이 부분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가령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데리다론”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데리다의 벤야민 해석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다수의 벤야민 연구자들 역시 데리다의 해석이 지닌 문제점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Haverkamp 1994에 수록된 여러 글을 참조할 수 있다. 또한 Greenberg 2008도 참조.] 심지어 탈구축 이론가들로 분류될 수 있고 데리다와 가까운 여러 이론가들 역시 데리다의 해석에 대해 유보를 표시하거나 암묵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가령 베르너 하마허(Werner Hamacher)는 데리다의 법의 힘과 거의 같은 시기에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제시한 바 있으며(Hamacher 1994), 이후 몇몇 글에서 데리다의 벤야민 해석에 대하여 암묵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Hamacher 1999, 2002 참조. 미국의 대표적인 해체론 이론가이자 저명한 벤야민 연구자이기도 한 새뮤얼 웨버는 데리다의 글이 발표된지 2년 후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친화성을 지적한) 벤야민과 슈미트의 차이점을 밝히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Weber 1992 참조.] 따라서 「벤야민의 이름들」 전체에 대해서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서언」과 「후기」에서의 평가는 다소 성급하고 과도한, 또는 면밀하거나 정확하지 못한 판단이라는 것이 여러 연구자들의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데리다의 평가가 성급하고 과도한, 또는 부정확한 것일까? 이 점에 관한 여러 비판가들의 판단 자체가 오히려 다소 성급하고 과도한 또는 면밀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데리다의 해석에 대한 비판들 못지않게 데리다의 평가를 옹호하는, 또는 그러한 평가의 의미를 좀 더 면밀하게 해명하는 주목할 만한 논의들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데리다에 대한 아감벤의 평가를 반비판하는 논의들도 있거니와,[특히 Thurschwell 2005 및 Johnson 2007, Librett 2007 참조.] 데리다의 「서언」과 「후기」에 대한 매우 꼼꼼하고 세심한 연구들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서언」과 「후기」에 대한 최근의 주목할 만한 독해로는 Zacharias 2007 및 Staikou 2008 참조.] 따라서 데리다의 벤야민 평가를 성급하거나 부정확한 것으로 기각하기 이전에 그 해석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시도해보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데리다의 평가의 함의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는 법의 힘 2부의 「서언」과 「후기」 자체를 분석하거나 그것이 2부 본문 및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맺는 관계를 따져보는 대신 데리다가 「후기」의 마지막에서 제기한 테제, 곧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가 “여전히 너무 하이데거적이고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이다”라는 테제의 의미를 검토해보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 벤야민의 텍스트는 여전히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왜 이 텍스트는 “여전히 너무 하이데거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너무 “하이데거적”이라거나 너무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왜 “하이데거적”이거나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 문제가 될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역사와 정치를 사고하는 데서 한계를 지닌 것일까?
III.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정의의 사건, 사건으로서의 정의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여러 주석가들이 그러듯이) 법의 힘이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텍스트에 한정할 수 없으며, 데리다의 다른 저작 및 벤야민과 하이데거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고찰해봐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텍스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법의 힘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한 쌍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서언」과 「후기」에서 데리다가 모호한 암시로 남겨놓은 테제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이고 분명한 해명을 제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를 모티프로 삼고 있는 이 책에서도 데리다는 벤야민과 하이데거와의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좀 더 본격적인 탈구축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시간론, 또는 현존(Anwesen), 현존성(Anwesenheit)의 관점에서 시간과 정의(dike)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1946)을 읽으면서 존재론과 정의, 시간론의 교차점을 탐색하며, “이음매가 어긋난 시간”, 유령적인 시간성의 관점에서 그러한 교차점을 넘어설 수 있는 길, 아니 오히려 그러한 교차점에 존재하는 어긋남, 균열, 탈구를 모색한다.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서 서양 철학의 가장 오래된 단편인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을 다시 사유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이 금언에 대한 문헌학자 헤르만 딜스(Hermann Diels)와 청년 니체의 해석에 반대하여(그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디케(dike)를 법적ㆍ도덕적으로 표상한다)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인 사유의 경험에 따라 디케와 아디키아(adikia)를 현존에 대한 그리스적인 이해 방식으로 읽으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딜스와 니체가 불의(不義, Ungerechtigkeit)로 이해하는 아디키아는 “현존자의 근본 특성”, 곧 “그것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물들이 올바로 존립하지 못한다는 사실”,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aus den Fugen)”(Heidegger 1951, 518~19쪽-번역은 약간 수정),[aus den Fugen 또는 Un-Fug는 번역자에 따라 “안배된 곳에서 벗어나 있다”(신상희)나 “불응”(박찬국ㆍ설민. Heidegger 1991, 181쪽 이하 참조)으로 옮겨지는데, 우리는 데리다의 해석을 따라 이를 “이음매에서 벗어난” 또는 “이음매가 어긋난”으로 옮긴다. 번역의 차이는, 데리다 식의 번역이 이 단어가 지닌 일상적이고 기술적인 어법에 좀 더 충실한 반면, 국역자들의 경우는 그 존재론적인 의미에 좀 더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데리다 식의 번역은 사실 영역본이나 불역본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번역이다.] 이음매가 어긋나 있고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아디키아는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음”,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을 뜻할까? 하이데거의 이러한 재해석은 현존자에 대한 재규정을 전제하고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의 의미에서 타 에온타(ta eonta)는 “현재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때의 ‘현재적인 것’이란, 시간의 흐름의 한 단계로서의 ‘지금의 것’(das jetzige)을 뜻하는 게 아니라, ‘현재적’(gegenwärtig)이라는 의미에서의 현재적인 것을 가리킨다.
