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현대 비평과 이론』, 1997년 가을/겨울호에 그 때까지 출간된 데리다 저작 및 국내의 데리다 연구에 대한 주제서평의 형식으로 발표된 글입니다. 좀 개략적인데다가,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점들도 있긴 하지만, 국내의 데리다 수용 현황을 점검하고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문제설정을 고찰해보는 데 어느 정도 유용하다고 생각돼서 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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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비평과 이론󰡕, 1997년 가을․겨울호



차이에서 유령론으로: 국내의 데리다 수용에 대한 하나의 반성을 위하여1)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입장들󰡕 (박성창 옮김, 솔).

󰡔해체󰡕 (김보현 옮김, 문예출판사).

󰡔다른 곶󰡕 (김다은, 이지혜 옮김, 동문선).

󰡔마르크스의 유령들󰡕 (양운덕 옮김, 한뜻).

󰡔데리다 읽기󰡕 (이성원 엮음, 문학과 지성사).


진 태 원

(서울대 박사과정․철학)



                                            1


  데리다의 논문이 하나둘씩 번역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잡는다면 이제 국내에 데리다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지도 1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여러 연구자들의 소개와 연구 덕분에 10년 전만 하더라도 생소했던 데리다의 사상이 이제 교양대중들에게까지 비교적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라마톨로지󰡕나 󰡔입장들󰡕 같은 초기의 저작들에서부터 󰡔해체󰡕에 실려 있는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포함하여 󰡔다른 곶󰡕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최근의 저작들에 이르기까지 다섯 권의 국역본이 출간되었다2).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이러한 노력과 성과는 분명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내의 데리다 연구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데리다의 국내 소개와 연구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우선 번역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이 문제는 현재 국역되어 있는 다섯 권의 저작 중 󰡔입장들󰡕과 󰡔곶󰡕을 제외한 나머지 세 권의 경우 역자들의 기본적인 이론적, 어학적 소양이 의심스러울 만큼 번역상태가 엉망이라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번역은 외래사상을 소개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어떤 한 저서에 대한 번역은 기계적인 1 : 1 산출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부가적인 문화적,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데리다 저작의 국역본 중 절반 이상이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국내의 데리다 연구의 수준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지표로 간주될 수 있다.

