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힘들줄은.....

이게 내 한계인가?

하.....

왜 나에게 이런 아픔을.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왜 우리만 언제까지

이런식으로

대한민국,정말 희망도 미래도 없다.

오늘부로 이 나라에 대해

어떤식으로든 봉사할 마음이 싸그리 없어졌다.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든지

미친 개 보듯 할 것이다.

그냥 폭삭 망해주시길.

그리고 돈 좀 모으시면 이민들 가시길.

한국,살수록 정나미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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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러시나요? 무슨일인지 궁금해집니다. 마음이 좀 풀리면 살짝 여기다 풀어놓아보세요.

Xoxov 2006-10-04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님의 안일함으로 인해 제가 몸이 굉장히 아프게 돼서요.몸이 아프니깐 만사가 다 귀찮고 짜증뿐이네요.이 정도면 답변이 됐을까요?..
 
 전출처 : 키노 > DJ 배철수의 나의 삶, 나의 음악 : 2회 (배철수)

DJ 배철수의 나의 삶, 나의 음악 : 2회 (배철수)

어렸을 때 음악은 들은 것이 아니라 그냥 '들린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아버지 바지 핫바지' 하며 따라 불렀던 베니 굿맨(Benny Goodman)의 'Sing, sing, sing'이나 수 톰슨(Sue Thompson)의 'Sad movie(Makes me cry)' 등은 우리 가수들도 부르곤 해서 자동적으로 들린 것들이다.



내가 능동적 의식을 갖고 들은 최초의 노래는 경희중학교 1학년 때 접한 브라이언 하일런드(Brian Hyland)의 'Sealed with a kiss(키스로 봉한 편지)'였다. 멜로디를 듣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환희를 맛보았다. 사춘기 소년을 자극하는 키스란 언어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들릴 수가 없었다. 나중 친구가 가사를 알려줘서 열심히 해석했던 일도 기억난다.

중학교와 고교(경희고) 때까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히트 팝송이 전부였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팝송을 거의 듣지 않지만 그 시절 청년들에게 향수할 대중문화의 으뜸은 팝송이었다. 청년과 기성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팝송을 들었고 불렀다. 당시 최고 인기 팝가수가 탐 존스(Tom Jones)였는데, 고교 시절 한 친구가 그의 'Green green grass of home(고향의 푸른 잔디)'를 기타 치며 부르는데 너무 멋져 보여 나도 나중에는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한국항공대)에 가서 마침내 밴드를 시작하게 됐다. 교내 밴드인 활주로(런웨이)의 멤버로 음악을 실제로 하기 시작했을 때, 음악은 이전의 듣는 입장과는 천양지차였다. 팝송을 카피해서 연주한다는 것은 굉장한 변화였으며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고 할까. 이 때 가장 많이 카피한 팝이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즉 C.C.R.로 이 밴드의 히트송인 'I put a spell on you' 'Proud Mary' 'Who'll stop the rain' 'Have you ever seen the rain' 등을 줄창 연습했다. 그들의 인기도 당대 최고인데다 음악도 쉬었기 때문이었다. C.C.R.의 1970년 앨범 < Cosmo's Factory >는 잊을 수 없다. 런웨이를 하면서 듣는 음악과 카피하는 음악은 다르게 갔고 그것을 일치시키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하지만 대학시절 가정형편상 나는 집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돈이 없어서 음반도 살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전축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주요 음악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 고교 동창으로 지금은 회사원인 김태명 덕분이다. 집이 잘 살았던 그는 상당히 많은 음반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 날 때마다 그 친구 집에 음악 들으러 갔다.

거기서 제스로 툴(Jethro Tull), 산타나(Santana), 블랙 새버스(Black Sabbath),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등을 비롯해 정말 많은 음악을 들었다. 더욱이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록의 르네상스기인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중반의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난 지금도 그 시절의 음악을 그 당시에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이 때 솔직히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음악은 어려웠고 상대적으로 딥 퍼플(Deep Purple)을 더 들었던 것 같다. 내 돈 주고 처음 산 앨범도 딥 퍼플의 < Machine Head >(1972년)였다. 너무나도 갖고 싶어서 산 것인데 집에 전축이 없었음에도 구입했다. 아마 요즘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음반을 트는 전축이 없는데 음반을 사는 심정.


환상적인 음악을 듣는 것은 좋으나 막상 음악을 하면서는 비참해졌다. 귀는 레드 제플린인데 실제 연주는 동네밴드였기 때문이다. 이 괴리감이 날 괴롭혔다. 그 콤플렉스가 너무도 커 나중에 그룹 송골매 시절, 가장 추구했던 것은 '어떻게든 연주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몇 차례 이뤄진 밴드의 개편도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이제 음악을 그만두고 생각해보니 연주력이 중요한 것은 아니더라. 그러나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런웨이로 해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 입상하면서 정식 가요계로 들어와서 프로 밴드 '사랑과 평화'를 보면 부러웠고 열등감이 가득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너무도 환상적인 연주였다. TV로 생중계된 MBC '78 대학가요제 공개방송에서 경연이 끝나고 게스트로 출연한 그들이 들려준 '한동안 뜸했었지'와 'A Fifth of Beethoven'(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월터 머피 밴드가 편곡한 것으로 1976년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에 우리 런웨이 멤버들은 넋을 잃었다.


