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중앙] 겨울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앞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를 스케치해본다는 생각으로 한번 써봤습니다.

아직 교정이 끝나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이 글에 대해 토론이나 인용을 원하는 분은 [문예중앙] 겨울호에 실린 판본을 참조하세요.

--------------------------------------------------------------------------------

개인 —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개인이라는 단어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것도 드물 것이다. 오늘날 ‘개인’이라는 단어는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 삶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말 중 하나다. 그것은 존재론적 단위이자 사회정치적 단위이고, 우리 생활의 기본 단위인 것으로 파악된다. 자연은 물리적 원자들과 생명을 가진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된다. 또 국가는 개인들의 생명과 재산,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정치 조직으로 정의되고, 시민사회는 독립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영역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각자 하나의 개인으로서 저마다의 ‘삶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개인은 상당한 불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동체적 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공동체의 질서나 조화를 깨뜨리기 쉬운 것으로 지목되곤 한다. 개인의 의견, 개인의 이익 추구는 국익이나 국가 발전, 전체의 조화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마땅한 것으로 치부된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나 단체들에게도 개인이 불신받기는 마찬가지다. 이 경우 개인은 자본주의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의 화신으로 지탄받는다. 곧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의 질서에 매몰된 이기적 태도로 비판받으며, 개인의 권리나 자유 운운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 질서를 은폐하기 위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수사법에 불과하다고 간주된다. 이렇게 본다면 개인은 한편으로 가장 기본적인 상식으로 통용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가장 불신 받는 표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이라는 말이 보통 생각되는 것처럼 정말 그렇게 자명한 것일까? 개인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기 이전에 과연 우리는 개인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는 개인에 대한 통념(notion)은 널리 퍼져 있지만, 개인에 대한 개념(concept)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여기서 ‘통념’과 ‘개념’의 구별은 프랑스 인식론 전통의 용어법을 따랐다. 가스통 바슐라르와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에 이르는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에서 concept와 notion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구별된다. 전자가 과학적 또는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구성되고 내포적ㆍ외연적으로 그 의미가 잘 규정된 개념을 가리킨다면, 후자인 notion은 엄밀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상식적인 생각이나 이데올로기적 관념들을 가리킨다. 가령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다양한 통념들을 가질 수 있지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또는 호킹 등과 달리, 누구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들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마르크스나 베버, 하버마스 등이 국가에 대한 독창적인 개념들을 제시한 반면, 대개의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통념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적어도 부족한 것이 아닐까?

사실 어떤 용어가 널리 통용되면 통용될수록, 따라서 그 용어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받아들여질수록, 그 용어가 갖는 고유성 내지 독특성은 상실되기 쉽다. 내 생각에는 개인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다. 개인이야말로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어떤 것, 따라서 보편성과 독특성이 역설적이게도 서로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라는 말에 함축된 보편성과 독특성의 역설적인 결합을 가장 잘 파악한 사람 중 하나(따라서 또한 개인을 가장 잘 개념화한 사람 중 하나)는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였다. 가령 그는 2001년 미국 무역센터 테러 이후 이루어진 한 대담에서 데모스(demos)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편으로 데모스는 모든 ‘주체’에 선행하는,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입니다. 데모스는 시민이라는 자격 모두를 넘어, 모든 ‘국가’를 넘어, 나아가 모든 ‘인민’ 심지어는 ‘인간’ 생명체로서의 생명체라는 현 상태의 정의를 넘어, 존중할 만한 비밀을 지닌 사회적 탈유대(déliason)입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데모스는 보편성입니다. 합리적 계산의 보편성, 법 앞에서 시민들이 갖는 평등의 보편성, 계약을 통해 또는 계약 없이 이루어진 공동 존재의 사회적 연관 등등입니다.

[자크 데리다, [상징적이고 실재적인 자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김은주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219~20쪽.]

 

여기서 데리다는 데모스가 역설적인 이중적 특징을 지닌 존재자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데모스는 한편으로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을 가리키는 명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성을 지칭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이러한 주장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를 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의 개인, 곧 존재론적으로, 사회적ㆍ정치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단위 내지 요소로 이해된 개인이라는 말이 확립된 것은 서양의 자유주의를 통해서였다. 존 로크에서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서양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공리는, “인간 존재자들 사이에 본성적 종속 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개인은 지고하며 모든 권위에 맞서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을 내린다”[Catherine Audard, Qu'est-ce que le liberalisme?, Gallimard, 2009, p. 29.]는 점이었다.

