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데리다의 최근 작업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유령들󰡕이다. 이는 이 책에서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인 분석을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철학의 주요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령들󰡕 (및 최근의 작업 전체)은 데리다 자신의 초기 문제설정의 ‘내재적 정정’과 마르크스의 유산에 대한 ‘비판적 상속’이라는 이중적 관점에서 읽혀져야 한다. 

  󰡔유령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데리다의 철학적․정치적 문제설정은 유령론(hantologie)으로 집약된다. 차이가 차이와 음성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론(ontologie)과 음성상으로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유령론’은 차이의 문제설정의 핵심을 계승하면서 이를 정치의 해체를 위한 요소들로 재가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유령론은―차이가 현전의 철학을 해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생생한 현재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계속해서 되돌아오는(revenant) 유령들(spectres/revenants)을 몰아내고자 하는 존재론(“존재론은 하나의 푸닥거리이다.”(󰡔유령들󰡕, 283))을 해체시킨다. 이때 유령은 살아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계속 출몰하고 되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소멸해 있는 것도 아니며, (면갑 속에 가려져 있어) 그 동일성을 확인할 수 없는 “어떤 한 타자로서의 어떤 /하나”(quelqu'un comme quelqu' un d'autre)(󰡔유령들󰡕, 18)1)로 남아있다는 의미에서 탁월하게 차이적인 것이다. 하지만 유령론은 시간내기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차이의 문제설정과 상이한 면모를 보여준다. 즉 차이의 문제설정에서는 시간내기의 작용이 생생한 현재의 시간화, 특히 목적론적 시간화를 해체하기 위해서 예정된 목적을 지연시키고 일탈시키는 작용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비해, 유령론에서 시간내기는 근본적으로 (의사-)종말론적인 도래(à-venir)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시간성, 또는 “메시아주의없는 메시아적인 것”(󰡔유령들󰡕, 110)의 구조는 󰡔유령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데리다 정치철학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이며2), 마르크스주의의 유산들에 대한 “선별적 상속”의 기본 원리를 구성하는 것이므로 좀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령들󰡕에서 종말론적 시간성에 대한 고찰은 “The time is out of joint.”라는 햄릿의 탄식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문맥대로라면 “시대가 제멋대로이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문장을 데리다는 시간에 대한 하이데거의 고찰 및 벤야민/레비나스의 정의 개념과 관련시켜 복합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때 핵심적인 것은 ‘out of joint’가 이중적 함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out of joint/aus den Fugen/hors de ses gonds'는 한편으로는 원래 진행되어야 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연결고리, 이음매(joint/Fuge/gond)가 빠져 있는 것, 따라서 불의(adika)를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정된 시간적 진행이 현전의 질서이면서 동시에―정의와는 구별되는―법적 질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out of joint’는 ‘현재’들의 선형적 연속에서 은폐되고 억압되어 있는 시간내기의 “증여 사건”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현재, 현재, 미래-현재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화에서 의사초월론적 근거를 구성하는 것은 현전하는 것들을 이어주는 이음매로서의 joint인데, ‘증여의 사건’은 선형적 시간화에서는 현재들의 연속 속에서 억압되어 있다가 ‘out of joint’의 순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out of joint’는 폭력과 일탈을 의미할 수 있는 반면, 그 자체 독점된 폭력에 다름아닌 법적 질서의 연속이 해체되고 전위될 수 있는 기회, 즉 (벤야민적 의미에서) “메시아적 정의”가 도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out of joint’가 한편에서는 불의와 폭력, 다른 한편에서는 정의라는 두 가지 가능성의 동시적 개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들의 선별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불의와 폭력의 위험 속에서 ‘out of joint’를 정의가 도래하는 기회로 만들 수 있는가? 데리다는 이 문제가 전적으로 우리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타자와의 관계가 곧 정의이다.”(󰡔유령들󰡕, 44)라는 레비나스의 함축적인 테제에서 유래한다. 레비나스적인 정의관에 따를 때 타자와의 관계는 어떤 존재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타자와 동등하게 맺는 관계가 아니라, 타자와의 “무한한 비대칭성”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탈-정립(ex-position)”하면서 타자에게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또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은 또한 자기의 동일성을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데리다에게서 이러한 타자에 대한 책임, 환대(hospitalité)는 일반적인 윤리적 요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례로 데리다는 󰡔곶󰡕에서 유럽적 동일성의 상속과 비유럽적 이타성에 대한 개방의 문제를 상호연관된 문제로 취급하고 있으며3), 󰡔유령들󰡕이 간행된 직후 이루어진 한 인터뷰에서는 환대의 대상 중 하나를 유럽의 이민노동자로 명시하고 있다4).  따라서 유령론의 종말론적 시간성 역시 종교적인 것으로의 복귀나 칸트적 의미에서의 규제적 이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도래하고 도래해야 하는 “[해방의] 약속의 형식적 구조 ... 해방의 약속의 특정한 경험”(󰡔유령들󰡕, 110)을 의미하며, 타자의 도래라는 정의의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환대할 것을 요구하는 실천적 명령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자의 도래는 차이의 조건 자체이다. “이타성 없이는 차이도 없고, 독자성(singularité) 없이는 이타성도 없으며, 지금-여기 없이는 독자성도 없다.”(󰡔유령들󰡕, 60)