'사랑과 평화'가 나왔으니 우리 음악을 꺼낸다면 중고교 때는 주류음악계가 성인가요 일변도였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들을 게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신중현선생을 알게 되면서 바뀌었다. 1972년 '신중현과 더 맨'의 '아름다운 강산'은 나로 하여금 '한국에도 이런 음악이 있나!'는 충격의 회오리를 불렀다. 음악의 구성을 비롯한 모든 게 종래의 가요와는 완전히 달랐다.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도 마찬가지였다. '미인'의 성공을 보면서 난 '한국에서 록을 한다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는 영감을 받았다.


김민기의 유일한 1971년 앨범도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가사 측면의 쇼크였다. '우리 글로 이렇게 좋은 노랫말을 쓸 수 있구나!' 이후 한동안은 충격이 없었다가 '산울림'의 1977년 데뷔앨범을 듣고 오랜만에 다시 놀랐다. 이전까지 가사에는 운율이 있어야 했지만 산울림은 산문적인 어법을 노랫말에 심은 것이었다. '3코드'라는 사실도 새로웠고. '이런 식으로도 음악을 할 수 있구나!' 난 그들의 '아니 벌써'를 국내 최초의 펑크(punk) 히트송으로 간주한다.



난 상기했듯 활주로와 송골매 밴드 시절 연주력 중심의 접근을 한 영향으로 정규보다는 라이브 앨범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의 1975년 두장짜리 라이브 앨범 < Caught In The Act >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이 밴드는 스튜디오 것보다 라이브를 더 잘한 것 같다. 유라이어 힙(Uriah Heep)도 라이브 앨범이 더 낫다. 1973년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11분55초짜리의 곡 'July morning'은 전율을 일으킨다. 이 라이브를 듣고 정규 곡을 들으면 시시할 정도.




이것만을 들어라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비틀스(Beatles)다. 아이돌 밴드로 출발해서 아티스트 반열에 오른 그들은 록은 물론 모든 장르의 음악을 했다. 초보자나 지망생들은 우선 이들의 히트 곡부터 들어서 음악에 길이 들어야 한다. 이 점에서 1973년에 나온 각각 2장 짜리인 비틀스의 레드 앨범 < The Beatles/1962-1966 >과 블루 앨범 < The Beatles/1967-1970 >을 추천한다. 디스크자키를 하면서 세월이 가면 갈수록 비틀스의 광대한 흡수력을 절감한다.




음악분야의 종사자들은 뮤지션이나 평론가나 마케팅담당자나 나 같은 디스크자키나 한 가지 기본적 공통조건이 있다. 그것은 음악을 많이 들으라는 것이다. 음악을 들어 공력을 다지지 않으면 막상 음악을 하게 되더라도 진부하고 지루한 음악이 된다고 본다. 난 요즘 후배 아티스트들이 다들 잘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높은 점수는 독창성에 준다. IZM 5주년을 축하하며 모든 방문객들이 음악의 즐거움, 그 청취의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다.

인터뷰, 정리 임진모

  2006/09 임진모 (jjinmoo@izm.co.kr)

* IZM - New Stre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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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광우병

  "광우병을 경고한다"…보건의료 전문가 1천여 명 선언
  "盧정부는 전염병 위험을 자진 도입한 정부로 기록될것"
  2006-09-27 오후 5:52:33
  전국의 의사, 수의사, 치과의사, 약사, 한의사 등 보건의료인 1174명이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이 경고 선언에는 예방의학을 전공한 현직 교수 등 31명이 직접 자기 이름을 밝히며 참여해 눈길을 끈다.
  
  "전염병 자진해서 들여온 정부로 기록될 것"
  
  전국의 의사 207명, 수의사 111명, 치과의사 221명, 약사 344명, 한의사 144명, 보건의료 분야 학생 및 종사자 147명 등 전국의 보건의료인 1174명은 27일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경고하는 보건의료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정부로 인해 전 국민이 광우병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게 되었다"며 "광우병은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음에도 정부가 앞장서 전 국민을 광우병의 위험에 몰아넣는 현실에 보건의료인들은 큰 자괴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들은 "소의 광우병은 종 간 장벽을 뛰어넘어 인간에게 '인간광우병(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 vCJD)'을 유발한다"며 "노무현 정부는 전 국민을 발병하는 경우 100% 사망하는 치명적인 전염병 위험에 몰아넣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정책실패를 자초한 정부로 기록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30개월 미만 살코기, 안전하지 않다"
  
  보건의료인들은 특히 "정부가 주장해 온 '30개월 미만의 뼈가 제거된 살코기'가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간 <프레시안> 등 언론과 시민사회단체에서 수차례 지적한 내용을 보건의료인들이 양심을 걸고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영국, 독일, 폴란드 등에서 30개월 미만의 소에서 광우병이 수 건 발생했고 일본에서는 불과 21개월 된 송아지에서도 광우병 발생이 확인됐다"며 "이런 증거는 일본이 20개월 이하의 미국산 쇠고기만 수입하기로 하는 데 결정적 기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이어 "살코기 자체도 광우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며 "일본에서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광우병의 증상이 확인되지 않았던 소인데도 도축 뒤 살코기에서 변형 프리온 단백질이 검출된 사례가 2건이나 있었다"고 덧붙였다.
  