  번역의 문제 이외에도 국내의 데리다 연구는 그의 저작들 중 비교적 ‘초기’3)의 것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 시기 동안 데리다 사상의 기본적인 골격과 요소들이 형성된 것은 분명하며, 따라서 데리다 수용의 초기 단계에 놓여 있는 국내에서 이 시기의 작업들이 집중적인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문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연구양상이 데리다 또는 다른 탈근대적 사상가들의 국내 소개의 조건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또한 더 나아가서는 최근 데리다 작업의 일정한 변모를 평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국내의 데리다 연구의 굴절과 공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데리다 연구에서 국내 소개의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데리다나 다른 탈근대적 사상가들이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위기와 붕괴라는 정세를 배경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리다를 포함한 탈근대적 사상의 국내도입은 충분한 이론적 검증과 정당화를 거쳐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외재적인 역사적 사건의 효과에 편승한 측면이 많으며, 이 때문에 오히려 탈근대적 문제설정(problématique)의 관여성 자체가 반감되어 한때의 유행이나 이데올로기적 가면으로 치부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 문제는 최근 데리다의 작업과 관련해 볼 때 더욱 커다란 맹점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80년대 이후, 특히 90년대 들어서면서 마르크스주의(󰡔유령들󰡕), 정치4), 법5), 유럽공동체(󰡔곶󰡕) 등과 같이 그가 이전까지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에 대해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계속 출간함으로써 ‘윤리적 전회’ 또는 ‘정치적 전회’를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비해, 국내의 데리다 연구자들은 도입조건의 제약에 의해 이에 대해 적합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그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최근 작업들은 그의 사상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해체의 문제설정이 지니고 있는 비판적, 정치적 함의들을 보다 구체화해 줌으로써 그의 사상이 ‘우리의 문제’(이것을 근대화라고 하든, 해방이라고 하든 간에)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좀더 분명하게 평가해 볼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난 10여년 간의 데리다 소개와 연구에 대한 반성을 겸하여 최근 데리다의 작업이 이전의 작업과 어떤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여주는지 검토해 보는 것은 앞으로 보다 진전된 연구를 위해 다소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검토를 위해서는 우선 초기 데리다 작업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데리다 자신은 자신의 작업을 어떤 하나의 개념이나 용어에 따라 명명하는 것을 극히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데리다 작업의 기본적인 성격과 방향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유용한 출발점은 「차이」라는 강연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데리다의 차이는 의미론적으로 볼 때 차이화하고 지연하는 이중작용을 의미한다. 즉 차이는 서로 구분되는 것들, 다른 것들을 구분되고 다르게 만드는, 간격, 거리, 공간을 만들어내는 공간내기(espacement)와 함께 예정되고 계산된 목적, 결과를 지연시키고, 유보시키는 시간내기(temporisation)의 결합작용이다. 따라서 (차이의 체계 이전에 존재하는 실증적인 항은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차이의 작용은 여전히 어떤 “중심을 갖는 체계”라는 관념, 그러므로 어떤 초월론적 기의의 (자기)현전이라는 관념을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간에) 전제하는 데 비해, 데리다의 차이는 현재를 중심으로 이전에 현재했던 과거-현재와 앞으로 현재하게 될 미래-현재의 계기적 연속과정인 선형적 시간화(temporalisation)가 자신의 은폐되고 억압된 근거로서 시간내기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언어학적․인류학적 구조주의(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만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철학까지도 포함되는 모든 현전(現前, Anwesenheit/présence)의 철학, 로고스중심주의의 철학을 해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동일성이나 그러한 동일성을 갖는 존재자는 단지 다른 존재자와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차이일 뿐 아니라, 또한 시간적 타자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흔적이며, 궁극적 기원 자체는 비기원으로서의 원초적 흔적(archi-trace)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는 차이가 “기원적 차이”(󰡔해체󰡕, 130(번역은 수정))6)라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의 작업과 관련하여 이러한 차이의 문제설정이 내포하는 비판적․정치적 함의를 좀더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차이의 문제설정을 이중경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7). 차이의 작용은 이중경제의 관점에서 고찰되면 제한경제와 일반경제 사이의 의사초월론적(quasi-transcendental) 관계로 나타난다8). 제한경제와 일반경제라는 용어는 바타이유의 원래 용어법에서는 생산과 축적, 금욕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전통적인 경제체계(제한경제)와 경제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잉여생산물을 소비하는 데 중점을 두는 미개사회의 낭비와 주권적 위신의 경제체계(일반경제)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를 보다 일반화시켜 제한경제를 의미와 현전, 전유/고유화(appropriation)의 체계 일반으로 설정하고, 일반경제를 이러한 제한경제의 은폐되고 배제된 근거, 다시 말해 제한경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제한경제의 내부에서는 억압되고 배제되어 그 자체로 현전할 수 없는 이타성의 관계로 체계화한다9). 그러나 일반경제의 타자들은 이렇게 억압되고 배제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제한경제의 근거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제한경제 내부로 다시 복귀하게 되며, 이 때문에 모든 목적론적 희망에도 불구하고 제한경제는 완성될 수 없고 종결될 수 없다. 따라서 일반경제는 제한경제를 (성립)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완결)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제한경제의 의사초월론적 근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차이는 모든 현전과 로고스의 체계, 형이상학적인 지배의 체계로서의 제한경제와, 그것의 은폐된 전제를 구성하는 일반경제(흔적, 기록, 대리적 보충, 은유 등과 같은 표지로 표현되는)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경제의 문제설정에서 본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의 일반전략”10)은 우선 제한경제의 메카니즘을 해체시키고, 그 안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어 있는 일반경제의 이타성을 복권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전복). 하지만 이것이 제한경제의 완전한 소멸과 일반경제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데리다 자신이 말하듯 일반경제는 “무의미와 죽음, 절대적 손실”의 공간 또는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광기의 공간이며, 이러한 공간의 완전한 실현은 삶 자체, 존재 자체의 순수한 소멸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전복의 전략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전략이 필요한데, 데리다가 “긍정적 전위”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전위의 전략은 우리와 적, 선과 악, 법과 폭력 및 제한경제와 일반경제를 포함하는 모든 이원적 대립질서 자체에 대한 해체와 전화(轉化, transformation)를 목표로 한다. 이는 데리다가 말하듯 “타자의 이타성이 [어떤 입장(position)으로] 정립된다면(posée), 단지 정립되기만 한다면, ... 이것은 동일자로 귀착”(󰡔입장들󰡕, 129)되어 버리므로, 이러한 역설을 막기 위해서는 타자를 타자로서 동일화하는 메카니즘 자체의 전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의 근본적 목표는 입장의 자기해체, 자기전화를 통해 해방의 퇴락의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의 일반전략은, 적어도 정치적 문제들에서는, 아직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제한경제와 일반경제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인가? 입장의 자기해체, 자기전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또는 도대체 이것이 하나의 정치적 전략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11) 등과 같이 위의 내용으로부터 당연히 따라나올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해 데리다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면서 제대로 답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곤란은 단순히 정치라는 하나의 특수한 주제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체의 전략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초기 데리다 작업의 기본적인 ‘한계’ 또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데리다의 해체의 문제설정은 강한 의미에서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가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지배체계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야 하며, 또한 정치적 비판이 근본적이기 위해서는 그 형이상학적 토대에 대한 해체와 전위에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작업에서는 이 양자가 긴밀한 상호연관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초기작업의 한계 내지는 공백을 넘어서는 것은 데리다 철학 내부에서 그 자체로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지만, 이는 특히 최근의 정세와 관련하여 보다 긴급한 과제로 제기된다. 80년대 말 이후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근원적 위기에 빠져든 현재 세계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어 어느 때보다 해방의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의 데리다의 작업들은 그의 초기작업의 공백을 메운다는 의미에서나 해방의 정치의 새로운―즉 탈근대적인―형상들을 모색한다는 의미에서 데리다 사상의 전개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1) 이 글에서는 󰡔입장들󰡕의 국역자인 박성창씨의 제안에 따라(󰡔입장들󰡕 (서울: 솔, 1991), 31쪽, 각주 10) 흔히 사용되어 온 차연 대신 차이를 différance에 대한 역어로 사용하겠다. 

