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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무현 씨는 바보가 아니다.
2. 탄핵 사유는 노무현 씨의 개혁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
3. 탄핵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4. 노무현 씨는 탄핵이 가결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 즉, 노무현 씨는 탄핵을 선택했다.
6. 탄핵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건 노무현 씨와 열우당이다.
7. 노무현 씨와 열우당은 탄핵이 가져올 이익을 알 수 있었다.
8. 탄핵 사태와 민중의 삶은 별 관련이 없다.
9. 탄핵 사태와 6월항쟁은 별 관련이 없다.
10. 오늘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농민과 노동자들이 죽어나갈 때도 나왔다면 대한민국은 좀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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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누리(펌)

탄핵안이 가결되기 전날, 그러니까 최초의 찬핵안 의결 시도가 있었던 날,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던 노사모 사람들이 내건 플래카트에 그렇게 씌어 있더군요. "노사모가 아닙니다. 국민입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첫날 그 자리에 모인 소수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노사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모순적인 문구를 내걸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기에 평소에 좀 잘할 일이지.

그런 시위가 벌어지면 대개의 단체들이 자기 단체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안달을 합니다. 반면 노사모에서는 자기들의 정체성을 부정하기에 급급하더군요. 왜 그러겠습니까? 그 동안 자기들이 해온 '짓거리'가 국민들 눈에 어떻게 비쳐지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비록 우리는 노빠나 이것은 노빠질이 아니다, 국민질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어제 얘기한 것처럼 노무현 지지율 20%와 열우당 지지율 30%, 탄핵반대 70% 사이에 존재하는 4~50%의 민심은 딱히 노무현과 열우당 지지자들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대부분의 민주노동당 지지자들도 속할 테니까요. 2~30%는 포지티브한 지지율이고, 70%는 네거티브한 지지율입니다. 지금 반사이익으로 10% 가량 포지티브한 지지율이 올랐지만, 지금이 피크이니 아마도 거기서 더 오르긴 힘들 겁니다.

대충 70%의 국민이 자기들 등 뒤에 서 있다고 믿었는지, 이분들이 또 기세등등하게 행패를 부리는군요. 자기들 급하면 남의 당에 찾아와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읍소를 하다가, 급한 일 지나면 그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고 입 딱 씼는 게 그 분들의 인생철학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마찬가지군요. 도대체 항의를 하려면 탄핵에 찬성한 장기표 당으로 몰려갈 일이지, 탄핵에 반대한 민주노동당을 향해 악담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군요.

오늘이 끝물입니다. 그리고 3월 20일날 한 차례 더 있겠지만, 이제 탄핵 가결의 충격은 사회에 흡수되었고, 대통령 없는 나라는 이미 일상이 되었고, 어제 시위로 국민들의 뜻은 정치권과 사법부에 충분히 전달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좀 제대로 된 선거를 치르기로 합시다. 정치가 도박판도 아니고, 유권자가 무슨 실험용 모르모트도 아니고, 여야가 합작해 만들어낸 탄핵 쇼에 이제는 좀 더 냉정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울러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몰고온 야당의 몰상식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나간 노무현의 올인 드라이브에도 문제제기를 해야 합니다. 여야 4당 대표와의 회담을 노무현이 거부한 것은, "그래 봤자 탄핵까지 가겠느냐. 또 탄핵까지 간다고 해도, 너그들만 손해다"라는 배짱의 표현이겠지요. 바로 이런 무책임한 때문에 자꾸 대통령 자질에 대한 구설수가 생기는 겁니다.  

이번 총선은 유권자들의 심판의 날입니다. 거기서는 먼저 탄핵사태를 일으킨 주범, 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의 의정활동에 대한 심판과 함께, 지난 1년간  이 나라를 이끌어온 노정권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와 정신적 여당 행세를 해 온 열우당의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도 함께 내려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거의 존재이유이고, 동시에 유권자들의 임무인 것입니다.

