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읽기 위해 번역한 이리가레의 글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올린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와 마찬가지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및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글인데,  지난 번 글이 매우 함축적이고 난해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 글은 훨씬 평이하고 명시적인 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번역자에게는(-.-;;) 여간 까다로운 글이 아닙니다. 참고할 만한 다른 외국어본을 갖고 있지 못해서 오역이 적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수정할 생각입니다.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도 두어 군데 수정한 곳이 있는데, 나중에 따로 올릴 생각입니다.

이 글은 원래 글의 전반부에 해당하며, 후반부도 곧 올릴 생각입니다.

 

Luce Irigaray, “Le Genre féminin”, in Sexes et parenté, Minuit, 1987.


여성의 유/여성 젠더

[이 글의 제목에서 “genre”라는 단어는 다양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는 문법에서 명사나 형용사의 “성(性)”을 가리키는 단어이면서 젠더를 의미하기도 하고, “유類”(또는 속(屬). 영어로 하면 genus)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계la machine는 성을 갖고 있지 않다. 자연, 그녀는 항상 성별화되어sexuée 있다. 분명히 기계는 때로는 성을 모방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녀(기계, elle)는, 특히 자신의 도구로서의 지위 때문에 한 성보다는 다른 성의 경제에 더 관련되어 있다apparenté. 기계, 그 생산 활동에서 성이 없거나 하나의 성만을 가지고 있는 기계는 때로는 생명을 보충[“보충”의 원어는 “protège”인데, 불어에서 “protéger”는 어떤 결함을 인공물로 보충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철이나 의족, 의수 등이 이러한 보충의 사례들이다.]하거나 보완한다. 그녀는 생명을 창조하지도 산출하지도 않는다.
  인간 정신은 성들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만큼 이미 너무나 기술의 명령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들 사이의 차이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사람은 때로는 수구주의자, 반동, 순진한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과학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남자들 또는 어떤 여자들은 분명히 수구주의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는 성적으로 차이화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죽어 있는 셈이다. 담론의 성별화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가? 기계, 기계론 및―주체의 제어에서 벗어나는―어떤 에너지로 환원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살아 있는가? 우리는 생명, 형상, 정신을 산출하고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아직 충분히 살아 있는가? 생명체로 남기 위해, 우리 자신을 생명체로서 재산출할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는 성적 차이가 필요하다.
  이러한 차이는 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적 모순이다. 서툴게나마 위치시킬 수 있는 상호보완성도 없고, 획득된 객관적 위치도 없고, 대상도 모습도 없는 [차이이므로]. 성들 사이에는 분명 생리학적, 형태론적morphologique 상호보완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호보완성은 증식에 도움이 되도록 자리잡아야s'habiter 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성/되기에서는 주체적인 성적 차이는 존재했던 적이 없다. 이는 특히 사유 속에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기회다.
  우리는 다른 환경으로 넘어가는 중에 있는데, 이 환경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연적 여건milieu이 된다. 기술의 여건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정상적인 환경으로 부과되는 것이다. 땅과 태양, 식물, 물, 공기가 존재하던 곳에 이제 콘크리트, 전기, 실내 공기 조절 장치, 기차, 비행기, 기차역, 주유소 등이 존재한다 ... 이처럼 보고, 들이마시고, 만지고, 맛보는 데서 [이전과] 차이가 존재하는 것 이외에도, 또한 소음bruit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 소음은 시계의 초침에 따라 규칙적으로 표시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음악가들은 소음에 리듬을 부여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지만, 이 소음은 더 이상, 예컨대 계절이나 풍경에 따라 규칙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므로 제멋대로 발생하는 셈이다. 기계의 소음은 일년의 절기나 지역 또는 세계 각 나라에 따라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정도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는 항상 거의 동일하다. 여기에서 지각 능력의 쇠퇴가 생겨나는 것일까? 오늘날 교대로 일어나는 것은 소음 또는 그것이 정지할 때 나타나는 정적이다. 하지만 정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교대는 인공적이고 거칠다. 참된 교대는 기계의 소음과 자연의 소음bruit[자연의 경우에는 “bruit”를 “소리”로 이해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하지만 기계나 자연 모두 똑같은 “bruit”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존중하여 모두 “소음”이라고 번역했다.] 사이에 존재한다. 자연의 소음에는 리듬이 담겨 있다. 게다가 이 소음은 리듬의 차이들을 존중한다. 이 소음은 형상을 부여한다informe. 이 소음은 항상, 그리고 여전히 최초로 일어나는 소음이다. 이 소음은 또한 항상 젖어 있다. 곧 상처를 주지 않고 접촉할 수 있다[“이 소음은 또한 항상 젖어 있다. 곧 상처를 주지 않고 접촉할 수 있다”의 원문은 “Il est aussi toujours humide, c'est-à-dire capable de toucher sans blesser”이다. “humide”는 “축축한”, “습도가 높은” 등의 의미를 갖고 있고, “toucher”는 “접촉하다”, “만지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또한 “타격을 가하다”, “상처를 주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계의 소음은 항상 동일하다. 이는 그것의 실효성의 조건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음은 반복하도록 기능한다. 기계는 반복적일 경우에만 신뢰할 수 있다. 반복되지 않을 때 기계는 손상되고 고장난 게 된다. 자연, 그녀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생성한다. 비록 자연의 주기들 내에 유사성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녀는 결코 동일하게 반복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뿌리들 및 자신의 꽃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하고 생성한다. 그녀는 소리son 및 모든 감각들을 통해 그치지 않고 형상을 부여한다.