에온타의 성격을 지닌 ‘현재적’이라는 낱말은, “비은폐성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고자 다가와 있는”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 그렇게 다가와 있음(Angekommenheit)이 본래적인 다가옴(Ankunft)이고, 본래적인 현존자의 현존이다. 과거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도 또한 현존자이며, 다시 말해 비은폐성의 영역 바깥에 현존하는 것이다. 비현재적으로 현존하는 것은 부재하는 것이다. (...) 부재하는 것도 또한 현존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 비은폐성의 영역으로부터 [떠나가] 부재하는 것으로서, 비은폐성 속으로 [또 다시 출현하여 나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현존하고 있다.(같은 책, 508~09쪽)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과거에 존재하는 것과 미래에 존재할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현존자, 현존하는 것이란, “생성하다가 소멸하는 것, 다시 말해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Vergängliche)”(같은 책, p. 343; 503쪽),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것, “‘그때마다-체류하는 것’(je-weilige)”[이것은 “그때그때 겨를을 지니는 것”(Heidegger 1991, 185쪽)으로 옮겨지기도 한다.](같은 책, 513쪽)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으로서 아디키아는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현존자가 자신이 존재하는 바의 그런 현존자로서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곧 일시적으로 머물렀다가 가는 것, 그때그때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현존자의 존재 양식임에도, 현존자가 계속 현존할 것을 고집할 때 이음매가 어긋나고 아디키아가 일어나게 된다. “그때마다-체류하는 것은 자신의 현존을 고수한다. 이런 식으로 그것은 자신의 이행적인 머무름으로부터 스스로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것은 완고한 고수 속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현존자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치 이러한 것이 머무름이라고 하는 듯 지속적 존립을 완강히 주장한다. 자신에게 적합한 체류 기간 속에 현존하면서 현존자는 이음매에서 벗어나 이음매가 빠진 상태로 그때마다-체류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때마다-체류하는 모든 것은 이음매에서 벗어난 곳에 서 있다.”(같은 책, 520~21쪽)
그러므로 아디키아, “어긋남은, 불화다(die Un-Fuge, ist der Un-Fug).”(523쪽) 반대로 디케는 “연결해주고 어울리게 해주는 일치(der fugend-fügende Fug)”다. 곧 그때그때마다 체류하는 현존자들이 그에게 부여된 체류 속에서 현존하게 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현존자들에게 고유한 체류, 현존과 어긋나거나 불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어떤 현존자가 자신의 현존을 완강하게 고수하여 다른 현존자들의 현존을 가로막거나 그것과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디케이며, 디도나이 디켄(didonai diken), 곧 디케를 줌, 디케를 선사함(딜스와 니체의 번역을 따르면 ‘벌을 받음’ 내지 ‘죗값을 치름’이지만)이다. “그때마다-체류하는 것들이 그저 단순히 지속하려고 끊임없이 고집을 피우고 그리하여 이러한 집착 속에서 현재적인 현존자로부터 서로를 밀어내고자 완전히 흩어지지 않는 한에서, 그것들은 일치를 속하게 한다(didonai diken).”(528쪽)
이러한 하이데거의 주장을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만약 하이데거가 하듯이 우리가 디케를 현존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사고한다면, “정의”는 무엇보다, 궁극적으로는, 특히 고유하게는 일치의 이음매다. 타자에게 고유한 이음매는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한 이에 의해 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불의는 어긋남 내지 부조화다.”(Derrida 2007, 69쪽) 그리고 곧바로 이런 반론을 제기한다.
