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월에 출간될 {철학사상} 제 29집에 수록될 글을 하나 올립니다. 이 글은 장-뤽 마리옹이라는 프랑스의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자의 코기토 해석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글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장-뤽 마리옹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데카르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고 그 외에도 후설, 하이데거, 레비나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가톨릭 신학 연구로 유명한 사람이죠. 성격이 아주 괴퍅하고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지만, 현재 프랑스 철학계(특히 강단철학계)를 이끌어가는 사람 중 한 명이죠. 서양 근현대철학에서 주체 이론을 재구성하는 맥락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다시 읽어보려고 쓴(또 앞으로 쓰게 될) 글 중 하나입니다. 장-뤽 마리옹의 철학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꽤 까다로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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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타자: 장-뤽 마리옹의 에고의 타자성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글은 프랑스의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가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의 󰡔성찰󰡕 해석, 특히 에고의 타자성에 관한 테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특히 마리옹의 두 논문, 즉 「에고는 타인을 변질시키는가? 코기토의 고독과 다른 에고의 부재」(Marion 1991b)와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Marion 1996)을 중심적으로 다룰 것이다.[이 두 글은 각각 「코기토의 고독」과 「에고의 타자성」으로 약칭하고 인용의 경우 본문에 쪽수만 표시하겠다.] 이는 1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글(「코기토의 고독」은 원래 1986년에 발표되었다)이 주제상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마리옹은 「에고의 타자성」 p. 6에서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에고는 유아론의 불모적인 압박 속에 머물러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각주 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에고는 타자를 변질시키는가?」에서 그렇다고 상정했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이 두 논문이 서로 동일한 문제선상에 있으며, 또한 양자가 서로 상이한 결론을 내린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전자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던 에고의 타자성에 대해 후자의 글은 「두 번째 성찰」에 대한 상세한 검토에 입각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의 타자성 테제에 대한 마리옹의 입장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논문을 차례로 검토하면서, 전자가 불가능한 것으로 주장했던 에고의 타자성이 어떤 근거에서 후자의 논문에서는 가능한 것으로 제시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마리옹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그가 핵심 논거로 삼고 있는 「두 번째 성찰」의 “ego sum, ego existo” 문장을 재해석함으로써 이 문장이 마리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 또는 이 문장에 대한 마리옹의 해석은 데카르트 철학의 첨예한 경험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경험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희망한다.



I

「코기토의 고독」의 기본 목표는, 󰡔성찰󰡕에서 제시되는 초월론적 주관성의 원리가 에고에게 내재적인 타자성의 가능성을 제공해 주지 못하지만, 데카르트 철학의 다른 측면에는 타자성 내지 상호주관성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리옹은 이러한 가능성을 󰡔정념론󰡕에 나타나는 데카르트의 사랑에 대한 논의에서 찾는다.


「코기토의 고독」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의 에고, 자아에 대한 파스칼의 비판이다. “자아는 가증스러운 것이다. [...] 만약 내가 자아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자아를 증오한다면, 나는 항상 자아를 증오할 것이다.”(Pensées, § 597―「코기토의 고독」, 189) 마리옹에 따르면 여기서 파스칼의 비판 대상이 되는 자아의 이기주의 또는 자아중심주의egoisme는 도덕적 의미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초도덕적인 의미”(190)의 이기주의, 즉 절대적 이기주의이다. 절대적 이기주의란 이러저러한 경험적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의 가능성의 조건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는 바로 데카르트의 에고, 코기토에서 출발한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cogitatio를 통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에고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한다면, 그는 가능한 모든 세계의 유일하고 불가피한 중심으로 자신을 고정시켜야 한다. [...] 요컨대 (사물을 사유하는 나 자신을) 사유하는 에고ego cogito(me cogitare rem)의 자기 지시적 설립은 단지 인식의 이론적 영역하고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 타인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의한 인정이라는 소위 실천적 영역―실은 전적으로 이론적인 것인―도 지배한다.”(191)


절대적 이기주의에 대한 파스칼의 비판이 이처럼 데카르트의 에고를 겨냥하고 있고, 또한 이러한 비판이 역사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면, 다시 말해 근대성 일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의미한다면[{데카르트 연구Questions cartésiennes} 1, 2권에서 마리옹의 관심은 단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문헌학적, 고증적 주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데카르트-(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노선 위에서, 근대성의 원천이자 또한 근대성 자체에 의해 왜곡되고 망각된 근대성의 이면으로서의 데카르트, 즉 탈근대성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개시하는 데카르트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사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코기토의 고독」이나 「에고의 타자성」은 이러한 기획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글들이다.], 무엇보다 긴요한 질문은 실천적 질문이다. 이는 특히 마리옹처럼 데카르트에서 단지 근대성의 원천만이 아니라 또한 탈근대성의 또 다른 입구를 발견하려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근대성의 지평을 형성하는 데카르트가 절대적 이기주의의 창시자라면, 근대성 내에서―왜냐하면 이것이 유일한 현실적 시간과 장소이기 때문에―근대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모색하는 일이야말로 긴급한 과제이며, 더욱이 데카르트에게서 절대적 이기주의와는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긴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긴요한 질문이 실천적 질문이라면, 이는 이론의 응용으로서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가 말하듯이 아포리아의 경험으로서 실천적 질문, 즉 더 이상 사방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는 절박한 자각을 겪게 되자마자 제기되는 질문, 불가능성에 직면하여 제기되는 질문을 가리킨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Derrida 1996 참조). 따라서 마리옹이 출발점으로 삼는 실천적 질문은 아포리아적인 질문이며, “다른 주체”, “정신들 사이의 소통”, “주체성의 영역에서 의식들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에고(코기토)만이유일하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고 동요될 수 없는 최소의 것”을 보증할 때, [...] 다른 정신들이 일반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특수하게는 에고에게 획득될 수 있는가?”(192, 강조는 필자)[이하에서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강조나 꺾쇠 추가는 모두 필자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왜 상호 주관성, “정신들 사이의 소통”, “주체성의 영역에서 의식들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그토록 절박한 것인가? 「에고의 타자성」의 용어법대로 하자면, 데카르트의 에고에 대한 해석에서 “유아론”의 문제가 왜 그토록 중심적인 것인가? 이렇게 상호 주관성의 문제가 근원적인 쟁점이라면, 후설이나 하버마스식의 상호 주관성이야말로 진정한 탈근대성의 출구로 간주될 수 있는가? 도대체 데카르트의 에고의 한계는 유아론에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유아론 이전에 유아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또는 에고에서 유아론의 문제를 보게 만드는, 좀더 근원적인 어떤 봉쇄가 문제인가? “에고(코기토)만이유일하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고 동요될 수 없는 최소의 것”을 보증할 때”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사실 이는 부정확한 주장이다. 근거들의 순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도 코기토가 “유일하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고 동요될 수 없는 최소의 것”을 보증”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실한 신의 보증이 없는 한, 코기토적 확실성은 끊임없이 기만적인 악령의 위협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Beyssade 1993 참조(이 문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다). 코기토가 ‘유일하고 결정적인 보증자’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적인 체계의 바깥에 위치해야 한다. 즉 진실한 신의 보증을 주관성의 형이상학이 요구하는 하나의 허구적 장치로 간주할 수 있을 때에만 코기토는 유일하고 궁극적인 근거로 나타날 수 있다. 마리옹은 이처럼 근거들의 순서와 체계외적 관점을 교묘하게 뒤섞으면서 자신의 논변을 정당화하지만, 이는 정당화되기 어려운 태도다.] 이 질문들이 우리의 주도적인 질문인데, 우선은 에고 코기토에 대한 마리옹의 논의를 좀더 따라가 보자.


