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oica님의 질문

 

아마도 원서를 갖고 계실 듯하여 여쭙습니다. 한국어판 207번째 줄에 ˝홉스와 로크에게 사회란 자연상태에서 연역해낸 것˝이라는 구절인데요.

 

루소는 이들이 자연상태를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회의 모습으로부터 부당하게 연역했다고, 따라서 그들의 자연상태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사적 소유의 존재 -는 모두 자연상태가 아니라, 문명 발생 이후의 상태라고 비판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저 부분은 ˝홉스와 로크에게 자연상태란 사회로부터 연역해낸 것˝이 맞는 말 아닌가요?

 

그런데 또 그 다음 부분을 읽어보면, 저 문장은 루소의 비판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냥 홉스와 로크의 입장을 기술한 것 같기도 하구요.

 

잘 모르겠어서 여쭤봅니다. 혹시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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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roica. 좋은 질문을 제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질문하신 그 부분은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는 대목입니다.

 

말씀하신 ˝홉스와 로크에게 사회란 자연상태에서 연역해낸 것˝이라는 대목은 번역서 󰡔루소 강의󰡕 20쪽에 


나오는 다음 문장에 나오죠.

 

홉스와 로크에게 사회란 자연상태에서 연역해 낸 것인데, 왜냐하면 사회는 자연 상태에서 이미 발견되며, 사회의 발생은 직선적이고 연역적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Pour Hobbes et Locke, la société se déduit de l’état de nature puisqu’elle s’y trouve déjà et sa genèse est <linéaire et continue> ...” (p. 20)

 

불어 원문을 고려해보면, 한글 번역본이 원문 내용을 정확히 잘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과거시제로 된 것을 현재시제로 바꾼다면, 이렇게 옮기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홉스와 로크에게 사회란 자연상태에서 연역되는 것인데 ...”

 

따라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대목(이 책의 편집자인 Yves Vargas의 해설 중 한 대목이죠)은 홉스와 로크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홉스와 로크의 자연상태 개념 안에는 이미 사회의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자연상태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사회의 요소들을 연역해내는 것이 바로 그들의 사회계약론의 요체라는 것이죠.

 

따라서 역으로 보자면, 그들의 자연상태 개념은 사실은 진정한 자연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상태 또는 문명의 특성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자연상태, 현존하는 문명 사회의 성격에 기반하여 구성된 자연상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것이 바로 루소가 그들을 비판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질문하신 대목 조금 앞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이처럼 역사적 시간은 유예된 현재, 그것의미래와 절대적으로 분리된 현재 속에서 간격이 생기고, 갈라져서 생겨난 것이다(하나의 심연”).” (20)

 

이 문장은 번역이 약간 이상한데, 이것은 사실 불어 원문이 좀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Le temps historique est ainsi écarté, écartelé entre un présent suspendu, absolument séparé de “son” avenir(un “abîme”).” (pp. 19~20)

 

이 문장에서 이상한 점은, 불어의 “entre”라는 단어는 영어의 “between”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between”이 늘 “and”와 함께 쓰이는 것처럼, “et”라는 접속사와 함께 쓰여야 하는데, 이 문장에는 entre만 있지 et가 없다는 점입니다. 곧 문법적으로 정확한 문장이 되려면 entre un présent suspendu, absolument séparé de “son” avenir(un “abîme”) et ...이 되어야 하는데, 이 문장에는 바로 et ...에 해당하는 부분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역자가 이 문장을 번역하면서 고심을 많이 했을 듯하고 그 결과가 위의 번역 문장인데,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역자는 “écarté, écartelé entre un présent”이라는 대목을 현재 속에서 간격이 생기고, 갈라져서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entre”속에서라고 옮긴 셈이죠. 역자의 고민이 어땠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우리가 et ...가 생략된 문장으로 이해한다면, 이 생략된 부분을 현재의 문장의 내용에 근거해서 유추해볼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유추해서 다른 식으로 번역을 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러한 유추에서 중요한 단어가 “suspendu”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suspended”에 해당하겠죠. 역자는 “suspendu”유예된이라고 옮겼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번역입니다. 사실 “suspendu”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알튀세르가 두 차례에 걸쳐서 사용하고 있고, 다른 저술에서도 종종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음 두 문장을 보시면 알튀세르가 이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Un saut dans le vide, si vous voulez, au point que, on peut dire que tout l’édifice du contrat social est suspendu sur un abîme.” (p. 135)

 

공백에서의 도약이란 말하자면 사회계약의 구축물 전체가 하나의 심연에 걸쳐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0)

 

 

“Or voici ce qui est important, je crois, c’est que tout possible apparaît toujours à Rousseau comme suspendu sur un abîme.” (p. 183)

 

그런데 중요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루소에게는 가능한 것 전체가 언제나 심연에 매달린 것처럼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192)

 

보다시피 알튀세르는 “suspendu”라는 단어를 두 차례 모두 suspendu sur un abîme”라고 쓰고 있죠. 역자는 이것을 첫 번째는 하나의 심연에 걸쳐 있음이라고 옮겼고, 두 번째는 심연에 매달린 것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우리가 인용한 20쪽 번역문에서는 “suspendu”유예된이라고 옮겼습니다.