하이데거는 항상 그렇듯이, 그가 호의/은혜, 베풀어진 호의/은혜의 가능성 자체로 해석하는 것에, 곧 조화롭게 한데 모으거나 받아들이는 허여하는 일치 (...) 에 호의적으로 기울어 있는 것 아닌가? (...) 타자와의 관계로서의 정의는, 존재 안에서 그리고 시간 안에서 어긋남 또는 몰시간성의 환원 불가능한 초과를, 어떤 운푸게(Un-Fuge), “이음매가 어긋난” 어떤 탈구를 가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어긋남이야말로 항상 악, 비전유, 불의의 위험―이것들을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는 계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을 무릅쓰면서, 유일하게 타자로서의 타자에게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또는 정의를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같은 책, 69~70쪽)
데리다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현존을 고수하는 것으로서의 아디키아를 “어긋남 내지 부조화”로 이해하고, 디케는 이러한 어긋남이나 부조화를 바로 잡는 것, 일치를 허여(許與)하는(Zugeben)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을 바로 잡아야 하거나 올바르게 만들어야 할 부당한 사태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긋남을 바로 잡음으로써, 무언가 새로운 것이 일어날 가능성, 전혀 이질적인 타자가 도래할 사건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것은 정의의 가능성을 총체화하는 현존의 경제 속으로 가두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시간과 정의의 관계, 사건으로서의 정의의 문제에 관한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차이는 디케를 현존자들에게 고유한 현존을 허락해주는 “연결해주고 어울리게 해주는 일치”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의 관계로 이해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물론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텍스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저명한 현상학자 프랑수아즈 다스튀르(Françoise Dastur)는 데리다에게 헌정된 논문에서 (헌정의 말 이외에는 데리다를 전혀 인용하거나 언급하지 않은 가운데)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은 이음매가 어긋남, 이음매가 빠져 있음을 “존재 그 자체의 중심에 기입”(Dastur 2000, 188쪽)해 넣는다고 말한다. 사실 하이데거는 데리다가 다루지 않는 논문 뒷부분에서 현존으로서 존재 내부에는 어긋남, 불일치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적] 필요(Brauch)는 일치와 배려를 관장하면서 체류 속으로 놓아주며, 현존자를 그때마다 체류하도록 양도해 준다. 그러나 이로써 그것이 체류하는 머무름으로부터 순전한 지속으로 굳어지게 될 위험이 항존하게 된다. 따라서 필요는 그 자체가 동시에 현존을 불일치(Un-Fug) 속으로 넘겨주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는 [불일치의] 불(Un-)을 이어준다.” (Heidegger 1951, 541쪽) 따라서 다스튀르의 주장에 의하면 “존재는 동시에 불일치 또는 아디키아의 빛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서는 일치 또는 디케로 사유될 수 없다.”(Dastur 2000, 188쪽-강조는 다스튀르)
그녀의 주장은 하이데거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독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반론이다. 사실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대한 다스튀르의 독해는 데리다에 관한 그녀의 몇 편의 텍스트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독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다스튀르는 후설이나 하이데거에 관한 데리다 독해의 새로움과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데리다 자신의 관점은 이미 후설이나 하이데거 텍스트에 존재함을 보여주려는 전략을 즐겨 채택한다(가령 Dastur 2007). 그것은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의 반론은 데리다의 독해에 대한 충분한 반론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불일치나 어긋남을 배제하거나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에 비하여 일치를 더 강조한다고, 일치 쪽에 더 기울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데리다는 우리가 적어도 불일치나 어긋남에 대해 동등한 비중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특히 새로운 사건의 조건으로서 불일치를 파악하지 않는다면, 현존을 사건 내지 생기(Ereignis)로 충실히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정의의 문제를 하이데거 자신이 비판하는 법적ㆍ도덕적 표상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스튀르의 반론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하이데거가 불일치나 어긋남에 대해 적어도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하며, 그것을 사건의 사건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또 다른 반론이 가능할 수 있다. 곧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서는 사건의 우발성이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다른 텍스트에서는 그것이 좀 더 깊이 있게 제시되고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하이데거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저작인 사유의 사태로(Zur Sache des Denkens)에서 하이데거 사상의 이러한 면모가 좀 더 풍부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이제 벤야민과 데리다의 관계를 메시아주의 또는 메시아적인 것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IV.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유사초월론 대 무초월론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벤야민과 관련하여 데리다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두 번째 테제에 나오는 “약한 메시아적 힘”[이 개념의 지성사적 배경에 관해서는 Deuber-Mankobsky 2008 참조.]을 자신이 말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의 벤야민 식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Derrida 2007, 343쪽 주 32)). 하지만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비평에 대한 답변으로 유령의 모습을 그리기(Ghostly Demarcations, 1999)에 수록된 「마르크스와 아들들」에서는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적 힘’과 자신이 말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의 차이점을 아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세 가지 논점으로 집약된다.
