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에 출간될 [황해문화] 가을호 권두언 올립니다. 


이번 호에서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을 특집으로 잡았습니다. 


독자분들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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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황해문화 이번호는 지난 봄 호에 이어서 연속 기획 “21세기 인간의 조건두 번째 특집으로 꾸몄다. 지난 봄 호에서는 안전을 주제로 다섯 편의 글을 실었는데, 이번 가을 호에서는 노동을 주제로 역시 다섯 편의 글을 묶었다.


다른 사회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이라는 문제도 무매개적인 지각을 통해 그 특성이나 함의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문제는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표상들 내지 재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회적 문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항상 이미 그 문제를 구성하고 감싸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표상들과 재현들, 더욱이 상연들을 문제 삼고 비판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노동이라는 문제는 다른 어떤 문제들보다 더욱 선행적인 비판과 해체의 작업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구조의 전환이라는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3차 산업혁명’(제레미 리프킨)이나 ‘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 같은 어휘들, 특히 후자의 어휘는 정부나 산업계, 언론계(특히 보수 언론계)에서는 마치 이미 확립된 정설처럼 확산되어 있으며, 각종 정책을 위해 고려해야 할 최우선 지침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통령 직속으로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4차 산업혁명은 제안자의 설명에 따르면 초연결지능혁명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 무인운송수단,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블록체인, 유전공학, 합성생물학 등의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물리적, 생물학적 세계와 디지털 통신이 융합되는 기술혁신의 시대를 표현한다고 한다.


과연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기존의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대한 투자와 정책적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과장된 수사법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노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3차 산업혁명 또는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담론은 늘 노동의 종말에 관한 논의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곧 조만간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사물인터넷의 발전을 통해 생산과 물류, 유통 등과 같은 경제 영역 전체에 걸쳐 자동화된 시스템이 확산되고, 이에 따라 수십 년 안에 기존 일자리의 대부분이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4차 산업혁명론의 확산에 발맞춰 공론장에서 점점 더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여기에 패스트푸드점을 필두로 한 무인판매기(키오스크) 보급의 확산은 노동의 종말에 대한 대중적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동 유연화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경영계의 요구와 정부의 호응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노동의 종말로 인한 급속한 중산층의 와해를 막기 위해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는 정치권 및 언론의 논의와도 접속한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노동의 종말은 사실상 현재의 산업 및 노동정책의 기저에 놓여 있는 두 가지 핵심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1980년대까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노동은 모든 논의의 중심 화두였다. 정치경제학적 분석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회학적인 계급 분석에서도 노동자 계급이 항상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정치학에서도 노동자 계급을 주체로 한 변혁운동의 연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늘 논의의 초점을 이루었다. 심지어 문화 분야에서도 민중문학, 민중미술, 민중음악, 민중무용 같은 표현이 말해주듯,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민중은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었다. 이것은 노동, 특히 (남성) 노동자 계급의 산업노동이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며, 또한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와 탄압이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의 뿌리를 이룬다는 데 대해 인문사회과학자들 사이에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및 그와 동시에 우리 사회에 확산된 포스트 담론은 노동자 계급 운동에 중심을 둔 사회변혁운동의 퇴조를 낳았으며, 노동이라는 기표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은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이름 아래 경제주의와 환원주의로 지목되어 퇴출되었고, 계급의 정치학은 절합(articulation)에 기초를 둔 다양한 사회운동들 간의 수평적 연대로, 더 나아가 시민운동 및 자유주의적 연대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 필연성 및 인식론적 근거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변화를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노동의 인간학이 내포하고 있던 환원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난점들이 과연 노동의 인간학 전체, 노동의 문제 전체를 퇴출시켜야 할 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는가, 그것이 소통(communication)의 인간학’(또는 포스트 담론일반)과 대립하거나 이 후자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들이 충분히 토론되거나 논쟁되지 않은 채, 일련의 대체와 청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 20~30년 동안 노동의 문제는 사회과학의 특정한 분야(노동경제학, 노동사회학 등)로 밀려나 있었다.


