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난 김에 [법의 힘] 역자 해제를 올립니다. 아직 마지막 최종교정이 한번 남아있어서 완성된 글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내용상의 큰 수정이 없을 것 같으니까 실질적인 최종본이라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원래 준비하던 글은 좀 분량이 많은 글이었는데,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이 글로 대체하게 됐습니다. 원래 해제에 넣으려고 생각했던 글은 독립된 논문의 형태로 발표를 할 생각인데, 글이 완성되면 여기에도 한번 올려서 좋은 논평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법의 힘』 역자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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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을 완역하고, 이와 관련된 두 편의 글을 부록으로 함께 묶은 것이다. 부록 중 하나는 데리다가 『법의 힘』 2부에서 다루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이고, 다른 하나는 데리다가 1976년에 버지니아 대학에서 강연했던 [독립선언들]이라는 글이다(이 글들의 출전은 각각의 글머리에 표시해 두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이전에 이성원 교수에 의해 [폭력의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는데(『외국문학』, 1986년 겨울호), 데리다가 이 책에서 이 글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다가 새롭게 번역,소개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 번역해서 수록했다. 그리고 [독립선언들]은 『법의 힘』의 논의를 보완하는 의미도 있을 뿐 아니라, 짧은 글이긴 하지만 정치철학에 관한 데리다의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글 중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되어 함께 수록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글을 국내에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 ).   
        데리다의 『법의 힘』은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책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책에 속한다. 실제로 『법의 힘』은 『기록학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1967)나 『기록과 차이L'écriture et la différence』(1967), 『철학의 여백Marges de la philosophie』(1972)이나 『조종Glas』(1974), 또는 최근의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1993) 같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에 못지 않을 만큼 철학이나 인문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르도조 법학지Cardozo Law Review』가 이 책에 관해 두 차례의 특집호를 낸 것이라든가, 영미권은 물론이거니와 독일어권에서도 이 책에 관한 연구서 및 논문들이 수없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로 이는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우정의 정치들Politiques de l'amitié』(1994) 같은 저작들과 내용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저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또는 전에 외국어 판본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량도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살펴봐도 이 책이 왜 그렇게 높게 평가되고 많이 논의되는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대할 때 받는 인상 중 하나는 이 책을 이루고 있는 두 부분 사이의 기묘한 비대칭성이다. 1부에서 데리다는 다분히 수사학적인 어법을 동원하여 해체가 정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하면서, 몽테뉴와 파스칼의 단편, 그리고 “정의, 곧 타인과의 관계”라는 레비나스의 명제를 원용하여 법(따라서 정치 일반)에 함축되어 있는 수행적 아포리아를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1부는 상대적으로 많은 논의들을 담고 있음에도, 이것들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해명하기보다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그 문제들에 담긴 함의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어서 독자들은 좀 산만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반면 2부에서는 오히려 ‘고전적인’ 해체적 독법에 따라 발터 벤야민의 논문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해 매우 상세하고 치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1부를 읽으면서 여기서 제기된 쟁점들이 2부에서 좀더 분명하게 해명되기를 기대한 독자들은 2부에서 전개되는 벤야민에 관한 상세한 해체적 논의가 다소 의아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이 책의 명성을 소문으로 들어온 독자들로서는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하지만 이러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높게 평가받는 데는 몇가지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이 책의 중요성은 바로 그 시의성(時宜性), 또는 데리다가 자주 쓰는 표현을 사용하면 ‘때맞지 않음intempestif’으로서의 시의성에 있다. 데리다가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강연이 발표된 시기는 1989-1990년이었는데, 이 때는 이 책과 관련하여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먼저 이 시기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하던 시기, 곧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으로 규정되는 20세기가 종언을 고하고, 따라서 정치적 근대성(전체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일부)이 해체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때는 법과 정치에 관한 기존의 사고들의 한계를 검토하고 새로운 문제 설정의 모색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다.