  "피하고 싶더라도 피할 수가 없다"
  
  보건의료인들은 "소비자의 최종 선택권을 가로막는 한국의 쇠고기 유통체계는 사태를 더욱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도 국민이 그것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2007년부터 300㎡ 이상의 음식점을 대상으로 쇠고기 원산지 표시제를 시행하더라도 규모가 더 작은 대다수의 음식점들은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밖에 없다. 원산지 표시제의 적용을 받는 음식점은 전국 음식점의 1%도 안 되는 불과 2700곳에 불과하다.
  
  보건의료인들은 "음식점, 학교급식, 병원급식, 각종 가공식품에 미국산 쇠고기가 쓰이더라도 소비자는 이를 알 수가 없다"며 "이런 유통구조에서는 미국산 쇠고기가 한국산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전예방의 원칙,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보건의료인들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사전예방의 원칙'을 강조했다. 이들은 "사전예방의 원칙을 지키지 않아 생명, 건강을 잃은 예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다"며 "1990년대 전 유럽을 공포 속에 몰아넣은 광우병의 역사는 그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추석이 지난 10월 중순 이후부터 국내에 들어와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유통될 전망이다. 2003년 12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중단되기 직전에 국내 쇠고기 소비량의 50%를 미국산 쇠고기가 차지했던 것을 감안하면 미국산 쇠고기가 국민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강양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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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병역기피의 사회사

병역기피의 사회사

조선시대, 번상(番上)과 봉족(奉足)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군대가 없었던 적은 없다. 군대의 역사만큼 역사가 오랜 것이 병역기피의 역사다. 군에 복무하는 것이 하나의 신분적 특권이고, 군복무에 대한 대가가 정당하게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병역기피가 심하지 않았지만, 부담만 있고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불이익뿐인 사회에서 병역기피나 거부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병역기피에도 뿌리 깊은 역사가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귀족이 전사계급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복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서양에는 이런 전통이 남아있다보니 지배층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해야만 지배층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지도층의 의무를 이야기할 때 군복무가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까지는 이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창건되고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고려의 지배층은 무신 성향을 버리고 유학을 배우는 문신귀족으로 변화했다. 고려의 문신귀족들은 점차 숭문천무(崇文賤武), 즉 문을 숭상하고 무를 업신여기는 풍조에 빠졌다가, 무신과 군인들의 반발을 자초해 무신의 난이라는 호된 대가를 치른다. 고려시대에 군인은 전시과 체제 아래 편입되어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았다. 군역과 함께 군인전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군인전을 부여받고 군인으로 나가는 특정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군반씨족(軍班氏族)이라고 했다. 이들의 지위는 문신이나 무신에는 못 미치지만, 평민 농민보다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화가 계속되면서 군인들은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천역으로 변해갔고,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군반씨족 체제의 와해는 불가피했다. 무신의 난 이후 정권을 잡은 최씨 가문은 삼별초를 만들었는데, 형식은 정부군이었지만 내용으로는 최씨 가문의 사병(私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가 해체된 뒤 왜구의 침략 등 외침이 있으면 농민 가운데 병사를 징발해 대응하고 전쟁이 끝나면 군대를 해산했다. 상비병 체제의 붕괴 속에서 고대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로 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창건 이후 태종은 개국공신들이 두었던 사병을 혁파하고 군제를 개혁했다. 조선 전기의 군제는 기본적으로 병농일치에 입각한 국민개병제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천인을 뺀 모든 사람들이 군역(軍役)의 의무를 지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16살에 시작해 환갑상을 받을 때가 된 60살에야 면하는, 평생에 걸쳐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부담이었다. 병농일치의 국민개병제가 원활히 운영되기 위해서는 농민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왕조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급해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국민개병제는 성립과 동시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서울로 올라와 현역으로 근무하는 번상(番上)과 번상하는 군인의 생계를 돕는 보인(保人) 또는 봉족(奉足)으로 구분된다. 고려시대에도 봉족을 두었는데, 고려의 봉족은 주된 임무가 군인전을 경작하는 것인 데 비해, 조선시대의 봉족은 번상을 하는 정군(正軍)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포(布)를 바쳐야 했다. 봉족들이 군역으로 바쳐야 하는 포는 정군의 역종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1년에 2필(돈으로는 2량, 쌀로는 6두)로 상당히 무거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번상하는 일도 점차 포를 바치는 것으로 바뀌어 국방력은 매우 약화됐다.


승병은 군역기피의 전통?

  양반이나 공신의 자제들은 조선 초기에는 충순위(忠順衛), 충의위(忠義衛), 충찬위(忠贊衛) 등 특수한 성격의 보충대에 편입되었다. 이들 부대들은 군사적 성격보다는 문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대기소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국민개병제의 본래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조선 초기의 양반 자제들은 이런 식으로나마 군역의 의무를 졌다.