  자연은, 항상 도처에서 성별화되어 있다. 우주적 질서cosmique에 충실한 모든 전통은 성별화되어 있으며, 자연의 역량/잠재력들을 성별화된 항들에 따라 고려한다. 자연의 역량/잠재력들 역시 교대에 따라 규제되지만, 모순적이지는 않다. 봄은 가을이 아니고 겨울은 여름이 아니며, 밤은 낮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우리의 논리에서 알고 있는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곧 하나가 다른 하나와 대립하거나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고 그리하여 열등한 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증식의 리듬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 두 극은 필수적이다. 겨울은 여름을 파괴하지 않으며, 수액(樹液)이 땅 속으로 들어가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수액이 나무의 꼭대기에서 항상 열매를 맺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게 가능한가? 이는 확실치 않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 반대를 말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교훈을,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peuple des hommes은 잊어버린 듯하다. 이 인민은 정상으로 올라가 거기 머물러 있으려고 하며, 타자, 예컨대 여자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길을 상실한 채 땅 위에 매몰되어 있도록 내버려둔다. 어쨌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과제, 성장하기 위해 자신들의 뿌리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 과제를 잊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항상, 자신들의 최초의 모성의 뿌리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지만, 그들은 문화 안에서 이러한 향수를 살해한다. 또는 직접성[무매개성]을 반박한다(모순화해서 지양한다, contredisent)[“contredire”는 단어의 의미대로 하면 “반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리가레는 여기서 이 단어를 “contradiction”, 곧 “모순”과 관련시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contredire”는 시초에 주어져 있는 직접적인 자료(여기에서는 모성의 뿌리)를, 모순의 매개를 통해 지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질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꼭대기와 뿌리 사이의 이러한 교대들은 문화의 발흥과 퇴보를 통해,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전쟁, 많은 경우 기술의 확대에서 생각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전쟁은 부정의 부정일 것이다. 이는 감각적 직접성으로의 복귀로 이해될 수 있는가? 감각적인 것을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자신의 정신의 본성으로 육성하는 대신, 남자―좀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이 감각적 직접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이를 자연의 타자에게, 특히 다른 젠더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각에 대한 의무obligation sensible는 사적이고 공[개]적인 삶에서, 사적이고 공[개]적인 전쟁에서 그에게 다시 돌아온다. 공[개]적으로 볼 때 남자는 자신과 같은 젠더하고만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다른 젠더와 비공개적으로 벌이는] 또다른 전쟁은, 마치 이 전쟁이 절대 지식 또는 절대 정신 안에서 이미 해결된 것처럼, 은폐된 채로 비밀스럽게 남아 있다. 이 전쟁이 절대 지식 또는 절대 정신 안에서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완성된 정신 역시 부정의 부정처럼 보인다. 정신의 완성 역시, 부정되었던 것 또는 변증법화되지 못했던 것이 감각 경험 안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것으로서 복귀함을 의미한다. 감각 작용의 절대적 성격은 개념화의 절대자 안에서 복귀하는가? 