이처럼 데카르트의 에고(코기토)에서 상호 주관성, 즉 다른 정신들에 대한 인식이나 “정신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 다음 마리옹은 󰡔성찰󰡕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지 검토한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아주 간단한très simple 절차를 따를 것이다. 즉 에고(코기토)가 󰡔성찰󰡕의 근거들의 순서에 따라 다른 정신들을 허락하고 그것들과 마주치는지 탐구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성찰󰡕 자신이 설정한 목표objectif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의상 객관성/대상성objectivité을 넘어서는 목표, 즉 정신의 타자성, 타자의 정신을 따라 󰡔성찰󰡕을 다시 한 번 더 읽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193) 마리옹은 자신의 탐구가 “아주 간단한 절차”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성찰󰡕 자신이 설정한 목표”, 즉 “󰡔성찰󰡕의 근거들의 순서”를 넘어서는 또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탐구가 과연 “아주 간단한 절차”인지 곧바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의미에서 앞 문장에 나오는 데카르트 자신의 “근거들의 순서”라는 개념이 다음 문장에서는―‘목표’와 ‘객관성/대상성’의 어원적 유사성을 매개로 하여―아주 간단하게 “객관성/대상성”이라는 전혀 낯선 개념으로 변용될 수 있는지, 그리하여 표상 및 객관성의 정당성을 실추시킨 하이데거의 권위를 빌려와서, 아주 간단하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성찰󰡕에 대한 해석에서 데카르트 자신의 목표, 즉 근거들의 순서와 다른 목표를 당연한 듯이 설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에서 마리옹은 “정신의 타자성, 타자의 정신”이 󰡔성찰󰡕의 또 다른 목표, 곧 데카르트 자신이 설정한 목표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데카르트의 정신에 부합하는, 일종의 무의식적이고 심층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여기에 대해 마리옹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다.[󰡔성찰󰡕의 텍스트 구조에 대한 문제는 거듭 논란이 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60년대 이후 구조주의 언어학과 문학이론의 성과를 토대로 󰡔성찰󰡕의 텍스트를 이중적인 구조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바 있다. 예컨대 쥬도비치는 장-뤽 낭시의 선구적인 연구를 따라,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허구 내지 우화fabula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실제 논의되고 있는 철학적 내용과 문학적이거나 비철학적 허구 작용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Nancy 1978; Judovitz 1988, p. 32 이하, p. 87 이하 참조. 또한 코스만은 토도로프나 주네트가 제시한 서사récit의 세 가지 차원, 즉 이야기histoire와 담론discours, 서사 작용narration의 구별에 입각하여 󰡔성찰󰡕에서 실제 성찰을 이끌어가고 있는 ‘나’의 성찰과정을 ‘이야기’로, 그리고 󰡔성찰󰡕 텍스트의 담론적 구조를 ‘담론’으로 분석하면서 서사자로서의 나와 󰡔성찰󰡕의 저자로서의 데카르트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저자는 데카르트의 󰡔성찰󰡕이 전통적인 성찰 형식의 작품들을 따르면서 이를 내적으로 변형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Kosman 1986. 이러한 연구들의 타당성과 설득력은 각각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겠지만, 새로운 이론적 성과를 바탕으로 이전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던 문제들을 제기하고 주목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만약 마리옹이 󰡔성찰󰡕의 근거들의 순서와는 다른 순서 내지 질서의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연구들을 검토해 보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자신의 탐구 목표를 설정한 마리옹은 󰡔성찰󰡕에는 다른 정신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따라서 결론은 근본적일 것이다. 󰡔성찰󰡕은 에고의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사람―적어도 다른 정신이라는 의미에서―에 대한 인식을 개념적으로 금지한다. 분명 적어도 암시적으로는 󰡔성찰󰡕은 다른 사람들 및 다른 영혼들이 사유에게 표상된 대상들로 제시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경우 󰡔성찰󰡕은 사유를 실행하는 유일한seul 에고의 독특한unique 특권을 승인한다.”(205)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는 하나의 예외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나 자신의 관념을 구성하는 세 요소 중 마지막 요소인 신의 관념이다. 유한한 실체인 에고의 세력권에서 독립해 있는 무한한 신의 관념은 탁월한 타자성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근거들의 순서가 적어도 한 번은 타자성을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고 반박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신 존재 증명은 어떤 타자에, 심지어는 탁월한 타자에 도달하며, 이것은 그것이 에고의 창조자로, 에고와 다를 뿐만 아니라 에고에 선행하는 것으로 자신을 알려주는 만큼 더욱 더 에고로 환원될 수 없는 자신의 독립성을 표시한다.”(205)


그러나 마리옹은 다시 이러한 신적인 타자성이 “에고에 의한 타자 그 자체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첫째, 타자성에는 근본적인 분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적인 타자성은 하나의 조건 하에서만 타자성 일반에 대한 인정을 소묘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데카르트가 유한한 정신들의 처지를 신적인 권위 위에서 사유한다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문제설정은 결코 중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데카르트는 적어도 한 번은 전자를 후자에 대립시킨다. 즉 에고가 부모의 타자성을 인정하든가(출생), 아니면 그가 신의 타자성을 인정하든가이다(창조). 타자성은 유한하고 경험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타자이거나 아니면 무한하고 초월론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전적인) 타자 중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타자성은 전자와 후자에 무차별적으로 확장될 수 없다. 데카르트의 어떤 텍스트도 신적인 타자성이 유한한 타자성을 가능하게 해주며, 심지어 그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고 가정하게 해주지 않는다. 유한한 타자는 타자성의 관계 아래에서 일의적으로도, 심지어는 유비적으로도 신과 합치하지 않는다.”(206) 무한과 유한 사이의 중의적인équivoque 분할, 간극을 데카르트 철학 해석의 기본 원칙으로 간주하는 마리옹(Marion 1991a)은 타자성의 문제에서도 무한한 신적 타자성과 유한한 인간적 타자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분할, 간극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인용하는 「세 번째 성찰」에 따르면 출생의 원인으로서 부모라는 경험적 타자의 문제는 사유하는 에고의 유래, 에고의 존재 근거라는 문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의미 있는 이론적 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신적 타자성을 다른 타자를 사유하기 위한 근거로 삼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신적 타자성이 초월론적 지평을 개방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신적 타자성은 타자에 대한 가능성을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에고의 탁월한 타자로서 신에 대한 인정이 이미 타인과의 마주침을 성취한다는 것은 논증되어야 할 사실로 남아 있다. [...] 무한한 관념으로서 신은 유한자의 관념들 중 하나를 이룰 수 없으며, 나 자신의 관념 [...] 중 일부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각각의 유한한 존재자, 따라서 에고의 초월론적 전제로 나타난다. 따라서 무한자는 근원적으로 에고를 규정하며, [...] 신적 타자성은 초월론적 지평을 개방한다. 그는 더 이상 진정한 하나의 타자un autre vraiment tel, “나와 유사한 인간”(󰡔성찰󰡕, AT, VII, 43, 3)으로 개방되지 않는다.[마리옹은 󰡔성찰󰡕을 해석하면서 줄곧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과 번역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성찰󰡕 국역본(Descartes 1996)을 참조하되, 번역은 마리옹 자신의 번역을 따랐다. 데카르트 저작은 관례에 따라 AT라는 약어 아래 권수는 로마자로, 쪽수와 줄수는 각각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한다.] 자아에 대한 또 하나의 타자이자 다른 에고로서 유한하고 사유하는 것인 어떤 타자, 자아와 다른 어떤 타자의 타자성은 항상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타자는 잠정적으로 결핍된 것이 아니며, 처음부터 에고가 그 자신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결핍된 채 남아 있다.”(206-207)


