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 유발자들 (2disc)
원신연 감독, 원풍연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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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을 떠나서 <구타유발자들>의 핵심은 폭력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시골에서 주변부로서 살아가는 촌놈들이 익지도 않은 삼결살을 우적우적 먹으며 날짐승을 잡아 생으로 먹는것이나 서울에서 성악과 교수질을 하면서 잘빠진 고급 벤츠차를 타고 다녀도 폭력성은 벌거벗은 채로 존재한다.성폭력과 왕따의 피해자에서 가해자의 변신은 군대 내에서 혹은 학교집단안에서 그대로 답습되어진다.자기가 당한 고통을 자기때에 끝장을 내는 게 아니라 똑같이 혹은 더 악랄하게 가해하는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이렇게 폭력은 더한 폭력을 낳고 그만 제 스스로 주체할 수 없게 미쳐버리게 하는 '마약'과 같다.자기보다 힘 약한 남자를 건드리고 그 남자들은 인간의 탈을 쓰고 여성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다.남자나 여자나 성폭력은 죽을때까지 잊혀지지 않는다.남자들은 사내자식들끼리 놀다보면 꼬추 좀 만질 수 있지라는 그런 안일한 생각이 이문식을 광기로 몰아간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왕따의 고통도 죽을 맛이지만 신체적으로 가한 구타와 특히 성기에 대한 학대는 숨통이 떨어지는 날까지 잊혀지지 않는다.학교에서,직장에서,군대에서,가정에서,길거리에서 대한민국의 좆방망이는 안녕하신가?함부로 세우지 말찌어다.아멘.

ps.야구방망이가 부러진 것은 좆을 함부로 굴리지 말라는 경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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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8-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직설적이네요.
 
괴물
홍정훈 지음, 봉준호 / 홍익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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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땟깔 나는 비쥬얼을 보시라.

봉준호 감독이 물이 올랐다.감독이 관객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능수능란하게 영화를 조물락 조물락거린다.관객의 머리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고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관객을 처음부터 쪼인트로 한대 치고 코너로 팍 몰아넣는다.영화의 괴물은 베일에 쌓여있지 않고 영화 시작 15분도 안돼서 홀연히 한강 교각에 나타나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플란다스의 개>,<살인의 추억>이후 봉준호는 엄청 성장했고 계속 발전할 것이다.봉준호는 현재 진행형이다.

봉준호 사단이라는 송강호,배두나,박해일,변희봉의 현악 4중주가 스크린을 빠방하게 때린다.실제 괴물을 보지 못한 채 순수히 배우들만의 상상력이 빚은 연기는 발군이다.감독에 의하면 괴물 CG없이 오로지 배우들만의 연기만 따로 모아 DVD서플먼트에 실을 계획이란다.사실 이런 작업은 굉장히 힘든 과제다.감독의 주문과 싸인이 배우에게 녹아들어가고 배우와 감독의 손발이 척척맞아 들어맞기 위해서는 탄탄한 시나리오가 아니였으면 불가능한 영화였다.그래서 봉준호는 인터뷰에서 내가 '아' 하면 저기서 '어'하게 바로바로 튀어나올 수 있는 배우들을 쓴 것이다.

영화에서 괴물은 포르말린이라는 독극물의 먹고자라난 돌연변이체다.한가로운 한강 고수부지의 일상에 사람을 무자비로 공격하고 찬물을 확 끼얹는다.괴물은 매점 주인 강두의 딸 현서를 원효대교 북단으로 잡아가고 한강은 오염지역으로 선포돼 폴리스 라인으로 접근이 불가다.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픈 냄새가 진동해 강두를 성장시킨다.강두의 머릿속에는 딸을 구해내겠다는 일념 그거 하나로 괴물을 추적한다.<플란다스의 개>에서 강아지를 쫒고 <살인의 추억>에서는 미궁에 쌓인 연쇄살인자을 쫒고 <괴물>에서도 여전히 딸을 납치해간 괴물의 뒤를 쫒고 있다.