2) 다음부터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들은 본문 중에 다음과 같은 약어로 표기하고, 인용의 경우에는 약어와 쪽수를 괄호 속에 병기하기로 하겠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그라마톨로지󰡕; 󰡔입장들󰡕 (박성창 옮김, 솔)→ 󰡔입장들󰡕; 󰡔해체󰡕 (김보현 옮김, 문예출판사)→ 󰡔해체󰡕; 󰡔다른 곶󰡕 (김다은, 이지혜 옮김, 동문선)→ 󰡔곶󰡕; 󰡔마르크스의 유령들󰡕 (양운덕 옮김, 한뜻)→ 󰡔유령들󰡕; 󰡔데리다 읽기󰡕 (이성원 엮음, 문학과 지성사)→ 󰡔데리다󰡕

3) ‘초기’라는 표현은 데리다 작업의 시대구분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기보다는 주로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즉 󰡔조종󰡕(Glas) 이전까지)의 저작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4) 특히 대표적인 것으로 Politiques de l'amitié (Paris: Galilée, 1994)를 꼽을 수 있다.

5) Force de loi (Paris: Galilée, 1994).

6) 이하 한 두 단어를 제외한 모든 인용문은 필자가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다.

7) 제한경제와 일반경제라는 이중경제의 문제설정은 원래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에게서 유래한다(La part maudite (Paris: Minuit, 1967)). 데리다는 󰡔기록과 차이󰡕에서 지양 없는 헤겔주의라는 관점에서 바타이유의 이중경제론을 재해석한 바 있는데, 최근에는 마르셀 모스 및 하이데거와 관련하여 증여(don/gift)라는 관점에서 이를 재고찰하고 있다. Derrida, “De l'économie restreinte à l'économie générale: Un hegelianisme sans réserv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Seuil, 1967); Donner le temps (Paris: Galilée, 1991)를 각각 참조.

