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발표 예정인 논문의 축약본입니다.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이 글에 관해 지적할 사항이 있으신 분은 코멘트를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기원인 개념

 

1. 자기원인 개념의 수용

자기원인(causa sui) 개념은 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 또는 코나투스(conatus) 개념 등과 더불어 스피노자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이는 그럴 만한 자격을 지닌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원인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더 많이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자기원인 개념은 형용모순이거나 또는 적어도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신비적이고 불가해한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니체 『선악을 넘어서』, 하이데거의 『동일성과 차이』, 헤겔의 『회의주의와 철학의 관계』).
  이 글에서 우리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자기원인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이다. 이 개념에 대한 통상적인 수용방식들은 이 개념이 보여 주는 외양적인 형용모순적 성격에만 치중함으로써 이 개념이 스피노자 철학, 특히 『윤리학』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와 기능을 간과해 왔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의미와 기능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이 개념이 『윤리학』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꼼꼼한 문헌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먼저 자기원인 개념의 정의 및 이 개념의 활용방식이 매우 특이하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이성의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윤리학』 이전의 저작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 및 데카르트의 『『성찰』의 반론에 대한 답변들』에서 이 개념의 의미를 검토할 생각인데, 이러한 검토는 이러한 특이성이 사실은 자기원인 개념의 비신학적 용법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마지막에서 우리는 이러한 논의에 기초하여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은 초월성에 대한 비판과 내재적 관계론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설정된 개념이며, 이는 스피노자의 주요 개념들 및 인과론, 그리고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함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2. 자기원인 개념에 대한 텍스트 분석

1) 자기원인 정의의 독특성

자기원인 개념은 『윤리학』 1부 [신에 대하여De Deo]의 첫번째 정의로 제시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 특히 헤겔은 이 개념이 절대자, 또는 신을 표현해 주고 있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윤리학』의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는 주목할 만한 문법적,의미론적 비규정성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자기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나는 자기원인을, [1]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으로, 또는 [2]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밖에는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Per causam sui, intelligo id, cujus essentia involvit existentiam, sive id, cujus natura non potest concipi, nisi existens.” 문법적인 차원에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가 “것”으로 번역한 “id”라는 중성지시대명사다. 이는 완전히 비규정적인 표현으로서, 단어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자 또는 실체만이 아니라, 양태, 곧 사람이나 기타 사물 중 그 어떤 것이든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스피노자가 자기원인이라는 개념으로 신 또는 절대자를 표현하려고 했다면, 왜 그는 곧바로 “나는 자기원인을,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신으로, 또는 ~인 신으로 파악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자기원인 정의와 관련하여 첫번째로 제기되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규정성은 우리가 자기원인 정의의 내용을 살펴볼 경우 또다른 측면을 드러낸다. 문제는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제시된 내용을 자기원인 개념의 정의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자기원인 정의에 나오는 두 가지 규정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정의에 고유하게 부여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데카르트가 『성찰』이나 『『성찰』 반론들에 대한 답변들』에서 신존재증명 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규정들이기 때문이다(AT VII, 65-68). 따라서 이처럼 다른 맥락에서 제시된 규정들을 첫번째 정의로 제시한 이유는 무엇이고, 그 경우 스피노자 정의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2) [신에 대하여]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이례적인 용법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은 1부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도 단 6차례, 곧 정의 1(G II 45), 정리 7의 증명(G II 49), 정리 12의 증명(G II 55), 정리 24의 증명(G II 67), 정리 25의 주석(G II 68), 정리 34의 증명(G II 77)에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은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독특한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자기원인 개념은 네 번의 증명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정리 7의 증명이다. 정리 7은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Ad naturam substantiae pertinet existere”이며, 그 증명은 “[A] 실체는 다른 사물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앞의 정리의 따름정리에 따라). [B] 따라서 이는 자기원인일 것이다. [C] 곧 (정의 1에 따라)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 또는 그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Substantia non potest produci ab alio(per Coroll. Prop. praeced.); erit itaque causa sui, id est(per Defin. 1), ipsius essentia involvit necessario existentiam, sive ad ejus naturam pertinet existere”이다. 이 정리의 증명의 특징은 제대로 된 증명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사물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고 말한 뒤에 곧바로 “따라서 이는 자기원인일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정의 1에서 표현된 자기원인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당한 증명이라면 오히려 A에서 어떻게 C라는 내용이 논리적으로 따라나오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마지막에 B, 곧 “따라서 이는 자기원인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얼마든지 증명의 형식에 맞는 증명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둘째, 자기원인 개념이 보여주는 또다른 변칙적 성격은 이 개념이 신존재증명에서는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곧 『윤리학』에서 신의 실존에 관한 네 가지 증명이 제시되고 있는 정리 11의 증명과정에서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데카르트에서 이 개념의 용법이나 『윤리학』 이전의 저작에서 이 개념의 용법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변칙, 이례성이다.