정치권에서 구사하는 수준낮은 잔머리에 입 헤 벌리고 멍청하게 속아넘어가지 맙시다. 유권자는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하지, 유치한 정치 쇼의 동원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유권자들이 자꾸 속아넘어가주니까 야당은 탄핵까지 하고, 대통령은 배째라 하는 겁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감시자들이 '뽕' 맞고 헤롱 거리니까 비리와 부패도 생기고, 저런 웃지못할 희대의 코미디 같은 상황도 벌어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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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언젠가 이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우파 과잉의(좌파 결핍의) 사회임을 두고 한 말이다. 우파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거나 옹호하는 세력이며, 좌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단지 혁명적인 방법만 말하는 게 아니라) 세력을 말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보여주듯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는, 혹은 아무런 견제가 없을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체제’다. 흔히 자본주의를 “인간의 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 가운데 탐욕만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대한민국’ 역시 ‘식인 체제’였다. 분단과 6.25전쟁 체험을 빌미로 하는 강력한 반공 파시즘은 대한민국에서 좌파의 씨를 말렸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노동자와 농민과 민중을 아무런 견제없이 마음껏 잡아먹었다. 물론 그런 식인 체제에 민중들이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많은 희생과 고통을 무릅쓴 끈질기고 빛나는 저항 운동이 있었다. 그 운동은 단지 ‘제도 민주주의’를 얻는 것을 넘어 반공 파시즘이라는 ‘식인 체제’를 부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우리는 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운동의 성원 가운데 대부분이 변혁을 좆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제도 민주주의’가 마련되자 그 운동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동의 종결’을 선언했다. 물론 그런 선언은 거짓말이다.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났을 뿐,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별 문제없이 작동되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그 운동의 보다 평범한 성원들이 갖는 자괴감(현실 사회주의 몰락의 충격에서 비롯한, 제 지난 운동의 관념적 급진성에 대한 자괴감. 처음에 순수했으나 점차 비뚤어진 좌파 혐오로 발전한다.)과 주류 사회에서 행세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대세가 되었다.

그런 대대적인 기만을 비판하는 좌파는 갈수록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소수로 전락했고, 공공연하게 ‘철 지난 이야기나 하는 몽상가’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무렵, ‘운동의 종결’을 선언했던 세력은 ‘민주화 운동의 후반작업’이자 ‘수구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을 내세우는 일련의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백화점식 시민운동과 강준만 씨를 비롯한 안티조선운동,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이런저런 네티즌 운동들이 그것이다.

좌파가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소수로 전락한 상태에서, 개혁운동은 ‘패러다임이 변화한 시대의 좌파운동’으로 위장되어, ‘수구기득권 세력’의 악취에 넌더리가 난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협잡과 공갈로 행세해 온 정치인들은 처음으로 위기를 맞게 되고, 위세가 영원할 것 같던 파시스트 신문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서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다. 개혁운동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여 결국 ‘개혁 정권’을 만들어냈다.

물론 누구도 개혁이 만들어낸 사회적 변화들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변화가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이란 한국 사회를 실제로 유지하는 대대수의 사람들, 노동자 민중들을 말한다. 그 실제 성원들의 삶이야말로 개혁이 가져다주었다는 변화가 갖는 의미를 판단하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기준이다. 그렇게 볼 때 개혁이 가져다 준 변화는 그 휘황한 겉모습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 변화가 의미 있는 것이라면 왜 한국사회의 실제 성원들은 왜 전보다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는가. 왜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기만 하는가.

이렇게 말하면 개혁의 지도부는 물론 다시 ‘수구 기득권 세력’을 들먹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것도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에 순진한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내는 것도 역시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우리는 그런 현실들이 전적으로 ‘개혁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혁이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은 이유는 개혁의 지도부가 무능해서거나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발 때문이 아니라, ‘개혁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좌파 운동’이 아니다. 개혁은 그 식인 체제가 내뿜는 악취를 제거하는 ‘우파 운동’일 뿐이다.