절대자는 직접적인 것의 다른 이름이다. 적어도 남자에게는 그렇다. 절대자는 지식 안으로 감각적인 것의, 그리고 감각적인 것 안으로 지식의 회고적이며 포괄하는 복귀이다. 절대자는 정신 안에 들어 있는 감각적인 것의 쟁점이고 지평이며 목표이고 가면을 쓴 이행이며, 위상학적 총체성의 형태 아래, 잠재적으로 폐쇄된 우주의 형태 아래 감각적인 것의 복귀이다. 절대자는 또다른 세계, [기술적으로] 제작되고fabriqué, [자연의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세계의 분신(分身, double)을 성취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는 가장 개연성 있는 우주적 리듬과는 반대로 살해하고 탈생명화하는데, 왜냐하면 절대자는 자연으로부터 시간화 과정temporalisation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은 적어도 절대자가 젠더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표시된다. 정신은 자신을 완성하면서 땅 속에 자신의 뿌리를 더 깊이 박아두지 않는다. 정신은 자신의 일차적 뿌리들을 없애버린다. 문화, 역사가 정신의 땅이 되며, 이는 정신이, 인식하는 것의 신체적 규정들déterminations incarnées을 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특정한 문화들이나 종교들이 무어라 예견하든 간에, 죽은 [남]자들은 그 자체로 부활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부활한다면, 이는 절대 정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감각적으로 상이한 세계 안에서 그렇다. 죽은 자들을 땅에 맡기는 것은 여성이다. 만약 그녀가 이러한 윤리적 의무를 아직 박탈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인간 유genre humain라고 불리는 남성이라는 유/남성 젠더는 자신의 타자와 유희하지만, 타자와 짝을 맺지는 않으며, 타자의 젠더를 망각함으로써, 이 젠더의 뿌리를 파괴함으로써 [타자와의 관계를] 끝맺는다. 아마도 그는 타자와 만나느니, 스스로를 변질시키려고 할 것이다. 스스로를 변질시키고 고통받고 죽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그와 그의 모든 화신들avatars은 가능하겠지만, 타자는 그렇지 못하다. 왜? 절대자를 원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것의 노동을 작동시키기 위해 직접적/무매개적 대자성을 포기하는 것이 함축하는 욕구불만과 결핍, 절제를 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주체, 한 유[젠더]의 절대 지식은 부정적인 것의 노동이 완수되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육화된, 성별화된 신은 무엇보다도 부정적인 것의 노동을 수락하는 것, 자기 자신을 신성화하기 위해, 완전성을 얻기 위해 신체를 얻어야 하는 필연성을 가리킨다. 한 쌍으로 된 신은 이를 좀더 변증법으로 말하지 않을까? 또는 말하게 되지 않을까? 어떤 신도 자신의 젠더 안에서 또는 이 젠더를 통해서는 절대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각각의 신은 일시적으로나마 젠더들 사이의 항상적인 접합으로, 성적 차이로 표상되는 생명체의 두 가지 모습 또는 구현incarnations 사이의 변증법으로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 뿐이다.     


***

  여성들의 해방, 상이한 정체성에 대한 긍정을 둘러싼 질문들은, 자주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윤리적 비극이 지니고 있는 광범위한 쟁점들을 회피하곤 한다. 헤겔은 이 쟁점들을 감지했으며, 인륜적 질서는, 특히 인간의 법과 신의 법, 각자 남성과 여성의 의무(이자 운명?)로 귀속되는 두 법 사이의 해소할 수 없는 대립에 의해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리라고 예견했다, 또는 진단했다. 이처럼 제시된 [남성과 여성의] 과업들―여기에는 가족과 생명체, 신들을 보호하는 일이 포함된다―의 배분은 이미 신적인 것이 남성 젠더에 속하고 여성 젠더에서 제거된 세계에서는 낯설게 보인다. 두 젠더의 정신적 의무 사이에서 성취되는 변증법 대신에 헤겔은 우리에게 이중의 책략을 지닌 감금[“이중의 책략을 지닌 감금”의 원어는 “enfermement à double tour”이다. 이는 또한 “이중의 망루로 이루어진 감옥”, “이중의 여정으로 이루어진 폐쇄”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을 제시한다. 이로부터 헤겔 체계의 위력이 나오며, 내가 보기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이를 풀어내지 못했다.
