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의 힘]에 들어갈 역주를 하나 더 올립니다. 이 역주는 [법의 힘]에서 데리다가 사용하는 전미래 시제의 독특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이는 [법의 힘]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논문이나 책으로 정리해야 할 내용인데, 일단 하나의 역주라는 형식을 빌려 소묘해 봤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제 생각이 맞는 것인지 잘 확신이 들지 않아서, 역주로 제시해도 되는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망신은 각오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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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데리다가 전미래적인 표현을 두 차례 사용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정의의 태초에 로고스, 언어활동 또는 언어가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는 원문의 “Au commencement de la justice, il y aura eu le logos, le language ou la langue”라는 문장의 번역이고, 두번째 “태초에 힘이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는 원문의 “Au commencement il y aura eu la force”라는 문장의 번역이다.
이 책에서 데리다의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 중 하나는 법이나 제도, 국가의 정초라는 사건이 갖는 시간적 역설을 부각시키는 것인데, 데리다는 이를 위해 전미래 시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불어에서 전미래 시제는 미래에 앞서 있는 어떤 시점을 가리킨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그녀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J'aurai fini ma traduction, quand elle reviendra.” 이 문장에서 ‘그녀가 돌아올 때quand elle reviendra’는 미래 시제를 가리키고, 이 시제 이전에 완료될 어떤 행위, 곧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J'aurai fini ma traduction’의 시제가 바로 전미래 시제가 된다. 이처럼 통상적인 용법에서 전미래는 미래 이전에 완료되는 어떤 시점을 가리키며, 따라서 과거와는 무관한 시제라고 할 수 있다(물론 어떤 과거의 상황에서 그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이루어질 행위를 염두에 두고 전미래 시제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선형적 시간관을 전제하고 있는 일반적 용법과는 달리 전미래 시제를 과거에 대해 소급적, 구조적 영향을 미치는 시제로 파악한다. 다시 한 가지 예를 들면, 일련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그 때까지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보자(데리다는 『에코그라피』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이런 사건의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다). 이를 사건 X라 부르기로 하자.
(1) 이러한 사건 X의 ‘발생’(또는 뒤에서 데리다가 사용하는 단어대로 하면 ‘돌발surgissement’)은 그 때까지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 이전의 시간적 흐름 또는 인과적 흐름 속에서 파악 불가능한 것이다.
(2) 그런데 이처럼 사건 A가 발생한 다음, 이 사건은 자신의 과거의 시간적 흐름에 대해 소급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곧 사건 A가 일단 발생한 다음에는 이 사건은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곧 A 이전의 시간적 흐름이나 인과적 흐름의 합리적(또는 인식 가능한) 결과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사건 X의 발생은 더 이상 돌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 적어도 합리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 A 이전의 시간적, 인과적 흐름과 A라는 사건 사이에는 필연적이거나 합리적인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목적론적인 관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이처럼 (합리적으로 예견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어떤 사건이 사후에 필연화되는 소급적, 구조적 메커니즘이다.