8) 데리다 자신은 한두 번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은 의사초월론이라는 개념에 대한 체계적 가공은 데리다도 인정하다시피 로돌프 가쉐(Rodolphe Gasché)에 의해 이루어졌다. The Tain of the Mirror: Derrida and the Philosophy of Reflect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6) 참조.

9) 데리다는 「차이」에서 이중경제로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바타이유에 대한 독해에서 예비물 없는 소비와 죽음, 무의미로의 노출 등에 전혀 관계하지 않는 “제한경제”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비예비물을 계산하고(고려하고, tenant compte), 비예비물을 예비하는(tenant en réserve la non-réserve) 일반경제 사이의 엄밀하고―새로운 의미에서 ―“과학적”인 관계설정(mise en rapport)이 어떤 것일 수 있을지 지적해 보려고 했다. 이는 이윤을 획득하는 어떤 차이와 이윤을 얻지 못하는 어떤 차이 사이의 관계이며, 절대적 손실, 죽음에의 투자(mise)와 혼합되는 순수한, 손실 없는 현전의 투자이다. 제한경제와 일반경제 사이의 이러한 관계설정에 의해 헤겔주의라는 특권화된 형태를 띤 철학의 기획 자체가 전위되고 재기입된다”. (󰡔해체󰡕, 145)

10) 데리다에 따르면 해체의 일반전략은 우선 “전복”의 단계, 즉 “어떤 주어진 순간에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것”(󰡔입장들󰡕, 65)을 필요로 한다. 이는 “전복의 단계를 무시하는 것은 대립의 갈등적이고 종속적인 구조를 망각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사실상 이전의 영역을 현상 유지시키고 이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박탈”(󰡔입장들󰡕, 65)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복이 기존의 체계 내에서 대립항들의 전도에 그치게 된다면 계속해서 지배구조 자체를 재생산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해체는 “더 이상 이전의 체계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돌발적인 출현”(󰡔입장들󰡕, 66), 지배구조에 대한 “긍정적 전위(轉位)”(déplacement affirmatif)(󰡔입장들󰡕, 93)를 시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11) 해체의 정치적 의미를 부인하는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리차드 로티이다. 그런데 󰡔데리다󰡕에 수록된 「타자성에의 개방」이라는 글에서 유홍림교수는 로티를 따라 “데리다의 노력은 정치적으로는 무용한 시도이며, 개인의 자아 완성에의 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데리다의 정치에 대한 이해는 개인의 관점에 국한되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데리다󰡕, 114). 이러한 평가의 문제점은 로티나 유홍림교수 모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이라는 자유주의적 전제가 당위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데리다 역시 이것을 옹호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반면(예를 들어 유교수는 해체가 “자유주의의 정치적 이상을 옹호함에도 불구하고”(󰡔같은 책, 111) 그 실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그 자신이 로티에 반대하여 분명히 진술하고 있듯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을 해체하고 넘어서는 것을 해체의 정치적 목표 중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로티]가 나의 작업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방식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구분을 분명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해 두어야겠다. ... 외관상으로는 보다 문학적이고 자연언어의 현상들에 보다 결부되어 있는 󰡔조종󰡕이나 󰡔우편엽서󰡕 같은 텍스트들은 사적인 것으로의 후퇴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구분에 대한 수행적 문제제기들(problematizations)이다”. Jacques Derrida, “Remarks on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Chantal Mouffe ed.,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New York: Routledge, 1996) pp. 78-79(강조는 데리다). 로티는 미국사람이므로 별문제로 한다면, 데리다의 정치적 작업에 대한 유교수의 평가는 국내의 데리다 연구가 아직 도입조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12) 80년대 이전까지 정치 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데리다가 계속 침묵을 지켜 온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과 개조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1988년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열린 알튀세르 고희기념 학술회의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대담에서 60년대(특히 68년 이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지적 세력관계 및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정치적 문제에서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 대해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Politics and Friendship: An Interview with Jacques Derrida” E, A, Kaplan & M. Sprinker eds., The Althusserian Legacy (London: Verso, 1993)/부분국역: 「데리다와의 대담」, 󰡔이론󰡕 1993년 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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