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의 지나친 전문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삶과 학문을 결별시켜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왔다. 엘리트주의는 학문을 자율적인 영역으로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고 요긴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부에서 아무리 활발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듯한 ‘효과’를 내더라도, 현실의 제도와 삶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힘이 없다면 그 기득권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자율성의 함정’이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이른바 ‘지식의 대중화’가 목소리를 높여온 것은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이고 그것이 일각에서 ‘대세’로 인식되고 움직이면서 하나의 지류를 형성한 것은 2000년 이후다.
‘보편적 청중’ 확보해 학문위기 타파
지식대중화를 말할 때 지배적인 心象으로 떠올리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다. 대중적 글쓰기는 어려운 전문용어와 한자, 논리의 구조물을 해체해서 우리말 속에 생각이 잘 용해된 쉬운 글, 독특한 예시와 문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쓰기를 의미한다. 이 대중적 글쓰기의 순기능은 학계의 전문지식과 대중의 접촉포인트를 대폭 늘려 학문적 성찰성과 깊이있는 지식의 토대 위에 우리의 삶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데 있고, 또한 철학·한문학 등 고사직전에 처한 순수학문의 위상을 되살려낸다는 데 있다.
이런 실용적인 측면 말고도 ‘대중적 글쓰기’가 원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중대한 기능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학문을 하는 목적이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근대적 학문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특수한 보편성’이라는 형용모순에 기초해 있어, 횡단성과 1인2역이 중요시되는 오늘날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분과학문이 자신이 근거한 특수영역을 넘어설 때는 매우 ‘기형적인 것’ 아니면 ‘유아적인 것’이 돼버린다는 것에 대한 자각인 셈인데, 따라서 대상을 궁리하는 일 자체가 ‘보편적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진행될 때에만 통언어적인 학문이 가능하다는 게 ‘대중적 글쓰기’의 실천개념에 들어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지식 대중화’의 다양한 실천들은 ‘교양서적’의 범람에서 그 존재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일단 양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에서 학계의 엄숙주의, 전문가주의, 논문 중심주의를 경계하는 균형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오늘날 지식대중화 현상이 과연 앞에서 언급한 실용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호에 가려 보이지 않는 허점과 이데올로기가 많은 것 같고, ‘대중’이라는 마술에 기대는 정도에 따라 리스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생긴다.
지식의 대중화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는 매우 묵직한 과정이다. 그것은 생각하기와 말하기의 관행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이 고도의 추상화 작업으로 철학성과 깊이를 획득한다면, 반대로 ‘고도의 구상화 작업’으로 그 구체성의 세계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대중화에 이런 ‘구상화’가 담보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그 작업이 주제나 사유 차원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소재나 관점, 글쓰기 차원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미시사’와 ‘생활사’의 열풍이 그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고도의 구상화’ 없는 글쓰기의 迷夢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을 수용하면서 2년 전부터 본격적인 미시사 적용서들이 선보였는데, 백승종 서강대 교수(한국사)의 ‘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 刊),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돌베개 刊)는 ‘개인’을 통해 역사전체를 새롭게 보려는 획기적인 시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곧 비판에 부딪쳤다. 한 개인의 삶과 철학이 시대와 맺는 관련성 및 시대의 지형도를 새롭게 볼만한 요소를 내포하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그의 작업은 일정한 의미망을 형성했다. 전자는 이찬갑이라는 평민지식인의 ‘일기’를 따라읽었고, 후자는 사상가인 하서 김인후와의 가상대담을 통해 그의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소재와 관점, 글쓰기 방법론이 독특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선비의 생활사를 다룬 책은 정창권 고려대 강사(국문학)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사계절 刊), 허경진 연세대 교수(국문학)의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푸른역사 刊)등이 있지만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물론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刊)이나 고미숙 씨의 ‘열하일기, 그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그린비 刊)처럼 각각 5만부, 2만5천부의 판매고를 올린 경우도 없지 않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불황과 관계없이 콘텐츠만 확실하면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사례”라며 치켜올린다. 유재건 그린비 대표도 “과거의 마이너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고, 기존의 메이저들이 차지한 영역을 침투해 새로운 중심을 세울 것이다”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런 확신들은 앞의 책들이 기존에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와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신선한 시도”라는 데서 생겨나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글쓰기나 소재나 관점에서 뭔가 새로운 걸 끌어들이는 게 요즘 ‘대중적 글쓰기’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독자의 ‘인식’을 바꿔놓을 정도의 새로운 역사상이나 철학적 전언은 없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것이 아니라, 헌 술을 냉장고에 넣었다가 내놓는 격이라 첫맛은 시원하지만 끝 맛은 더욱 야릇하고 찝찝할 때가 많다.
