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의 유/여성 젠더] 후반부 번역본입니다. 전반부 번역과는 달리 "peuple des hommes"를 "남성들로 이루어진 사람들"로 하지 않고 "남성들로 이루어진 인민"으로 번역했습니다(그리고 "peuple"은 모두 "인민"으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croissance"는 "성장"이라고 하지 않고 "생장"이라고 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번역본은 인용의 대상이 아니므로, 인용을 원하는 분은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성의 유/여성 젠더

***

  오늘날 우리는 자주 의무와 의무의 희극적 충돌―여기에는 제도들을 수단삼아 이루어지는 것도 포함된다―에 직면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동성/수난passion, 정념들passions에 새로운 길을 부여하고, 파토스 또는 오히려 좀더 윤리적인 감각적 정신을 정련하는 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반대로 의무에 대한 경쟁적인 선호는 애처롭고 가련하며 추상적이다. 사실 도덕이 감각적인 이것[“감각적인 이것”은 “un ceci sensible”의 번역이다. “ceci”는 개별적인 “이것”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 이리가레의 논점은 감각적인 것을 추상적인 도덕적 의무와 대립시켜서는 도덕의 희극적 순환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감각적 보편성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에 맞서 [도덕적 의무를] 보존하려고 하는 곳에서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여성 젠더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때, 여성 젠더는 너무나 자주 권리들의 평등에 대한 주장에 자신을 위치시키는데, 이는 자신의 젠더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 이 경우 권리들과 의무들의 충돌은 희극적이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충돌은 대립 속에 있는 절대자의 모순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 비극적인 희극은 아마도 전쟁의 파생물로서 기능하는 것 같다. 절대자를 전유하고 있으나, 자신이 직접적인 것/무매개적인 것과 맺고 있는 관계를 해소하지 못한 젠더에 속하는 전쟁 말이다. 광적인 학살을 벌이기보다는 차라리 웃는 게 더 낫다! 하지만 [양자 사이의] 경계는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경각심을 풀지 않고서 웃어야 하며, 최악의 것을 멀리하고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직접적 폭력을 피하고 기다릴 시간을 벌기 위해서 웃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자기le soi가 자신을 둘이 아니라 하나와 같게 만들면, 만약 자기가 타자로서의 타자를 무시하고 동일자même 및 그것의 분열과 자신을 같게 만들면, 모든 작용은 무위에 그치고 만다. 이 질서에 따른다면 작용 없이 남아 있는 것만이 결백하다. 헤겔이라면 아마도 바위, 식물이 그렇다고 말했으리라. 여성들은 자주 자신들의 작용을 박탈당한 채, 바위처럼 식물처럼 존재해 왔다. 남성/인간을 형성하고, 남성 젠더에 동화된 작용들은 결백하지 않다. 또는 더 이상 결백하지 않다. 이 작용들은 심지어 두 개의 젠더들에 대해 유죄이다. 하지만 오늘날 윤리적 행동의 내용, 성들에 따라 가변적인 그 내용은 말소되고 있다. 남성들에 의해 관리되는régi 우주는 감각적인 것을 파괴함으로써 사고의 내용을 제거하고 있다. 평등하다고―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에 대해 동일하다고―주장하는 어떤 세계 역시, 모든 작용의 독특한 내용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이는 [여성적인] 한편에게는 범죄행위가 아닌가?) 감각적인 것을 파괴한다. 분명히 유죄인 것은 특수한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인민이며, 보편성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특수한 의무들과 결부된 쟁점들과 전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보편자 그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런 의무들은 보편자 내에서는 somme을 이루지도 못한다. 한쪽 편에서 보편적으로 입법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죄이고 범죄다. 전리품, 강간, 중죄의 몫을 나눠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왜냐하면 그런다고 해서 그림자가 덜 커지는 것은 아니며, 그와는 정반대다. 차이의 한 부분은 훨씬 더 억압되고 부정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젠더들 사이의 차이에서는 진리의 절반은 더 이상 다른 절반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직 한 부분만이 자신의 유령들, 자신의 그림자들, 자신의 가면들, 자신의 죄들, 자신의 두려움들 ... 과 맞서 투쟁을 벌일 뿐이다. 적수의 실체 없음inconsistance은 그를 너무나 절망스럽게 만들어 그는 대립물들을 발명하고 야기하고 격화시켜 기어이 전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되면 행위는 너무나 명백하게 파괴적인 게 되고 범죄는 너무나 분명하게 완수되어, 다시 정적이 찾아든다. 죄의식이 자신과 맞서 있는 한 대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태는 말하자면 전도되었다. 곧 개인성은 작용 일반의 형식적 계기이며, 내용은 법률들과 습속들moeurs에 의해 구성된다. 일단 태어난 이후 개인은 법률들 및 습속들에 의해 두 번째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 두 가지 탄생은 서로 다른 것 안에 끼워맞춰질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오늘날 인간/남자를 문제삼는 이들이 끊임없이 맹목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이 탄생은 유전적, 자연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인가? 이 질문은, 헤겔이 인간의 이중적 탄생 및 성들에 따른 이러한 탄생의 배분에 관해 우리에게 기술해준 것을 우리가 다시 받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질문은 두 개의 젠더에게 부여된 운명 및 과제에 관해 제기되어야 한다. 