그 사이에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사회는 전면적인 신자유주의화의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노동의 문제는 비정규직이라는 네 글자로 요약되는, 불안정노동의 전면화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비정상적인 일자리라는 의미로, 따라서 외환위기가 지나고 구조조정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되고 나면 다시 정상적인고용관계로 회복되어야 할 임시적인 고용 방식으로 생각되었던 비정규직은 이제 어느덧 그 자체가 정상적인, 심지어 대표적인 고용관계가 되었다. 간접고용, 특수고용, 플랫폼노동 등과 같은 (무기계약직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 분기(分岐)하고 재창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정규직은 정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권적인 일자리가 되었다. 그것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자리이자, 언제든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끈질기게 버티고 지켜내야 하는 자리, 따라서 오히려 자신 대신에 희생물이 되어주고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해줄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어나기를 욕망하게 되는 자리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일어난 이른바 인국공사태는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다분히 과장된 수사법적 용어로 표현되는 경제적 전환은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산업 체계의 변화를 이끄는 동력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며, 이는 기존의 산업 체계를 파괴적으로 변화시키거나 그것과 단절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양상을 가속화하고 심화한다는 의미에서 진화적인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집에 실린 장귀연 선생의 글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디지털 전환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집약되는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와 단절하거나 그것을 파괴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더욱 가속화하고 창조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노동자들이 힘든 투쟁을 통해 획득한 노동권들은 점점 더 해체될 것이다. 플랫폼노동의 확산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노동의 종말이라는 문구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의 문제와 관련하여 적어도 이중의 측면에서 맹목적이다. 노동의 종말은 리프킨 이전에 이미 사회과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던 주제다. 1980년대 고전적인 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하면서 나타났던 것이 노동의 종말 또는 노동사회의 종언내지 탈노동사회라는 주제였으며,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은 오히려 1980년대에 전개된 논의의 반향이라고 할 수 있다. 탈노동사회나 노동의 종말이라는 주제는 고전적인 복지국가에서 가능했던 완전고용 하에서의 정규직 노동의 위기를 반영하는 주제였다. 곧 탈노동이나 노동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사실은 정규직 (남성)노동이 표준적이고 정상적이었던 사회의 종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을 노동의 종말 내지 탈노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따라서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 노동의 문제를 정확히 분석하고 인식하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은 종말을 고하지 않았으며, 노동에 중심을 둔 사회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정규직의 확산과 심화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에 노동은 훨씬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곧 세습된 자산을 갖추지 못한 채 근로소득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야 하는 대부분의 을들이 감당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은 그 노동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그만큼 그들의 삶 전체를 불안정하고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디지털 자본주의의 노동은 단지 비정규직 노동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정규직 노동이든 비정규직 노동이든 간에 오늘날의 노동은, 특집에 수록된 박제성 선생의 글이 명료하게 보여주듯이, 테일러리즘이라고 통칭되는 노동에 대한 과학적 관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알고리즘적 통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디지털 자본주의적 통제는 인간의 노동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를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알고리즘적인 노동 통제에서는 나의 행위와 동작만이 아니라 나의 사고와 판단, 심지어 나의 감정들까지도 나 자신의 본질, 나 자신의 정체성에서 소외된다. 이 경우 나의 본질, 나의 정체성은 아마도 간신히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사생활로 축소될 것이다(그 사생활이 정말 그 자신의 고유한 생활일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반면 노동의 종말이라는 문구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의 문제를 인간학적이고 사회적인 문제, 곧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숙고하고 고민해야 할 인간과 문명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다루기보다 오히려 기본 소득제와 같이(적어도 이 문제가 현재 정치적사회적으로 처리되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정치가들이 제안하는 이런저런 정책들에 의해 일거에 해결되어야 하고 또 해결될 수 있는 가공의 문제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의 종말이라는 문구는 돌봄 노동을 비롯한 재생산노동과 관련해서도 맹목적이다. 돌봄 노동으로 대표되는 재생산노동은, 특집에 수록된 윤자영 선생의 글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 인류 문명 전체가 유지되고 재생산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노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에서 엄밀한 의미의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제대로 수용되지 못해왔다. 따라서 정규직 (남성) 임노동만을 정상적인 의미의 노동으로 전제하는 탈노동사회나 노동의 종말 같은 문구들은 처음부터 돌봄 노동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돌봄 노동이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만들 것이고, 그것을 여성이 전담해야 하는, 또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노동으로 젠더화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여성에게 노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신경아 선생은 디지털 전환에 더하여 코로나19 팬데믹이 초래한 위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상황을 고찰하면서 이 질문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듯이 인간은 실존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데서 생겨나는 취약성(vulnerability) 및 여기에서 비롯하는 실존적 불안정성(precariousness)을 지닌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은 정치경제적 권력관계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경제적 불안정성(precarity)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구조적역사적으로 이러한 이중의 불안정성을 더 깊이 경험할 뿐만 아니라 성폭력이라는 젠더적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여성들이 직면한 이러한 취약성과 불안정성의 상황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디지털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이전 시기 못지않은 노동, 더욱이 이전 시기보다 더 불안정하고 더 위태로워진 노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노동의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 단지 경제 부문이나 사회 부문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문명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은폐하거나 축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지 지배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노동 유연화 및 긱 이코노미(gig economy)‘4차 산업혁명시대에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실로 받아들인 가운데, 노동의 문제를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일자리 창출의 문제로 전환하고 노동의 종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신성장동력의 발견이나 기본소득으로 답변하려는 자유주의 정치의 실천에서도 고스란히 구현되고 있는 일이다.