         더 나아가 이 시기에는 1987년 빅토르 파리아스Victor Farias의 유명한 『하이데거와 나치즘』[Victor Farias, Heidegger et le nazisme, Verdier, 1987]이 프랑스에서 출간되면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미권 등에서 하이데거의 나치즘 연루에 관해 일대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데리다는 60년대부터 하이데거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을 발표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중요성을 다른 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비해 좀더 강조해왔기 때문에, 자연히 하이데거의 프랑스식 후계자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이 논쟁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데리다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제시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데리다는 파리아스의 책이 출간되던 같은 해에, 하이데거의 저작에 나타나는 ‘정신Geist’ 개념을 실마리 삼아 하이데거 철학의 형이상학적, 정치적 한계를 다루고 있는 『정신에 대하여. 하이데거와 질문De l'esprit. Heidegger et la question』, Galilée, 1987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데리다가 정치에 관한 자신의 독자적인 사고를 제시하고 있는 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정세 속에서 발표된 이 책(또는 이 책의 원형을 이루는 [법의 힘]이라는 논문)은 곧바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때까지 데리다에게 가해졌던 니힐리즘이라든가 공적인 책임 의식 없는 사적 유희라는 식의 비판들을 일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실 본문에서 그 자신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데리다는 1960년대부터 줄곧 프랑스(및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정치적인 문제들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물론 데리다는 자신이 처음부터 이 문제들을 다루어 왔다고 역설하고 있고 또 이는 분명 사실이지만, 『법의 힘』 이전까지 정치적,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데리다의 논의는 부차적이거나 암묵적이고 우회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법의 힘』 이후 정치적,윤리적 문제는 데리다 작업의 중심적인 주제로 부각되었으며,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우정의 정치들』에서부터 최근의 『불량배들』[ Voyous: Deux essais sur la raison, Galilée, 2003. 이 책은 2003년에 국역본이 출간되었지만, 심각한 번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및 『9월 11일이라는 개념』[ Le concept du 11 septembre: Dialogues à New York (octobre-décembre 2001) avec Giovanna Borradori, Galilée, 2004. 이 책은 2003년 영어로 먼저 출간되었는데, 세계무역센터 테러에 관해 하버마스와 함께 대담한 책이라는 점 때문에 출간 이전부터 큰 화제가 되었다]에 이르기까지 매우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산출하고 있다(이 때문에 데리다 자신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데리다 사상에 윤리적 또는 정치적 전회가 일어났다는 평가가 자주 제시된다).
         이처럼 정치,윤리적 문제에 관한 데리다 작업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더 나아가 데리다 문제 설정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바로 이 저작의 두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우선 이 책은 혁명과 개혁, 정초와 보존, 법과 폭력(또는 폭력과 대항 폭력) 같은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이율배반을 해체하고 전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특히 2부 [벤야민의 이름]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데리다는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개진된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적 혁명론을 세심하게 검토하면서, 벤야민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는 궁극적으로 ‘원초적 오염’, 또는 되풀이 (불)가능성의 원리에 대한 벤야민의 맹목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데리다의 관점에 따르면 이는 결국 근대 정치 사상에 고유한 맹목과 아포리아이기도 하다.  
         둘째, 이 책의 또다른 핵심 주제는 정치와 시간성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데리다는 근대 정치 사상의 이율배반에 대한 해체 작업을 시간성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는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초기의 해체 작업을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이면서 정의의 가능성이 어떤 점에서 미래futur와 구분되는 장래avenir의 관점과 근원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 보여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를 활용하는 방식인데, 데리다는 [법의 힘] 및 [독립선언들]에서 불어의 전미래 시제(또는 영어의 미래완료 시제)를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활용함으로써, 앞서 지적한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이율배반이 어떻게 시간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법의 자기 정초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수행적 폭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수행적 폭력의 필연성을 억압하고 은폐하려는 메커니즘이 바로 전미래 시제를 통해 표현되며, 이는 결국 위와 같은 이율배반을 낳게 된다.    
         셋째, 이 책은 또한 독특한 타자에 기초한 정의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데, 이는 고전적인 이율배반에 대해 데리다가 제시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론은 법적 보편성과 구분되는, 하지만 항상 법적 보편성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독특한 정의의 문제로 제시된다.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정의를 ‘타인과의 관계’로 규정하는 레비나스의 관점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를 장래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읽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벤야민 자신의 논의에서도 이러한 문제 설정을 발견할 수 있으며, 벤야민식의 ‘해체’ 작업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들의 논의를 조합하거나 추종하지 않고, 기록학grammatologie과 수행성의 관점에서 이들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변용하고 있다는 데 바로 데리다 정의론의 중요성과 강점이 있다. 