첫째, 데리다는 자신이 말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이러저러한 메시아주의적 전통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구조, 실존의 구조”를 가리키며, 따라서 그것은 벤야민과 달리 “약화된 메시아주의, 감소된 힘을 지닌 메시아적인 기대가 아니다.”(Derrida 2009, 217쪽-강조는 데리다) 오히려 그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언어행위, 다른 모든 수행문 및 심지어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모든 전 언어적인 경험을 조직하는 약속(하지만 또한 약속의 주심에 놓여 있는 위협)의 수행문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경험에 대한 분석”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위협하는 약속과 교차하는 기대의 지평에 대한 해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의 지평은 (...) 기대 없는 어떤 기대, 말하자면 사건(기다려짐 없이 기다려지는)에 의해 그 지평이 파열된 어떤 기대, 곧 사건에 대한 기대, “도착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규정하는 예상을 넘어서고 놀라게 해야 하는 어떤 “도착하는 것/이”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 “미래 아닌 미래의 걸음(pas de future), 장래 아닌 장래의 걸음(pas de l'avenir), 다르게 다른 것 아닌 다르게 다른 것의 걸음,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사건 아닌 사건의 걸음, 혁명 아닌 혁명의 걸음, 정의 아닌 정의의 걸음.”(218쪽-강조는 데리다)
둘째,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적 힘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위기와 궁지에 몰린 상황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그 힘은 “약한”이라는 형용사로 규정되는 데 반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보편적이고 유사초월론적인 구조”로서, 이는 “역사(...)의 어떤 특수한 순간과도, 어떤 특수한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아성은 어떤 메시아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로도 사용되지 않으며 어떤 메시아주의도 모방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주의도 확증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같은 책, 226쪽)
셋째, 따라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또는 메시아성은 “우리가 메시아주의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곧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과는 아무런 본질적인 관계도 없다. 메시아주의는 한편으로 역사적으로 규정된 계시―유대적인 계시이든 아니면 유대ㆍ기독교적인 계시이든 간에―에 대한 기억,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규정된 메시아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그 구조의 순수성 자체에서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배제한다.”(219쪽-강조는 데리다)
이 주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데리다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을 “보편적이고 유사초월론적 구조”라고 부를 때 “유사초월론”(quasi-transcendantal)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1967)나 조종(1974) 같은 저작들에서 가끔 “유사초월론” 내지 “과잉초월론”(ultra-transcendantal)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하지만 그가 이 표현을 좀 더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로돌프 가쉐(Rodolphe Gasché)가 거울의 주석박: 데리다와 반성철학(The Tain of the Mirror: Derrida and the Philosophy of Reflection)(Gasché 1986)에서 독일 관념론 전통과의 대비 속에서 데리다 철학의 독창성을 설명하면서 “유사초월론”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이고 중요한 위상을 부여한 다음부터다.
과잉초월론이나 유사초월론이라는 명칭은, 이것이 칸트나 후설 철학을 특징짓는 초월론 철학과 무언가 관련성을 지니면서도 또한 그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초월론철학을 어떤 것(이것이 인식 경험이든 실천이든 또는 언어이든 간에)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하여 탐구하는 철학으로 규정하고, 초월론적인 것을 경험적인 것의 가능 조건을 이루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초월론 철학의 특징은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뚜렷한 구별 및 위계적 비대칭성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초월론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을 근거 짓는 반면, 경험적인 것의 변화 여부와 무관하게 불변적인 것으로 남아 있고, 또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데리다가 말하는 유사초월론은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의 원칙적 분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양자 사이에 비대칭성 내지 일방향적 관계를 설정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유사초월론은 초월론적인 것이 경험적인 것 내부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경험적인 것의 변화를 통해 초월론적인 것 자체도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가령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민주주의적인 것에 본질적이고 기원적이고 구성적이고 종별적인 가능성으로서, 곧 민주주의적인 것의 역사성 자체”(Derrida 2003, p. 106)에 관해 언급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도래할 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표현은 그 자체 내에서, 그 개념 자체 내에서 자기 비판과 개선 가능성에 대한 권리라고 불리는 자기면역의 공식을 환영하는 유일한 체계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원칙상, 민주주의라는 관념, 그 개념과 그 역사, 그 이름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권리를 사람들이 지니거나 떠맡게 되는 유일한 체계, 유일한 헌정 패러다임이다.”