이러한 공리는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것은 자유주의적인 개인 이해가 얼마나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사회 내지 국가가 개인들에 앞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내지 국가가 독립된 개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했다는 생각은, 전근대 사회에 보편적이었던 인간학적 가정, 곧 인간들 사이에는 본성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며, 사회 질서는 이러한 불평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가정을 뒤집는다. 알다시피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신분적 질서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이런저런 신분관계(왕, 귀족, 평민, 노예 등)에 따라 규정되고 정치ㆍ사회적 위치와 행동 방식에서 제약을 당했던 것에 비해, 근대적 개인들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모두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들로 가정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번성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지닌 이들은 자유 시민(곧 데모스)이었으며[이것은 귀족과 평민 사이의 신분적 구별의 해체를 함축하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대단히 혁명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자신의 주저인 [불화]에서 이 점을 인상적으로 논증한 바 있다. J. Rancière, La Mésentente, Éditions Galilée, 1995; {불화}, 진태원 옮김, 길, 근간 참조.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좀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로는 Josiah Ober, Mass and Elite in Democratic Athens: Rhetoric, Ideology, and the Power of the Peop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대중과 엘리트}, 박재욱 옮김, 그린비, 근간 참조.], 노예들은 이러한 권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근대적인 개인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반박하면서 근대적 개인 개념이 함축하는 이러한 급진성을 잘 밝혀준 바 있다.[C. Lefort, L'invention démocratique, Fayard, 1994(초판은 1981) 및 Essais sur le politique, Seuil, 1986;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홍태영 옮김, 그린비, 근간 참조.]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근대적 평등과 자유의 원칙이 착취 및 억압 관계를 은폐하는 측면만을 부각시켰을 뿐, 그것 자체가 지닌 혁명적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은 추상적이며, 또한 그 담지자로서 개인 역시 추상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과 독립적인 정치 영역의 구성을 (사고)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인권 선언]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선언된 인간은 추상적 개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국적과 관계없이(프랑스인이든 영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또는 국적 없는 난민이나 망명객이든 간에),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부자든 가난뱅이든, 재벌이든 노숙자든 간에), 피부색에 관계없이(백인이든 흑인이든 황인종이든 간에), 종교에 관계없이(기독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무슬림이든 간에), 성별에 관계없이(여성이든 남성이든 아니면 트랜스젠더이든 간에), 또 연령에 관계없이(어른이든 아이든, 노인이든 청년이든 간에), 사람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간주되며 또 그렇게 간주되고 존중받을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 없고 ~ 없고 ~ 없는 존재자라는 점, 다시 말해 아무런 특성도 없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인권의 담지자인 또는 인권의 ‘주체’인 사람은 추상적 개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인권 선언이 보편적 선언으로서 효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추상성 덕분이다. 만약 여기에 어떤 제한이 붙는다면, 가령 인간은 그가 가난한 한에서, 또는 생산수단이 없는 존재자인 한에서, 약소국 국민이거나 피식민지인인 한에서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인, 따라서 혁명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데리다가 ‘데모스의 보편성’에 대해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근대적 개인,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시민으로서의 개인이 지닌 이러한 보편성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적 개인이 말 그대로 사회에서 독립해 있는 일종의 인간학적 원자(原子)들로서 실존함을 뜻하지 않는다. 앞에서 우리가 서양 자유주의의 기본 공리라고 불렀던 것은 기술적(descriptive) 의미가 아니라 규범적(normative)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Catherine Audard, Qu'est-ce que le liberalisme?, op. cit. 참조.] 때로 개인의 독립성을 기술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으나(고전적인 사회계약론의 근간 개념 중 하나인 ‘자연상태’ 개념에는 이러한 애매성이 함축돼 있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관계 바깥에서는 생존하기 어렵고 인간으로 성립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18세기 이래 서양의 문학에서 종종 거론되어온 ‘늑대인간’의 이야기는 이러한 난점의 문학적 표현이다) 개인들 사이의 실제적인 불평등(신체적 능력만이 아니라 재산이나 권력, 지능 등에서의 불평등)의 존재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실제로 근대사회의 개인들은 전근대사회와 상이한 조직화 및 사회화 과정에 따라 형성되고 재생산된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개인화(individualization)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이때 개인화 과정이란, 개인들이 원초적으로 주어진 존재자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변형되고 또 재생산되는 존재자들이라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근대적 개인, 보편적인 추상적 개인의 이면에는, 이러한 개인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개인이며 특정한 메커니즘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이 놓여 있다. 근대적 개인에 대한 이해가 완결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설명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는 또한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점이기도 하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근대 자연권 이론 및 사회계약론의 가정과 달리, 개인은 국가 및 사회에 앞서 존재하는 자율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또는 ‘제조되는’ 존재자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규율ㆍ훈련을 바탕으로 하는 권력은 사람들의 힘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힘을 묶어두는 것이 아니다. 그 힘들을 전체적으로 증가시키고 활용할 수 있도록 묶어두는 것이다. 권력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그리고 전체로서 굴복하게 만드는 대신 분리하고 분석하고 구분하며, 그 분해 방법은 필요하고 충분할 정도의 개체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 추진된다. 유동적이고 혼란하며 무익한 수많은 신체와 다량의 힘을 개별적 요소들의 집합체―분리된 작은 독방들, 조직적인 자치제, 단계적으로 생성되는 개체의 동일성과 연속성, 조합적인 부분들―로 만들게끔 ‘훈육시킨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fabrique).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1994, 255~56쪽. 강조는 푸코.]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지만,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스피노자 철학에 의지하여 이를 개조하려고 했다. 이러한 개조의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알튀세르는 가상 내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내지 진실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한계를 넘어 이데올로기의 실재성(및 더 나아가 물질성)을 개념화하려고 했다.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가상 내지 허위의식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그러한 가상(예컨대 종교라든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신숭배(fetishism) 같은 것)이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또 사회적 현실을 구조화하는 힘을 갖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둘째,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종속적 주체 형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흔히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개인적인 실존 양식, 개인성 그 자체가 지배 계급의 권력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권력 또는 상징적 권력에 대한 분석을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알튀세르는 특히 호명(interpellation) 개념을 중심으로 이러한 종속적인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을 해명하려고 했다.[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및 호명 이론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알뛰쎄르와 라깡: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및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제3권 1호, 2008을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이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철학적 근대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개인을 뜻하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범주는 칸트 이래 근대 철학의 핵심 원리로 존재해왔는데, 개인 내지 주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호명 메커니즘의 산물이라면, 개인 내지 주체는 정의상 종속적인 주체인 셈이며 근대철학의 가정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종속화(assujettissement)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심각한 난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이데올로기론은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혁신적인 이론 중 하나로 널리 찬사를 받았지만, 동시에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이러한 이론을 전제할 경우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 내지 개인의 가능성을 좀처럼 사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개인 내지 주체가 정의상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산물이라면, 따라서 종속적인 개인 내지 주체라면, 그렇다면 해방의 주체,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이는 특히 영미권 맑스주의자들이 알튀세르에게 제기한 주요한 비판 논점이었으며,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현대 비평가들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비판이 특히 잘 나타난 책으로는 Slavoy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Verso, 1989;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1 참조. 이러한 비판에 맞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강점을 옹호하려는 시도로는,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앞의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실제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밑바탕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법 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관점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법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바로 평등과 자유 같은 것이다. “법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개인은 법인으로서 법률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의무가 있는 법적 인격이다. ... 법 이데올로기도 외관상 이와 유사한 담론을 펼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본래(본성상, par nature) 자유롭고 평등하다. 따라서 법 이데올로기에서는 (법인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에 ‘토대가 되는’ 것이 법이 아니라 자연이다.”[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121~122쪽. 강조는 알튀세르.]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평등’과 ‘자유’는 법 이데올로기이며, 이러한 법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강제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또 그것이 ‘정상적으로’ 재생산되도록 그 체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해준다.