  왜 이 체계는, 적어도 이중의 책략/이중의 망루에 따라 닫혀 있는가? 왜냐하면 여성이 자연과 유[젠더]를 주재하는 한에서, 여성이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 중 죽은 [남]자들에 대한 제례를 존중하는 한에서, 여성은 신의 법과 함께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안티고네에 의해 완성된 법의 행사는 이미 남성적 보편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안티고네는 더 이상 빛과 화덕, 자신의 신들 및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여성이 아니라, 두 오빠가 논란을 벌이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빚어진 가족의 파괴에 일시적으로 대처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이미 남성들의 신, 남성들의 파토스에 봉사하고 있다. 그녀는 죽은 [남]자들의 신을 달래고 살아있는 [남]자들로부터 범행의 흔적을 씻어내기 위해 범행을 사죄하고 죄를 없애려고 시도한다. 이미 문제는 여성 젠더에 속하는 한에서의 그녀의 과업이 아니다. 국가의 권력 및, 희생 위에 수립된 인간의 권리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국가가 [죽은 [남]자들로 하여금] 흘리게 만든 피를 없애려고 안티고네가 시도하는 이상, 그녀는 이미 국가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le féminin은 이미 더 이상 자신의 젠더, 자신의 변증법에 봉사하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남성 지시대명사][“여성[이라는 남성 지시대명사]”는 “il”의 번역이다. 불어에서 “il”은 남성 지시대명사를 가리키고 “elle”은 여성 지시대명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불어에서 여성에 해당하는 “le féminin”은 남성 정관사 “le”가 붙는 남성 명사이다. 이 문장에서 이리가레는 “le féminin”을 받는 남성 지시대명사 “il”을 사용함으로써, 안티고네가 남성적인 권력에 봉사하고 있음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il”을 “여성[이라는 남성적 지시대명사]”으로 번역했다.]은 신의 법, 자연의 법, 생명으로부터 남성적인 인간의 법으로의 이행 속에 감싸여 있고 말려 있다[“감싸여 있고 말려 있다”의 원어는 “enroulé, roulé”이다. “rouler”이라는 동사는 “말다”, “구르다” 등을 의미하며, 구어로는 “말려들다”, “속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런 이중적 의미가 모두 표현되고 있다.]. 안티고네는 이미, 동일자의 타자를 대표하는 여자, 대표하는 [남]자이다[이 문장의 원문은 “Antigone est déjà la représentante, le représentant, de l'autre du même”이다. 이 중에서 “le représentant”은 “대표자”라는 뜻을 가진 남성 명사이며, “la représentante”는 이것의 여성형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이리가레는 같은 뜻을 가진 명사를 성만 바꿔 두 번 사용함으로써, 안티고네의 행위의 남성적 성격을 표현하려 하고 있다. 곧 안티고네는 남성이라는 동일한 젠더의 질서 내에서 표현된, 또는 이 질서 안으로 이미 포섭되어 있는 여성적인 타자라는 의미이다. “동일자의 타자”란 이를 가리킨다.]. 화덕(가정, foyer)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과업에 충실하고, 화덕의 불꽃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는 그녀는, 남성적 질서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전진하도록 해주는 일과 연결되어 있는, 화덕의 어두운 쪽만 담당하고 있다. 범행을 사죄함으로써 안티고네는 자신의 과업, 윤리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 관계, 자신의 신들에 대한 봉사를 더 이상 지키지 않고 있다. 여성 젠더의 독특성은,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적 신들 및 남자들 사이의 전쟁에 대한―모성적?―충실성[헌신]에 굴복하고 있는 이 인물에서 상실되어 버린다. 안티고네는 더 이상 여신이 아니다. 그녀는 남자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신들에 충실하며, 이 신들 때문에 죽는다. 하나의 [여성적인] 과업une tache을 다시 말소하기 위해. 어떤 과업? 근본적으로는 여성의 의식(양심, conscience)이라는 과업, 여성 젠더에 소속되는 과업, 자신의 모성적 혈통filiation이라는 과업이다. 여성 젠더에 대한 이중적으로 은밀한 이러한 소속에서 박탈당한 안티고네는 또한 남성의 잃어버린 뿌리들에 대한 충실성[헌신성]이라는 점에서도 소멸되어 버렸다.