(Ibid., p. 127)] 그렇다면 초월론적인 것은, 가령 단지 역사적 변화를 규정하고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역사 바깥의 불변적이고 보편적인 틀 내지 질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를 갖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입각하면, 근원 내지 근거로서의 기원은 후속하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통해 변화하게 된다. 가령 이런저런 최초의 사건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러한 사건이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사건으로 남으려면, 그 사건은 일회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며, 계속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초의 사건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일회적인 것에 그치게 된다면, 그것은 이후의 시간의 계열들과 단절된 채 소멸되거나 망각될 것이고, 따라서 최초의 어떤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사건이 최초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그것 다음에 오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등등의 사건들 속에서 되풀이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사건으로서의 기원은 그 이후에 오는 시간 내지 역사의 계열에 의거해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기원을 기원으로서 성립 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기원을 기원으로서 재생산되게 만드는 반복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의 유사초월론에 관해서는 Gasché 1986 이외에도 Fritsch 2005 중 2장, Hurst 2005 참조. ]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나오는, 처음 보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다음 대목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반복과 최초의 순간. 이것은 아마도 환영의 문제로서 사건의 문제일 것이다. 환영이란 무엇인가? 유령, 곧 허상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고 잠재적이며 비실체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의 현실성 내지 현존이란 어떤 것인가? 거기에, 사물 그 자체와 그것의 허상 사이에는 어떤 대립이 존재하는가? 반복과 최초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반복과 최후의 순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모든 최초의 순간의 독특성은 또한 최초의 순간을 최후의 순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매 순간마다 그것은 사건 그 자체이며, 어떤 최초의 순간은 최후의 순간이다. 전적으로 다른 것/모든 다른 것(tout autre). 역사의 종언의 무대를 마련하기. 이것을 유령론(hantologie)이라고 부르자. 이러한 신들림의 논리는 어떤 존재론이나 어떤 존재 사유(...)보다 단순히 더 광범위하거나 더 강력한 것만은 아니다. 신들림의 논리는 자신 안에 종말론이나 목적론을 수용하고 있지만, 한정된 장소들 내지는 특수한 효과들로 수용하고 있다.”(Derrida 2007, 34쪽-강조는 데리다)
따라서 반복 가능성은 기원 이후에, 최초의 사건 이후에 비로소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 그 자체 속에 기입되어 있다. 다시 말해 반복될 수 없는 것은 기원으로서 성립할 수 없으며, 기원이 기원이기 위해서 그것은 항상 이미 반복되어야 한다. 법의 힘에서 데리다가 ‘되풀이 (불)가능성의 역설’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라는] 두 가지 폭력의 엄격한 구분을 위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되풀이 (불)가능성의 역설―벤야민이 이를 말하지 않은 것은 이를 배제하고 있거나 아니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이다. 되풀이 (불)가능성은 기원이 기원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곧 스스로를 반복하고 스스로를 변질시킬 수밖에 없게 만든다. (...) 되풀이 (불)가능성은 정초의 본질적 구조 안에 보존을 기입한다.(Derrida 2004, 98쪽-강조는 데리다)
유사초월론이 낳는 또 하나의 효과는 무조건적인 것(가령 정의)과 조건적인 것(가령 법)의 절대적 대립의 해체다. 가령 법의 힘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법의 힘이 법보다 정의를 더 중시하고, 법을 초월하는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데리다가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계산 불가능한,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정의를 추구하고, 그러한 정의에 입각하여 법과 정치를 사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데리다가 법 바깥에 있는, 법을 넘어서 있는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데리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정의가 법과 계산을 이처럼 초과하고, 현존 불가능한 것이 규정 가능한 것을 이처럼 범람한다고 해서 이를 제도나 국가 내부에서, 제도들이나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법적ㆍ정치적 투쟁을 회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삼을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 선사하는 정의라는 이념은 그것 자체로 고립될 경우에는 항상 악이나 심지어 최악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는 가장 도착적인 계산에 의해 재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계산 불가능한 정의는 계산할 것을 명령한다. (...) 계산 가능한 것과 계산 불가능한 것의 관계를 계산하고 협상해야 하고, 우리가 ‘던져져’ 있는 곳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곳에서 재발명되어야 하는 규칙들 없이 협상해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장소를 넘어서, 그리고 기존의 식별 가능한 도덕이나 정치 또는 법적인 지대를 넘어서,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등의 구분을 넘어서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멀리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해야 함의 질서는 정의에도, 법에도 고유하게 귀속되지 않는다.