그렇다면 과연 이데올로기론을 따를 경우, 우리는 항상 종속적이고 예속적인 개인 내지 주체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현대 이데올로기론, 더 나아가 현대 정치철학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리고 현대 정치철학의 논의를 주도하는 사상가들, 곧 에티엔 발리바르나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나 슬라보예 지젝(Slavoy Zizek)이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같은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남겨 놓은 질문에 대한 상이한 답변들을 발견할 수 있다.[발리바르가 알튀세르의 사상, 특히 그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이론, 1993을 참조할 수 있다. 알튀세르가 발리바르 이외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같은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이론가나 지젝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학파, 또는 주디스 버틀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알튀세르 효과}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글들이 참조할 만하다. 서관모, 「알튀세르에게서 발리바르에게로: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정치의 개조」; 최원, 「인셉션인가, 호명인가? 슬로베니아 학파, 버틀러, 알튀세르」; 김정한, 「알튀세르와 포스트맑스주의: 라클라우와 지젝」,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다시 앞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데리다가 말하는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의 의미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 표현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데리다의 다른 대담에서 찾을 수 있다. 데리다는 {비밀에 대한 취향}이라는 대담집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권리 중 하나로 “답변하지 않을 권리”를 꼽은 바 있다.[Jacques Derrida & Maurizio Ferraris, A Taste for the Secret, Polity, 2002, p. 26.] 곧 민주주의에서는 누구에게나 답변의 권리, 반론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동시에 답변하지 않을 권리도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답변하지 않을 권리’란 법적인 문제에서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거나 침묵할 수 있는 권리 같은 특수하고 제한된 권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답변하지 않을 권리란 그것에 앞서 어떤 정체성을 갖지 않을 권리, 나에게 주어지거나 강제된 정체성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이것은 어떤 정치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는 보편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아무런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을 권리, 익명적인 누군가로 존재할 권리, 비밀을 지닌 존재자로 살아갈 권리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또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je ne suis pas de la famille)라고 말한다. 이것은