봉준호는 사회학과 출신답게 사회현상과 현실에 대해 관심이 많다.게다가 TV도 열심히 본다.포르말린이라는 독극물은 한때 <피디수첩>에서도 다뤄져 인근 주변 지역 주민들이 피해 사례가 보도된 적이 있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포르말린을 무단으로 폐기시킨 곳은 통조림을 상업적으로 운영하는 회사였지 미군은 아니였던 걸로 기억한다.강두가 골뱅이 통조림을 까먹은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하지만 미군들이 토해놓은 오염원들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고 한국 땅을 업었다 뒤집었다 손바닥 뒤집듯 주무르고 있고 한국인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로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괴물>을 반미로 보는 시선은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반미와 친미의 이분법을 넘어서 지금 한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 대해서 딸을 잃은 강두의 가족들은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현실적으로 국가적 재난 상태에서 가족들은 영정이 길게 늘러뜨리고 카메라 플래쉬가 쉴 새 없이 주제 넘게 터뜨리는 곳에서 목 놓아 하염없이 우는 것 밖에는 달리 할 도리가 없다.KAL기 참사사고가 나고,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성수대교가 끊어지고,대구 지하철이 날라가고,태풍이 강타해서 집이 박살나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텅 빈 교실이나 마을회관에 임시로 모여 잠자리를 해야 할 사나운 팔자다.


국가에서 사회적 재난과 재앙 혹은 예기치 못했거나 미리 충분히 예측했던 사태가 벌어지면 대한민국의 윗대가리들이 하는 일이라곤 사태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분석해 일처리를 하기보다는 서로가 꽁무니 빼기 바쁘지 않은가?언론에서도 며칠 정도 집단적으로 확 끊어올랐다가 다른 사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관심밖으로 밀려나는 순환 패턴이지 않은가?솔직히 말해 지금 황우석이란 사기꾼은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관심도 없지 않은가?

결국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는 없었고 그가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도 조작으로 밝혀졌다.영화 <괴물>에서도 송강호가 위트있게 던지는 대사처럼 '노바이러스'다.괴물의 존재는 한국 사회가 부지불식간에 만들어 낸 괴물이었던 것이다.칸느에서 기립박수를 받고 봉준호가 내뱉은 말은 <괴물>은 한국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하는 영화라는 것이였다.그래서 <괴물>은 하수구에서 부패되서 썩은 내가 지독하게 풍기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애증이 교묘하게 결합된 영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다리위에서 자살하려는 중년이 마지막에 따라지들에게 뱉은 말 "끝까지 둔한 새끼들"그렇다.괴물의 움직임과 동태가 눈에 빤히 보이는 사람이 있듯이 끝까지 미련하고 둔하게 괴물을 키워 온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명장면은 거의 끝날 무렵 강두가 쇠파이프를 가지고 괴물과 1:1로 필사적으로 사투하는 장면이다.마치 <살인의 추억> 마지막에 박두만이 관객을 향해 시선을 쏘아부치듯이 쇠파이르를 괴물의 아가리에 집어쳐넣는 장면에서 괴물을 처참히 밟아 뭉갠 건 아버지 희봉도 4년제 대학을 나온 남일도 양궁선수 남주도 아니였다.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미련하고 둔하고 어리숙하게만 보이고 어리버리하고 덜 떨어진 듯 보였던 철부지 강두가 어느 새 괴물의 존재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으며 진정으로 사태에 대해 가장 가까이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강두의 모습은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자 괴물을 눈 부릅뜨고 마주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해가는 미래의 모습이다.이런 점에서 <살인의 추억>의 서태윤이 서양의 합리성을 한국에 이식했던 모델이라면 <괴물>의 강두는 괴물이란 존재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키어 온 둔한 아버지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저항하는 모델로 진화한다.여기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가 굉장히 중요하다.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딸은 이미 괴물에 의해 납치됐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손은 다른 딸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처럼 영화 <괴물>은 대사 하나하나와 배우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감독은 괴생물체의 움직임도 생생하게 잘 포착했고 한강이라는 공간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했다.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땀에 쥐도록 긴장감있게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와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역작으로 한국 영화에 남을 것이다.단순한 괴수영화를 뛰어넘는 <괴물>의 봉준호는 시간이 켜켜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궁금해지고 기대가 되는 감독이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 영화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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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8-15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뱅이통조림 장면이 그런 의미의 디테일이었군요. 공감되는 리뷰 잘 보고가요^^ 꾸욱..