개혁으로 위기를 맞은 건 ‘식인 체제’가 아니라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들’(제도 정당과 언론, NGO 따위)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이미 효용성을 다한, 그 심한 악취로 더 이상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을 서둘러 교체하는 중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실체이자 진실이다. 오늘 많은 선한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지는 탄핵 사태 역시 그런 교체의 와중에서 나온 사건이다. 교체 위기에 빠진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는 어차피 죽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그들이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식인체제의 '대중적 대변자’ 노릇을 할 수 없음을 스스로 웅변했을 뿐이다. 그들은 노무현 씨를 탄핵함으로써, 수구기득권 세력과 싸운다는 강력한 명분을 가지면서도 졸렬한 실무 능력으로 지리멸렬하던 노무현 씨와 열우당을 단숨에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열우당 의원들이 앞으론 웃지만 뒤론 웃고 있다는, 아니 기뻐서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순교자’는 곧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말이다.

그 덕에 개혁 우파는 좀더 빨리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로서 역할에 충실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대변자는 교체된 대변자 세력을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고, 적어도 중간 계급 이상의 한국인들은 좀더 ‘상식적인 시민 사회’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한국인들, 한국사회의 실제성원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며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몸을 불사르는 일도 계속될 것이며, 순진한 청년들이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서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수구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라는 설명은 ‘한국적 현실’이라는 좀더 전통적인 설명으로 대체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오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속속 여의도로 모여드는 먹이들을 보며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식인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

추신 : 어떤 이가 나에게 왜 여의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냉소하느냐 말했다. 좌파가 ‘관념적 냉소로 가득찬 인간’ 취급을 받는 세상이긴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들을 냉소하겠는가. 그들은 단지 좀더 나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래서 욕심도 적을 뿐이다. 그들은 고작 축구팀이 세계 4강에 드는 일로 조국에 대한 첫 자부심을 느끼고, 개혁이라는 새로운 식인체제의 대변자가 처한 곤경을 한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결코 그들을 냉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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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참정'할 수 없는 대의민주제의 현실을 직시하자


시정잡배들의 추악한 정치 싸움판이 되어 반민주, 반인권 법률을 양산해
온 국회가 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다. 부정부패와 당리당략에 매달려 이전
투구에 골몰하던 야당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킨 것
이다.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궁지에 내몰린 야당들이 도덕성이나 정당성
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의 중대사안도 정치적 기
득권을 회복하려는 술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재삼 확인할 필요도 없
다. 5공 신군부, 냉전수구의식과 지역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는 그들은 그러
기에 들끓는 반대 여론도 외면한 채 탄핵을 결행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그렇다고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이 작금의 사태를 분노할 자격이라
도 있는가! 그들은 이라크 파병, 한-칠레 FTA, 집시법 개악, 인터넷 실명
제 등과 같이 기본권을 침해는 각종 법안과 결의안을 수구보수정당과 한편
이 되어 통과시키지 않았던가. 신자유주의 경제강령을 무슨 경전처럼 떠받
들고 민중의 생존권을 압살하는 정책 강행을 개혁이라고 호도하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 민주투사인 양 치장하는 것도 역겹기만 하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가 진정 분노해야 하는 것은 이 나라 주권자들이 정
치로부터 배제되어 들러리가 되고 있는 정치현실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국회의원들에게 국회를 이전투구의 전투장으로 삼을 권능을 부여한 것은
참담하게도 주권자들이다. 주권자들은 4년마다 한번 투표로 대표를 뽑을
수 있을 뿐, 그 대표를 소환할 수도, 주권자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법안
을 직접 발의할 수도 없다. 더욱이 정당을 만들어 국회에 진출하기도 어렵
다. 이런 예들은 이미 다른 정치 선진국들에서는 일반적인 정치제도가 되
었음에도 말이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가짜 대표들에게 대표성을 위임한 채 국회를 바라보
며 분노와 허탈의 종주먹질만 해댈 것인가. 오늘 6월 항쟁을 계승하여 민
주주의를 실현하는 양 판치고 있는 가짜 민주주의 정치판을 뒤엎는 것이
진정 6월 항쟁의 계승일 것이다. 그 길은 주권자가 직접 참정할 수 있는
정치제도를 수립해야만 이룰 수 있다. 그것이 가짜 대표들이 저지른 이번
탄핵 사태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인권적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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