  이러한 타자에 대한 책임, 자기동일성의 해체는 마르크스를 포함한 근대적인 해방의 정치를 ‘선별적으로’ 상속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데리다의 유령론이 푸코나 들뢰즈 등과 같은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상과 더불어 탈해방적(post-emancipatory) 정치 또는 탈혁명적 정치의 문제설정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적 해방의 정치가 한편에서는 자율적 주체의 구성, 다른 한편에서는 지배구조의 전화를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했던 것에 비해, 유령론의 탈해방적 정치는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역설, 즉 해방운동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과 지배로 전도되는 역설의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적인 해방의 정치는 현전의 존재론과 순수한 동일성의 인간학에 기초하여 유령과 현실, 적과 우리, 선과 악, 폭력과 해방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5). 그리고 해방의 정치는 지배구조의 전화(이것이 곧 혁명인데)를 통해 이러한 지배와 폭력이 소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데리다에게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폭력과 저항의 관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경계, 비대칭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인 악, “원초적 폭력”(󰡔그라마톨로지󰡕, 226)은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고유성, 자기보존이 불가피하며, 이에 따라 또한 타자의 배제와 억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데리다가 볼 때 유령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마르크스의 시도는 오히려 (혁명적 주체의) 순수한 동일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며, 자신의 유한성, 자신의 폭력성을 혁명의 목적론, 즉 지양의 목적론을 통해 삭제하려는 원초적 폭력의 간지(奸智)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현재’처럼 폭력적인 세계화의 질서 속에서 해방의 정치와 마르크스의 유산을 상속하고 보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말하지만, 또한 이러한 상속은 항상 비판적 선별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유령들은 항상 “하나 이상이자 더 이상 하나가 아니”(le plus d'un)6)(󰡔유령들󰡕, 6)며, 우리가 그 유산을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존재한다면 또한 마르크스가 몰아내려고 했던 마르크스 자신의 유령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령들󰡕에서 이러한 선별적 상속의 과제는 데리다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교통(communication), 또는 차이들 사이의 개방적 관계설정의 과제로 집약된다. 이는 분명 쉬운 과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제는 한편으로 구조적인 착취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대항폭력의 조직이 불가피하다는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해방운동의 역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폭력은 스스로를 해체하는 폭력이어야 한다는 요구 모두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인터내셔널, 즉 “신분과 직위, 호칭 없이, 은밀하지는 않지만 거의 공적인 것도 아니며, 계약을 맺지 않고 “이음매 없이”, 조정(調整) 없이, 당과 조국, 민족 공동체, ... 공동시민성 없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 소속 없이 이루어지는 비동시대적인 연대”(󰡔유령들󰡕, 151)는 폭력적인 세계화의 전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수단 중 하나이며, 새로운 해방의 정치의 불가결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점이다.


4


  데리다는 이전에 그가 구체코슬로바키아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직면했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다. “어떻게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이들의 요구를, 이러한 철학소들은 형이상학적인 또는 로고스중심적인 전통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중재시킬 수 있을 것인가?”7) 이러한 데리다의 고민은 ‘우리’에게 데리다라는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즉 데리다라는 유령을 어떻게 ‘공정하게 대우’(do justice to)할 것인가에 대해 중요한 시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숙고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의 데리다 연구는 지난 10여년 동안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데리다의 다양한 면모를 다루고 있는 글들을 묶은 󰡔데리다󰡕와 그외의 몇몇 저작들은 앞으로 보다 진전된 연구를 위해 필수적인 준거점의 구실을 해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실 데리다는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의 허깨비, 유령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상당한 명망을 지닌 역자들이 아무런 책임의식도 없이 20세기 후반에 인류의 중요한 지적 성과를 산출해 낸 철학자를, 기본적인 논리나 조리 있는 문장력도 갖추지 못한 얼치기 철학자로 탈바꿈시키는 한에서, 그리고 한 권의 책, 한 편의 글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몇몇 상투어들을 읊조리면서 데리다라는 허깨비를 푸닥거리해 내려고 하는 한에서, 또한 우리라는 ‘동일성’에 집착하여 그 동일성이 지니는 위험과 폭력을 일깨워주는 철학자를 우리와 무관한 타자, 심지어 우리에게 해로운 타자로 몰아내려고 하는 한에서, 데리다는 허깨비 이상일 수 없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 계속해서 되돌아오기 마련인 이 유령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시달릴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데리다라는 유령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길은 내가 보기에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타자를 위해 던졌던 질문을 이번에는 우리가 우리의 타자인 그에게 돌려주는 길이다. 어떻게 타자의 폭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 우리의 과제를,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책임 아래 절대적으로 우리를 개방해야 한다는 데리다의 요구와 중재시킬 것인가?  


