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는 중요한 의견 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 아주 구체적으로 인간이란 현존으로 인한 온갖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서 특수한 심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에 끌려 들어온 육체적 존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자각하였고,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의식을 꾸준히 키웠으며, 삶을 목표를 가진 열린 길로 만드는 새로운 물질적, 영적 능력의 발전 가능성을 자기 안에 품은 유일한 피조물이다. 파스칼은 《팡세Pensées》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지만 생각을 하는 갈대이다." (48-49, 02 [인간의 본성]의 서론)

마지막으로 인간을 자기 목적으로 보는 사람들과, 인간을 자연의 다른 모든 사물처럼 다른 목적 - 국가, 가족, 소유, 권력 등 - 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구분해야 한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전자이다. 그들 모두가 인간에게는 의식적으로 체험하고 감탄하며 자신의 실존적 분열을 해소하는 최적의 방법인 가치와 목표를 발견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일신론을 믿건 그렇지 않건 이들 모두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의식화 과정을 통해 이 한계를 극복하기에 위대한 존재라고 보았다. (50, 02 [인간의 본성]의 서론)

활동은 ‘어떤 것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활동이란 감정의 영역은 물론이고 지적, 감각적, 의지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의적 활동을 말한다. 자발성의 전제 조건은 인격을 전체로 받아들이고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의 본질적 부분들을 억압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게 명료해질 때, 삶의 다양한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시켰을 때에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78-79, 04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은 물질의 소유에도, 감정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물건의 사용이나 조작도 힘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이건 생명 없는 사물이건 창조적 활동(*나를 지키며 타인/자연과 하나되게 하는 사랑/노동)을 통해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속성들만이 우리의 자아에 힘을 주고, 자아가 온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아준다. (81, 04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활동 그 자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무게중심이 정확히 거꾸로 되어 있다. 우리는 구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산하는 대신 상품을 팔겠다는 추상적 목적을 위해 생산한다. 모든 유형, 무형의 사물을 돈을 주고 살 수 있고, 돈만 주면 다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여긴다. 우리 개인의 특성과 노력의 성공 또한 돈과 명성, 권력을 위해서 팔 수 있는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무게중심이 창의적 활동이 주는 순간적 만족에서 완제품의 가치로 옮겨간다.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만족 - 활동의 순간 체험하는 것 - 을 잃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83, 04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자발적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개인은 더 이상 고립된 원자가 아니다. 그와 세상은 질서정연한 전체의 부분이 되고, 그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얻게 되며, 그럼으로써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도 사라질 것이다. 고립과 좌절 탓에 생긴 회의는 강제적으로, 자동인형처럼 살지 않고 자발적으로 산다면 그 즉시 사라진다. 그는 자신을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느끼며, 삶 자체의 완성만이 삶의 단 하나의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84, 04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두 유기체가 생리학적으로 다른 것처럼 두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개인적 토대 역시 동일하지 않다. 진정한 자아의 발전은 항상 이런 특수한 토대를 바탕으로 한 성장이다. 이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씨앗의 발아, 유기적 성장이다. 자동인형 같은 순응주의자의 발전은 유기적 성장이 아니다. 이 경우 자아의 토대가 되는 발전이 가로막혀 있고, 자아는 외부의 사고 및 감정 모델이 주입된 가짜 자아로 뒤덮인다. (85, 04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창의적 사고는 - 다른 창의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 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불균형과 같은 뜻이 되었고, 심지어 정신 장애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 기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하게 허약해질 것이다. 그의 사고는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완전히 말살되는 것이 아니기에 인격의 지적 측면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싸구려 가짜 감상이고, 그것을 이용해 영화와 대중가요가 감정에 굶주린 수백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90-91, 04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하지만 진리는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아는지의 여부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지팡이와 같다.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도움은 되지만 그를 더 약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온전하게 완성할수록, 다시 말해 ‘자신을 잘 꿰뚫어볼수록‘ 더 강해진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기본 계명이다. (97, 04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고,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이런 회의를 침묵시키고 어느 정도의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직 살아 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만족과 낙관론의 무대 뒤편에서 오늘날의 인간은 죽도록 불행하다. 실제로 그는 절망의 끝에 서 있다. 절망의 심정으로 개성이란 것을 붙들고 늘어진다. 다르고 싶고 어떤 것을 ‘다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칭찬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차표를 파는 창구 직원의 이름을 안다. 핸드백과 카드와 휴대용 라디오에 주인의 이니셜을 새겨 ‘특별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다름‘에 굶주렸다는 증거이며, 우리에게 남은 개성의 마지막 흔적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삶에 굶주려 있다. 하지만 순응주의자이기에 삶을 자발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자극과 스릴의 형태를 띤 대용품을 움켜잡는다. 술과 스포츠가 주는 스릴이나 스크린의 허구적인 인물을 통해 경험하는 스릴 말이다. (104-105, 04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삶이란 모순과 역설, 고통으로만 이루어진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과 수동적 태도의 극복에서 존재의 충만으로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몬 베유의 말대로 ‘억압‘이 ‘자유‘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각에 이르는 만큼만, 현실을 인식하는 만큼만자유로워진다. (62, 03 [인간의 본성]의 서론)