3) 『윤리학』 이전 저작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

『윤리학』 이전의 저작에서 자기원인이라는 표현은 여러번 사용되고 있다. 『지성개선론』에서는 단 한 차례(92절) 사용되고 있고(G II 34)), 『윤리학』이 저술되기 이전의 서신교환에서도 한 차례 사용되고 있지만(G IV 11), 네덜란드어 번역본만 남아있는 『소론』에서는 라틴어의 “causa sui”에 해당하는 “oorzaak van zich”라는 표현은 8번 등장한다.
  이중 주목할 만한 용법은 첫째, 우리가 위에서 자기원인에 대한 통상적인 관점이라고 부른 것, 곧 니체가 조롱하고, 헤겔이 사변화한 자기자신에 대한 자기의 시간적 선행성이라는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소론』 2부 17장 5절의 용법이다.
  둘째, 좀더 주목할 만한 것은 자기원인 개념이 선험적 신증명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소론』에서 자기원인에 관해 비교적 명시적인 규정을 제시하고 있는 두 가지 용례(1부 1장 10절(G I 18); 1부 7장 12절(G I 47))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이 두 용례는 모두 후험적 신증명에 대한 선험적 신증명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용례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선험적 증명은 후험적 증명보다 우월한데, 이는 선험적 증명은 자기원인으로부터 증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런데 역으로 스피노자는 후험적 증명의 열등성은 외적 원인으로부터 진행한다는 데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원인 개념의 중요성은 이것이 바로 내적 원인이라는 데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데카르트와 자기원인 개념의 발명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의 특이성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용법을 고찰해 보는 게 필요하다. 자기원인 개념을 처음으로 실정적으로 사용한 데카르트는 『성찰』에 대한 [논박]에 답변하면서 이 개념을 [첫번째 답변]과 [두번째 답변], [네번째 답변] 세 차례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의 용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데카르트는 [답변들]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시간적 선행성이라는 관점을 배제하고 원인 개념을 생산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어떤 것이 자기자신의 작용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 원인의 개념은 엄밀히 말하면 단지 원인이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하는 한에서만 적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에 앞서지 않는다.”(AT VII, 108―강조는 인용자) 이는 왜 스피노자가 『소론』 2부 17장 5절에서 시간적 선행성이라는 의미에서 자기원인 개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2) 데카르트는 일종의 충족이유율의 최초형태를 제기하면서, 작용인으로서의 자기원인 개념은 최초 원인의 가능성을 근거짓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최초 원인은 자기원인의 형태로만 가능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무한소급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하지만 나는 아주 거대하고 소진될 수 없는 권능을 소유하고 있어서, 최초로 실존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고, 지금도 자신의 보존을 위해 어떤 도움도 요구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자기자신의 원인인 어떤 것이 실존할 수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AT VII, 108-109)고 주장한다.
  두번째 측면은 데카르트 철학 체계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데, 이는 이 정식이 인과율을 피조물의 영역에 한정시키지 않고, 신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자의 영역으로 확대하고, 따라서 존재의 가장 보편적인 원리로 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답변들]의 데카르트를, 아퀴나스와 구분시켜 줄 뿐만 아니라, 인과성의 범위를 관념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성찰』의 데카르트와도 구분시켜 주는 핵심적인 차이점이다. 더 나아가 데카르트는 이처럼 최초로 자기원인 개념을 실정적으로 사용함으로써 1630년 이래 자신의 형이상학의 숨은 원리로 작용해 온 영원진리 창조론과 갈등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영원진리 창조론의 형이상학적 핵심이 일체의 가지성의 원리를 넘어서는 신의 파악 불가능한 초월성에 있다면, [답변들]의 자기원인 개념은 이처럼 인과율 또는 근거율을 신 자신을 포함하는 보편적 원리로 격상시킴으로써, 신 자신조차도 이 원리에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아르노에 대한 [네번째 답변]에는 자기원인이라는 개념이 유비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여전히 인과율의 적용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4.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의 독특성: 이례성의 해명