사실 질문이 이처럼 제기되지 않는 한, 각각의 젠더는 범행 및 죄에 대한 혐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곧 보편자가 [남성적] 대자pour-soi에 대한 관심을 정당화할 수 있다. 보편자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윤리를 변형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두 젠더는 하나의 주형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하나의 운명 안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모델, 하나의 빌려온 정체성은 이들이 진리를 지각하고, 자신을 진리로 지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누구에게도 죄가 있지는 않다 ... 보편자는 생명을 그 형태들 안에서 완성시켜 주는 게 아니라 생명을 죽이거나 살상하는 규범들의 강제로서 존재한다. 자연적 보편자와 법적, 관습적, 진리적 보편자 사이에는 이행, 교차, 생성이 결여되어 있다.
  두 성의 이른바 자연적 운명은 이미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다. 법률들 및 습속들은 이미 한쪽편에 의해 제정된 보편자를 추구함으로써 자연을 도착시켰다. 인간/남자가 언어를 불가침적이고 중립적이며 보편적인(그러므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쉽게 설명된다. 언어는 한쪽편의 진리로 관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중성[ 이리가레는 예컨대 “on” 같은 단어를 “중성”으로 사고하고 있는 듯하다. “on”은 영어로 하면 “one”이나 “they”처럼 불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 블랑쇼의 저작들이나 초기 푸코의 문학 비평에서 익명적인 중성에 관한 탐구를 엿볼 수 있는데, 이리가레가 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이 이론적 위신을 얻고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희극적이다. 이는 또한 비극적이기도 하며, 폭력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 왜냐하면 각각의 젠더는, 하나의 중성, 그 자신의 중성이 문제이지 절대적 중성이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중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개의 중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법을 제정하려고 한다. 하나는 특히 프로이트의 제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아이이며, 다른 하나는 일신론의 신, 특히 육화되지 않은 신으로부터 우리에게 유래한 어떤 의무이다. 성들 간의 전쟁 바깥에서 윤리적이고 싶어하는, 중성적인 것의 이 고립된 땅들은, 성들 간의 차이의 비극 및 그 수태 능력fécondité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에서, 기술통치technocratie의 지배권 및 지배영토―이것들이 충동적 통치이든 로고스에 따른 통치이든 또는 도구들, 기계들의 효과이든 간에―와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예컨대 첨단 기술의 힘을 빌려 이루어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중성적인 것을 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에너지의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등급들 내지는 질적 차이들을 지니지 않은 동일한 유형의 에너지, 곧 사람들on, 무책임한 다수, 양적인 것 안에 멈춰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 전체, 인민들 전체 및 이들의 산출과 재산출, 이들의 발생적 원리에 맞서 아무런 정당한 객관성도 주체성도 없는 파토스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 의심할 여지 없이 논쟁―또는 중성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외견상의 화해―의 은밀한 열쇠인 아이로 되돌아가보자. 아이는 특정한 언어, 예컨대 프로이트의 언어나 헤겔의 언어 같은 특정한 언어들 안에서만 중성적이다. 따라서 국제 정신분석학회―이 문제를 둘러싼 분쟁지들 중 하나만 언급하자면―가 자신의 중립성/중성성을, 중성적이라고 간주되는 아이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는 모종의 공언어주의bilinguisme를 댓가로 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공언어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으며, 내가 보기에 이는 성들의 차이에 대한 실어증 내지는 무기력증과 관련해 본다면 척추교정술과 비길 만한 것이다. 예컨대 안나 O는 자신의 대화 치료talking-cure에서[안나 O는 프로이트와 브로이어가 공저한 『히스테리 연구』에 나오는 히스테리 환자 중 한 사람의 명칭이다. 그녀는 정신분석의 치료법에 대해 “대화치료talking-cure”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단어들이나 표상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 자신의 정서들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중성적인 언어로 이야기되는 하지만―genre라는 단어를 희랍어에서는 [중성으로] 토 게노스to génos라고 하듯이. 타자에 대한 윤리와 관련하여 내가 다시 읽고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관련 구절에서 이 두 가지 중성 단어 사이의 관계를 확립해 보는 일은 흥미로울 것 같다―아이는 항상 성별화되어 있다. 아이를 중성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이에 대해 영속적으로 자행되는 대범죄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영속되는 범죄인가? 신? 정신? 양자 모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성별화되어 있고, 성별화로부터 태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죽음을 아이에게, 젠더에게, 산출에게, 생명에게, 성에게 강요하는 것인가? 어떤 권리로, 어떤 어둠을 틈타,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언어, 남자들의 언어는 중성적인 존재로서의 아이를 덮어싸고 조르고 질식시키는 것인가? 실존하지 않는 중성적인 신의 이름으로? 또는 성들 사이의 분유partage에 대한 무능력 내지는 분유의 거부의 이름으로?