  조선의 법제상 양반이란 신분의 개념이 아니라 문반과 무반의 관료를 뜻하는 것이며, 법제상의 신분은 양반을 포함한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하나의 이상이었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은 특권귀족화하였다. 양반들은 자신들이 일반 평민들이 져야 하는 군역을 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달가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군역을 지지 않는 것을 양반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인구 구성에서 양반이 10% 미만이고, 노비 등 각종 천민이 40 ~ 50%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만이 군역을 전담한 것이다.

  포 2필이라는 만만치 않은 군역을 거의 평생 져야 하니 농민들 사이에 군역을 피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양인의 신분은 노비보다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군역의 부담이 무겁다 보니 양인의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세도가나 힘 있는 양반 가문의 노비가 되는 것을 자원하는 일이 많았다. 스스로 노비의 길을 택해야 할 만큼 군역의 부담은 무거운 것이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승려가 되는 길이었다. 조선시대 승려의 지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천인에 속하는데, 양인인 농민이 사회적 신분을 낮춰 승려가 되는 데는 불심의 발동보다 군역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국가에서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요역 대상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출현한 것도 호국불교의 전통보다 승려집단이 군역기피자의 소굴이라는 인식과 더 관련이 깊다. 이도저도 안 되는 농민들은 도망을 쳐서 군역을 모면했다. 또 당시에는 대립(代立)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번상해야 할 차례에 돈을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현역근무를 하게 했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校生)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서양과는 달리 유교문명권에서는 평민도 여건이 허락되면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민 가운데도 드물기는 하지만 문과나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향교의 교육 기능은 매우 취약했다. 이미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울 상실했다. 더구나 이미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갓난아기도 군역, 죽은 사람도 군역

  임진왜란 이후인 인조대에 이르면 전국의 교생 수가 4만명을 넘었다. 교생들이 향교에 적을 두는 이유가 유학 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역 기피에 있었고, 평생을 교생으로 있으면서도 글 한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정부에서는 낙강충군법(落講充軍法)이라는 것을 제정해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생들에게도 군역을 지게 하는 방안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아직 향교에 빈한한 양반 자제들이 적지 않게 다니는데다가, 군역을 지느냐의 여부가 양반층의 신분의 상징이 되어버린 마당에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은 곤란했다. 결국 “민심은 잃어도 좋으나 선비들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民心可失 士心不可失)”라는 명분 아래 이 법은 시행 6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효종은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에 힘을 기울였다.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북벌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 당시의 군비 확충은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 이른바 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를 낳았다. 여기서 양역이라 함은 곧 군역을 말하는 것으로, 양반들이 전혀 군역을 지지 않아 양인들만 지게 된 사정을 반영한다. 좁은 지면에 복잡한 논의를 소개할 수는 없지만, 과도한 군역 부담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유일한 방안은 양반을 포함한 모든 가호에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는 데로 모아졌다. 그러나 군역을 지지 않는 것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던 양반들은 이 제도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영조는 호포법이 실시되면 자신이 가장 먼저 호포를 바치겠다고 선언하며 양반들의 양보를 촉구했으나, 양반들은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호포법은 시행되지 못하고 대신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었다. 균역법은 종래 포 2필인 군역의 부담을 1필로 반감하는 조치였다. 균역법은 호포법만큼 강력하지는 못했어도, 잘만 시행되면 농민들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균역법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세율을 줄인 대신, 세원을 넓히고자 한 정부는 군적에 올라 군역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총원인 군액(軍額)을 크게 늘린 것이다. 영조의 전 임금인 숙종대에 30만이던 군액은 영조대에 이르면 50만으로 크게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흔히 삼정(三政)의 문란이란 말을 많이 쓴다. 삼정이란 정부 수입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布)로 받는 군정(軍政), 정부의 구휼미 제도로 사실상 고리대금업이 돼버린 환곡(還穀)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부담이 군정이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세율은 낮아졌지만, 세원을 확대하다 보니 16살 이상 60살 이하의 장정이 아니라도 군역의 부담을 져야 했다. 갓난 아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사람도 살아 있는 것으로 꾸미거나 체납액을 이유로 군적에서 삭제해주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계속 군포를 거둬가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이나 이웃에 부과하는 족징(族徵)·인징(隣徵) 등은 군역이라는 이름 아래 농민들을 쥐어짜는 고전적 수법이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도망갈수록 남아서 땅 파고 있는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학질은 떼도 첩역은 못 뗀다”

  또 조선 후기에는 군제가 복잡해지면서 농민들도 자신이 어떤 군영의 군역을 지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의 이 군영, 저 군영이, 또는 지방의 군영에서 각각 군역을 부과해 한몸으로 여러 곳에 군역을 져야하는 첩역(疊役)의 폐단도 자주 일어났다. 때문에 농민들은 학질은 뗄 수 있으나 첩역은 뗄 수 없다고 탄식했다.

