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과지성사에서 얼마 전에 나온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문학과 사회} 가을호에
실릴 글인데, 아직 교정이 끝나지 않은 글이니까, 인용은 불허합니다.
이 책은 제 후배들이 번역한 책인데, 번역이 꼼꼼하게 잘 됐고, 필요한 역주도 잘 달아놓아서
읽는 데 도움이 많이 되더군요. 49명의 필자가 쓴 50여편의 글이 실려 있어서 깊이 있고 전문적인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짧은 글 속에서도 진지하고 독창적인 문제의식이 느껴져서
저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깊게 읽은 책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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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에 관한 통념을 두 번 배반하기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가치라는 단어가 많이 운위되고 가치에 관한 담론과 언사가 활발히 전개되는 시대라고 할 만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가치에 관한 말을 많이 하고 또 많이 듣게 되는 나라일 것이다.
왠 생뚱맞은 소리냐고?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한번 인터넷 서점에서 ‘가치’라는 말로 검색을 해보라. 수백 권의 책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중 대부분은 ‘경제경영’, ‘자기계발’ 분야의 책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의 가치투자”, “○○○○의 가치투자 전략”, “물건을 팔지 말고 가치를 팔아라”, “위대한 가치투자자 캐피탈 그룹”, “새로운 도전이 만드는 나의 브랜드 가치”, “한국에서 부자되기 가치투자가 최고다”, “가치를 디자인하라” ... 게다가 새로 들어선 정권은 ‘국격(國格)’ 높이기를 국정과제 중 하나로 삼고 있으니(어떤 이들에게는 한 편의 질 낮은 블랙코미디로 여겨질 만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화두, 트렌드는 가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치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 한 권 더 나온 것은 그리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경제경영 도서 또는 자기계발 도서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치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 책이 가치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두 번 배반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은 가치의 경제화를 당연한 원리로 삼지 않고 진단의 대상 자체로 간주한다. 이는 저명한 지식인ㆍ작가ㆍ과학자ㆍ정치가들로 구성된 이 책의 필자들이 공통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세계화가 산출하는 음울한 현실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들이 보기에 세계화가 산출하는 폐해는 무엇보다 가치의 획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화는 모든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한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듯이 “세계화되는 것, 이것은 우선 시장이고, 모든 교환과 모든 생산물의 뒤섞임이며, 돈의 영속적인 흐름이다.”(57) 따라서 몇몇 필자들이 현재의 세계화를 보편화와 혼동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세계화는 보편적인 것의 획일화 내지 소멸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다른 한편 세계화는 또한 배제와 폭력, 갈등의 확산과 영속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의 국제면을 장식하는 각종의 분쟁과 내전, 국제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세계화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한 폭력과 갈등을 확산시키고 있다. 더욱이 9ㆍ11 테러 이후 명백해진 것처럼 세계화가 촉발시킨 전쟁은 더 이상 군대들 사이의 충돌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아주 새로운 종류의 전쟁이다. “단순히 민간인을 죽이려는 시도가 아니라 민간인이라는 관념을 끝장내려는”(아파두라이, 46) 전쟁, “민간인 상태와 전쟁 상태의 구분”(음벰베, 519)이 깨어지는 전쟁인 것이다.