  개념의 분열은 동일자 내부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개념 안에서 분열은 여성 개념과 남성 개념의 분열로 남는다[이 때 여성과 남성은 언어학적인 의미의 여성과 남성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 언어는 이러한 분열을 전도시키는 경향이 있다. 언어는 [분열의] 표시marque를 여성에게 유보시키고, 남성은 이러한 표시 아래에 있는 언어의 질료, 언어의 친숙한 실체로, 그리고 표시 위에서는 절대 정신으로 또는 신으로 존재하게 한다. [남성적 변증법 안에서] 남성은 [여성을] 포함하는 기체(基體, substrat), 여성[의 존재]을 보증해주는 원천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 발생한다. 곧 여성은 원천, 기체, 포함하는 것(용기, l'englobant)으로 남고, 남성은 (음성학적, 음운론적, 언어학적인 본성[자연]을 포함하는) 자연 및 자연으로서의 여성적 젠더에 대해 알지 못하는 표시이다. 하지만 전자는 표시, 부적절한 가면, 타자가 덮어씌운 겉치장으로 환원되고, 후자는 질료, 주체(기체, sujet), 포괄하는 절대자가 된다고 가정되어 있다. 언어는 변증법이 기술하는 것을 전도시키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원환은 이러한 전도, 비변증법적이지만, 담론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전도에 의해 닫혀진다. 언어는 보편자의 도구이다. 언어[라는 여성명사]는 하지만 보편자가 아니다. 자연과 결부된 모든 것은 직접적으로/무매개적으로immédiatement 보편적이다. 분절articulation을 경유하는 것은 매개적으로만 보편적이다. 이러한 보편자는 가족의 정신, 성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들 중 하나로 삼고 있다. 보편적 도구는 시민들이 가족의 독특성의 시각에 대해, 가족의 법들 및 그것의 필연적인 성적 차이의 시각에 대해 중립적/중성적이기를 원한다. 성들 사이의 평등에 대한 옹호는 많은 경우 국가 및 국법들의 이익을 위해 가족 및 성적 독특성을 중성화하려는 기획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는 결국 기술로 귀착되는 우리 시대의 유물론적 전복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법들은 공개적으로 여성을 희생시켰으며, 보이지 않게 남성을 희생시켰다.
  가족의 목표는 독특한 사람, 개인이지만, 이는 우연적인 개인이 아니라 더 이상 가족에 속하지 않게 될 미래의 시민이다. 가족, 젠더, 성욕sexualité의 목표는 보편자로서의 개인이며, 다이몬, 영혼 또는 개인은 우연적인 것들로서 부정된다. 비우연적인 이 개인은 전통적으로 여성, 유/젠더의 보호자에게 귀착된다. 여성들을 어떤 [남성적] 전체의 부분들([여성] 하나 +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불어에서 “un”은 남성 부정관사이고, “une”은 여성 부정관사다. 따라서 “un tout”는 “남성적 전체”이고, “une + une + une ...”은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가 된다.]로 정의하는 이론적 또는 실천적 사실은 여성들 각자의 고유한 젠더, 그들의 개인성에게 보편적 소명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성들은 보편적 독특성/전칭 단수le singulier universel에 상응한다. 자신들의 개인성 안에서 여성들은 가장 독특한 것과 가장 보편적인 것을 결합한다. 여성들의 정체성은 자연과 정신의 체계적인 비-분열 안에서, 자연과 정신이라는 이 두 가지 보편자들의 수정/재결합retouche[불어에서 “retouche”는 “수정”, “가필”을 뜻하지만, 단어를 분철하면 “re-touche”, 곧 “다시 접촉함”, “다시 결합함”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안에서 성립한다. 여성은 온전하고 보편적이며, 너무나 온전할 정도로 보편적이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도 사물들의 질서를 전도시켜 왔다. 이는 우리의 문화에서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 낯설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여성들은 [남성적] 인간들hommes이라기보다는 다이몬, 비우연적인 개체들이다. 또는 그렇게 머물러 있다. 단지 어머니만이 아니라 이미 여성도 문제가 된다. 여성에게 바쳐질 숭배는 우리의 문명에서는―처녀성에 대한 자주 잘못 해석되어온 숭배를 제외한다면―반드시 다이몬, 곧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서, 근원적으로 분열되지 않은 자연과 정신으로서의 여성 자신인 다이몬에 대한 숭배인 것은 아니며, 드물게조차 이런 숭배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분명 헤겔에 따르면 죽은 [남]자는 마침내 평화를 발견한 자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지 않고 계속적인 투쟁 상태에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또다른 평화, 식물적인 생명력의 성장이라는 평화를 얻게 될 수도 있다. 더욱이 헤겔의 체계 전체는 몇 가지 오류나 근거 없는 논변들을 제외한다면, 이러한 평화와 유사하다. 그의 철학의 일반 모델은 은밀하게 식물적인 모델이 아닌가? 하지만 체계의 내부에서 이 체계의 의식적 전개의 질서를 따를 경우, 독특성에서 벗어남은 죽음의 질서, 죽은 [남]자의 질서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념 또는 신념은 신체와 정신의 분열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분열은 여성이 국가에 희생될 때, 남성이 시민성 및 젠더의 관점에서 보면 중성화되어 있는 문화에 진입할 때 작동하게 된다. 