Xoxov 2006-08-1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봉감독 인터뷰를 보니깐 실제로 2000년도 맥팔랜드가 독극물을 방류했다는 것을 모델로 만들었다는군요.근데 그보다 훨씬 전에 피디수첩에서도 통조심회사에서 포르말린을 방류해서 인근 주민들의 피해를 고발했죠.봉감독이 이것을 알았든 몰랐든 상관없이 그 외에도 식품의 부패를 막기 위해 포르말린을 첨가한 통조림 회사들이 무더기로 적발된 사례는 부지기수였죠.아마 그래서 괴물의 모습과 비슷하게 '골뱅이'가 들어간 듯 합니다.번데기는 좀 그렇죠?ㅋ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호밀밭으로의 초대

 

 "무슨 일이든 상관하지 않을 테고.그저 아무도 나를 모르고,나도 다른 사람들을 모르는 곳에 가는 걸로 족했다.그곳에서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살 참이었다."(…)누구라도 내게 말하고 싶으면,종이에 써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귀찮아지게 될 것이다.그렇게만 되면 평생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내게 되리라.(…)"죽을 때까지 거기서 사는 것이다.오두막집은 숲 가까이에 지을 것이다.(…)음식도 손수 요리해서 먹을 것이고,결혼하고 싶어지면,나와 똑같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귀여운 여자를 만날 것이다.그 여자는 내 오두막에서 같이 살 것이다."

영화 <넬 Nell>에서 조디 포스터는 산속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그런 그녀를 연구하기 위해 박사들이 오면서 여러가지 해프닝이 일어난다.조디 포스터(넬)을 세상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혹은 사회화를 위한 갖은 노력들을 한다.하지만 놀랍게 조디포스터에게도 나름대로의 먹고 사는 구조가 있다.비록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아니더라도 조디포스터에게는 자기만의 삶의 양식과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그것은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능력이다.바로 미메시스(mimesis).바람속에서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그녀의 두팔은 좌우로 흔들거리면서 자연을 미메시스한다.아직 타락하지 않는 넬의 언어는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세상의 때묻은 않은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다.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처럼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홀든은 확실히 미쳤다.미친 게 분명하다.미쳐있는 세상에 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손해다.특히 홀든처럼 혹은 조디포스터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에게는 치명적이다.차라리 이성의 스위치를 내리고 미쳐가는 세상에 몸을 섞여 사는 게 건강에도 좋으며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착한 학생'과 '착한 자녀'로 살아가는 게 유일한 방법일게다.홀든이 지금 건강이 악화돼 요양원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이른 바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권력의 망속으로 뛰어들어 돈과 명예따위를 성취한다면 홀든이 행복해할까?적어도 홀든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와 행복은 거기에 없다.

선택이 주어지지 않는 삶.이제 홀든의 삶은 바둑판처럼 정해져있다.내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정한 삶에 브레이크를 걸고 방향을 틀 수 없는 무력감은 홀든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다.적당히 공부해서 적당히 좋은 대학에 적당한 직업에 적당한 아내와 함께 살고 그만그만한 아이들을 키우며 살다가 죽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바라는 삶이다.이처럼 획일적으로 옭아메는 세상은 홀든더러 이렇게 살아가는 게 정답(!)이라는 강령이 깔려있다.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홀든의 입에 재갈을 물린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불만인 것이다.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언어'를 앗아가고 남은 메아리처럼 끝없이 따라다니는 우울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그래서 홀든은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침묵을 지키고 싶어했을지 모른다.그러면 홀든이 바라는 삶과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 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그럴 때면 어딘가에서 내?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절벽은 아찔하다.순간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추락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에 청춘의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다.바로 이곳에서 홀든은 원하지 않는 선택과 이미 짜여진 삶의 모양으로부터의 강요때문에 절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뛰어내려야 하는 아이들을 구출해낸다.깍아지듯 위태로운 절벽과는 대비되는 호밀밭에서 평평한 땅에서 노는 아이들은 홀든의 보살핌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미.쳐.서 행복의 의미를 진정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세상 사람들이 행복은 저기 너머에 있다고 손짓할 때 홀든과 호밀밭의 아이들은 자기의 언어를 발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자연을 미메시스했던 조디포스터처럼 호밀밭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어린 아이는 '아직 정해지지 않는 삶'속에 '자신의 것'으로 '새로 채워넣고 그려넣어야 할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이처럼 홀든은 이 하얀 캠버스에 누구의 방해와 간섭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호밀밭의 파수꾼.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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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0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넬과 홀든,, 멋진 리뷰네요. 그 영화도 다음에 봐야겠어요. 호밀밭의 파수꾼, 영원한 명작...

Xoxov 2006-07-0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더 멋진 리뷰 쓰겠습니다.^^
 
몸 숭배와 광기 - 개정판
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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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텔레비전을 보면 잘난 사람들이 넘쳐난다.꽃미녀와 꽃돌이에 이어 예쁜 남자 신드롬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얼굴은 이제 얼굴축에도 못끼는 분위기처럼 보인다.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고 점수를 메겨야 직성이 풀린다.소위 견적까지 줄줄이 꿰는 예비 성형외과 의사들도 항시 대기중이시다.또 입방정은 얼마나 떨어대는가.아예 몸이 뚱뚱하다고 공개적으로 면전에다 대놓고 "돼지새끼"라고 면박을 주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코미디와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을 자세히 뜯어다보면 이것은 '애교' 수준이다.