         이러한 데리다의 입장은 이후 여러 저서들을 통해 좀더 구체화되고 확장되고 있다. 특히 데리다는 유럽 공동체와 주권, 국제법의 문제, 이주 노동자와 환대의 문제, 탈식민주의와 보편 종교의 해체 문제, 도래할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의 해체 문제 등과 관련된 현실적 쟁점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의 구체적인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라는 정세를 조망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정치철학 중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벤야민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또다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실 데리다가 이 책의 2부인 [벤야민의 이름]을 발표하기 전까지 벤야민은 주로 문예이론이나 매체이론, 또는 유명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을 뿐,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1965년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정치신학 단편]을 묶어 소책자로 펴내면서 마르쿠제가 붙인 [후기](Zur Kritik der Gewalt und andere Aufsätze, Suhrkamp, 1965)나 Günther Figal & H. Folkers eds., Zur Theorie der Gewalt und Gewaltlosigkeit bei Walter Benjamin, Fest, 1979 정도가 주목할 만한 예외다]. 하지만 데리다의 글이 발표된 이후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벤야민 연구의 중심적인 대상 중 하나로 부각되었고[중요한 연구들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Alexander Garcia-Düttmann, “The Violence of Destruction”, in Walter Benjamin: Theoretical Question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Tom Mccall, “Momentary Violence”, in Ibid.; Werner Hamacher, “Afformative Strike”, in Andrew Benjamin & Peter Osborne ed., Walter Benjamin's Philosophy: Destruction and Experience, Routledge, 1994; Beatrice Hanssen, Walter Benjamin's Other History: Of Stones, Animals, Human Beings, and Angel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idem, Critique of Violence: Between Poststructuralism and Critical Theory, Routledge, 2000; Anselm Haverkamp ed., Gewalt und Gerechtigkeit: Derrida-Benjamin, Suhrkamp, 1994; Eric Jacobson, Metaphysics of the Profan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3; Françoise Prosut, L'histoire à contretemps, Cerf, 1994; Burkhardt Lindner, “Derrida, Benjamin, Holocaust”, in Klaus Garber & Ludger Rehm ed., Global Benjamin: Internationaler Walter-Benjamin-Kongress 1992, vol. III, W. Fink, 1999;  John P. McCormick “Derrida on Law: Or, Poststructuralism Gets Serious”, Political Theory no.3, June 2001; Hent de Vries, Religion and Violenc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 이 글을 비롯한 초기 벤야민의 정치신학적 관점을 20세기 독일 (유대) 사상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는 작업들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Pierre Bouretz, Témoins du futur: Philosophie et messianisme, Gallimard, 2003; Eric Jacobson, Metaphysics of the Profane, op. cit.; Michael Löwy, Rédemption et utopie: Le judaïsme libertaire en Europe centrale, PUF, 1988(이 책은 『법의 힘』 이전에 출간되었지만, 중요한 저서이기 때문에 병기해 둔다); Stéphane Mosès, L'ange de l'histoire: Rosenzweig, Benjamin, Scholem, Seuil, 1992; Anson Rabinbach, In the Shadow of Catastrophe: German Intellectuals Between Apocalypse and Enlightenm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이 책이 이처럼 벤야민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단순히 벤야민의 잊혀진 글 하나를 발굴하는 데 국한하지 않고,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벤야민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데리다는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 권력과 정의의 구분 및 메시아주의적 혁명론은 단지 벤야민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20세기 전반기의 좌파 및 우파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20세기의 야만적 사건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벤야민의 사상을 20세기의 사상사 및 현실 역사의 좌표 속에서 조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의의는 데리다 자신의 사상적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사회주의 혁명, 1,2차 세계 대전, 유대인 대학살,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 등―을 배경으로 전개된 유럽 사상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조하려는 강력한 한 가지 시도라는 점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3

         데리다는 번역자들, 특히 상이한 문자 체계를 사용하는 번역자들에게는 매우 힘겨운 도전 상대가 아닐 수 없다. 데리다는 글쓰기 자체에서 자신의 주장을 수행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매우 보기드문 문장가여서, 논의 과정에서 중의적인 단어나 구절들을 자주 사용하고 수사학적 어법과 철학적 논증을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내에 데리다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철학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이해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데리다를 우리말로 옮기려는 역자들의 어려움은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곧 데리다를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역자들은 그의 다면적이고 섬세한 글쓰기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옮기면서 동시에 그의 철학에 익숙하지 못한 많은 독자들에게 미묘한 논의 내용을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야 하는 야누스적인 과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옮긴이가 이 과제를 온전하게 완수했다고 자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두 개의 과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특히 후자의 과제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고심했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다소 번거롭다 싶을 만큼 여러 개의 옮긴이 주를 달았고, 그 중 몇 개는 역주로서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국내에 데리다의 책들이 제대로 잘 번역되어 있다면, 데리다처럼 미묘한 철학자의 저작은 옮긴이 같은 사람이 이런저런 서툰 주석을 달기보다는 원문의 논의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또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많은 독자들이 잘못 번역된 데리다 책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에 대해 매우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음을, 그동안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따라서 또다른 오해와 그릇된 인식을 낳게 될 위험이 있겠지만, 적어도 데리다 저작의 번역에 관한 한 옮긴이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독자들이 데리다를 읽는 어려움을 덜 수 있고 그의 철학을 좀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식의 번역이 지닐 수밖에 없는 미학적 결함은 충분히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비롯한 다른 데리다의 저작들을 번역할 경우에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계속 이런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물론 번역상의 잘못이나 역주에서 드러나게 될 내용상의 오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역자가 책임을 질 것이며, 기회가 되는 대로 고쳐나갈 생각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비판이 있기를 기대한다.

4

         이 책을 내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책의 편집과 교정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보잘것 없던 원고를 말끔하게 다듬어주신 문학과 지성사 편집부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을 주선해 주고 여러가지 번거로운 일을 맡아 처리해준 (김)재인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김기복, 김문수, 김은주, 목광수, 백주진, 이보경, 이선희, 이재환, 주재형, 한형식 등은 이 책과 관련된 공부 모임에 참여해서 열심히 읽고 토론해주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책을 번역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테니, 그 고마움은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마땅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이 보여준 깊은 관심과 격려 덕분에 옮긴이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이 번역이 그 분들의 기대에 대한 배반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4. 2. 18.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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