(앞의 책, 59~60쪽―강조는 데리다)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사초월론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또는 도래할 민주주의나 정의, 장래 같은 것)을 칸트 식의 규제적 이념으로 잘못 파악하게 되거나, 유토피아주의의 한 형태(그것도 규정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빈곤하고 불모적인)로 간주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데리다에게 정의나 도래할 민주주의 또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과 분리되지 않고 그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규제적 이념이나 유토피아주의와 무관하다. 더욱이 정의나 도래할 민주주의 또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 유사초월론적인 것인 한에서, 이것들은 모두 경험적 사건들을 통해 그것 스스로 변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초역사성을 주장하는 입장(가령 하버마스 식의 비판이론가들이나 최장집 교수 같은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과도 무관하다. 또한 그것은 역사의 완성이나 종결로서의 종말론과도 무관한데, 왜냐하면 역사의 완성이나 종결 또는 최후라는 것은 정의상 그 후속하는 시간 내지 역사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의 완성이나 종결로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사초월론적 관점에서는 상이한 시간성의 대립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데리다는 이미 「실체와 기록」(Ousia et Gramme)(Derrida 1972 수록)이라는 논문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본래적 시간성(eigentlich Zeitlichkeit)과 비본래적 시간성(uneigentlich Zeitlichkeit)이라는 대립쌍을 해체한 바 있거니와, 그 이후에도 상이한 시간성의 대립을 전제한다거나 둘 중 하나의 시간성에 대하여 우위(거짓된 시간성 대 진정한 시간성, 지배의 시간성 대 해방의 시간성 같이)를 부여한다거나 한 적이 없다. 그 대신 그는 시간의 질서 자체가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어긋남은 분명 불의와 폭력, 기능 이상의 표현일 수 있지만, 또한 정의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데리다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두 번째 테제에 나오는 “약한 메시아적 힘”과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을 연결하면서 동시에 분리하는 것은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처음 보기에는 시간에 관한, 역사에 관한 데리다의 관점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테제 13)과 “지금 시간(Jetztzeit)”(테제 14)을 대립시키고(Benjamin 2008a, 344~45쪽), 전자를 파시즘의 시간으로, 후자를 역사유물론의 시간으로 규정함으로써 뚜렷한 이원론적 시간관을 표현하고 있고, 더 나아가 역사의 연속체가 폭파되는(테제 15), 그리하여 과거에 억압된 이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테제 3) 지금 시간을 통해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주의적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뛰어난 벤야민 연구자들 덕분에 우리는 사정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베르너 하마허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매우 일관성 있고 심오하게 벤야민의 시간관과 역사관을 재구성하고 있다(특히 Hamacher 2002, 2005). 그의 연구가 더욱 의미 있는 것은 그가 (하이데거 및) 데리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재구성하고 있으며, 다스튀르가 그렇듯이, 데리다를 전혀 (또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그의 벤야민 해석을 정정하거나 비판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하마허는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중 특히 2번째 테제와 17번째 테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두 테제에 입각하여 벤야민의 역사 개념을 체계화하고 있다. 특히 그는 두 번째 테제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약한 메시아적 힘”을 특수한 역사적 상황, 궁지에 몰린 위기의 상황(가령 나치즘의 파리 침공)과 결부시키고, 이를 통해 그것을 역사의 보편적 구조와 분리시키려는 데리다의 해석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반면 미카엘 뢰비는 벤야민의 「역사 개념에 대하여」를 역사적 정세 및 19~20세기 혁명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독해한다. Löwy 2001. 따라서 뢰비의 저작은 하마허의 독해보다 덜 사변적이지만 벤야민 글의 이론적ㆍ정치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는 더 도움이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능한 것―가능한 행복―은 현재화―현재의 행복―를 요구하는 것이며, 그 속에 이러한 요구의 목적(telos)이 기입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현재화가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고 또 앞으로 이러한 현재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 (...) ‘우리’가 과거의 모든 것에 의해 ‘부여받은’ 메시아적 힘은 약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능력이 아니라 [과거에 실현의 기회를] 놓쳐 버린 가능태들 및 충족에 대한 그것들의 요구의 소실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약한 힘인 이유는 또한 그것이 각각의 미래(그것이 지각되고 현재화되지 못하는) 속에서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Hamacher 2005, p. 42-강조는 하마허, 꺾쇠 추가는 필자)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한 것과 달리 메시아적 힘은 단지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구조적인 특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마허는 다음과 같이 암묵적으로 데리다를 반박한다. “‘약한’은 더 커다란 힘과 관련하여 이러한 힘의 양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 원칙적으로 그것이 실패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오직 실패할 수 있는 경우에만 메시아적 힘이 존재한다. 따라서 메시아적 힘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약한 메시아적 힘이다.” (같은 글, p. 44-강조는 하마허) 또한 다음과 같은 대목은 더욱 명시적으로 데리다 철학의 관점에 입각하여 벤야민을 해석하면서 동시에 데리다의 벤야민 해석을 반박하고 있다.
