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대 철학과 교수인 장춘익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재기가 넘치면서도 매우 신랄한 분류법인데, 이걸 읽으면서 나는 어디에 속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철학자 유형>

 

산까치형 - 여기저기 찍어 보는데, 끝까지 먹는 게 없다. 이 놈 때문에 멀쩡하게 남는 주제가 없다.

암벽등반가형 - 어렵지 않으면 하지도 않는다. 부상은 곧 명예다.

두더지형 - 이 놈이 뭐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놈이 뭐 내놓을지 모른다고 기다리다가 다들 지친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또 꿈틀거린다.

미식가형 - 제 딴에는 핵심만 골라 공부하고 말하는데, 영양실조(지식실조)에 걸린다.

(오만한) 광산가형 - 저 혼자 금 캐고 남들은 다 석탄 캐고 있단다.

(착한)연탄집주인형 - 달동네 사람도 연탄 써야 한다고 나르듯이, 힘들고 돈 안 되는 작업(예를 들어 안 팔리는 책 번역하기) 만 골라서 한다.

해외특파원형 - 딴 나라에서는 뭘 하는지 열심히 전한다. 독자수준이 낮을 때는 남의 것을 슬그머니 자기의 창작으로 둔갑시켜서 내놓기도 한다.

목욕탕주인형 - 제 속은 안 보여주지만, 딴 놈들 껍데기 속을 다 안다.

때밀이형 - 열심히 논평해서 남의 잘못 고쳐주는 것을 보람으로 안다. 너무 빡빡 밀었다가 항의도 자주 받는다.

영웅적 순교자형 - 철학해서 저 빼놓고 세상을 다 구하겠다고 한다.

소심한 순교자형 - 한 번 틀린 것을 가지고 평생을 후회한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필을 선언한다.
 
마를린 먼로형 - 수준은 낮은데, 이상하게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타이거 우즈형 - 그에게는 굿샷과 배드샷만 있다.

 

* 이 유형은 사실 아래 글에 딸린 일종의 부록입니다.

 

<지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인문학자의 바람직한 태도라는 것이 있을까? 좀 황당하고 위험하기조차 한 질문이다. 이런 물음은 자칫 인문학을 지식체계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로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지식체계라면, 그것이 정확히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 그 지식을 얻는 데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인문학적 지식이 소위 정상과학과 다른 특성을 갖는다는 측면이, 일급의 인문학자들의 경우를 빼놓고는, 인문학에 (그리고 인문학자들에게도) 득이 되기보다는 (자주 치명적인) 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을 인문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인문학이 인문과학이 못되어서 너무나도 아쉽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좋은 인문학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내가 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다. 윤리로서의 인문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는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의 발전에 보탬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내가 최근에 생각하게 된 것은 지도를 그리는 자세이다.

지도를 그리려면 전체를 효과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의 고안부터, 특정지역과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까지, 여러 가지 종류의 노력이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 노력은 정말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 전체를 개관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또 특정지역에 대해 세밀한 지도를 그리는 사람도 필요하다. 지도를 그리는 방법은, 또 어느 정도로, 어떤 면에 치중한 세밀한 지도를 그릴지는 필요와 역량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도는 실제지형에 바탕하고 또 실제지형을 추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식의 다름이 지식의 지식적인 성격을 위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도 그리기에서는 지식의 우열문제보다 지식의 결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야말로 - 내가 실제로 그려보지 않았지만 - 다른 사람들의 작업이 자신에게 불가결한 도움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인문학에서 모험적 광산업자의 태도가 가장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금을 캐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셔보고 다니는데, 어디 하나 정교하게 작업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다. 혹시, 혹은 좀더, 금이 많이 나올 것 같은 곳이 보이면 즉각 옮겨버린다. 그 바람에 환경만 오염되고, 후속자의 작업도 빛을 잃는다. 또 혹시 무언인가를 발견하면, 자기는 금을 캐고 있는데 남들은 석탄이나 캐고 있다고 비웃으며 남의 작업의지마저 꺾는다.

나는 인문학에서 모험적 광산업자의 태도가 그저 개인의 기질만이 아니라 인문학의 성격<과> 환경에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과학성의 부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 연구비든, 학자의 명예든, 대중성이든 간에 - 소위 히트를 쳐야 하는 부담, 그리고 일반인의 인문학에 대한 기대가 결합하여, 광산업자의 태도를 갖도록 유인하고 또 종종 성공으로 이끈다. 과학성 검증이 잘 안 되니, 또 인문학에 대한 일반의 기대가 정확한 지식보다는 어떤 암시 같은 것이기에, 주제의 선점이 곧 주제의 소유자 내지 그 주제를 다루는 학자로 만들어 준다. 게다가 이제 인문학자도 연구비를 위해서든 지식엔터테이너로서의 성공을 위해서든, 자신을 부각시켜야 하겠으니, 광산업자적 태도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성공의 확률은 높고, 혹시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지식의 탐사에 나선 사람의 실수로 용서받으면 된다. 최악의 경우조차 별로 나쁘지 않다. 무엇 무엇을 밝힌 것이 아니라 무엇 무엇을 <다루었다는 것>을 공공연한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인문학의 실정이니 말이다.


(후기: 내가 그린 지도?: 나는 어렸을 때 이불에다 지도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주로 술집지도만을 그렸지.. 또 뭘 그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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