이 두 개의 논거는 「코기토의 고독」에서 마리옹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상호주관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타자는 하나의 유한한 자아로서 에고의 인식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아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무한자도 아닌, 사유하는 유한자로서의 또 하나의 다른 에고다. 이렇게 마리옹 주장의 진의가 해명되면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또 하나의 다른 에고”의 문제가 데카르트 철학에서, 그것도 󰡔성찰󰡕과 같은 텍스트에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어야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이 문제가 데카르트 자신이 설정한 󰡔성찰󰡕의 목표보다 더 중요한, 그것을 “넘어서는” 목표로 제시될 수 있는가? 마리옹이 제시하는 다른 에고가 하나의 다른 에고, 즉 이미 수적이고 양적인 규정에 따라 구별된 에고이고 따라서 ‘제일 철학’보다는 경험적이고 응용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어떤 근거에서 그는 󰡔성찰󰡕의 제목 속에 “분리된 지성들”, 또는 다른 정신들이 빠져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이를 “역설”(194)이라고 부르면서 데카르트 제일 철학의 권리 설정의 타당성 여부를 문제 삼을 수 있는가? 마리옹의 목표가 󰡔성찰󰡕에서 상호 주관성의 가능성을 검토해 보는 것이라면, 이런 질문들은 당연히 제기되고 또 적절한 답변이 제시되었어야 할 질문들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은 채, 상호 주관성의 문제, 그것도 이미 경험적 영역에 속하는 상호 주관성의 문제가 󰡔성찰󰡕 같은 제일 철학 저작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논문 마지막에서 마리옹은 자신이 이 글에서 목표로 삼은 것이 데카르트 도덕론의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이 가능한 두 가지 논변이 가리키는 것은, 데카르트의 도덕론은 그 본질적인 일부에서는 여전히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219) 이는 다소 허탈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결국 이 논문의 목표가 데카르트의 도덕론이라면, 왜 제일 철학의 권리 영역 속에서 경험적인 상호 주관성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성찰󰡕에서 이것이 생략된 것을 “역설”이라고 부르는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이 논문의 4절까지의 내용이 목표로 삼은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II

이처럼 「코기토의 고독」에서 타자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실망스럽게 종결된지 10년 뒤 마리옹은 「에고의 타자성」에서 “다시 한 번 동일한 문제”, 즉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에고는 유아론의 불모적인 압박 속에 머물러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번째 성찰」에 대한 매우 세심한 독서를 통해, 󰡔방법서설󰡕이나 󰡔철학원리󰡕의 ‘cogito ergo sum’, 또는 ‘Je pense donc je suis’와는 달리 「두 번째 성찰」에 나오는 ‘ego sum, ego existo’라는 문장[이 문장은 국역본에서는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로 번역되어 있다. Descartes 1996, 43쪽. 하지만 마리옹 자신이 라틴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데다가, 독자적인 번역을 위해서는 상당히 세심한 분석과 논증이 요구되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겠다.]이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10년 사이에 동일한 텍스트에 대한 분석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제시되는 만큼, 이는 아주 주목할 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에고는 근원적 타자성을 함축하는가? 또는 ‘ego sum, ego existo’ 문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이 도출될 수 있는가? 도대체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이란 무엇인가? 데카르트 철학에서, 즉 탈근대성의 한 가능성으로서 데카르트 철학에서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이 마리옹의 「에고의 타자성」 논문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제기해 보려는 질문들이다.


「에고의 타자성」에서 마리옹은 자신의 관심이 근본적으로 탈근대성의 문제에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즉 마리옹은 탈형이상학적이고 탈근대적인 조류 속에서 주체에 대한 문제는 항상 ““나”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나”를 말하는 것의 지위”에 대해 제기된다고 주장한다. “근본적으로 “나”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토대[속]에서 [자신을] 정립한다고, 또는 그것을 획득한다고 주장할 때에만 질문을 받을 만하게 된다.”(4) 그런데 마리옹에 따르면 이러한 자기 정초적 나는 두 가지 아포리아, 즉 분열scission과 폐쇄clôture에 직면하게 된다. 첫 번째 분열의 아포리아는 “나”라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선행하며 다른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초월론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에서 직접 유래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이러한 초월론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모든 가능한 대상의 영역, 따라서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는 반면에, 그것의 경험적 담지자로서 가시적이고 개체화된 “경험적 나”는 여러 대상들 중 하나로 설정되며, 이에 따라 주체가 초월론적 기능을 행사하는 순간부터 모든 인간 주체는 초월론적 나je와 경험적 나 또는 자아moi의 분열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폐쇄의 아포리아는 에고의 이러한 내적 분열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경험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일 원리의 성격은 에고를 절대적인 현상학적 독특성, 즉 그 자신은 경험될 가능성이 없는,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독특성으로 밀어 넣기”(5)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허한 자족성”에 대한 해결책은 “이것과 모든 가능한 현상 사이의 연속성이라는”(같은 곳) 것으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에고는 “자신이 생산한 대상만을 인식하기 때문에, 어떠한 다른 에고 자체에도 이르지 못하고, 오직 그것이 대상화/객관화하는 타자화된altéré 에고, 단순한 다른 “자아”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타자를 다른 대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에고는 유아론의 아포리아 속에서 창문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폐쇄된다.”(6)