이제 본문의 문장을 살펴보자. “정의의 태초에 로고스, 언어활동 또는 언어가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Au commencement de la justice, il y aura eu le logos, le language ou la langue.” 이 문장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듯이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다”는 문장의 변용이다. 두 문장의 차이점 중 하나는 후자의 경우 과거 시제가 사용된 반면, 전자에서는 전미래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후자의 문장이 외관상으로는 “말씀이 있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했던 사태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러한 실제로 존재했던 사태는 어떤 사건 X가 발생한 결과로, 또는 이 사건 X가 어떤 특정한 세력에 의해 특정한 목적에 따라 전유된 결과로, 사후에 재구성된 사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곧 태초라는 것, 기원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사태, 또는 더 나아가 가장 먼저 존재했던 원인이 아니라, 사실은 억압되고 전위(轉位)되어displaced 드러나지 않는 어떤 우발적 사건 X의 사후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시간적이거나 인과적인 흐름이 이런 식으로 재구성되면, X라는 사건의 우발성은 말소되고 대신 X라는 사건은 재구성된 서사의 과정 속에 편입되어 태초의 어떤 기원, 근원적인 원인이 산출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통상적인 전미래 시제의 용법과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의 용법 사이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 X(이는 예견되어 있는, 또는 적어도 예측 가능한 사건이다)를 전제한 다음, 이 사건 이전에 이루어질 행위나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반면, 데리다는 전미래 시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사건 X가 소급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지시하기 위해 전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 용법은 이중적임을 의미한다. 곧 데리다의 용법에서 (1) 완료에 해당하는 부분(“했던 게”)은 과거에 대한 소급작용 및 그 결과를 가리키며 (2) 미래에 해당하는 부분(“될 것이다”)은 이러한 소급작용의 구조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곧 이러한 소급작용은 어떤 특정한 사건의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언젠가는 소멸하게 될 일시적인 역사적 불운도 아니다. 이는 모든 역사적인 사건,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다(따라서 위에서 말한 ‘특정한 세력에 의해 특정한 목적에 따라 전유된 결과’라는 표현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 용법은 선형적인 시간관을 전제하는 일상적 용법과 달리―말하자면―시간의 시간화 내지는 역사의 역사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 80쪽에서 데리다가 “법이나 국가가 정초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미래라는 문법적 범주는, 실행되고 있는 폭력을 기술하기에는 현재의 변형과 너무 유사하다. 이 범주는 정확히 말하자면 현전 또는 현전의 단순한 양상화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 용법의) 전미래 시제에 따라 소급적으로 구조화된 시간의 흐름에서는 선형적인 시간, 곧 순간적인 지금의 연속만 존재할 수 있으며(이 경우 과거와 미래는 각각 ‘지나간 현재’와 ‘오지 않은 현재’일 것이다), 과거에 대해 소급적으로 작용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전미래 시제는 이외에도 7번 더 사용되고 있는데, 이 문장들은 모두 이런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정의]은 항상 이것, 이 도래-하기를 지닐 것이며, 항상 이것을 지녔던 게 될 것이다elle l'aura toujours, cet-à-venir, et elle l'aura toujours eu.”(p. 57])
“항상 선행했던 게 될, 하지만 또한 인간에게만 명명의 힘을 선사함으로써 모든 이름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은 ‘신의 폭력’이 아닌가?N'est-ce pas la ‘violence divine’ qui aura toujours précédé mais aussi donné tous les prénoms, en donnant à l'homme seul le pouvoir de nommer?”(p. 69)
“피의 혼합이 아니라 서출, 곧 피흘리게 만들고 피로써 보답하게 만드는 법을 근저에서 창조했던 게 될 서출인 것이다non pas mélange des sangs mais bâtardise qui au fond aura crée un droit qui fait couler le sang et payer par le sang.”(p. 118)
“신의 폭력은 모든 이름에 항상 선행했던 게 될 테지만, 또한 모든 이름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이다La violence divine aura précédé mais aussi donné tous les prénoms.”(p.119)
“사실은 나는 이미 이를 갖고 있었던 게 될 텐데, 왜냐하면 나는 나에게 이를 선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en vérité je l'aurai déjà eu puisque j'ai pu me le donner.”(p. 168)
“나는 서명의 위임(委任)을 통해 나에게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능력/권력’, 서명할-수-있음이라는 의미로 이해된 ‘능력/권력’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이다je me serai donné un nom et un ‘pouvoir’, entendu au sens de pouvoir-signer par délégation de signature.”(같은 곳)
"정확히 말하면 최종심급의 자리에서는 ... 신만이 서명했던 게 될 것이다Précisément à la place de dernière instance ... Dieu seul aura signé."(p. 183)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전미래 시제가 함축하는 이중적 양상을 모두 나타낼 수 있도록 다소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il y aura eu”를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며, 뒤에 나오는 전미래 시제 문장들의 경우에도 이처럼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