  농민의 부담이 이렇게 무겁다 보니 아전들에게 뇌물을 바쳐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사람들은 자꾸 늘어났다. 아니, 아전을 탓할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정부는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을 써서 곡물이나 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팔았다. 벼슬 임명장인 교지에 이름을 비워놓은 이른바 공명첩(空名帖)인데, 이 벼슬을 산 사람은 호적에 납속, 즉 돈으로 산 것임을 밝혀 군역을 면제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지켜질 리 없었다. 돈 주고 공명첩을 살 정도의 재력가라면, 아전들에게도 돈을 먹여 호적에 납속 두 글자를 빼고 기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가난한 양반들은 조상이 받은 여러 장의 교지 가운데서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팔아먹고, 이를 산 사람은 교지의 주인공이 자기 조상이라 우기고, 또 족보를 위족하고 해서 조금 힘 있는 사람들은 다 군역을 빼먹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꿔가며(換父易祖) 얻은 양반 지위는 실제 양반 사회에서 양반으로 대우받을 수 없었지만, 국가를 상대로 군역을 면제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문란과 관련해 호적을 분석해 양반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오는 것도 다 이들 군역기피자들 때문이다.

  그러면 호적을 정리하고 인구를 파악해 군정을 닦는 군정수(軍政修)를 해 이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아전이라는 것들은 일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일이 있어야 먹을 것이 생기니, 군정을 닦는다고 호적을 재정리하면 아전의 이익이 될 뿐 오히려 농민에게 부담이 될 뿐이라서, 군정수는 현명한 수령이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이다. 다산 같은 철저한 개혁가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된 것이다.

  천민의 다수가 조선 후기에 가면 양인에 편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떤 사회도 특권층이 40%를 넘는다면 유지될 수 없다. 경제적·사회적 형편이 좋은 상위 40% 정도가 군역을 지지 않고, 또 노비 등 천민들을 빼고 나니 중하위층 30, 40%의 양민들만 군역을 부담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이 ‘애절양(哀絶陽)’이란 끔찍한 시를 쓴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시아버지 돌아가 벌써 상복을 벗었으며/ 갓난 아기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첨정되어/ 군보에 올랐네/ 하소연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 지켜 섰고,/이정(里正)이 호통치며/ 외양간에서 소마저 끌어갔네/ 칼 갈아 방에 들어가/ 자리에 피 가득한데/ 스스로 한탄하는 말/ 애 낳아 이 고생당했구나.” 이리저리 다 군역을 피하는데, 그럴 힘도 주변머리도 없는 불쌍한 농민이 군역의 부담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성기를 자른 것이다. 피임수술도 기구도 없던 시절, 아이 하나 더 태어나면 군포 2필씩 부담이 되니 그곳에 칼을 댄 것이다. 정력에 좋다는 것은 모두 다 잡아먹어 멸종위기에 놓인 정력공화국 대한민국의 아아, 가련한 조상의 끔찍한 군역기피여!


보수적 대원군조차 실각시킨 호포법

  1862년 대기근이 들고 삼남지방은 흔히 민란이라고 하는 농민들의 항쟁에 휩싸였다. 삼정의 문란, 특히 군정의 문란은 농민항쟁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대원군이 집권한 것은 안으로는 거센 농민항쟁에, 밖으로는 서양의 동아시아 침략에 직면한 상황에서였다. 안팎으로 조여오는 위기상황에서 대원군은 나름대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국방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보수적 개혁가인 대원군의 여러 정책 가운데서 군역과 관련된 것은 17세기 말부터 양역변통 논의 때마다 대안으로 제기됐으나 양반들의 저항으로 시행되지 못한 호포법의 시행이다. 보수적 실용주의자인 대원군은 정부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포법을 시행했지만, 결코 양반들의 신분적 특권을 약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군포를 부담하지 않는 것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던 양반들의 입장을 고려해 양반가에서 호포를 낼 때는 노(努)의 이름으로 내게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대원군을 용납하지 않았다. 병인양요·신미양요 등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와 미국 함대를 ‘격퇴’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하고,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보수적 양반의 지지를 받은 대원군이 실각한 결정적 요인은 민감한 호포법의 시행, 곧 양반들이 자신의 신분적 특권의 상징이라 여기는 군포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초기에는 국민개병제를 표방해 양반들도 군역을 져야 했지만, 세월이 흐르자 군역면제는 양반의 특권으로 자리잡았다. 이회창 후보 일가의 병역면제 의혹을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거론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교가 뿌리내린 근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나라 지배층의 덕목에 군복무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인과 똑같이 군역을 지는 것은 오히려 치욕적인 일이었다. 조선시대였으면 상류층의 병역면제는 전혀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회창 후보는 시대를 잘못 만난 불행한 지도자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조선시대의 지배층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유의 글을 쓰다 보면 당연히 지배층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지만,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나름대로 매우 엄격한 자기관리의 잣대가 있었다.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조선왕조가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당시 지배층이 그들 나름대로 엄격한 책임감으로 사회를 지탱해왔다는 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선비정신이라 부르든, 유교 지식인들의 자기성찰이라 부르든 불행히도 오늘날의 상류층은 그런 전통사회 지배층의 책임감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렇다고 무(武)의 전통을 이은 서구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체현하는 것도 아니다. 이 땅의 주류는 정녕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 하는가?


상아탑은 병역비리탑?