마리옹의 이 두 가지 규정은 그의 문제의식이 「코기토의 고독」보다 훨씬 깊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앞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코기토의 고독」에서 마리옹의 문제제기는 실은 형이상학적인 것 내지 제일 철학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내지 응용적인 것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실천적인 도덕론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남용하고 왜곡하는 부정확성을 드러내는 데 비해, 여기서는 제일 철학의 영역에서 주체성의 형이상학적 규정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타자성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규정에는, 「코기토의 고독」에서부터 지속되고 어쩌면 마리옹의 입장 자체에서 유래하는 근원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즉 이 두 가지 규정에서, 푸코의 󰡔말과 사물󰡕의 분석(및 무의식의 주체에 대한 라캉의 분석)에 따르는 첫 번째 규정과, 후설적인 상호 주관성의 관점에 입각한 두 번째 규정이 내적인 갈등 없이 상호 연결될 수 있는지, 또는 마리옹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에고의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내적 분열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폐쇄를 동반한다”(5쪽)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규정이 초월론적 에고와 경험적 자아 사이의 분열을 문제 삼는데 비해, 후자는 이러한 분열 자체가 에고의 폐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규정은 에고가 초월론적 에고라면, 그 에고는 정의상 또 다른 초월론적 에고를 허용할 수 없으며, 따라서 초월론적 에고에 대해 내재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에고가 초월론적 기능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에고의 내적 분열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규정에 따르면 초월론적 주체의 설정 자체는, 그 이전의 존재론적 기원 내지 원초적 실정성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반면 두 번째 규정은 초월론적 에고의 문제설정에 내재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 에고의 설정 자체가 하나의 유아론이라고, 즉 어떤 하나의 에고가 초월론적 기능을 떠맡는 것은 부당하며, 이는 다른 에고 내지 다른 존재자들에 대한 억압이고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나의 에고’라는 규정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이러한 두 번째 규정은 첫 번째 규정의 관점에서 볼 때는 처음부터 초월론적 문제설정을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외재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어떤 에고가 초월론적 에고라면, 그 에고의 바깥에 실정적인positive 의미에서 또 다른 에고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초월론적 에고의 바깥은 무의미한 미지의 영역이든가 아니면 다른 에고는 항상 이미 경험화되고 개체화된 에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옹은 에고의 폐쇄를 “어떠한 다른 에고 자체에도 이르지 못하고, 오직 그것이 대상화/객관화하는 타자화된 에고, 단순한 다른 “자아”에 도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렇게 해서 에고의 폐쇄라는 규정 내부에다가 첫 번째 규정에서 유래하는 (초월론적) 에고와 (경험적인) 타자화된 에고=다른 자아 사이의 차이를 슬쩍 추가하고 있지만, 이것이 두 가지 규정 사이의 근원적인 관점의 차이를 가릴 수는 없다. 이러한 차이 내지 갈등을 무시한다는 점에 「에고의 타자성」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어쨌든 이 두 가지 규정에 따라 마리옹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그는 첫 번째 규정을 통해 “칸트와 후설에 이르기까지 명시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러한 분열은 이미 데카르트적 에고에도 영향을 미치는가? 이미 그 현상학적 가시성과 원리로서의 우월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가?”(6)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푸코 식의 첫 번째 규정이 칸트 이후의 현상학적 초월론에는 타당하지만, 데카르트적인 에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마리옹의 관점인 셈이다. 그리고 마리옹은 두 번째 규정을 통해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에고는 유아론의 불모적인 압박 속에 머물러 있는가?”(같은 곳)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은, 데카르트적인 에고에서, 분열만이 아니라 폐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근원적인 타자성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마리옹의 목표임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마리옹은 󰡔성찰󰡕을 분석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남아 있는 과제는 데카르트를 ‘고전’으로 만들어 온, 따라서 역설적으로 데카르트를 근대성의 지평 내로 가두어 온, 데카르트적 에고에 대한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해석들을 비판하고 이와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마리옹은 분석 대상의 구분이라는 전략을 채택한다. 마리옹이 보기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따르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의 문제점은 그들이 ‘cogito ergo sum’이나 ‘ego cogito, ego sum’이라는 정식에 집중할 뿐, 󰡔성찰󰡕에 나오는 ‘ego sum, ego existo’라는 정식은 무시한다는 점에 있다.[이는 사실은 마리옹에 앞서 발리바르가 제기한 문제다. Balibar 1992 참조.] 이것은 그들이 ego와 sum 사이의 논리적인 동일성, 따라서 동일률을 데카르트적인 에고의 핵심 전제이자 원리로 간주해 왔음을 뜻한다. 마리옹은 이러한 해석이 스피노자에서부터 칸트, 헤겔을 거쳐, 심지어는 니체나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이는 고전 철학자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게루Martial Gueroult나 힌티카Jakko Hintikka 또는 해리 프랑크푸르트Harry G. Frankfurt 같은 탁월한 데카르트 주석가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어서, 후자의 두 사람은 코기토 해석에서 수행perfomance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이것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항상 ego에서 sum으로 이행하는 것이 문제”(16)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인가? “우리는 분명 ego cogito, ergo sum이라는 정식이 이러한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래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 단지 우리는 이 정식[...]이 코기토라는 데카르트적 개념[의 의미]을 소진시키는지, 요컨대 고전적인 해석만이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것인지 묻는 것뿐이다.”(16)


그렇다면 ‘ego sum, ego existo’라는 새로운 정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리옹은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이 정식의 요점은 “추론에서 수행문performatif으로의 이행”(18)이라는 점이다. 즉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한에서 나는 확실히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사유는 언표 속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사유가 언표를 성취하는 한에서 사유는 언표에 선행한다. 사유는 직접 언표 속에서 말해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언표를 말하는 것이 바로 사유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정확히 바로 그것이 언표를 검증한다/진리화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표에 부재한다. [...] 오직 「두 번째 성찰」에 나오는 실행중인 언표만이 자신이 말하는 바를 실행할 뿐이다.”(같은 곳)


두 번째는 왜 데카르트가 1641년에, 그것도 「두 번째 성찰」에서만 ego sum, ego existo라는 정식을 채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부정확한 문학적 변형물일 뿐인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상이한 논변의 출현인가? 마리옹의 논점은 이 새로운 정식은 ego cogito, ergo sum으로는 해명될 수 없는 새로운 테제, 즉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을 표현해 준다는 점이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상이한 논변의 돌출이 문제 아닌가? 그리고 고전적인 해석이 유아론에 귀착되기 때문에, 우리는 1641년의 정식이 에고의 모든 유아론을 넘어선다는 점을 통찰할 수 있지 않을까?”(19) 그가 제기하는 논점이 이렇다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두 번째 성찰」의 정식에 대한 마리옹의 해석의 타당성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쟁점은 이 정식이 과연 에고의 타자성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처음부터 제기해 온 문제의 핵심에 닿아 있다. 마리옹이 제기하는 에고의 타자성은 과연 탈근대성의 문턱에서 데카르트 철학이 지닌 또 다른 가능성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의 진정한 가능성을 오도하는 것인가?


III

우선 마리옹의 텍스트 분석을 따라가 보자. 그는 「두 번째 성찰」, AT판 7권 24쪽 19번째 줄부터 25쪽 13번째 줄까지 불과 반쪽 정도밖에 안되는 원문의 내용을 4단계로 나누어 치밀하게 분석한다. 마리옹의 전략은, 그의 구분법에 따르면 네 번째 단계, 즉 25쪽 12번째 줄에 나오는 “ego sum, ego existo” 문장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그 이전의 논변의 전개과정을 차례로 검토하는 것이다.