사실 독특성의 지양은 성장에 대한 복종에 의해, 자연적인 보편적 리듬에 대한 귀속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 이러한 귀속은 심지어 독특한 죽음보다 더 보편적이다. 분명히 자연의 보편성은 복합적이지만, 자연은 끊임없이 완성되고 생성 중인, 완성되고 열려 있는 모습이며, 자신의 완성 속에서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가족에 빚진 게 없으므로, 생명에 대한 성별화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므로, 직접적/무매개적으로 생성된 자연의 존재는 죽음이다. 자연에 빚진 게 없으므로, 자연에 대한 복귀는 죽음의 질서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곧 자연적이고 가족적이며 여성적인―또는 원한다면, 한밤중의nocturne―정신의 희생은 뿌리내린 존재enracinement의 밤을 개념의 시대의 맹목으로 대체했다. 의식의 대자를 소멸시킨 다음, 남자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감각적인 것의 즉자, 감각적인 것이 즉자대자로 생성하는 것을 파괴한다. 이러한 파괴는 정신의 내용을 파괴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축소시킨다. 감각적인 것 그 자체는 정신의 생성에서 거의 사고되지 않고, 사고된다 하더라도 정신의 파토스[“파토스pathos”는 “passion”과 마찬가지로 “정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수동”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후자의 경우 “정신의 파토스”는 정신이 완전히 개념화해서 포섭할 수 없으며, 사고활동을 위해 정신이 항상 의존하고 복귀해야 하는, 개념의 타자, 사고의 원천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가 아니라 정신의 질료 내지는 실체로서의 감각 지각으로 사고되는 것 같다. 만약 분명하게 선언되고 벌어진 전쟁이 인민을 파괴한다면, 이 전쟁은 또한 의식이 정신의 가능한 내용으로서 감각적인 것의 파괴로 이끄는 좀더 은밀한 전쟁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이는 소음이 우리의 신체 균형에 미치는 충격에 의식이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의식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과거나 미래의 전쟁은 의식이 생명의 자양분이자 생명을 위한 피신처로서의 자연의 파괴에 직면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의식의 주의를 분산시킬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은밀한 파괴는 전쟁을 초래하거나 아니면 전쟁과 맹목적 폭력, 물자부족을 조장할 것이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결백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의 명석한 부분을 대표하기(또는 대표할 것이라고 가정되어 있기?[“대표할 것이라고 가정되어 있기?”의 원어는 “représentrait?”이며, 이는 “représenter”라는 동사의 조건법(영어로는 가정법) 형태이다. 이런 의미를 고려해서 “이라고 가정되어 있기”라는 말을 추가했다.])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쪽을 억압한다. 웃으면서, 공손하게 의무에 따라 남자들은 상처를 입히거나 죽인다. 그들은 악에 대해 무의식적이다. 적어도 자신들이 문화를 완결하는 데 도구로 삼았던 절대적 의식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악을 영속시키는 순간에, 그들은 악에 대해 무의식적이다. 하지만 무의식에게 모든 권리를 부여하고, 모든 면죄부를 부여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나는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의 답변, 정신분석학의 입장도 포함하는 나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세계 전체/모든 사람들tout le monde[불어에서 “tout le monde”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숙어이지만, 말 그대로 하면 “세계 전체”라는 뜻이다.]는 코드화된 언어 현상인 무의식에서 동일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무의식은, 부분적으로는 남성에 의해 다른 젠더 및 자신의 젠더의 그림자, 이 양자가 무의식 안으로 감금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범죄이기도 한 이 밤의 파토스에 대한 권리를 왜 무의식에게 부여하는가? 다른 젠더가 우리 문화의 경제 안에서 동일한 행동의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데, 왜 그렇게 하는가? 여러 세기 동안 세계의 [여성적] 일부une partie는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타자에 대해 범죄적이었다. 이는 이 일부분이 세계의 다른 절반의 윤리적 법칙을 깨뜨리거나 침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여러 세기 동안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윤리적 의식을 점거/탈취하고서s'empare, 윤리적 의식을 절대적으로 밝혀낼 수 있고, 그것의 진리, 모든 진리를 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여러 세기 동안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인간의 유[젠더]를 그 유의 파토스와 혼동해왔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여정은 우리 문화에서 정신의 이러한 생성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두 개의 유로서 실제로 인지하는 대신, 다른 젠더에서 유래하는 통찰―즉자적이고 대자적인 통찰―을 받아들이는 대신,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자신들이 모든 진리를 지니고 있고 전체에 관해 입법할 수 있는 권리(철학, 법, 정치, 종교, 과학 ...)