따라서 선지현 선생이 제기하듯이,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어떤 노동의 정치가 가능한지 질문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도 아니고,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 또는 정파에 한정된 질문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다. 특히 탈탄소사회로의 전환이 디지털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면서 오히려 또 하나의 새로운 자본 축적의 장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더욱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정당하게도 사회적 사실로서의 계급정치적 집단주체로 승격하는 일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서로 이질적인, 상이한 실천에 대한 관심과 투쟁의 목표를 지닌 다양한 개인들 및 집단들과 함께 계급의 정치로서 노동의 정치를 수행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어려운 길이지만 우리가 찾아내고 추구해야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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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집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비평에 수록된 김원태 선생의 글은 마땅히 특집 주제와 관련하여 읽혀야 하는 글이다. 헤겔에서 마르크스를 거쳐 한나 아렌트에 이르는 근대 서양 사상의 흐름 속에서 노동 개념의 계보를 그리고 있는 이 글은 독자들이 특집에 수록된 글을 읽는 데 필요한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토대를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노동에 관한 기존의 사회과학적 논의들이 경험적 연구와 실용적 정책 분야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안적 노동 개념을 사고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개념도를 제시하는 것을 글의 목표로 삼고 있다.


선생은 먼저 존 로크에서 허버트 마르쿠제까지 노동의 긍정성을 강조한 사상가들과 한나 아렌트에서 악셀 호네트까지 노동의 부정성을 강조한 이론가들의 논의를 일별한 후, 이들이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을 꼼꼼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은 대안적 노동 개념을 사고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선생은 후기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청년 마르크스나 중기의 마르크스가 유적(類的) 본질의 활동내지 자기활동으로서의 노동이라는 긍정적 노동 개념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적 노동의 병리적 성격을 비판한다면, 후기 마르크스는 추상노동 개념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 및 물신성의 특성을 더 정교하게 해명하면서 자유로운 노동 또는 대안적 노동이 전개되기 위한 조건도 더 엄밀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생의 이 글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지만, 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논의하는 특집의 글들에 대한 보충적인 이론적 논의로서도 의미가 있다.


비평의 또 다른 꼭지에서 임재성 선생은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재판에서 재판부가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각하하는 것으로 판결이 난 지난 67일 재판에 관해 다루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피고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이번 판결은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이 판결의 의미를, 흔히 비판하듯이 친일 판결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그것은 판사들의 과잉된 나라걱정에서 비롯한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징후로 읽어야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 무죄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대법원에서 이미 내려진 판결에 거스르는 판결을 하급심에서 내리기 위해서는 엄정하고 면밀한 법리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은 이러한 법리 없이, 피해자 승소 판결을 내릴 경우 미칠 정치적외교적 파장에 대한 판사 개인의 우국충정에 입각해서 내려진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 선생의 입장이다. 이는 결국 삼권 분립의 기초를 흔드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치의 사법화 현상을 낳게 된 근본적 이유가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 쟁점을 정치 본연의 영역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계속 우리에게 큰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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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문화비평 특집은 지역 문제를 주제로 구성했다. 이희환 선생은 문재인 정부 4년을 돌이켜보면서 여러 가지 공과 중에서 지방분권 정책과 관련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권력구조 개편과 더불어 지방분권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한 바 있다. 헌법 13항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 국가를 지향한다는 조문을 명시한 이 개헌안은 지방 분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이루어진 3기 신도시 발표는 수도권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롤 초래했으며 부동산 문제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선생은 수도권 1극 체제를 해체하고 위해서는 지방 분권 개헌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지주형 선생은 현재 대다수의 지방 대학이 겪고 있는 위기는 지방의 위기에서 비롯하며, 역으로 지방대의 위기는 지방의 위기를 가속화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현재 국가적 화두가 되고 있는 지방 소멸의 위험은 20대 청년층이 농어촌과 중소 도시에서 벗어나 수도권과 대도시로 이주함으로써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 선생의 진단이다. 일자리 부족, 여성에게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부족한 문화여가시설 등으로 인한 청년 인구의 유출은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더불어 진행된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 발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 대학들은 대학정원감축정책의 일방적인 목표물이 되어 고사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선생은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국가의 최상위 정책으로 추진하는 것만이 이런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반 위에서만 일방적인 지방대 폐교정책 철회, 정원조정에 대한 적절한 재정 지원, 지방대 교육 여건 개선 등과 같은 지방대 발전 방안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선생의 제안이다.


나머지 문화비평 꼭지들에서도 조광희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과학소설, 조습의 사진미학 등에 관해 유익하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시해주고 있다.


이번 호 주제 서평에서는 류동민 선생이 마르크스의 저작 및 마르크스에 관한 다양한 저술들에 관해 유용한 길잡이를 제시해주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노동에 관한 학문적 관심이 줄어든 것은 마르크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역으로 노동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시급한 문제로 제기될수록 마르크스에 관한 독서와 연구는 더욱 필수적인 요구가 될 것이다. 선생은 인간 마르크스의 삶에서부터 청년 마르크스’, ‘역사유물론’,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마르크스에 접근하는 것이 좋은지 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마르크스에 관심이 있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반가운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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