마리옹은 AT판 7권 24쪽 19번째 줄에서 26번째 줄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에서 지금까지의 결론, 즉 내가 보는 모든 것이 거짓이며, 아무 것도 확실치 않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 시도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출발점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것diversum”이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미 24쪽 16-17번째 줄에서 물체와 형태, 연장과 운동 및 장소가 키메라[...]라고 단언되었으므로, 이 “diversum”은 이와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마리옹은 diversum에서 중의적 의미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즉 diversum은 자체 내에 어떤 특정한 규정을 갖지 않기 때문에 비인격적 사물로서의 타자, 곧 autre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타인, 곧 autrui를 의미할 수도 있다. “단지 어떤 타자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으로는 어떤 타인이 문제가 된다.”(21) 여기서 마리옹이 말하는 타인은 물론 경험적이거나 존재적ontisch인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론적이거나 존재론적인ontologisch 존재자를 가리킨다. diversum이 지닌 이러한 중의성이 「두 번째 성찰」을 해석하는 마리옹의 첫 번째 교두보다.
그 다음 그는 이를 「두 번째 성찰」의 바로 다음 문장과 연결시킨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내 속에 집어넣는 어떤 신aliquis Deus이, 내가 그를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존재하지 않는가?” 마리옹은 여기서 타자성의 첫 번째 흔적을 발견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첫 번째 특이한 결과가 도출된다. 즉 회의를 극복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에서부터 타인이 가설의 자격으로, 에고 이전에avant 생성되는 것이다.”(21―강조는 마리옹)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벗어날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던 회의를 극복하기 위한 단초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내 속에 집어넣는”, 따라서 나의 회의가 실제의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신”, 따라서 타인의 존재가능성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어떤 신은 그가 나의 회의, 나의 생각들을 “집어넣는immittit”―마리옹은 이를 “발송하는envoie”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이데거나 데리다를 염두에 둔 것일까?―자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것이 입증될 수 있다면, 그는 바로 나 이전에 존재하는, 즉 시간적으로만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권리상으로 나에 우선하여 존재하는 어떤 자이다. 그렇다면 회의와 확실성, 거짓과 명증의 문제는 이 어떤 신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는 셈이 된다. 어쨌든 마리옹은 이러한 어떤 신이 위에서 제기된 diversum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즉 diversum은 본질적으로 타인일 뿐만 아니라, 에고의 대화자interlocuteur인 어떤 신이다. “신은 [...] 곧바로 에고의 대화자로 인정된다.”(22) 따라서 “회의는 추상적이고 한층 심해지는 [...] 어떤 사유의 유아론 속에서 전개되기는커녕, 에고와 비규정된 타인 사이의 대화의 공간 속에서 전개된다.”(22)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마리옹은 “어떤 신”의 가정에서부터 곧바로 타인의 존재, 더욱이 에고의 대화자로서의 타인을 이끌어내지만, 원문의 형식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고 맥락상의 의미는 가설적 추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데카르트가 어떤 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또는 존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실제로 다음 문장에서 데카르트는 곧바로 이러한 신의 가정이 나 자신이 꾸며낸 것일 수 있다고 반박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마도 나 자신이 이것의 작자일 수도 있는데, 왜 내가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가Quare vero hoc putem, cum forsan ipsemet illarum author esse possim?”(AT VII, 24, 23-24)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또한 아직은 이렇게 생각해야 할 어떠한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옹도 곧바로 이를 인정한다. “분명히 추론은 곧바로 역전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원문의 증거에 굴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대체[어떤 신에서 나 자신으로의]는 대화의 공간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데, 왜냐하면 에고는 그에게 도달하는arrive 관념들의 우발적인éventuelle 원인이 됨으로써만, 자신의 고유한 역할 외에 타인의 역할을 떠맡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22-23) 더욱이 나는 “아무런 감각이나 신체도 갖고 있지 않”(AT VII, 24, 25-26)기 때문에, 타인의 자리에 나의 관념들을 위치시킬 수 없다. 나는 어떤 신의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옹에게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어떤 신의 가정, 즉 “나와 다른 것의 관념의 원인이 내 안에, 하지만 나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23) 가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다.


그러나 마리옹은 묻지 않지만, 아직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아 있다. 그리고 이것은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은 󰡔성찰󰡕에서 성찰을 진행하고 있는 ‘나’라는 화자의 추론, 따라서 이야기histoire의 전개과정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성찰󰡕의 담론 구조에 대한 질문이다. 즉 왜 「두 번째 성찰」의 이 지점에서 어떤 신의 가정이 제기되는가? 마리옹이 구별하는 첫 번째 단계 바로 이전의 문장에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물체와 형태, 연장과 운동 및 장소가 키메라”라고 주장되었으며, 따라서 “아마도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한 가지 것만이”(AT VII, 24, 18) 참된 것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되었는데, 이제 왜 어떤 신의 존재가 가정되는가? 「두 번째 성찰」의 이야기의 수준에서는 이것에 대한 어떠한 추론적 필연성도 제시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야기의 내용에 따르면 이러한 신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내 속에 집어넣는” 자인데, 이는 지금까지의 나의 사유들을 단지 가설에 불과한 것으로, 또는 오히려 어떤 신에 의한 조작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지금까지의 데카르트의 회의의 과정 자체를 허구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데카르트 이야기의 전개 과정 자체의 설득력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왜 추론의 이 지점에서 이러한 어떤 신의 가설을 제기하는가?


전능한 신의 존재에 대한 가정은 사실은 「첫 번째 성찰」의 ‘과장된 회의’의 순간에 이미 등장한 바 있으며, 현재의 어떤 신에 대한 가정은 이것이 다시 제기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리옹 역시 「두 번째 성찰」의 어떤 신의 존재에 대한 가설과 「첫 번째 성찰」의 전능한 신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연결시킨다. “이 순간 「두 번째 성찰」의 모든 논변의 지평을 고정시키는, 적어도 「첫 번째 성찰」에서 에고에 의해 수용된 신념은, 엄밀히 말하면 에고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meae mentis vetus opinio으로부터 도래하는데, 이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어떤 신의 가능성을 고려하게 만든다.”(25―강조는 마리옹) 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텍스트의 담론 구조의 수준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 이 질문들은 󰡔성찰󰡕의 이야기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담론 구조의 문제는 데카르트가 󰡔성찰󰡕을 집필한 이유가 무엇이고, 󰡔성찰󰡕을 통해 제시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은 󰡔성찰󰡕 이전까지의 데카르트의 저작들, 예컨대 󰡔세계󰡕나 󰡔방법서설󰡕 등과 어떤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등과 같은 문제들을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찰󰡕의 이야기 수준의 내용, 즉 이론적 논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Judovitz 1988; Kosman 1986 참조).


그런데 마리옹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을 단순히 “사실성facticité”의 문제로 간주한다. “이러한 의견은 정신에 [...] 강제되며, 정신은 이를 자신 안에 오래 전부터vetus 고정되어 있는infixa 것으로 발견한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의 사실성 덕분에 에고를 규정한다.”(25) 더욱이 마리옹은 이러한 오래된 의견의 사실성이 바로 에고의 타자성, 에고의 대화적 성격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에고가 회의에 들어서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사실성(그것의 원초적으로 비기원적인 “이미 거기에”)에 따라, 비규정적임에도 불구하고 기정되어 있는 어떤 사실un fait accompli 앞에 미리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의견 그 자체로 식별할identifier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으로, 또는 비규정적인 어떤 기만자로 식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어쨌든 에고는, 에고를 그 자신과 동일화해야 하는 유아론으로의 길 위에서 모종의 타자가 자신에 선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는 독백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초적 대화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이다.”(25-26)


여기서 드러나듯이 마리옹이 에고의 타자성, 에고의 대화적 본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결정적인 논거는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는 오래된 의견이 하나의 사실성으로서 미리 에고에게 주어져 있다는 점이며, 그는 이러한 논거로부터 자신의 기본적인 논변을 전개한다. 즉 마리옹은 (1) 자신이 설정한 첫 번째 단계에 나오는 diversum의 중의적 의미의 가능성에 착목한 뒤, (2) 이를 그 다음에 나오는 어떤 신의 가정과 연결 짓고, (3) 다시 이를 에고 이전의 사실성으로, 곧 에고의 원초성을 타자에 의해 정립된 원초성으로 만드는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성으로 확정함으로써, (4) 에고가 자기 이전의 어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초월론적 주체성으로 성립되며, 바로 이 때문에 에고는 근원적으로 타자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 이후의 마리옹의 논변은 이렇게 해서 확정된 논리 구조의 적용에 불과하며, “ego sum, ego existo”에 대한 해석 역시 이러한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