이러한 우회는 우리가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을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1) 초월성 비판과 내재적 관계론의 확립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학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곧 스피노자는 이 개념을 신존재증명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자기원인 개념이 실체(정의 3)나 신에 대한 정의(정의 6)가 제시되기에 앞서 정의 1에 제시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신과 결부되어 제시되지도 않는다(정리 12의 증명에서 비로소 자기원인과 신은 결부된다. 그러나 이는 신의 실존이 증명된 이후의 일이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자기원인 개념을 반박한 철학자 또는 신학자들 모두는 단지 이 개념이 자기모순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 개념이 신의 초월성이나 신의 무한성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를 반박했으며, 데카르트는 선험적 신존재증명의 가능성을 확립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원인 개념을 실정적인 개념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존재증명의 두번째 길에서 자기원인 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자기자신의 작용인이라는 것은 발견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자기자신보다 선행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용인들을 따라 무한하게 소급해 가야 한다면, 최초 원인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이 신이라 부르는 최초의 작용인이 실존한다는 점을 긍정해야 한다.”(신학대전』 1부 두번째 문제 제 3절 Iª q. 2 a. 3 co.)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이 세계, 이 세계에서 발견되는 작용인의 질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를 근거짓는, 또는 적어도 이를 시작하는 최초의 원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게 아퀴나스의 논변이다. 이는 아퀴나스의 논변은 다른 신존재증명과 마찬가지로 근거의 정초라는 맥락, 곧 논리적 요청이라는 맥락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독창성이 존재한다면, 그는 『성찰』에서는 관념들의 인과성에 따라, 그리고 ⌈답변⌋에서는 보편적인 인과성에 따라 선험적으로 신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서 자기원인은 정의, 그것도 첫번째 정의로 제시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체의 증명의 맥락, 논리적 요청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스피노자에서 자기원인은 이러저러한 존재의 필연적 실존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필연적 실존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점을 의미한다. 곧 이는 누구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누구의 실존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있음이라는 사태 자체이다. 따라서 자기원인 개념의 사용에서 스피노자에게 독창성이 있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이 개념을 신존재증명이라는 맥락에서, 어떤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는 논거라는 기능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는 우연과 무질서만이 남지 않는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거듭 강조되는 필연적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 이에 관해 스피노자는 주목할 만한 일관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스피노자의 근거율의 독특성에 있다. 스피노자는 정리 11의 신의 실존 증명에서 주목할 만한 근거율 테제를 제시한다. “모든 사물에 대해, 그것이 실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비실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원인 또는 이유(causa seu ratio)가 존재해야 한다.”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자연과 은총의 원리] 7절)라는 라이프니츠에 고유한 근거율과 비교해 볼 때, 이 테제의 고유성은 무와 실존을 동등한 두 개의 항으로 정립하는 게 아니라, 비실존, 곧 무를 이미 실존의 한 양태로 포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첫째, 스피노자에게 무는 가능한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 논리적 근거, 인과적 원리는 항상 이미 일어난 있음이라는 사태, 곧 자기원인의 사태 이후에 적용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왜 정리 11에서 자기원인이 증명의 근거로 사용되지 않고, 대신 이것에서 파생된 근거율 테제가 사용되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왜 스피노자에게 필연적 질서가 존재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자기원인과 근거율이 제시된 이후에는 내재적 관계만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스피노자가 내재성을 줄곧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소론』의 [대화]에서부터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스피노자의 어휘법이다. 곧 스피노자는 내재적 원인(causa immanens)과 타동적 원인(causa transiens)을 계속 구분하면서, 신 또는 실체는 내재적 원인(자신의 결과를 자신 안에서 생산하는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자기 바깥에 자신의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스피노자는 『소론』 이후에야 비로소 실체-우유라는 전통적인 용어법 대신 실체-양태 또는 실체-변용이라는 용어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역시 내재성에 대한 강조를 말해 준다. 곧 우유가 “실체 없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인데 반해, 양태는 항상 “실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체와 양태 또는 변용이라는 용어법은 자기원인에 동반된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eo senus)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고 불려야 한다”(1부 정리 25 주석)는 스피노자의 주장 역시 내재적 관계의 형성과 결부되어 있다.  

2) 인간학적 함의

  자기원인 개념의 인간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고 불려야” 하며, 따라서 신이 모든 사물에 내재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필연의 법칙에 구속시킴으로써 이 사물들의 자유 또는 능동성의 여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 사물들의 능동성의 근거가 된다. 정의상 강제하거나 구속한다는 것은 외재적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따라서 일체의 외재성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강제하거나 제약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한한 사물의 “자기”, 곧 능동성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유한한 사물은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절대적” 자기,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존재자일 수는 없으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덕분에 원초적인 능동성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말하자면 3인칭의 관점이다. 곧 1인칭의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의 세계는 의미의 상실을 가져 온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목적론적 관점은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인간은 “왕국 속의 왕국”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가상의 투사에서 생긴다. 궁극적 목적에 따른 자연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스피노자는 1인칭의 가상으로 폄훼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가상 속에서, 스피노자가 상상이라고 부르는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이를 3인칭의 관점에서 폄훼하는 것과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스스로 이를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적 과제는 자기원인에서 비롯하는 이 두 가지 인간학적 함의들을 어떻게 결합시키는가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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