벤야민이 약함을 이러한 구조적 메시아성에 귀속시키는 것은, 이상적 상황에서는 치유될 수도 있는 우연적 결함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메시아성의 한 구조적 요소, 그것을 통해 이러한 메시아성이 자신의 가능한 실패와 연결될 수 있는 그러한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행복의 가능성은 오직 그것에 상응하는 행복의 실패 가능성과 함께 지시된다. 메시아적 인덱스는, 선험적으로 가능한 실패 및 따라서 가능한 불가능성에 대한 지시와 교차된다. 요컨대 (...) 자신의 비메시아성으로부터 출현하지 않는 메시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메시아적 힘’의 약함은 그 구조적 유한성에 놓여 있다. 역사의 사라져 버린 가능성들을 현재의 행복으로 구원한다고 가정돼 있는 메시아 자신이 사라질 수 있다. 모든 메시아―그리고 그가 들어설 수 있어야 하는 각각의 순간, 각각의 지금―는 본질적으로 유한하다. 곧 오직 그가 메시아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메시아일 수 있다.(같은 글, p. 45)
그리하여 그는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최소의 메시아주의”(minimal messianism)로, 더 나아가 “무-메시아주의”(a-messianism)(같은 글, p. 66)로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마허의 밀도 높고 치밀한 재구성을 좀 더 엄밀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그리고 그의 해석과 아감벤의 벤야민 해석과의 친화성 및 차이점에 관해 판단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좀 더 정교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한편 아감벤은 데리다의 철학을 “실패한 메시아주의”라고 규정한 바 있다. Agamben 2001, p. 103. 이는 호모 사케르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가 데리다의 철학, 그의 탈구축론이 기본적으로 결정 불가능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한 가지 질문만 제기해보기로 하자. 하마허는 데리다 철학에 입각하여 하지만 또한 데리다에 맞서, 그의 역사철학과 경쟁할 만한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제시한다. 그는 약한 메시아적 힘이 구조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며, 그의 메시아주의를 최소의 메시아주의, 무-메시아주의로 규정한다. 또한 데리다가 유사초월론을 주장하듯이, 그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이 무초월론(a-transcendental)임을 주장하고 있다.[또한 그는 “attranscendental”, “ad-transcendental”, “ante-transcendental” 같은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사실 하마허의 다른 글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용어법이다. 가령 Hamacher 1994, 1999 참조.] 그런데 그의 해석은 결국 그의 역사철학을 훨씬 더 초월론적인 것으로, 또는 훨씬 더 메시아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이러한 최소의 메시아주의 내지 무-메시아주의에 따를 경우, 역사의 매 시간, 매 순간, 매번의 지금은 역사의 가능성 자체, 과거의 억압받은 사람들의 구원 자체가 달려 있는 절박하고 위험한 순간, 역사 자체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메시아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는 결정적인 순간, 그야말로 종말론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정의 책임은 특정한 계급, 특정한 집단, 특정한 지도자들, 특정한 지식인들에게만 할당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한 아무나 모두에게 할당되어 있기 때문에, 절박성은 훨씬 더 실존적으로 강화된다. 하마허에 따르면 어느 시간, 어느 순간, 어느 지금이든, 누구나, 아무나에게는 과거의 억압받은 이들을 구원하고 역사의 가능성을 실현할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 각자, 우리들 아무나는 매일매일, 매 시간, 매순간, 매 지금마다 치열한 계급투쟁을 치르고 있고 또 치러야 하는 셈이다.[내가 보기에 국내의 연구자들은 벤야민 역사철학이 지닌 이러한 종말론적 측면 및 그것이 지닌 난점들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벤야민 역사철학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독해로는 고지현 2005a, 2005b, 2007 및 김유동 2006, 이창남 2006, 최성만 2010을 참조.]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또는 우리가 누군가에게(또 사람들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규범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까?[이것은 물론 이러한 절박한 투쟁을 매일매일, 매 시간마다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류은숙의 증언을 보라. 류은숙 2012 참조. 하지만 그러한 극단적 존재 양상(극단적 폭력에 내몰려 있는)이 일상적인 존재 양상으로 보편화될 수는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
이러한 생각이 일리가 있다면, 하마허는 시종일관 데리다를 염두에 두고 데리다 철학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유사초월론의 특징 중 하나는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타협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으며, 지배와 해방의 날카로운 대립에 입각하여 대항폭력을 추구하기보다는 민주주의적 정치의 필요성,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 정치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지배의 폭력에 맞서는 손쉬운(물론 ‘개념적으로’ 손쉬운) 대항폭력에 의탁하기보다 지배의 폭력과 대항폭력의 이분법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에서 데리다와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은 매우 근접해 있다. 대항폭력의 위험에 대한 경고 및 반(反)폭력의 정치 내지 시민다움의 정치의 필요성에 대한 촉구에 관해서는 Balibar 1997, 2010 중 7장, 2012를 각각 참조. 반면 지젝은 고전적인 의미의 대항폭력을 옹호하되, 벤야민의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여기에 약간의 변주(신비화?)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Zizek 2009 참조.] 반면 하마허가 재구성한 역사철학에서는 이러한 민주주의적 정치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매우 희박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경우 정치적 삶, 더 나아가 인간적 삶의 영위 가능성 역시 매우 희박해지는 것 아닐까? 데리다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닫힘(closure)이 본질적입니다. 만야 내가 어떤 것 내지 어떤 이 또는 어떤 상황을 긍정하기를 원한다면 (...) 독특성이 존재해야 하는데, 독특성은 어떤 닫힘을 의미합니다. 곧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준다면, 그런 한에서 나는 어떤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을 포기하는 셈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환대를 베풂과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내 집 문을 닫게 됩니다. 그것이 유한성입니다. 유한성 없이는 선물이나 환대도 없습니다. 따라서 유한성은 선택을 의미하며, 선택은, 내가 “예”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어떤 형태의 닫힘이 개입돼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라는 것이 긍정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 우리는 그저 여러 가지 가능한 열림들과 닫힘들 가운데에서 선택해야 하며, 이것은 전략의 문제입니다.(Derrida 1999, p. 250)[이는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 개념에 대한 데리다의 반론 또는 적어도 문제제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Derrida 1996 참조.]