이처럼 방송에서 혹은 여러잡지의 매체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외모의 특정 부위를 유머의 소재로 삼아 히히덕거리고 즐기는 풍경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타인의 외모를 놓고서 좋다 혹은 나쁘다 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그건 일종의 인종차별이나 다를 바가 없다"이러한 현상은 얼굴 잡티의 세세한 부분까지 잡아내는 미디어가 출현하면서 현대인들의 미에 대한 지각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았기 벌어진 현상이기도 하다.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미디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만족해하며 행복했을 것이다.그리고 지방 노폐물이나 임신선,또는 어두운 색깔의 머리카락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두꺼운 허벅지,느슨하게 처진 가슴,그리고 가는 머리카락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미디어의 등장으로 자연이라는 자신의 몸을 혐오하고 끊임없이 교정해야 하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미디어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완벽한 색보정과 여러가지 교정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우리와 만나게 된다.광고에 나오는 잘빠진 몸과 얼굴을 한 모델들은 일상에 흔하지도 않고 그렇게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데도 미디어는 마치 그것을 가능케하는 환상을 심어준다.이로써 당신도 노력만 한다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신화'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기 혐오하기' 전략에서 파생된 미용산업과 화장품,성형산업의 모종의 공모관계가 성립하면서 자본이라는 교집합에 모여 집단 방출한다.물론 미디어는 이러한 메세지를 반복적이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한다.그렇다.광고속의 모델들은 항상 물건을 들고 나와 유혹하는 모습이였다.상품을 팔기 위해 소비자들의 미적 욕망을 한 껏 부풀려 돈을 빼내는 역할이 그들이 맡은 임무이다.

아름다움을 파는 그 이면에는 이러한 추악한 계산이 숨어있는 것이다.철저하게 치밀한 전략에 의해 짜여진 아름다움에 관한 미적 욕망의 대상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진다.물론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 가꾸는 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오히려 그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지은이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시스템이다."라고 말한 바 "외모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선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그런 노력이 즐거움을 주며 개성을 확장시켜 주는 한에서는 말이다.하지만 그것이 개성을 억압하고 제한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나이 서른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다.우선 이 논리는 우리의 몸과 얼굴은 언제든지 노력만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게 바탕에 깔려있다."어떻게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했을까" 따위의 말들이 힘을 얻는 이러한 상황에서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은 일종의 방종이며 게으른 것이며 자신의 무책임과 무능력을 상징하게 된다."아름답지 않은 것은 개인의 심리적 결함 때문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이는 자기 혐오상으로 뚜렷하게 내면화되어 완성되어진다.

이렇게 되면 아름다움은 일종의 '관리'대상으로 인식된다.끊임없이 자본을 투여해야 하고 매일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며 온갖 신경을 써야한다.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조금만 관리가 소홀하면 금세 파괴되니까.게다가 아름다움은 '시간' '체력' '돈'까지 삼박자가 척척 맞아 떨어져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이게 바로 자본의 얼굴이다.타고난 얼굴과 개성을 적극적으로 살리기보다 교정된 시선으로 바라 본 미적 기준으로 얼마나 노력하고 투자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얼굴이 결판난다.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다들 알듯이 경제적인 물질인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너희들은 아름다워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부유한 계층에서 날씬한 이들이 많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가난한 이들은 당장의 먹고사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다."수많은 분석들이 입증하듯이 산업국가들의 경우,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상류계층의 사람들보다 확실히 더 뚱뚱하다."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빨아들임으로써 유지되어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몸과 얼굴을 지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본이라는 기름을 발라야 한다.현대의 미의 얼굴은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동일성의 폭력을 저지르는 자본의 얼굴과 닮아있다.군사독재의 군사 파시즘은 타자를 억압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았다면 현대사회의 미의 파시즘 시대는 다른 미를 억압하고 배제함으로써 정당성을 찾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판단은 상대적인 것이다.인간의 몸에 새로운 미의 관점을 입혀주는 상상력이 미적 파시즘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유일한 위안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이미지-영상 시대에는 그런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다만 미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담론을 넓혀가는 것.미용산업이 퍼뜨리는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맞서 고유한 개성을 지키고 자신만의 미를 창조하여 저항하는 것.그럴 때에 비로서 미는 새로운 주체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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