초월성을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은 초월성에 도달할 때, 다시 말해 자기중심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나르시시스트처럼 거울 속의 자신만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자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67, 03 [인간의 본성]의 서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결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외부의 힘이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확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는 큰 착각이다. 우리가 결심하는 것의 대다수는 실제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암시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결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 이유는 고립이 두렵기 때문이며 우리의 삶, 우리의 자유와 안락이 직접적인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133, 05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에서 발췌)

그의 목표는 시장에서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의 자존감은 사랑하고 생각하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자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역할에서 나온다. (...)
인간의 자긍심은 그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가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느냐, 경력의 출발 시점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한마디로 그가 성공했느냐에 달려 있다. 그의 몸과 정신과 영혼은 그의 자산이며 그의 삶의 과제는 이것을 유익하게 투자하여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 (141, 05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에서 발췌)

자아감은 스스로를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감정, 나의 결정, 나의 판단, 나의 행위의 주체로 느끼는 데에서 탄생한다. 그러자면 나의 경험이 실제로 나 자신의 체험이지 소외된 체험이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사물은 자아가 없다. 사물이 되어버린 인간은 자아를 소유할 수 없다. (142, 05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에서 발췌)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202)

태어날 준비 -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성경에 나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말하는 용기, 즉 자신의 나라와 가족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갈 용기다. 자신의 사고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관련하여서도 진리 말고는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이런 용기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여기서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믿음, 즉 과학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이념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구약에서 믿음을 칭하는 단어 ‘에무나emuni‘가 확신을 뜻하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사고와 감정에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따라서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 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6)

저자는 1장에서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의 영화 「멜랑콜리아」와 (영화에 나오는) 브뤼헐Pieter Brueghel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들」, 바그너Richard Wagner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예로 하여 순수한 외부, 완전한 타자의 파국적 침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타자의 침입은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지만, 그 재난은 동시에 자아의 공백과 무아 상태에서 오는 행복이며, 결국 구원의 길임이 드러난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7)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사랑이 사유 자체의 필수적 조건임을 확언한다. "오직 친구,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사랑을 거부하는 세계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동반한 저자의 사랑 찬가는 사랑의 사멸과 함께 사유도 파괴된다는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11)

타자의 아토피아(무소성)는 에로스의 유토피아임이 드러난다. (23)

에로스, 에로스적 욕망이 우울증을 제압한다. 에로스는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피아로, 즉 완전히 다른 자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간다. (26)

아이는 텅 빈 하늘의 무한성에 매혹된다. 아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아이는 내면을 잃고 경계를 벗어나 깨끗이 비워진 상태로 아토포스적 외부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파국적 사건, 외부의 침입, 완전히 다른 자의 침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사건Ent-Eignis,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 즉 죽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하늘의 공허, 유예된 죽음: 재앙." 그러나 이 재앙은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기쁨"을, 부재의 행복을 안겨준다. 여기에 바로 재앙의 변증법이 있다. 재앙의 변증법은 영화 「멜랑콜리아」의 구성 원리로도 작동한다. 파국적 재난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 (27-28)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에로스의 이러한 관계를 실패로 규정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답은 그렇다이다. 만약 우리가 흔히 에로스의 묘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에로스적인 것을 붙잡다‘ ‘가지다‘ ‘알다‘와 같은 말로 규정하려 한다면 말이다. 에로스 속에 그런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에로스는 그 모든 것의 실패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의 동의어다." (41)

그러나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visage"은 비밀이 없는 페이스face의 대척점에 있다. 페이스는 포르노처럼 발가벗겨진 채 전시되는 상품이며,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고 남김없이 소비된다. (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중에 나는 아버지의 성격에 대해 깊이 생각한 후에, 아버지는 내게도 가정생활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다른 것을 사랑했고 이 다른 것을 완전하게 탐닉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혼자 차지하도록 해라. 남에게 넘겨주지 마. 자신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것, 인생의 모든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거야."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57)

"자유." 아버지는 반복해서 말했다. "인간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무엇인데요?"
"의지, 자신의 의지야. 그것이 자유보다 더 좋은 권력을 준다. 원하기만 하면, 자유로울 수도 있고, 명령할 수도 있지." (57-58)

"괜찮아." 루신이 계속 말했다. "겁내지 말게. 정상적으로 사는 것, 집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네. 좋을 게 뭐가 있어? 파도가 휩쓸려 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도, 사람은 바위 위에, 스스로 두 발로 서야 하는 거야. 나는 이렇게 기침을 해 대지만… 그런데 벨로브조로프에 대해선 들었나?"
"무슨? 아니오."
"소식도 없이 사라졌네. 카프카스로 갔다고들 해. 자네같은 젊은이에겐 교훈이 될 거야. 모든 것이 제때에 단념하고 그물을 찢고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네. 보아하니 자네는 다행히 빠져나왔군. 다시는 그런 것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게. 잘 가게." (134-135)