문학평론가 김인호 씨는 “펼쳐 보다가 10쪽도 못읽고 덮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라는 개인체험을 전한다. 그는 “예전에는 10만부 판매를 너끈히 기록했을 책들이 요즘은 만부에 그치고 있다는 건 근래 책들이 대동소이한 소재와 문체, 고만고만한 이야기들로만 승부하려는 유행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현식 인천대 강사(국문학)도 비슷한 생각이다. “고미숙 씨의 옛날 책들은 지적 자극을 던져주는 책이었지만, ‘열하일기…’는 그분이 쓴 책인가 싶을 정도로 실망한 게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현재 광범위하게 동의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미시역사서를 둘러싼 출판계의 자화자찬은 ‘비판적 검증’을 겪지 않은 ‘시장판매’에 따른 추후적 해석과 자의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불만을 가지고 계속 ‘대중적 글쓰기’를 추궁하다 보면 지적 쏠림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사회의 독서가 비평적 잣대를 상실한 주류언론이 조성하는 지적 경향을 좇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는 언론과 출판사 그리고 아카데미를 답답해하는 학자들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가 띄운 ‘읽을거리’가 ‘대중적 글쓰기’ 자체로 포장되다보니 본질이 가려지는 것이다.
지식대중화, ‘비판적 중계자’로 거듭나야
‘재야’라는 것의 이데올로기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의 재야는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강한 반감을 토양으로 성장해왔다. 이덕일, 이희근, 남경태를 거쳐서 최근의 강명관, 백승종, 김현식 등으로 이어지는 재야의 반열들은 기존 학계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해왔다. 예를 들어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刊)에서 조명되는 송시열은 예학의 선봉장이 아니라 숙청의 칼을 허리에 찬 당파의 냉혹한 우두머리로 조명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존학계의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이 비판대상자와의 최소한의 담론적 교집합 위에도 서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설령 송시열과 관련된 재야의 지적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담론의 교집합 속에서 반대담론과의 부딪힘과 융합없이, 순전히 바깥에서 담 안쪽을 향해 욕하는 식으로 비판이 이뤄져서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송시열이라는 역사인물의 복합성이라는 주제 자체의 속성을 가지고 따져볼 때도 그렇다. 이런 진정성 획득의 실패는 주제를 다루는 배타성과 편협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의 ‘말초적 대중영합주의’의 산물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에 오면 상황이 더하다. 최근 역사학계의 ‘대중적 쓰기’는 이런 최소한의 비판적 역할마저도 팽개치고 있다. 이는 학계와 독서계를 연결해주는 ‘중간필자’ 지식인이 전반적으로 놓여있는 상황을 점검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중계자’의 역할, ‘앵커’가 되지 못하고 쉽게 풀어주는 ‘아나운서’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가장 눈에 걸린다. 견고한 것을 소프트하게 바꾸는 역할로 제한된다는 것은 학계의 역량을 量化시키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맛깔스럽다는 것은 글쓰기의 한 특성으로 국한돼야지, 그것이 책의 전체를 저울질하는 기준으로 적용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쉽다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이 분명하다. 그 이데올로기는 ‘전문성’의 이데올로기에 비해서는 인간적이지만, 그 부작용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대중적 글쓰기의 한계는 명백하다. 그것은 내용의 상한선을 명백하게 긋고 시작함으로써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이다. 쉬워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너무 깊게 들어갈 필요가 없고 예시를 많이 들어서 설명하자는 계율은 마치 허들경기와도 같이 정형화된 힘겨운 몸짓을 생산해낸다.
‘쉽게 쓰기’가 일말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까닭은 글쓰기의 권력이동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은 글쓰기의 주체가 지식인에서 대중에게로 이동된 시기다. 이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권위를 갖지 못하는 시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의 대중적 글쓰기는 일종의 패러다임 변환에 종속되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의 감수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주류가 되기 위한 선택인데, 이렇게 볼 때 대중적 글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정교한 자기성찰성을 기반으로 해서 생산된 흐름이라기보다는 외재적 환경에 의해 주어진 수동태인 것이다. 이런 대중적 글쓰기에 내재된 수동성에 주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쉽사리 ‘타협적이고 패턴화된 글쓰기’로 정형화될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요즘 학계의 인기저자들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피로감’도 이런 구조적 변수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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