1) 하나(일자, un)는 그것이 어떤 하나로 정립되고 인식되면 ‘같은 것’(동일자, même)이 된다. 이러한 하나의 자기자신으로의 원초적인 복귀운동, 따라서 ‘같은 것’의 생성운동이 곧 자기현전 또는 전유/고유화의 운동이며 이를 통해 어떤 개체, 하나의 자기동일성이 구성된다.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에서 유령이, 자기로 복귀한 하나로서의 같은 것이 아니라 타자, 즉 자기동일성에서 이미 차이화된 어떤 것/하나라고 말함으로써 유령이 탁월한 차이적 사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사실 여기에는 󰡔유령들󰡕 1장에서 나타나듯이 레비나스의 정의 개념과 후기 하이데거의 존재사건(Ereignis)에 대한 사유, 그리고 벤야민의 역사철학이 응축되어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유령들󰡕을 󰡔법의 힘󰡕과 󰡔위조화폐󰡕, 󰡔아포리아󰡕(trans. Thomas Dutoit Aporias: Dying-Awaiting (One Another at) the 'Limits of Truth'(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와 관련하여 읽어야 하지만,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3) “유럽에 대한 기억의 소환에 대답해야 할 의무 ... 이 의무는 ... 유럽이 아닌 것, 한 번도 유럽이었던 적이 없는 것, 앞으로도 절대 유럽이 되지 않을 것을 향해 유럽을 개방하라고 명령한다. 동일한 의무는 또한 외국인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이타성을 인식하고 수용하기 위해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명령한다. 이러한 환대의 두 가지 개념은 오늘날 유럽적인 동시에 민족적인 우리의 의식을 분열시키고 있다.”(󰡔곶󰡕, 64(강조는 데리다))

4) “The Deconstruction of Actuality”, Radical Philosophy 68, 1994 Autumn 참조.

5)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차이의 유한하고 무한한 과정들로서 관념성의 근원성과 그에 고유한 효력, 그것의 자율화와 자동화(...)를 존중할 것을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유령적 모사물에 대한 그의 비판 또는 축귀(逐鬼, exorcisme)를 하나의 존재론 ... 현실적 실재이자 객관성으로서 현전의 존재론 ... 위에 근거 지으려고 한다”(󰡔유령들󰡕, 299). 즉 “그들[슈티르너와 마르크스]은 살아있는 육체에 대한 무조건적 선호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살아있는 육체를 재현하는 모든 것, 살아있는 육체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그것에 되돌아오는 것, 즉 보철물이나 대리물, 반복, 차이에 맞서 끝없는 전쟁을 치른다. 살아있는 자아는 자기 면역적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유령들󰡕, 245-246).

6) le plus d'un은 국역본에서처럼 “하나 이상”이라고 번역되어서는 안되며 “하나 이상이자 더 이상 하나 아님”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불어에서 plus는 영어의 more처럼 “~이상”의 의미를 가지면서 또한 ne ... plus 용법에서는 “더 이상 ... 아님”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현재의 맥락에서 “하나 이상”은 유령들의 복수성을 의미하며, “하나 아님”은 주 13)에서 말했던 것처럼 유령들이 자기동일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는 󰡔기억들: 폴 드만을 위하여󰡕에서 le plus d'un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하나의 언어 이상이자 더 이상 하나의 언어 아님”(plus d'une langue―both more than a language and no more of a language), Mémoires: for Paul de M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6), p. 15(강조는 데리다).

7) P. Lacoue-Labarthe, et al., Le retrait du politique (Paris: Galilée, 1983), pp. 203-204; Simon Critchley & Peter Dews eds., Deconstructive Subjectivities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6), p. 27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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