따라서 여러 필자들이 세계화에서 새로운 식민주의와 새로운 인종주의, 새로운 빈곤의 원인을 찾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책에 수록된 주변부 또는 ‘남쪽’ 지역의 필자들은 대부분 세계화가 자신들의 나라에 얼마나 큰 고통과 갈등, 문제점을 가져왔는지 절박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것은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 사이의 균열의 확대로 인해 “인간 종 내에서 구분되는 두 가지 아종이 출현하리라는 공포”(사가스티, 236)나 타자들(특히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을 차별하고 배제하기 위한 구실로 문화가 활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음보콜로, 524)로 표출되기도 하며, 미국식 세계화에 맞선다는 구실 아래 창궐하는 전통주의 및 자문화중심주의의 폭력(베지)과 “이데올로기적 괴물”로서 이슬람 테러리즘의 구성에 대한 비판(아르쿤)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의 합리성의 상징이자 근대성의 구현 그 자체로 간주되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우려를 종식시킬 수 있을까? 유전자 혁명이 인류를 질병과 기아로부터 구원하리라는 대중매체와 바이오산업의 들뜬 이중창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많은 필자들은 그것은 오히려 세계화의 문제점을 더욱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평가한다. ‘유전학 혁명’이라는 구호 자체가 허풍에 불과할뿐더러(테스타르), 그것이 과학의 권위 아래 새로운 우생학(“유연하고, 친절한, 합의를 통한 우생학”(473)이기 때문에 사실은 더 위험스러운)을 유포하고(사네ㆍ뱅데) 인종주의(고디머, 칸) 및 심지어 “유전학적 종족 말살”(아나스, 500)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악 그 자체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화에서 파괴적인 동질화의 폭력과 악의 모습을 발견하는 반면(보드리야르, 베지), 어떤 사람들은 세계화는 바로 그 경제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도 지닌다고 본다. 가령 데리다가 보기에 현재의 세계화가 보여주는 “언어적ㆍ문화적 헤게모니”는 “공통 언어, 교환, 기술ㆍ과학,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진보에 접근할 수 있게”(212) 해주며, 사예간에 따르면 세계화의 담론은 가장 폭력적인 종족적ㆍ민족적 갈등의 폭발뇌관을 제거하는 “필터 역할을 한다.”(279)
따라서 세계화에 반대하고 미국 및 서유럽의 오만한 헤게모니를 비판한다는 구실로, 손쉬운 문화상대주의나 종족 중심주의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세계화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세계화로 환원되지 않는 보편적인 어떤 것을 모색하고 발명해내려는 노력이야말로 진정으로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적이고, 보편화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 혁명적인 요구”(데리다, 215)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전자 지배 및 우생학의 확산에 대한 우려 때문에 유전학을 비롯한 생명과학의 연구를 금지하는 것은 어리석을뿐더러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악셀 칸이나 류이치 이다가 지적하듯이 유전학은 하나의 과학이며, 그 자체로 본다면 그것은 인종주의나 우생학을 지지하지 않으며 반인종주의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제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유전학을 비롯한 생명과학의 발전은 오히려 인간 본성이나 인간의 존엄성, 생명 등에 관한 새로운 철학적ㆍ윤리적 모색의 계기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공동 저자 목록에 데리다, 리쾨르, 리프킨, 모랭, 바티모, 보드리야르, 크리스테바 등과 같이 그야말로 화려한 사상계의 스타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혹시 가치에 관한 고담준론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적어도 무언가 확고한 답변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상당히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이 가치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배반하는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니체가 잘 간파했듯이 가치라는 단어는 그 고상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말이다. 가치는 우리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지침이나 준거가 될 만한 타당한 기준이기에 앞서, 가혹한 생존 투쟁에서 승리한 강자의 규범이나 위계질서인 것이다.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라는 또는 신의 율법이라는 지극히 숭고한 가치 아래 국가와 종족의 파괴가 자행되고, 테러와 무자비한 폭력이 정당화되는 일이 충격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에 관한 진정으로 어려운 물음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며, 그것을 실제로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위험, 그것은 ...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공유된 가치들의 부재이다”(30)라는 아지자 베나니의 말은 이 책 전체의 ‘서론’으로, 화두로 삼을 만하다. 이 문제에 대해 “쇠퇴의 문명”(바티모, 44)을 해법으로 제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전술적 인간주의”(아파두라이)나 타자에 대한 개방의 방법으로서 “악마의 변호사”(슬로터다이크)라는 은유를 제시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감각적인 리비도”(마페졸리)나 “자기에 대한 재비판을 실행하는 능력”으로서 “정신적인 것”(디아뉴, 181)에서, 또는 “여성적 독특성에 대한 긍정”(크리스테바)에서, “가치들의 미래 연구”(뱅데) 자체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특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남들은 이렇게 가치를 하나의 물음으로서 전개할 줄 안다는 점이다. 삶을 가치 속으로, 또 가치를 삶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이, 가치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이중으로 배반하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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