  언어 안에는 중립적인 것의 두 가지 다른 저장소들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단지 내용(들)일 뿐만 아니라 형식(들)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보기에는 의무권리의 저장소에 상응하는 것 같다. 이는 그리스-로마 문화 시기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이것이 우리의 개별적, 집합적 의식에 미친 충격에 관한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법, 권리는 중성/중립적으로 말해지지만, 이것들은 한쪽편에 따라 제정되었으며, 따라서 실제로는 중성적/중립적이지 않다. 이러한 비중립성은 성인 개인의 내용을 정의하는 법의 내용과 형식 안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중성성/중립성은 심각한 결과들을 낳고 있으며, 언어 및 주체의 지위의 변동을 수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대한 저항의 보루를 대표하고 있다. 남자들 사이의 전쟁들 및 논쟁들을 사면하기 위한 영토로서 이 중립 지역은 남성 젠더와 여성 젠더 사이의 위계라는 문제 및 그것들의 불의, 그리고 이로부터 유래하는 언어들 및 가치들의―개인적이고 집합적인―병리적인 중립화/중성화라는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이러한 중성성/중립성은, 적어도 불어에서는 남성과 동일한 대명사로 번역된다는 점(곧 elle faut가 아니라 il faut인 것이다[“il faut”는 “~해야 한다”를 뜻하는 불어 숙어이다. “il”은 원래는 남성 3인칭 단수 대명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중성적인) 비인칭 주어로 사용된다. 이리가레가 “il faut”, “~해야 한다”의 예를 든 것은 법이 지정하는 의무와 명령, 권리의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을 덧붙여두고 싶다.
  거의 체계적인 자연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심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연의 왕국/지배권l'empire de la nature 역시, 천둥치다il tonne, 눈내리다il neige, 바람불다il vente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성으로 표현된다[이 경우에도 역시 “il”은 비인칭 주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리의 동양의 뿌리 및 그 분맥들에서는, 우주는 젠더들에 따라 배분되었고, 젠더들은 때로는 갈등을 겪으면서도 함께 우주의 요소들을 통치했다. 인간들의 세계는 단지 오늘날 이야기하듯이 별들에 의해 규정된 것만이 아니라, 그것 자신이 별들을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두 개의 젠더/유 덕분이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의 사회 윤리의 몇 가지 토대들이 표현되고, 자연의 법칙들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 상실되면서 그 법칙들에 대한 존중심의 상실이 언급되고 있는 장소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빛과 어둠, 뿌리들과 꽃들 사이의 차이들이, 사회적 의무들―이것들을 창조한 죄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에게 있다―에 대한 준수라는 명목 아래 더 이상 지켜지지 않으면서, 그들은 미시적 우주 및 거시적 우주에 대한 통치를 상실했는데, 다른 젠더/유하고만, 다른 유의 잔여나 그 그림자 뒷면이 아니라 여성 젠더하고만 이 우주들을 통치할 수 있다. 두 개의 젠더 사이에 미시적 우주 및 거시적 우주에 대한 통치가 배분된다. 이러한 운명은 중성적이지 않으며 유일한 젠더/유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이처럼 말했다. 왜 오늘날 이를 잊어버렸는가? 우주의 질서 및 우리 자신의 육체chair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긴급하면서impérieux 또한 더 부드러운doux 의무가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우리를 이러한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중성적으로/중립적으로 우리를 뿌리로부터 밀어내는 모든 것은 감각 및 사상, 예술, 윤리의 내용을 이루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우리의 신체 및 세계의 생명을 소멸시킨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가 남아 있다면, 이는 남자의 행위의 밤과, 아직 여성의 밤 안에 있는 것 사이의 대결에 있다. 우리는 다른 기회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분명히 문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근친상간이나 그것의 금지일 뿐만 아니라, 같은 나이에 속하는 두 개의 젠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이들이 생명, 감성, 형태 및 신과 사고에 대해 상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의식에 관한 물음을 몰아낼 이유가 되지 못하며, 무의식의 형성을 이중화해야 할 이유도 되지 못한다. 무의식은 작용 안에서 생산되어야지, 영속적이고 부동적(不動的)인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무한한 반복은 작업oeuvre 안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이 경우 타자성은 동일한 것 안에 머물지 않고 타자에게 되돌아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추구해나가야 할] 하나의 극한점이지만, 이러한 방향은 우리가 윤리적 감각의 순수성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헤겔은 안티고네 범행의 순수성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이보다 훨씬 더 거대한 순수성이 존재할 것이다. 