병역기피의 사회사 2- 50년대 징집면제 위한 정원외 입학 성행하면서 최대 수혜 입어

  우리나라에서 징병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4년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징병제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일각에서 있었으나, 1894년 농민전쟁의 홍역을 치른 고종은 농민들에게 무장을 쥐어주는 일을 극력 피하여 실현을 보지는 못했다.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 강점기의 징병제를 둘러싼 논의과정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일제치하땐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일제의 폭압에 눌려 징병제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이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수준의 병역기피와 저항이 존재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국내에서 징용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청년들이 곳곳에서 산 속으로 들어가 집단을 형성하고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1944년 경상북도 경산(慶山)경찰서에서 적발한 사건을 보면 징용을 기피한 청장년 27명이 산에 들어가 결심대(決心隊)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식량과 죽창, 낫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산 속에 숨어 있었다. 일제의 징병이나 징용을 거부한 청년들이 입산하여 조직을 결성하고 일제에 대해 무장항쟁을 준비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전쟁 시기의 빨치산 지도자로 유명한 남도부(南道富, 본명은 河準洙)가 지리산에서 조직한 보광당(普光黨)을 들 수 있다.

  일본의 중앙대학 법학부를 다니던 하준수는 학도지원병제가 발표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하여 친구인 노동무와 함께 고향 근처인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갔다. 당시 지리산에는 징용·징병을 거부한 청년들이 약 300명가량 숨어 있었는데 하준수는 이들을 중심으로 1945년 3월 동지 73명을 모아 보광당을 조직하여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고, 장차 연합군이 조선에 상륙하는 경우 이에 호응할 수 있도록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무기의 입수를 위해 인근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1944년 경기도 포천(抱川) 인근에서도 일본 청산학원 학생 염윤구(廉閏龜) 등이 조선민족해방협동단(또는 협동당)을 조직하고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광덕주재소에서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또 강원도 설악산에서는 이혁기(李赫基)가 학병거부자들을 모아 산악대(山岳隊)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단체들은 여운형과 일정한 연락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제에 의해 일단 학병이나 징병으로 끌려간 젊은이들 중에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나 화북조선독립동맹 등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한 분들도 많았다. 광복군은 바로 이들을 기반으로 창설된 것이고, 이런 젊은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도 크게 발전했다. 즉 이 시기의 병역기피나 탈영은 독립운동의 주요한 수단이었다. 한편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제7안식일예수재림교 등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나 집총거부를 실천해와 박해받은 교파의 신자들은 일제 강점기에도 역시 자신들의 종교적 양심에 따라 징병을 기피하여 산으로 피신하거나 일제에 의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 당시 악질 친일파들은 학병이나 징병에 응할 것을 일반 청년들에게 권유하면서 자기 자식을 앞장서서 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민생단 창립의 주역으로 뒤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지낸 조병상(曺秉相)이다. 그는 두 아들을 모두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보내면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학도특별지원병 제도는 조선에 있어서 상류계급 사람들의 애국심을 저울질하는 중대한 시금석”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입만 뻥끗하면 안보요 애국이요 반공을 내세우면서 자기 자식들은 죄다 군대를 빼먹게 한 모모씨들에 비하면 조병상은 비록 악질 친일파지만 자기 나름대로 엄격한 도덕적 의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형편없는 부정(父情)의 소유자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도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 없이 큰소리칠 수 있으니 독립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고 감탄해야 할까?


악질 친일파들의 도덕적 병역의무?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이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유엔군 사령관 벤플리트 대장의 아들도 한국전선에서 실종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고위 공직자 아들들이 전선에 나갔다는 이야기는 과문이지만 들어본 적이 없다. 국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의 초대 사령관이자 이승만 정권의 막후 실력자인 원용덕은 아들이 육사를 마치자 동기생 150명 전원이 전선에 투입될 때 자기 아들만 자신이 사령관으로 있던 헌병 병과로 빼돌려 후방에 배치해 빈축을 샀을 뿐이다.

  제도가 바로 서지 못할 때 합법적인 병역면제나 병역연기와 불법적인 병역기피의 차이는 불분명해진다. 한국전쟁 기간 중 군대에 가는 것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고, 또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군에 가서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고, 얼어죽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병역기피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 당시 병역기피의 주된 통로는 대학에 들어가 징집연기를 받는 것이다. 일단 연기를 하여 급한 불을 끄고 다른 방법을 알아보아 징집연령을 넘기는 방식은 가장 애용된 병역기피의 수단이었다.