아 청춘이여! 청춘이여! 그대는 어느 것도 꺼리지 않는다. 그대는 마치 우주의 모든 보물을 가진 듯해, 우수에도 위로받고, 슬픔과도 친하다. 자신에 넘치고 용감한 그대는 "보시오, 나는 혼자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의 날들도 흘러 흔적 없이, 속절없이 사라져 간다. 태양 아래 밀랍처럼, 눈처럼, 그대 안의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그대가 지닌 매력의 비밀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146-147)

그런 감정이 되풀이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 경험할 수 없다면, 나는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낸 사람만을, 바꾼다. (47)

그리고 이번에는 한수의 몫이 더 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끝내 완전히 동일해질 수 없을 둘 사이의 상처와 고통의 불균형을 남은 생을 통해 가까스로 맞춰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53)

예컨대 근래 새삼스런 주목을 받고 있는 정영문의 소설책 열두 권 어디를 펼쳐도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아포리즘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그가 무의미한 세계의 무의미함을 빈손으로 견뎌내고 있다는 증거다. (165)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이변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창조적 작가는 자기 작품의 합리적 독자가 되어 억지스러운 해석에 반박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말하자면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띄운 편지처럼 이미 자신의 글을 세상에 던져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호학에 관한 책을 낸 다음에는 내가 틀린 부분이 없는지 찾아보거나 내 의도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글을 오독했다는 걸 보여주는 데 온 시간을 쏟았다. 그에 반해 소설을 출판한 후에는 원칙적으로 독자들의 해석에 반론하지 않아야 한다는(또한 어떠한 해석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느꼈다.
이런 차이가 생긴 까닭은(여기서 우리는 창조적 글쓰기와 과학적 글쓰기의 진정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론서가 대체로 특정한 이론을 증명하거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면 시나 소설을 쓸 때 사람들은 모순 가득한 삶을 대변하고 싶어 한다. 여러 삶의 모순들을 펼쳐놓고 분명하고 통렬하게 드러내고자 하는것이다. 창조적 작가들은 독자에게 해답을 찾아보라고 주문할 뿐 공식을 정해주지는 않는다(싸구려 위안을 주려는 키치적 작가나 감상주의적 작가들은 제외하고). 내가 갓 출판한 첫 번째 소설로 강연을 하러 다니던 시절, 소설가는 때때로 철학자가 하지 못하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16-17)

첫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영감‘이란 약삭빠른 작가들이 예술적으로 추앙받기 위해 하는 나쁜 말이다. 오랜 격언에 천재는 10퍼센트의 영감과 90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은 종종 자신의 가장 뛰어난 시 중 하나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숲길을 거닐고 있을 때, 한 편의 시가 완성된 형태로 섬광처럼 떠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마르틴이 세상을 뜬 후 그의 서재에서는 바로 그 시를 여러 해 동안 수없이 고쳐 썼던 방대한 분량의 원고가 발견됐다. (어떻게 쓸까, 21)

영감이란 서서히 떠오르기도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장미의 이름]을 완성하는 데는 불과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대해 더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덕분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중세 미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고, 그 후로도 중세에 대한 연구를 더 이어갔다. 몇 년 동안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과 고딕 양식의 대성당 등을 찾아다녔다.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마치 수십 년 동안 중세에 관한 정보들만 모아두었던 널찍한 벽장을 여는 것 같았다. 필요한 모든 자료가 내 코앞에 있었고, 나는 단지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 쓸까, 24)

[장미의 이름]을 출판한 후 맨 처음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던 영화감독은 마르코 페레리(Marco Ferreri)였다. 그는 내게 "영화 대본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셨군요. 대화 길이가 딱딱 맞아떨어져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글을 쓰기 전에 수백 개의 수도원 도면과 미로들을 그려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덕분에 등장인물 두 명이 대화를 나누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만든 허구의 세계에서는 구획과 배치에 따라 대화의 길이가 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나는 소설이 단지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는 걸 터득했다. 시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낱말의 음과 저자가 의도한 다중적 의미까지 계산에 넣어야 하는데다, 단어의 선택에 따라 내용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 같은 서사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서사는 작가가 창조하는 ‘우주‘ 이며, 그 안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음률과 문체, 단어 선택까지 정해진다. 서사는 라틴어로 ‘렘 테네, 베르바 세쿤투르(Rem tene, vertba sequentu)‘, 즉 ‘주제를 고수하면 언어는 따라온다‘는 법칙에 지배받는다. 반면 시는 그와 반대로 ‘언어를 고수하면 주제는 따라온다‘로 바뀌어야 한다. (세계 설계하기, 25-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