왜 이 추정된 범행이 금지되는 것인지 아는 것이 그것인데, 이는 이러한 범행이 남자들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운명에게만 봉사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게 되면 외관상의 대립이 제거될 것이며, 여성으로서는 긍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성은 고유한 윤리적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에게 낯설게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즉자, 그녀의 본질이다. 하지만 여성성은 더 이상 자신의 즉자, 자신의 본질이 다른 성, 다른 젠더에 의해 정의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여성성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정의, 남성성의 실효성의 일부를 이루는 정의와 단순히 대립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성 젠더는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측면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생성되기 위해 자신의 윤리적 생성의 질서에 따라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자기 자신과 투쟁한다. 이러한 생장, 한편으로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무매개성과 매개들 사이에서, 어머니와 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기도 한 이러한 생장은 여성 젠더를 위해, 그리고 여성 젠더 안에서 열린 상태로 무한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장은 두 개의 젠더 사이의 만남을 위해 필수적이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가장 커다란 죄는 하나의 젠더로부터 그의 윤리적 의식 및 젠더로서의 실효성을 박탈했다는 데 있다. 이는 실체로부터 현실성(실행성, effectivité)을 분리시켰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철학자인 타이 그레이스 애트킨슨Ty Grace Atkinson은―내가 그의 분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면―이러한 행위를 “형이상학적 흡혈주의”라고 불렀다. 나로서는, 그리고 그 결과들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이고 싶다. 
  만약 여성들이 다른 성의 확실성들에 따라 정의된 의무를 수행한다면, 여성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몫이 빠져 있는, 고유한 윤리적 목표가 빠져 있는 의무에 대한 파토스 말고는 어쩔 수 없이 우연적인 현실성 안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들의 목표, 그들의 목표의 현실성은, 비록 그들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이 제거된 목표로 머물고 말 것이다. 사회, 노동하는 세계, 전쟁이 아이와 남편을 그녀들로부터 앗아갈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행동 목표를 절단당한 채로, 선택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한 채 무관심하게 금욕적으로 남아 있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몇몇 신비가들이나 현인들이 금욕[“금욕”은 “renoncement”의 번역인데, 원래의 내용상으로는 “자기를 버림”, “무욕” 등이 더 어울릴 듯하다.]의 과정으로 기술한 것이 그들의 일상의 운명이 된다. 하지만 어떤 인민에게, 다른 인민의 목표라는 명목 아래 성인이 되도록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실―헤겔은 이 점을 매우 잘 간파했다―인민도 전쟁도 [단일한] 하나가 아니다. 반대로 그들 중 한 부분[이 경우에는 남성]은 자기 자신을 위해 윤리적 의식의 권리를 요구하면서도 다른 부분[곧 여성]은 목표와 현실성을 박탈당한 상태에서―자신의 분신까지는 아닐지 몰라도―자신의 그림자로, 자신을 회복시켜 주는 존재로 남겨둔다. 인간 유는 두 개의 젠더가 아니라 두 개의 기능, 두 개의 과업으로 분배되는 것이다. 여성은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은 “sous peine de mort”이다. 이 숙어는 일상 어법에서는 별 혼란이 없지만, 이 경우에는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곧 이 숙어는 본문처럼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으로 해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서”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후자의 경우는 물론 안티고네를 지칭하는 말이 될 것이다.] 자신의 젠더를 포기해야 했다. 남성도 마찬가지이지만, 여성과는 상이한 의미에서 그렇다. 남성이 자신과 벌이는 논쟁은 자신의 젠더의 신 또는 정신과 벌이는 논쟁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남성과 여성이 각자 상이한 젠더를 주장하게 되면, 양자가 소통할 수 있을지 묻곤 한다. 아마도 그들은 결국은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간에 가능한 이행이 부재한 가운데, 상이한 의식과 정신, 인민의 모습들 안에 서로 분리된 채 갇히게 것이다.        