  그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유진오 박사는 “총탄이 마구 날아오는 전시 중에 징집제도가 비로소 실시되고 그에 따라 대학생에 대한 징집 보류제도도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 제도는 상상 이상으로 악용되어 크나큰 폐단을 자아내게 되었던 것”이라면서 “이 제도는 마치 휘발유를 뿌려놓은 벌판에 성냥불을 켜댄 것 모양으로 우리나라의 대학들을 눈 깜짝할 동안에 혼란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들게 했다”고 평가했다. 그 당시는 “대학다운 시설도 교수진도 없이 문교부로부터 특허받은 대학의 간판만 붙여놓고 앉아 있으면 수천명의 학생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당시 사립대학들은 이를 기회로 청강생·보결생 등 정원외 입학을 마구 받아들였고, 당국은 이를 묵인했다. 또 비좁은 시설에 많은 사람을 집어넣고 강의하다 보니 출석률이 높아질까봐 학교당국이 교수들에게 출석을 부르지 말라고 종용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1950년대는 사립대학의 황금시대, 그것도 그냥 황금시대가 아니라 ‘동화적 황금시대’였다. 5·16 군사반란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대학정비를 단행한 직후인 1962년에 아직도 대학생 수가 정원의 175%였던 것을 보면 1950년대 정원외 입학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병무행정 담당자는 물론이고, 사립대학 관계자까지 대학이 병역기피자의 소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 과도한 교육열에서 대학진학이 병역기피 수단이 된다는 점은 그것이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 분명히 아주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분위기의 최대의 수혜자는 사립대학이었다. 사립대학을 감독할 능력도 의지도 없던 문교당국의 철저한 방임 아래 대부분의 사립대학은 정원외 입학을 받아 그 돈으로 건물을 지었다. 단기적으로는 병역기피의, 장기적으로는 출세의 사다리로 대학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자 농촌에서는 소를 팔아 아들들을 대학에 보냈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대학망국론이 대두된 것도 다 이때의 일이다. 이처럼 사립대학이 급성장하고 사학비리가 만연하게 된 일등공신의 하나는 병역기피였다. 1950년대의 사립대학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병역기피 풍조의 최대 수혜자였다고 할 것이다.

  병무행정의 근간이 되는 호적제도가 문란한 것도 병역기피를 제도적으로 조장했다. 분단으로 인해 이북지역의 호적에 접근할 수 없게 된데다 전쟁 기간에 많은 지역에서 호적이 손실·파손됨에 따라 임시호적·가호적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군대를 빼먹는 일도 빈발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호적 정리가 잘못되어 제대 뒤에 또다시 징집영장이 나와 두번 군대에 갔다가 탈영하여 억울하게 전과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1953년부터 1966년까지 해외유학인정 선발시험을 통과해 해외로 유학한 사람은 모두 7398명인데 이 중 귀국한 사람이 6%에 불과한 것도 상류층 자제들의 병역기피와 무관하지 않다. 신생 독립국으로서는 엄청난 수준의 두뇌유출을 겪은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뒤 민주당 정권은 민심 수습 차원에서 병역미필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1960년 12월 말 정부는 제대군인이 150만에 병역기피자 10만, 그리고 탈영자가 12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정부는 또 21살 이상 30살 이하의 공무원들의 병역사항을 조사하여 1961년 3월21일까지 모두 2,746명을 해임했다.


되풀이된 자진신고와 일제단속

  1961년 5·16 군사반란 직후인 6월9일 군사정권은 내각 공고 제1호로 병역의무 불이행자 지수신고기간을 설정하여 10일간 24만 5천여 명의 신고를 접수했는데, 기간이 짧았다 하여 이듬해 초 2차 신고기간을 설정했다. 1, 2차 신고기간에 신고한 사람은 무려 41만명에 육박하는 놀라운 숫자였다. 이 숫자에는 제대군인으로서 소집에 불응한 사람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병역의무 불이행자가 수십만에 달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 중 나이 든 사람 1만4천여명은 당시에 일제 검거된 깡패들과 함께 계화도 간척 등 국토건설사업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유야무야되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5·16 1주년 담화에서 사회정의 실현 분야의 업적으로 폭력배 일소와 함께 “병역기피자를 공직에서 추방하여 법 앞에는 만민이 평등함을 처음으로 실증”하였다고 자랑했는데, 사실 병역기피자의 공직추방은 제2공화국의 업적을 훔쳐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내내 병역기피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자진신고와 일제단속이 되풀이되었지만, 후속조치가 따르지 않았고 당국의 태도가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병무청이 발행한 <병무행정사>는 수차례의 자수신고기간 설정이 “어떤 면에서는 병역의무자의 병역기피 경향을 조장하는 듯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고 기술할 정도였다. 이런 자진신고기간은 1969년 말에서 1970년 초에 걸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1차 병무비리파동을 거친 뒤 1969년과 1970년 1, 2차에 걸쳐 모두 7만여명 기피자의 자진신고를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1968년 이후 병영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박정희 정권은 1차 병무비리파동에 충격을 받고 병무행정의 일원화를 목표로 1970년 8월 국방부의 외청으로 중앙병무청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1972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제2차 병무파동이 일어나 병무청이 사직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병역기피에 대한 단속이 엄격하게 실시된 것은 2차 병무파동 뒤인 1973년부터다. 유신쿠데타 직후 정부는 1973년 1월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입영 및 소집 기피자는 병역법상의 3년 이하의 징역에서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을 크게 강화했다. 또 연기, 면제, 재영기간 단축에 따른 뇌물 수수는 5년 이하의 징역에서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을 강화했다. 한편 이 법은 행정착오를 빙자한 병무부조리를 제거하기 위해 ‘병무직원이 위법한 판정이나 경정 처분, 허가를 하였을 때’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이 조항에 따라 병무청 직원들이 얼마나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요즘 논란이 되는 이정연씨의 병적기록표처럼 수십 군데의 오기가 발생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병역특례의 절정, 석사장교

