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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조선일보가 쳐들어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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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쳐들어온다고?


19세기 초 영국의 젊은 엄마들은 아이가 칭얼거리면 ‘나폴레옹 온다!’는 말로 울음을 그치게 했다고 한다. 대륙을 제패한 프랑스 황제가 그 시대 영국인들에게는 공포의 상징이었던 모양이다.

한국인들에게도 어린 시절의 ‘망태할아버지’나 ‘에비’의 기억이 있지만, ‘나폴레옹’은 그 실체가 또렷한 데다가 당대 ‘선량한 영국인 공동체’ 전체의 적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아이들의 공포 대상과는 성격이 좀 달랐다. 나폴레옹이 도버해협을 건너온다는 데야, ‘선량한 영국인’이라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일치단결해야 하는 것이다.


근자에 노무현 대통령 주변 인물들이나 노 정권의 강고한 지지자들 사이에서 옛 영국인들의 ‘나폴레옹’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조선일보다.

이들은 주변에서 무슨 추문이 터지기만 하면 우선 “조선일보가 온다!”고 외치고 본다. ‘포로코’라는 필명의 네티즌이 한 웹사이트에서 지적했듯, 옛 군사정권이나 조선일보가 일이 잘 안 풀린다 싶으면 “북한이 쳐들어온다!”며 불안을 조장했던 식이다. 호시탐탐 개혁세력을 해코지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조선일보의 말을 왜 믿느냐고 질책하기까지 한다.

이 글에 대한 뒤틀린 비방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얼마간 눅이기 위해, 구차한 신원 진술을 하자. 나는 세칭 안티조선운동의 활동가까지는 못되지만 꽤 어기찬 지지자다. 지난 7년간 나는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술집이나 식당에서든, 종이신문으로든 인터넷으로든, 조선일보를 보지 않았다.

몇몇 신문의 미디어 난에서 비판을 위해 인용된 조선일보 기사를 스쳐 지나가듯 본 것을 제외하면, 그 기간 동안 내 경험세계에서 조선일보는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신문에 대해 내가 느끼는 거리감은 직업적 안티조선 운동가들이나 노 정권 주변 사람들 못지않다는 것을 믿어줘도 좋다는 뜻이다.

다시 돌아가자. 조선일보는 악인가? 7년 전까지의 독자로서, 그리고 그 이후의 간접적 수용자로서 판단하건대, 그렇다. 나는 이 신문의 상업주의적 반공놀음과 종파주의적 선정성이 다원적 민주주의와 열린 사회의 장애물이라고 판단한다. 또 나는 조선일보가 글쓰기의 권력화를 가장 추악하게 실천하고 있는 비윤리적 신문이라고 판단한다.

다음, 정권 주변 사람들이 최근 부쩍 더 암시하고 싶어하듯 이 신문은 만악의 근원인가? 이 신문은 늘 사실을 왜곡하는가? 코웃음 칠 얘기다. 일반적으로 고부 갈등이나 비련애사가 조선일보 탓이 아니듯, 일반적으로 정권 주변의 크고 작은 추문을 조선일보가 조작해내지는 않는다.

물론 일단 터진 추문을 이 신문이 악의적으로 부풀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는 있고, 조선일보는 그 분야의 전과가 화려하다. 그러나 정권 주변의 최근 추문과 관련해서 당사자들이 보이는 태도는 조선일보만 아니었으면 추문이 아예 없었을 것이라는 식이다. 그것은 논리의 앞뒤를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개혁세력’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몸가짐과도 거리가 있다.

그 다음, 악한 집단의 적대자는 저절로 선한가? 그렇지 않다. ‘식인귀’ 부시와 적대자였다는 사실이 사담 후세인의 ‘식인귀 아님’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조선일보에 대한 사나운 비판이 그 비판자가 조선일보와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사소한’ 추문들의 책임소재를 놓고 최근 조선일보를 격렬히 비판하며 “조선일보가 온다!”고 외친 정파는 정작 그 추문들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 이라크 파병이나 송두율씨 인권을 두고는 조선일보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 정권의 핵심과 그 지지자들이 조선일보와는 비길 수 없을 만큼 자유민주주의에 친화적이라는 것은 안전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집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서는 제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개혁세력’을 보는 일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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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7-24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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