***

  오늘날 가장 선진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들 중 다수가 근친상간을 성적 관계―무의식적 관계이든 의식적 관계이든 간에―[의 모델]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유/젠더와 그것의 배분이라는 문제를 해소시키지는 않는다. 근친상간은 세대간의 간격 및 젠더의 생식(산출, procréation)과 작용하지, 젠더의 정신과 작용하지는 않는다. 항상 나이, 생장, 세대의 간격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근친상간 및 그것의 위반을 문화적 운명의 극복으로 간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이미 언어의 기능방식에 관해 말한 것처럼, 일차적으로 실체는 여성들, 어머니들에 의해 주어진다. 남성은 이 실체에 표시를 하고 자신의 흔적들을 새겨넣고 재단하며, 기호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 실체를 용해시킨다. 하지만 그 다음 그는 이 기호들은 일의적(一義的)인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라고 주장한다. 예전에 존재했던 양의성(兩義性, équivocité)은 반드시 기호 내지는 합급(合金) 내의 전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안티고네 자신은 양의적인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녀는 이미 단 하나의 [젠더] 쪽으로 끌려가고 있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두번째의 토양, 곧 젠더와 무관한다고 하는 의미의 실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들은 이 실체를 하늘을 향해,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기호들의 원천인 그들의 하늘을 향해 거의 동어반복적으로 열어 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타자, 여성의 개입을 금지하지만, 또한 그들은 여성을 성스러운 것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경외한다. 남성은 언어의 실체 내에서 여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닫아걸으면서, 이 실체에 대해 말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실체로 머물러 있되,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도록 요구한다.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들,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말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여성에게는 생명의 집을 지키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그는 여성의 과업은 죽은 [남]자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는 어머니로서, 모체로서, (살아 있는 [영혼의] 보호막-무덤인) 신체로서, 영양 공급원으로서의 여성이 필요하다. 외관상으로는 그에게는 어머니이자 성처녀로서의 여성만이 필요하고 때로는 아주 애매한 방식으로 누이도 필요한 것 같지만, 여성으로서, 다른 젠더로서의 여성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근친상간은 젠더들 사이의 관계라는 물음을 해소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생명체의 산출 안에 또는 그것에 대한 부인(否認, dénégation) 안에 머물러 있으며, 젠더의 물음은 제기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맹목적이다. 정말이지 젠더에 맹목적이다! 내가 보기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근친상간에서] 그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한 여자도 문제된다는 사실에 가장 맹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적 차이에 무지하다. 담론과 주체의 분열, 파트너 없는 그 모순들은 분명히 근친상간의 욕망 및 그 금지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근친상간의 욕망 및 금지는 두 개의 젠더로 분할되어 있는 인간 유의 현실성에 상응하는, 감각적인 것에 대한 관계를 조절하지는 못한다. 근친상간은 의미의 이중적 토양 및, 여전히 항상 우리의 의미로 남아 있는 편파적인partiel 의미의 장벽을 위반하지만, 은폐되어 있는 전쟁polemos인 성적 차이의 물음을 제거하지는 못하며, 이 차이의 가능한 풍요성(수태, fécondité)를 제거하지도 못한다. 근친상간은 언어 및 자연과 작용하지만, 항상 그것들 사이의 분열 내에서, 그것들의 비-동맹 내에서, 그것들의 비-동시적인 생장 내에서 그것들과 작용할 뿐이다. 근친상간은 형태론morphologie은 위반하지만, 이는 수액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수액으로부터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주체가 열매로서 나무에서 떨어진 한에서 또는 나무로부터 분리된 한에서, 이 수액은 아직 또는 더 이상 주체의 수액이 아니다. 이는 아직 또는 더 이상 주체의 뿌리들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성별화된 두 인간을 현재, 현행적으로 현존시키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결함이야말로 인간/남자를 기술적 존재가 되게끔 운명지은 것이 아닐까? 가능한 일이다. 산출적으로, 성별화되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기계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가능한 일이다. 우리 시대는 이를 경향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의 뿌리들을 탈취하고 거기에 기생하는(이는 이 뿌리들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박해하는 것이다) 순간부터, 한 성이 자신의 뿌리들을 상실하고 유한자로서 자신의 생장이 불확실한 상태임에도 불멸적이거나 영성적인 존재로 치켜 세워진 순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우리 문화의 퇴락의 원천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거기까지 나아가 봐야 하리라. 