실제로 마리옹은 세 번째 단계에 대한 해석에서, “만약 내가 속는다면, 분명 나는 존재한다Haud dubie igitur ego etiam sum, si me fallit”는 문장을, 두 번째 단계에 나오는 “만약 내가 설득된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certe ego eram, si quid persuasi”는 문장과 연결시켜, 이것 모두가 에고에게 질문하고 따라서 그에 선행하는 어떤 대화적 타자를 가정하고 있다고 해명한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 나오는 “ego sum, ego existo”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리옹은 이를 두 번째 단계의 문장과 바로 연결시킨다. “여기서 “ego sum, ego existo”는 나에 의해, 절대적으로 나에 의해 발언되고 수행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의 “만약 내가 설득된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논거를 재개하는 것인가? 분명 그렇다. 두 경우에서 타인은 논변을 단축하고 그것을 좀더 강렬하게 만들기 위해 배후로 물러선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때 대화의 장치가 소멸된다기보다는, 호명되는interpellé 에고와 호명하는interpellant 에고(자기의 타인으로서)로 전위되고, 거기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힌 바 있다.”(29-30)


“ego sum, ego existo”가 이렇게 에고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어떤 신의 가설과 연결될 수 있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 문장 자체를 에고 자신에 의한 에고의 호명으로 해석하는 것뿐이며, 이는 매우 간단히 이루어진다. “이제 여기서 에고가 자신에 대한 호명을 실행하게 되는 유사한 대화를 도출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여기서 특징적인 수행문의 어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가 자신에 대한 호명으로부터 탄생하는 대화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시간화되어 있는(~할 때마다quoties) 언어행위(발음하다pronuntiatum, 발언하다profertur)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자기의 대화는 [...] 자기에 대한 자기의 표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여기서는 자기에게 말 걸기, 자기에 대한(심지어는 자기에 맞선) 말하기를 인지해야 한다. [...] 존재하지 않는 나는 나 자신을 선행하여 이러한 다른 실존(하지만 나의 것인)을 발음하고 발언하기 위해, 그리고 행동 속에서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든다.”(30) 이렇게 해서 diversum에서 출발하여 “ego sum, ego existo”에 이르는 마리옹의 기본 논변이 완성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말 걸기는 어떻게 “자기에 대한 자기의 표상”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자기에 대한 자기의 말 걸기를 지칭하기 위해 마리옹은 계속 “호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모세와 여호와의 대화를 통해 예시했듯이(Althusser 1995, p. 309), 호명은 나라는 작은 주체와 내가 알 수 없는, 하지만 나를 부르고 내가 그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주체가 되는 대문자 주체, 따라서 큰 타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울작용인데, 이러한 호명이 타자성을 위한 논거로 사용될 수 있는가? 즉 호명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드는 것이 진정 타자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에고의 기만적인 가공에 불과한 것인가? 마리옹은 호명의 타자적 성격을 증명하기 위해 호명의 수행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시간화되어 있는(~할 때마다) 언어행위(발음하다, 발언하다)”가 타자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 또는 여기서 보증되는 타자성이란 어떤 것인가? 마리옹은 정당하게 타자성은 “자기촉발auto-affection과 타자촉발hétéro-affection, 동일자même와 탈자extase의 구별이 확립되기도 전에 작용”(30)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항상 구별 이후에 오는 우리가 이러한 타자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자마자, 그것을 식별하거나 동일화하자마자, 그것은 순수한 가공과 허구, 기만이 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가 앞서 제기했던 질문과 지금의 질문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앞서 “아마도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한 가지 것만이” 참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로 다음에 어떤 신의 가설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수준보다는 텍스트의 담론 구조의 수준에서 질문되고 답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리옹은 이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어떤 신의 가설, 또는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는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을 이미 기정되어 있는 사실로 간주하면서, 바로 이러한 논거에 의지하여 에고의 타자성에 대한 논변을 진행한다. 우리가 어떤 신의 가설을 담론 구조의 수준에서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과장된 회의의 과정 전체는, 게루가 지적했듯이 광기나 꿈과 같이 “회의의 자연적 이유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의견”(Gueroult 1968, p. 42), 다시 말해 전능한 어떤 신의 가설, 따라서 또한 악령의 가설에 의지하며, 이 때문에 악령의 가설은 “데카르트 철학의 몇 가지 진리들”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진리들에 전적으로 낯선 인공물”(Ibid., p. 42)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능한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의견이나 악령의 가설은 󰡔성찰󰡕 자체의 이야기의 수준에서는 해명될 수 없으며, 담론 구조의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데카르트가 광기나 꿈과 같이 바로크 시대의 회의주의자들에 고유한 논거들을 사용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악령이라는 초자연적 가설을 도입하여 󰡔성찰󰡕의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보편 수학의 명석 판명함이라는 진리의 기준만으로는 확실한 진리를 보증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더욱이 코기토에 고유한 순간적, 일시적 성격 때문에 코기토적 확실성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기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즉 “내가 사유하는 한에서quatenus”, “내가 사유할 때마다quoties” 내가 존재한다는 점, 또는 내가 “설득되는 한에서”, 내가 “기만되는 한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점은 절대적으로 기만의 위협을 막아내지 못하며, 내가 사유하는 동안에만, 내가 사유할 때만 진리를 보증해 줄 수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 철학 체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한 회의에 의해서도 반박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는 결국 ‘진실한 신의 전능함’으로부터 보증되는 것이며[여기에는 신의 진실성, 또는 선함과 신의 전능성 사이의 갈등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영원 진리 창조론에 대한 해석과 연관되어 있는 이 문제를 여기에서 다룰 수는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Curley 1984; Beyssade 2001 참조.], 코기토적 진리의 “표본적exemplary” 성격은 명증한 진리에 고유한 취약성과 불안정성을 드러냄으로써, 신이라는 “진리의 표본 자체”로 인도해준다는 데 있다(Beyssade 1993, p. 38). 이렇게 볼 때 만약 우리가 마리옹처럼 어떤 신의 가설을 하나의 주어진 사실성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성찰󰡕의 담론 구조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질문을 생략한다면, 󰡔성찰󰡕의 논변의 의미와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마리옹은 자신이 이 논문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성찰󰡕의 에고가 처음부터 타자적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제기했던 질문을 다시 던져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획득된 에고의 타자성이라는 테제는 과연 데카르트 철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데카르트 철학의 비판적인 성격, 또는 데리다의 용어대로 하자면 첨예한 성격을 오도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탁월한 타인으로서 신의 타자성에 관한 질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리옹은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는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을 하나의 사실성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이 의견에 고유한 갈등과 긴장을 은폐한다. 즉 「두 번째 성찰」에 이르는 데카르트의 논의에서 전능한 신은 진실성과 사악함 사이의 긴장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신인데, 이는 이 신이 데카르트의 논의에서는 과장된 회의를 추동하고 그리하여 절대적인 진리의 보증을 추구하게 만드는 역할만을 수행할 뿐, 그에 대한 보증의 기능을 담당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타자성은 일차적으로 진리의 명증성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절대적 기만의 위협이야말로 에고의 첨예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마리옹처럼 이러한 신에 대한 의견을 “의견 그 자체로, 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으로, 아니면 비규정적인 어떤 기만자로 식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라고 넘겨버릴 수는 없다. 여기서는 그에 대한 식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식별이 없다면 에고의 경험의 첨예함 자체가 무디어질 뿐 아니라, 이러한 첨예한 경험을 통과하지 않고 도달된 신적 타자성은 유한자, 또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이성에 고유한 자기기만과 신비화라는 비판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며, 그 자체가 유한자의 가공물과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파스칼은 이미 이를 지적한 바 있다.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신 없이 철학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세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신에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역할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것 이외에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Pascal 1963, p. 1001)