 

‘나는 나 자신을, 가족에 대한 나의 소속을 기초로 하여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지만 이는 좀더 비유적으로는 내가 어떤 집단의 일부도 아니라는 것,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언어 공동체, 국민 공동체, 정치 정당 내지 어떤 종류의 집단이나 파벌, 어떤 철학적이거나 문학적인 학파와 동일시하지 않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 나를 ‘당신들 중 하나’로 간주하지 말라, ‘나를 당신들 가운데 하나로 셈하지 말라’ 나는 항상 나의 자유를 유지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에게 이는 독특하기 위한, 타자이기 위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타자들의 독특성 및 타자성과 관계를 맺기 위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족의 일원일 때 그는 자신을 무리 속에서 잃고 말 뿐만 아니라 타자들 역시 잃고 맙니다. 타자들은 단순히 장소들이나 가족 기능들, 곧 집단, 학파, 민족 내지 동일한 언어를 말하는 주체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기적 총체 속에서의 자리들 내지 기능들이 되고 맙니다.

[Jacques Derrida & Maurizio Ferraris, A Taste for the Secret, 같은 곳.]

 

그렇다면 이것은 일체의 정치적 소속, 일체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적 주장을 뜻하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이라는 데리다의 개념, 또는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수행문적 주장은 정치 공동체에 대한 참여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가족의 성원이 되지 않으려는 나의 바람은 가족의 성원이 되려는 나의 바람이라는 사실에 의해 전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공동체에 속하려는 욕망, 소속 자체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만약 내가 실제로 가족의 일원이라면, 나는 ‘나는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Jacques Derrida & Maurizio Ferraris, 같은 책, p. 28—강조는 데리다.]