 

사실 “suspendu”라는 단어는 걸쳐 있는”, “매달린”, “유예된같은 다양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알파벳 문자를 쓰지 않는 언어권의 역자에게는 “suspendu”와 같은 단어를 번역하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단어인데, 뜻이 너무 다양하다 보니까 어느 하나를 지정하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의적인 단어에 대하여 중요한 철학적 함의를 부여하는 경우는 더 그렇죠. 반면 영어책을 불어로 옮긴다든가 역으로 불어책을 영어로 옮길 때는 이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령 이 경우 영역자는 그냥 “suspended”라고 번역하면 되겠죠.

 

다시 위에서 말했던 20쪽 문장으로 되돌아가면, 저는 20쪽 문장의 경우도 그렇거니와 다른 경우에도 “suspendu”매달린이나 매달려 있는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20쪽 문장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서나, 그 문장에서 생략된 부분을 유추하는 데서 중요한 점입니다.

 

“suspendu”매달려 있는으로 옮긴다면, 20쪽 문장에 나오는 “un présent suspendu”매달려 있는 현재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 문장에서 현재는 매달려 있는 것이고, 특히 심연 위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공중에 매달려 있는 외줄과 같이 현재는 매달려 있는 것인데, 현재를 이처럼 매달려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미래입니다. 미래는 심연입니다.

 

미래가 심연이라는 것은, 현재와 미래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현재에게 미래는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지 아닐지가 불확실한 가능태, 또는 알튀세르가 좋아하는 개념을 빌린다면 우발적인 것(aléatoire)입니다. 모든 현재에게 미래는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재와 미래 사이의 연결 관계가 불확실하다,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은, 시간, 특히 역사적 시간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우발적인 것임을 뜻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위의 20쪽 문장에서 지금 빠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유추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미래또는 현재의 미래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위의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시간매달려 있는 현재”, ““자신의미래(하나의 심연”)에서 절대적으로 분리된현재와 그 현재의 미래사이에서 벌어져 있고 균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충해서 위의 번역문을 조금 수정해보면 이렇게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적 시간은, 매달려 있는 현재와 그것의미래(현재는 이것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심연입니다) 사이에서 벌어져 있고 균열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한다면, 그런데 이렇게 빠진 부분을 보충한다면, 원래의 불어 문장이 어떻게 변형되어야 할까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것은 제 불어 실력이 일천한 관계로 별로 자신이 없네요.

 

“Le temps historique est ainsi écarté, écartelé entre un présent suspendu et “son” avenir(un “abîme”), qui est absolument séparé de celui-là.”

 

그리고 막상 이렇게 수정해놓고 보니, 원래 문장이 지닌 함축을 너무 밋밋하게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알튀세르의 역사적 시간 개념을 멋지게 요약하고 있는 이 문장은, 우리가 알튀세르의 철학을 새롭게 사고하기 위한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제가 보기에 이 문장, 그리고 이 문장이 압축적으로 제시해주는 이 루소 강의는, 특히 알튀세르가 데리다에게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알튀세르의 루소 강의는 1972년에 이루어진 것인데, 같은 해에 데리다의 걸작 중 한 권인 󰡔철학의 여백󰡕(Marges de la philosophie)이 출판되었죠. 그리고 이 책에는 데리다 시간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실체와 기록(Ousia et grammè)이라는 논문이 수록돼 있습니다. 또한 저 유명한 차연이라는 강연이 담겨 있는 것도 바로 이 책이죠. 이 두 글은 모두 1968년에 발표된 것인 만큼 알튀세르는 이 글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텐데요, 루소 강의에서 드러나는 알튀세르의 관점과 데리다의 시간론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언제 다뤄보면 아주 흥미로운 논의가 나올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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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0-03-2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제 질문은 잘 해결되었고,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셨네요. 엄청난 보너스 선물 같습니다. 심연 위에 매달려 있는 현재와 심연으로서의 미래... 현재란 아주 깊은 협곡의 높은 곳에 매달려 놓여 있는 밧줄 다리 같은 것이고, 미래란 저 까마득한 아래 같은 것, 계기적 인과성이 존재하지 않은 두 시간대로서의 현재와 미래... 현재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중력 때문에 떨어진다(미래가 온다)는 확실성 뿐,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떨어질지는(어떤 미래가 올지는) 모르는 우연의 주사위... 일단 이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맞는지는 모르겠구요. 이제 제1강 다 봤는데, 지적해주신 “suspendu sur un abîme”이 나오는 140, 192쪽은 신경쓰면서 보겠습니다. 일독권유 후의 애프터 서비스 완전 감사 드립니다. ^^ 건승하세요.

balmas 2020-03-20 22:43   좋아요 1 | URL
ㅎㅎ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습니다. 이 주제는 철학에 대해서도 중요하지만, 다른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해서도 중요한 주제이고, 앞으로 그 중요성이 더 알려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

자유이용권 2021-01-29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의 여백은 번역본이 알라딘에서는 검색되지 않네요. 데리다 책 중 처음 읽기에 좋은 책이 있을까요?

balmas 2021-01-30 08:58   좋아요 0 | URL
[철학의 여백]은 아직 번역본이 안 나왔을 겁니다. 데리다 책 가운데서 입문하기에 적당한 책은 [에코그라피]예요. 대담으로 된 책이어서 별로 어렵지 않고, 기술, 매체, 이미지, 정치 등을 주제로 데리다 후기 철학에 관해 논의하고 있어서 데리다 철학 입문으로 적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