다음으로는 “ego sum, ego existo”에 대한 해석의 문제다. 「에고의 타자성」의 기본 논지는 에고의 타자성을 통해 해석된 “ego sum, ego existo”는 데카르트 철학에 고유한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타자성의 방향에서 해석하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기 표상, 따라서 마리옹식으로 말하자면 동일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리옹이 제시하는 두 개의 논거는 첫째, 이를 자기에게 말 걸기, 자기에 대한(심지어는 자기에 맞선) 말하기로 이해해야 하며, 둘째, 이러한 말하기는 “존재하지 않는 나는 나 자신을 선행하여 이러한 다른 실존(하지만 나의 것인)을 발음하고 발언하기 위해, 그리고 행동 속에서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든다”(30)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논거는 사실 한 가지 문제로 귀착된다. 어떻게 “ego sum, ego existo”를 타자적인 말하기로 해석할 것인가? 마리옹이 제시하는 진정한 해답은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든다”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는 “ego sum, ego existo”가 어떻게 이런 의미로 파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문장이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해도, 이러한 해석이 기본적으로 부당전제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아직 존재하는 것으로 해명되지 않은, 즉 “ego sum, ego existo”를 통해 비로소 그 존재 여부가 판명되는 에고에 대해 자기 자신을 주체로 동일화/식별할 수 있는 언어 능력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타자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ego sum, ego existo”를 발언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입증되는[코기토의 맥락에서 수행적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스틴보다는 벤베니스트Emil Benveniste의 규정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벤베니스트는 오스틴을 비판하면서 수행적 행위의 의미를 좀더 정치하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규정은 경청할 만하다. “수행적 언표는 하나의 행위이므로 유일하다unique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특별한 상황 속에서만, 단 한 번만, 일정한 날짜와 일정한 장소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 이것은 기술의 가치도, 명령의 가치도 지니지 않으며, 다시 이야기하지만 수행의 가치를 지닌다. [...] 사건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수행적 언표는 사건인 것이다.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이기에 수행적 발화는 반복될 수 없다. 모든 재생자격을 지닌 사람이 수행하는 하나의 새로운 행위이다.” 벤베니스트 1992, 391쪽. 벤베니스트의 입론에 어긋나지 않고서도 우리는 코기토의 경험은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초역사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유일한 사건이라고 정정할 수 있다.] 에고가 이런 능력을 미리 지닐 수 있는가? 더욱이 에고에게 이러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경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코기토의 행위는, 비록 내가 미쳤을지라도, 비록 나의 사유가 전적으로 미쳤을지라도 타당하기 때문”에 “코기토의 행위와 실존은 처음으로 광기에서 벗어난다.”(Derrida 1967, p. 85―강조는 데리다) 반면 마리옹처럼 코기토의 행위를 타자적인 것 내지 대화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에고에게 이미 이성적인 능력을 갖춘 말하는 주체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미리 광인이라는 타자를 배제하는 게 된다. “만약 코기토가 광인에게도 타당한 것이라면, 미친다는 것은 ... 코기토를 반성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즉 그것을 하나의 타자, 나 자신일 수 있는 하나의 타자에 대해 그 자체로 나타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Ibid., p. 91)


이러한 코기토의 경험의 첨예함에 대한 약화 및 광인이라는 타자의 배제가 우연일까? 다시 말하면 이는 마리옹이 설정하는 타자성의 공간, 대화의 장치와 무관한가? 앞서 본 것처럼 그는 자신이 말하는 타자적 공간 속의 타인이 누구인지, 또는 그 타자적 공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보듯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마리옹이 타자와의 대화의 가설에 따라 “ego sum, ego existo”를 해석한 결과는 정작 광인이라는 타자, 심지어는 타자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내가 보기에는 마리옹이 설정하는 타자성이란 코기토적 경험을 좀더 잘 이해하게 해주고, 더 나아가 그것이 오늘날 탈근대성의 문턱에서 직면한 한계를 내재적으로 극복하게 해주는 타자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코기토적 경험의 첨예함에 거스르는 타자성이며, 그 첨예함을 배제한 가운데서만 성립할 수 있는 타자성임을 의미한다.


「에고의 타자성」 논문 서두에서 설정된 두 가지 아포리아의 용어법대로 하면, 코기토의 경험의 첨예함이란 분열, 즉 초월론적 에고와 경험적 자아 사이의 분열의 경험이다. 코기토의 경험은 ‘나는 사유하며, 사유하는 동안 나는 존재한다’는 것, 또는 ‘나는 존재하며, 나는 실존한다’고 말하는 순간 바로 그 말하는 행위로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경험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권리적인 의미에서 세계 전체를 파악하고 초과하려는 기투의 경험이다. 하지만 이러한 코기토의 경험이 보증되고 인정되고 소통되자마자, 곧 “작동”하자마자, 이 경험은 동시에 배제를 작동시키면서 유한한 자아의, 자아들 사이의 경험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코기토에 고유한 타자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코기토가 그에 맞서 자신을 입증하고 확인해야 하는 미지의, 비규정된 타자이며, 이러한 타자가 타자로 설정되자마자 이 타자는 유한한 다른 자아라는 타자와, 자아들 사이의 상호 주관적 소통에서 배제된 광기와 폭력이라는 타자, 또는 진실한 신이라는 타자로 분할된다. 코기토적 경험에 고유한 이러한 불안정 및 분열을 무시한 채 처음부터 원초적 타자성을 추구하는 것은 애초에 특정한 타자를 배제하게 되며, 따라서 타자성을 폐쇄된 공간 속에서의 타자성, 즉 경험적 자아들 사이의 타자성으로 만들게 된다. 내가 보기에 이는 마리옹이 초월론적 주체에 고유한 아포리아를 회피하기 위해 너무 서둘러 상호 주관적 타자성으로, 또는 레비나스적인 절대적 타인의 타자성으로 도피해버린 결과다.