따라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수행문적 주장은 오히려 일차적으로 모든 개인은 항상 이미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소속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그러한 정체성이나 소속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보다는 비판하고 거부하려는 태도를 함축한다(데리다가 이 문장은 사실이나 존재 방식을 서술하는 문장이 아니라 수행문(performative)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그러한 정체성이나 소속이 폐쇄나 동질화의 위험, 곧 개인들을 “단순히 장소들이나 가족 기능들, 곧 집단, 학파, 민족 내지 동일한 언어를 말하는 주체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기적 총체 속에서의 자리들 내지 기능들”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주장 속에는 모든 개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정체성과 소속이 좀더 개방적이고 좀더 자유로운, 좀더 평등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바람, 정치적 요구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다른 저작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린다면, 이는 “도래할 민주주의”(démocratie à venir)에 대한 요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특히 J. Derrida, Voyous, Galilée, 2003 참조. 이 책은 {불량배들}(이경신 옮김, 휴머니스트, 2003)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지만, 번역이 좋지 않으므로 불어본이나 다른 외국어본을 참조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수행문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무정부주의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어떤 정체성과 어떤 소속, 따라서 어떤 공동체가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는 무정부주의에 기초를 두어야 함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 때의 무정부주의란, 흔히 비난의 의미로 거론되는 무정부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최근 랑시에르와 발리바르가 각자 이론화한 의미에서의 아나키(anarchy), 다시 말하면 “토대 없음”, “아르케 없음”이라는 뜻에서 안-아르케(an-archē)를 가리킨다. J. Rancière, La mésentente, op. cit.; {불화}, 앞의 책 및 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을 각각 참조. 그리스어로 아르케는 어떤 시원(始原)과 동시에 원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아르케는 어떤 정치 공동체를 기초 짓는 근거 내지 토대, 또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권위를 뜻한다. 따라서 “토대 없음”으로서의 안-아르케가 의미하는 것은, 첫째, 민주주의에는 본질상 자연적이거나 객관적인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혈통이나 신성(神性) 또는 무력이나 부, 아니면 (지적) 능력 같은 특정한 어떤 기초에 근거를 두게 되면 민주주의는 데모스의 권력(demokratia)이 아니라, 그러한 기초를 보유한 어떤 소수 집단의 권력이자 통치, 곧 과두제로 변질된다. 랑시에르가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다”(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Éditions la Fabrique, 2005, p. 79;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허경 옮김, 인간사랑, 2011, 154쪽. 번역은 약간 수정)라고 일갈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그 말은, 민주주의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부정적인 토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부정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토대가 창조된 것 내지 발명된 것이지, 실체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근대 민주주의가 추상적 개인의 보편성에 기초를 둔다고 했을 때, 여기서 기초의 역할을 하는 보편성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자연적 본성(생물학적 종으로서 인간)이나 신학적 속성(곧 ‘신의 모방’으로서 인간), 또는 존재론적 특성(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까지 포함하여)에 함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본성이나 속성 또는 특성 어디에도 민주주의적 인간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보편성은 (말년의 알튀세르가 유고에서 말한 것처럼) 강한 의미에서 우발적인 것이다. 곧 그러한 보편성은 억압에 맞서 저항하고 지배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인간들의 집합적 행위를 통해 발명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데리다의 관점에 따를 경우 어떤 정치 공동체가 얼마나 민주주의적인지 측정하는 한 가지 기준은 그 정치체가 얼마나 많은 무정부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지, 얼마나 무정부주의의 제도화에 성공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개인, 보편적인 추상적 개인은 동시에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을 포함하며 또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인은 좀더 평등하고 좀더 보편적인 정체성을 가질 권리를 지니면서 동시에 일체의 정체성들로 완전히 포섭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계산 불가능한 아무개로,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나 자신으로 존재할 권리 역시 지니고 있다. 개인이란 이러한 두 가지 권리의 변증법(물론 이러한 변증법은 기원도 없고 목적도 없는 무한한 변증법, 곧 알튀세르가 말한 의미에서 과잉결정된(surdéterminée) 변증법일 것이다)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 그러한 변증법의 공간 속에서 구성되고 재구성되고 또 전환되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적인 사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 사회에 속한 개인들이 얼마나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개인들인지에 달려 있다. 보편적이거나 독특한 것이 아니라, 독특하면서 보편적인,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개인들, ‘나’들인지에.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Joule 2011-11-1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예중앙 겨울호는 꼭 사봐야겠는데요.

balmas 2011-11-10 20:44   좋아요 0 | URL
줄님 오랜만이세요. 문예중앙 편집위원들이 들으면 좋아하겠습니다.^^

박하순 2011-11-26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

balmas 2011-11-26 10:59   좋아요 0 | URL
박 위원장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궁금하네요. 잘 읽으셨다니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합니다. ㅎㅎ

박하순 2011-11-27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뭐 그럭저럭 지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