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또다른 중심 주제는 “철학의 맥락”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철학회에 나가보면 재미도 없고 실망만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헤겔 철학이든 스피노자 철학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철학이든 간에 철학은 항상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고, 철학은 자신의 환경, 자신의 맥락에 대한 긴장과 갈등, 성찰로부터 형성되고 발전되기 마련인데, 국내의 철학회에서 발표되는 논문들을 보면, 철학이 현실 맥락과 맺고 있는 긴장 관계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나쁜 의미에서 추상적이고 몽롱한 논의들로 가득차 있다는 거지요.

  더 나아가 외국에서 학위를 하고 돌아온 몇몇 연구자들의 논문을 보면 결국 그 나라 철학계의 하청작업만 해주고 왔다는 인상을 받게 되어 씁쓸하기 짝이 없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예컨대)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얼마간 필요한 문헌학 작업이지만 정작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어서 그 나라에서도 그 일을 수행할 만한 연구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 나라 사람도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 가서 그 일을 대신 해주고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그 나라는 구하기 힘든 고급 노동력 하나를 잘 구해서 아쉬운 부분을 메울 수 있지만, 그 연구자가 몇 년 걸려 해낸 그 작업이 우리나라 철학계에, 우리나라 지식계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더 나쁜 것, 더 심각한 것은 본인들은 정작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학문 선진국에서 (얼마간) 인정받은 논문이니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는 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 아니냐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학문적 사대주의”로 비판받을 만한 이런 태도는 사실은 국내의 철학계(꼭 철학계에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겠지만)에 상당히 팽배해 있는 현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좀 유별난 것은 국내의 학자들은 국내에서, 자신이 유학한 나라의 철학적(또는 학문적) 경향을 그대로 대변하는 투사 노릇을 한다는 점입니다. 독일 철학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영미 철학을 무시하고 프랑스 철학은 아예 철학 취급도 하지 않거니와, 영미 철학자들 중 상당수는 독일 철학을 공허한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프랑스 철학은 여자들에게나 적합한 철학”(원문 그대로! 무슨 뜻인지는 발언자에게 물어보셔야 할 듯)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철학이 덜한 건 아닙니다. 아직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고 “통일된 대오”(?)를 갖추지 못해서 그렇지, 프랑스 철학자들도 독일 철학이나 영미 철학 못지 않은 “애국심”을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건 프랑스 유학자들의 경우 주로 공격 대상이 프랑스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이제는 국내에도 얼마간 알려진 사실이지만, 프랑스의 제도권 철학계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보통 사람들이 프랑스 철학의 대표자들이라고 알고 있는 인물들, 곧 알튀세르,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리오타르 등의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거의 연구되지 않고 있고, 매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학위 논문 주제로 삼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유학자들이 학위 논문 주제로 가장 많이 택하는 철학자는 베르그송이고, 그외 메를로-퐁티나 사르트르, 레비나스 같은 현상학 계열의 철학자들, 아니면 멘 드 비랑을 비롯한 군소 유심론 철학자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국내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립니다(물론 이 경우도 일부가 문제입니다). 그들을 가르친 프랑스 강단 학계의 선생들이 이 사람들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철학적인 논거를 들어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드는 논거들은 그건 철학이 아니라느니, 너무 많이 쓴다드니, 저자 사인회를 하면서 책을 팔더라느니 등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일제 합병 이후 우리나라의 학문의 맥이 끊어졌고, 여기에서 비롯한 빈 공백이 아직도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를 잘 표현해주는 용어가 바로 국학이라는 단어일 겁니다)에서 유래하겠지만, 공시적으로 본다면 학문, 또는 철학을 맥락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결과들이 아닐까 합니다. 철학을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철학을 사회경제적 조건의 결과로 봐야한다는 것도, (불변적인) 민족성의 정수이자 한 결과로 봐야한다는 것도,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철학자의 삶의 조건과 관련시켜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일 수도 있겠지요(그런데 “맥락”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context? circumstances? surroundings? environment? conjuncture? exteriority? ...).
이 문제는 좀더 다듬어진 생각으로, 좀더 개념적인 논의에 따라 고찰해봐야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철학 또는 이론적 논의에 맥락이 부재한다는 점 또는 적어도 상당히 부족하다는 점은 경험적 차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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