  따라서 윤리적 죄가 발생한 곳으로 되돌아가, 남성들과 여성들이 복종해온 이러한 이중적 뿌리상실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질문해봐야 한다. 남성들과 여성들이 생장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그 순간은 양자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 이는 근친상간을 젠더에 관한 질문의 해결책 또는 해소책으로서 사고하려는 미혹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설명해준다. 사실 여성은 물질/질료적인 물과 하늘 사이에, 자연적인 대지와 태양 사이에 머물러 있던 데 반해, 남성은 그가 생명체로서 자신의 소명에 충실했던 때에는 우주의 생장의 작업자이자 조직자가 되었다. 하지만 자주 그의 반항과 그의 권력은, 유한자로서 자신의 생성 및 [여성] 젠더에 대한 자신의 빚을 부정하면서 물질/질료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물질[질료]를 탈취하곤 했다. 또는 탈취한다고 믿곤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개의 극 사이에 충분한 분절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인공적이면서 불균형적인, 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를 건립했는데, 이 세계는 중성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남성 자신의 세계이며, 토양 전체를 그 자신과 동화시키려고 하는 세계이다.
 
  최근 우리 시대는 양성성이 젠더들 사이의 분할에 대한 윤리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해왔다. 이러한 해결책은 자주 [여성 젠더에게] 관대한 선택지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묻거니와, 어떻게 다른 젠더를 젠더로서 정의하지 않고서 다른 젠더와 자신을 동일화할 수 있는가? 문제는 단지 하나의 역할을 모방하는 것일 뿐인가? 과업들을 배분하는 것일 뿐인가? 아니면 다른 그밖에 다른 어떤 것일 뿐인가? 그리고 오늘날 어떤 남성이 여러 세기 이래 계속 되어온 여성 젠더의 사회적 운명을 인식하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권력을 기꺼이 포기하려 하겠는가?
  게다가 관념론적 유토피아가 아니라면, 다소간 미혹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mentale 형태들 속에서 형태론을 새롭게 제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우리가 다른 젠더에 우리 자신을 영성적으로spirituellement 완전히 동일화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양성성이 젠더들 사이의 윤리를 위한 도정을 구성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도정이 존재한다면, 이는 성적 차이에서 출발하고 성적 차이에 도달해야 하며, 이를 영성적인 발견과 긍정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양성성이란 환상들 및 사변들에 젖어 있는 퇴락의 유토피아를 그려낼 뿐이며, [우리의] 문화를 생산하는 신체들에게 훨씬 더 이질적인 문화를 생산해낼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도 역시 인민들 중 매우 적은 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유형의 정체성과 사회적 스타일―여기에는 패션 및 패션산업을 수단으로 한 것도 포함된다―을 강제하려는 시도를 본다. 다시 한번 더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의 젠더를, 젠더, 젠더들이라는 질문을 확정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중성적인] 사람들on, 양적인 것, 사이비 중성성의 에너지를 증대시키고 있는 기술적으로 통치되는 우주의 평준화 효과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늘날 직면해 있는 가장 심각한 전쟁일 텐데, 왜냐하면 이 전쟁은 다른 전쟁들과 비교해볼 때 우리에게 어떠한 저항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기 때문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06-0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오역이 하나 발견되어서(-.-;;;;) 하나 지적해 둡니다. 맨 앞에 세 차례에 걸쳐 나오는 "결탁"이라는 단어는 사실은 "충돌"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제가 collision을 collusion으로 잘못 읽었습니다.
벌써 복사하시거나 퍼가신 분들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