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 수가 14만이고, 파업투쟁 기금이 백억이나 된다고 하던 공무원 노조의 총파업이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지더니 17일에는 결국 스스로 파업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런 경과를 보며 씁쓸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공무원 노조의 파업 실패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공무원 노조를 둘러싸고 드러난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들 때문이다. 어디서나 국민의 공복이 웬 파업이냐 혹은 ‘철밥통’들이 웬 파업이냐는 시민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공복 운운하며 공무원 노조를 비난하는 것은 민원 처리를 위해서 직접 만나면 상전처럼 여겨지는 공무원에 대한 원한의 전도된 표출이며, 상전과 공복 사이를 오갈 뿐 도무지 그들을 같은 동료 시민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전근대적인 사고의 표현일 뿐이다. 철밥통 운운하는 비난도 문제다. 그간의 가혹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남은 철밥통에 대한 사회적 질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서로 질투를 심화시켜가는 것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노동조건 전체를 침식할 위험이 있다.
언론매체들의 행동도 유감스러웠다. 보수적 신문들의 행태는 그렇다고 쳐도 〈한국방송〉이나 〈문화방송〉이 공무원 노조의 법제화를 둘러싼 쟁점들을 상세히 다루지 않았다. 〈한겨레〉조차 단체행동권이 노-정 간 갈등의 핵심인 듯 잘못된 보도를 했는데, 그런 점에서 한겨레 또한 쟁점을 제대로 짚으며 우리 사회에 맞는 공무원 노조 모형과 노-정 간의 타협지점을 모색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다고 하기 어렵다. 보수적인 매체들이 공무원 노조에 대한 대중적 반감에 불을 지피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면, 개혁적인 매체들은 대중의 반감을 추수할 뿐 공론 형성 구실을 충실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실망스러운 것은 공무원 노조 자체였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대의를 일반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공무원 노조의 주축인 중하위직 공무원들이 엄격한 상명하복 체계의 국가기구 안에서 갖은 부조리와 불합리를 경험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또한 사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기구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권리 주장에 앞서 대다수 국민이 가진 공무원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을 불식하기 위해서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공무원 조직의 유연화와는 다른 방향에서 국가기구를 혁신하고 양질의 대민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자신들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알려야 했다.
선전 활동에서뿐 아니라 운동 과정에서도 공무원 노조는 전략적 취약점을 드러냈다. 냉담한 언론매체들이 비록 공세적인 비난의 기조일망정 공무원 노조에 관심을 보인 것은 노-정 협상이 깨지고 공무원 노조가 총파업을 예고하면서부터다. 그렇다면 이 기간을 길게 끌며 자신들의 대의와 노-정 협상에서의 쟁점 등을 알리고 사회적 토론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조는 총파업이라는 카드를 쉽게 꺼내고 말았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26일로 예정되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파업을 그때까지 끌고 갈 수 있다고 과신한 것일까? 전략적으로 서툴러 보일 뿐 아니라 민주노총 편에서도 연대투쟁의 효과를 극대화할 전략이 있었는지 의아스럽다.
그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일단 총파업에 뛰어들었다면 그 투쟁의 열렬함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중의 지지도 없는 상황에서 전략도 치밀하지 못하고 거기다 자신의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과 용기마저 없는 셈이다. 이렇게 열정마저 없다면 대의와 진정성조차 의심받게 되는 법이다. 근대 사회의 역사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희생과 고통 없이 공짜로 얻은 적은 없거니와, 이렇게 근로대중이 수세에 몰리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공무원 노조의 파업 실패가 그간 우리 노동운동이 펼쳐온 용기와 열정의 쇠퇴를 보여주는 증좌가 아니길 바란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