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기 의식은 행위하자마자 유죄라는 사실, 그것은 분명히 그렇다. 그것은 특히 유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행위를 규정하고, 다른 젠더를 자신의 그림자 안에다 놓아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의 양가성을 부정하면서 또는 다른 젠더를 이러한 양가성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단순성을 주장하고 본질이 존재하는 그대로 자신에게 발현된다고―하지만 이러한 발현은 사실은 자기 의식이 어떤 대자 안에서 자기로 복귀하는 것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주장할 때, 자기 의식은 유죄이다. 게다가 종교적 계시révélation의 내용은, 이러한 계시를 종결/폐쇄시켜야clôture 할 필연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젠더는 자신에게 어떤 신, 아버지 신, 아들 신, 성령 신을 필연적으로 부여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해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계시에 대해 어떤 것도 덧붙여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 역시 증거해준다. 여성에게는 보호하는 게 범죄였던 반면에, 남성에게는 덧붙이는 게 범죄가 될 것이다. 그녀는 보호할 수 없는 반면, 그는 [덧붙이지 않고] 오직sans plus 보호[보전]해야 한다. 의무는 항상 동일하며, 심지어 언어 안에서도 그러하다. 실체 및 첫 번째 토포스topos[“토포스”는 희랍어로 “장소”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질료”라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된 것 같다. 곧 존재자들이 형성되기 위한 원초적 기반, 모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여성인 반면, 육화[신체화]되고 발현된 기호는 남성이며, 어떤 것도 이러한 구분을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러한 구분은 닫혀 있어야 한다. 여성이 덧붙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종결/폐쇄는 언어의 불가침성으로서 진리의 계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가?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정신에 대한 관점에 따를 경우, 이는 궁극적으로 최초의 운동자le premier moteur와 제일 질료la matière première[“최초의 운동자”는 순수 능동성을, “제일 질료”는 순수 수동성을 함축한다. 게다가 전자는 남성 명사이고 후자는 여성 명사이다.]가 서로, 신과 여성이 서로 접촉 불가능하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것인가?
  하지만 남성-신은 남성 젠더의 언어와 마찬가지로comme la langue du genre masculin, 여성으로부터, 있는 그대로 훼손되지 않고 찬양받는 어떤 질료―이 질료가 다양한 장식들로 치장되기는 하지만―로부터 탄생했다. 둘 사이에서 인간/남자가 성립한다. 만약 인간/남자가 자신의 그림자들과 빛들 사이에서, 자신의 밤들과 밝음들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면, 여성은 아무런 표시도 지니지 않은 제일 질료와 남성이 이 제일 질료를 치장하고 가리는 기호들 내지는 표장들 사이에서, 남성 및 그의 세계에 의해 분할되어 있다. 여성은 결코 자신을 재통합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이러한 재통합은 아직도 도래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재통합은 아마도 기원에서는 발생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 또는 여러 여성들의 입술들/음순들 사이에서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탄트라 문화를 비롯한 몇몇 문화들이 이를 증거해준다. 히브리 문화, 적어도 카발라는 입술들을 전도된 이중의 yod[ “yod”는 히브리어의 10번째 알파벳 문자이다.], 전도된 이중의 언어로 표시한다. 기독교의 경우는 예수의 어머니에게서 침묵의 기호의 중요성을 통해, 그녀의 처녀성이 지닌 신성한 성격을 말하고 있으며, 입술들을 결합함/닫음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침묵 이외에, 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문자는 m이다. 이 자음은 다른 모든 자음의 기원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하면서 또한 가장 모호한 자음이다. 이러한 m의 음성은 인도 문화에 따를 경우, 특히 aum이라는 신성한 음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발현되지 않은 것[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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