IV

마리옹 자신도 자신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cogito ergo sum이라는 고전적 정식의 배타적 우월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완전하게 증명한 것은 아니라면, 적어도 보여주었기를 희망한다.”(43) 하지만 문제는 “완전하게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 주체에 고유한 분열의 문제를 너무 쉽게 회피하면서 곧바로 타자성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서는”, “신에게는 동일율, 유한한 정신에게는 타자성이 엄밀하게 배정”(45)되어 있다는 것을 자신의 논거로 삼지만, 이는 데카르트를 서양의 존재-신-론에 다시 포섭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러한 배정은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에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옹이 계속해서 데카르트의 도덕에 대해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궁극적으로는 실천의 문제, 즉 권리와 사실의 분열, 간극의 문제다.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는 우리가 (유한하거나 규정된)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때, 우리가 신이나 존재, 또는 무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유한자를 자신의 말의 공표된 의미 속으로 변형시키지 않을 때, 우리가 무한자를 말할 때, 즉 우리가 무한자로 하여금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말하게 할 [...] 때 거짓말할 수 없다.”(Derrida 1967, 90-91)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무한자가 “자신을 사유하고 자기 스스로 말”할 때만이다. 따라서 동일율에는 항상 중간태라는 문법 형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유한한 주체의 권리 밖의 일이며, 이를 빌미로 유한자의 타자성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의 폭력을 권리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유한자가 근원적으로 타자적 존재라면, 유한자에게 무한자, 존재, 신은 항상 분열된 채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주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분열된 타자성을 식별하려는 노력이며, 자신의 사실적 폭력과 분할을 폭력과 분할로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타자성은 유한한 주체의 분할을 폐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회피할 수도 없다. 따라서 마리옹이 에고의 타자성을 주장하고, 또한 이것이 탈근대적 문턱에서 필수불가결한 원칙이라고 주장한다면,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유한한 주체에 고유한 분할을 초과하거나 회피하려 한다면, 이는 탈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근대성의 경계 너머로 후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마리옹의 타자성론은 이 두 가지 경계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참고문헌

벤베니스트, 에밀(1992). 󰡔일반 언어학의 제문제 1󰡕 황경자 옮김, 민음사.
Althusser, Louis(1995). Sur la reproduction, PUF.
Balibar, Etienne(1992). “"Ego sum, ego existo": Descartes au point d'hérésie”,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tome LXXXVI.
Beyssade, Michelle(1993). “The Cogito: Priviledged Truth or Exemplary Truth?”, in Stephen Voss ed., Essays on the Philosophy and Science of R. Descartes, Oxford University Press.

Beyssade, Jean-Marie(2001). “Création des vérités éternelles et doute métaphysique”, in Descartes au fil de l'ordre, PUF.
Curley, Edwin(1984). “Descartes on the Creation of the Eternal Truths”, Philosophical Review 93.
Derrida, Jacques(1967).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Seuil.
(1996). Apories, Galilée.
Descartes, Renée(1974). Oeuvre de Descartes, eds., C. Adam & P. Tannery, Vrin.
(1996). 󰡔성찰 외󰡕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Gueroult, Martial(1968). Descartes selon l'ordre des raisons I, Aubier(2e éd.).
Judovitz, Dalia(1988). Subjectivity and Representation in Descart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Kosman, L. Aryeh(1986). “The Naive Narrator: Meditations in Descartes' Meditations”, in Amélie Rorty ed., Essays on Descartes' Meditation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Marion, Jean-Luc(1991a). Sur la théologie blanche de Descartes, PUF.
(1991b). “L'ego altère-t-il autrui? La solitude du cogito et l'absence d'alter ego”, in Questions cartésiennes, PUF.
(1996). “L'altérité originaire de l'ego”, in Questions cartésiennes II, PUF.
Nancy, Jean-Luc(1978). “Mundus est Fabula”, MLN 93.
Pascal, Blaise(1963). Oeuvres complètes, Ed. L. Lafuma, Seu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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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go sum, ego existo
    from meilette's paper 2008-09-30 00:14 
    (��)������ Ÿ��: ��-�� �������� ������ Ÿ�ڼ��п� ���� ������ ���� �׷��ٸ� ��ego sum, ego existo����� ���ο� ������ ������ �ǹ��ϴ°�? �������� ��
 
 
람혼 2008-08-30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요즘 이곳에 연이어 '진수성찬'을 차려주셔서 저로서는 그냥 편하게 앉아서만 읽기가 오히려 죄송한 마음까지 듭니다.^^; 논문을 다 읽고 나니 마리옹의 어떤 '저의'가 새삼 궁금해지기도 하고 또 스스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기도 한 기분에, 평소 따로 시간을 내서 읽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오던 Questions cartésiennes 두 권 또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베사드만해도 그런 느낌은 아닌데, 마리옹은 데카르트 안에서 너무 '과도하게 많은' 것을 찾아내고 끌어내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개인적 인상을 받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논문의 맥락을 따라가면서 문득, 마리옹은 Husserliana 13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약간 '익살스런' 생각도 잠시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데카르트에 대한 '재평가'는 가라타니 고진도 조금 다른 맥락에서 몇 번 언급한 바 있었지만, 말씀하신바 '너무도 쉽게' 타자성으로 '회피'한 결과가 돼버린 마리옹의 경우는, 아마도 '탈근대'와 '타자성'을 성찰하려는 철학적 기획이 얼마나 많은 '전제조건'들을 또한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하게' 추적하고 검토해야 하는지에 관해ㅡ곧 철학적 아포리아와 대면하는 기본적이면서 동시에 치열한 이론적 자세에 관해ㅡ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끔 해주는 사례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아마도 이 논문이ㅡ직접적으로는ㅡ'말하지 않고 있는' 거시적 본령 역시 이러한 철학적 정치함에 대한 '환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덧붙여, 이러한 이론적 '정치함' 혹은 '치밀함'과 관련하여, 위의 분석이 뜬금없이(?) 제게 새삼 환기시켜준 개인적 감정은, 세태 혹은 정세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너무도 쉽게 '민족주의적' 상호주관성 개념을 통해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김상봉 선생의 저서에 대한 불만이었음도 지나가는 길에 첨언해봅니다.

여담이지만, 마리옹의 '꼬장꼬장한' 실물을 멀리서나마 좀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갔던 '철학자 대회'는 말 그대로 '꽝'이었습니다.^^

balmas 2008-09-01 03:50   좋아요 0 | URL
'진수성찬'이라뇨, 지나친 말이네요. 어쨌든 열심히 읽어주시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이번 철학자대회는 원래 오기로 했던 철학자들이 다수 불참하는 바람에 좀 허전했겠습니다. ㅎㅎ

동구리 2008-09-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마리옹에 대한 졸고를 서강대 철학논집에 하나 실었습니다. 제가 주로 연구한 마리옹의 저작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프리즘"에서는 데카르트 철학의 존재신론적 측면과 존재신론에 포섭되지 않는 측면을 마리옹이 나름대로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보였는데요. 그래서 거기서는 마리옹이 데카르트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의 파스칼의 논의에서 존재신론에 포섭되지 않는 파스칼의 탈형이상학적 기획을 찾아내려 하더군요. 아무튼 위에서 알게 된 마리옹의 두 편의 논문에서는 그가 좀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 같군요(물론 원문 자체를 아직 읽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진 선생님의 건실한 논의를 따라가보자면 말입니다). 꼼꼼하게 써주셔서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저도 마리옹 얼굴좀 보려고 철학자대회 갔다가 허탈감만 느끼고 집에 돌아갔더랬죠^^;;

balmas 2008-09-23 12:48   좋아요 0 | URL
동구리님,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반갑습니다. 부족한 글을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옹에 관해서 글을 하나 쓰셨군요.^^ 마리옹은 국내에 생소한 철학자인데 이미 글을 하나 쓰셨다니, 이쪽 분야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인가 봅니다. 마리옹의 실물을 못봐서 못내 섭섭한 분들이 꽤 있나 봅니다. ㅎㅎ

앞으로도 종종 들러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