하마허가 재구성한 벤야민의 역사철학에서는 이러한 전략의 여지가 아주 협소해지는 것은 아닌가?
V.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인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 아니 단수의 역사가 아니라 복수의 역사라는 의미에서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는 이 문제야말로 데리다와 벤야민, 하이데거를 둘러싼 논의가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서구중심적, 유럽중심적 관점에 입각한 종말론적인 역사철학과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에 관한 논의[실제로 바디우, 지젝, 아감벤의 공통적 특징 중 하나는 노골적인 유럽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적어도 바디우에게서는 다수의 초월론에 관한 논의의 한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Badiou 2006 참조.]가 우리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이론적 기여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논의를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에 관한 화두로 변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포스트 담론에 관한 논의의 철학적 핵심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 담론의 국내 수용에 관한 비판적 고찰로는 진태원 2012b 참조.]
하이데거가 말년에 사유하고자 한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의 문제였다고 할 수도 있다. 가령 하이데거가 사유의 사태로에서 존재의 역사로서의 “존재의 역운(Geschick)”에 대해 말하면서 “[각각의 시대마다] 변화되는 존재의 모습들”을 “에포케”(epokhe)라는 개념으로 표현할 때, 일종의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를 사유하려는 시도를 읽을 수 있다.
플라톤이 존재를 이데아와 이데아들의 코이노니아(koinonia, 공동체)로서 표상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에네르게이아로서, 칸트는 정립(Position)으로서, 헤겔은 절대 개념으로서, 그리고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서 표상했다면, 이러한 것은 그저 우연히 전개된 이론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은] 자기 자신을 은닉하는 보내줌(schicken) 속에서, 즉 ‘그것이 존재를 준다’는 말 속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의] 어떤 말 걸어옴에 대한 대답들로서의 존재의 낱말들입니다. 스스로 물러서는 보내줌 속에 그때그때마다 포함되어 머물러 있는 채, 존재는 자신의 에포케적 변화의 풍부함과 더불어 사유에게 탈은폐됩니다.(Heidegger 1976, 40~41쪽)
더욱이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말하자면 헤겔의 이성과 달리 역사의 주체라고 할 수 없으며, 존재의 역운을 규정하는 일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존재는 항상 보내줌 속에서 스스로 삼간다는 점에서 하이데거가 사유하려는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는 목적론에서 탁월하게 벗어나 있으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종말론의 위험 역시 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의 역사는 존재의 역운을 뜻하는데, 이러한 역운의 보내줌들 속에서 보내줌과 보내주는 그것(Es)이 이러한 보내줌들 자체의 알려짐과 더불어 스스로 [드러내기를] 삼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삼감(An sich Halten)은 그리스어로는 에포케입니다.”(Heidegger 1976, 39쪽) 하지만 하이데거에게는 스스로 보내면서 삼가는 익명의 존재, 또는 그것(Es)에게 그러한 역사를 결정하는 몫이 부여돼 있다는 점에서 행동의 여지, 실천의 여지가 매우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의 가능성이 신비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다.
반대로 이 문제에 관해 데리다와 벤야민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점에 있는 것 같다. 벤야민은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를 개시할 수 있는 정지와 중단 또는 비정립(Entsetzung)의 계기를 강조하는 반면,[따라서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나오는 ‘비정립’ 개념과 「역사의 개념에 나오는」 중단으로서의 ‘지금-시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한 좀 더 면밀한 고찰은 벤야민의 정치철학의 함의를 살피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 중 하나다.] 그러한 정지와 비정립이 최악의 것으로 귀결될 수 있는, 또는 적어도 일시적인 중단 이후 다시 법 질서에 고유한 동요의 순환으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 같다. 반대로 데리다는 그러한 최악의 것으로 귀결될 수 있는 위험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차이적 오염의 논리나 되풀이 (불)가능성의 법칙에 주목하는 반면, 그러한 되풀이 (불)가능성이 변형적인 되풀이로, 차이와 이질성을 산출할 수 있는 근거, 적어도 그 계기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데리다가 장래를 열어두는 것, 사건이 도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함축된 최악의 것, 도착성, 잔혹성을 막기 위해 보존의 필요성, 전유 및 동일성의 필요성을 긍정하고, 서로 환원 불가능한 두 가지 법칙 사이의 타협의 숙명을 주장한다면, 그러한 타협은 차악의 것을 영속적으로 보존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위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곧 그러한 타협을 통해 생산되는 차이, 변형, 이질성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차이, 변형, 이질성이라는 것, 더욱이 이전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요컨대 초월론적인 것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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