  박정희는 또 1973년 2월26일 대통령 훈령 34호로 ‘병무행정 쇄신지침’을 내려 범정부 차원에서 ‘10월유신의 기본정신’을 받들어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각종 병무사범을 완전 근절하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당국의 방침이 강화되면서 병역기피자는 1973년을 고비로 크게 줄어들었다. 1970년에는 3만4004명으로 전체 징병대상자의 13.2%였던 기피자 수는 1973년 3월 이후 902명으로 0.3%, 1974년 234명으로 0.1%로 줄어들었고, 1980∼1983년 기간에는 매년 3∼4명으로 0.001% 이하가 되었다. 1973년 이후 병역기피자가 줄어들 수 있었던 것은 1968년부터 주민등록증 제도가 실시되고, 1976년부터는 병무자료가 전산화되는 등 행정망이 크게 강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병역기피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1976년에 병무청은 병무부정이나 병역기피 등의 낱말을 완전히 없애버리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1973년 4월에는 병역기피자를 고용한 사장이 처음으로 구속되는 등 병역기피자들의 취업도 어려워졌다. 1961년 초에 병역을 필하지 않은 공무원들을 대거 해직한 이후에도 1970년 4월 현재 공무원 중 병역미필자 2만1448명에 달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강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박정희는 고위 공직자나 재벌 등 상류층 자제의 병역의무 이행에 대한 감시를 강화 이들의 병적기록표에 ‘특’이라는 도장을 찍어 별도로 관리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류층 자제들은 과거와 같이 무 쪽 베어먹듯 병역의무를 빼먹는 것은 힘들어졌다. 대신 방위로 빠지거나 군대에 일단 입대한 뒤 편한 보직에 배치받거나 의병제대나 의가사제대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특수층 자제에 대한 특별관리에 대해 특수층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끊임없이 이런 특별관리를 철폐하려고 압력을 가했고 마침내 1996년 국방부는 이런 특별관리가 상류층 자제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라며 폐지하기에 이른다.

  유신 시기에 병역기피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그것을 박정희의 공적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병영국가를 건설하여 병역제도를 왜곡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68년 1·21사태 직후 박정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고, 현역의 복무기간을 30개월에서 36개월로 연장했다. 1950년대에 비해 인구는 거의 두배 늘어났는데 단축되고 있던 복무기간이 다시 늘어나자 병역 잉여자원이 엄청나게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방위나 전투경찰과 같은 제도를 만들어 이들을 흡수하는 한편, 각종 병역특례 제도를 만들었다.

  즉, 병역의무의 형평성을 파괴하여 합법적으로 특혜 받는 사람들을 양산하거나, 병역의 의무를 진 젊은이들을 정권연장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병역특례제도가 특권층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 것은 전두환 집권 이후 석사장교 제도가 도입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4개월 훈련에 2개월 전방실습만 받으면 예비역 소위로 제대하는 엄청난 특혜가 있는데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서류를 조작하거나 신검 판정을 위해 뇌물을 쓸 일도 없었던 것이다. 이 말 많은 제도는 전두환·노태우 두 군사독재자의 아들들이 혜택을 본 뒤 1990년 대학원 입학자들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특수층 자제들이 합법적으로 큰 부담 없이 병역의무를 때울 수 있는 제도가 사라지면서 다시금 특수층 자제들을 둘러싼 병역비리는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 제도가 몇년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오늘날의 병풍 의혹은 없었을 것이다. 이회창씨 부부는 자기 아들들만 특혜를 준 뒤 제도를 없애버린 군사독재자를 원망해야 할까?

  자기 자식들은 군대를 빼먹게 하고 남의 자식들만 병역의 의무를 다하게 하는 특권층의 비도덕성과 그들이 저지른 불법행위는 마땅히 법적 처벌과 도덕적 규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병역비리의 해법이 상류층의 도덕성 회복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도 자체가 엄청나게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종 병역특례제도가 있고, 방위(지금은 상근예비역)처럼 단기 복무가 있고, 병역자원은 넘쳐나 부모가 조금만 ‘애를 쓰면’ 현역으로 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도록 된 상황에서 병역비리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더구나 병역비리 사건이 터지면 졸부 몇명만 처벌하는 시늉만 하다 말 뿐 아들은 병역면제, 부모는 처벌면제인데 왜 비리가 발생하지 않겠는가?

시민단체의 무관심도 중요한 요인

  병역문제에 대해서는 시민단체가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병들의 복무 여건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개선되지 않는 데는 시민단체의 무관심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 인권운동가·평화운동가들 1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한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사람은 모두 3명뿐이었고, 그나마 40대 중반에 접어드는 내가 제일 막내였다. 시민운동의 인적 충원이 학생운동를 통해 이루어지고, 80년대 이후 학생운동가들이 군대 대신 감옥에 가야 했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놀라운 결과였다. 병역의무의 형평성을 유지하는 것은 나라의 장래와 젊은이들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이 일은 시민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할 과제지만, 군대를 다녀온 민주시민들이 좀더 분발해야 할 일 아닐까? 재향군인회는 병역비리나 사병 인권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니, 민주재향군인회라도 만들어야 할까보다.

한겨레21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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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왔다.

모든 것들이 낯설다.

곧 다시 치열하게 살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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