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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사
고대의 음악
음악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처음으로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인류가 역사를 알게 된 것은 말이 있고, 글이 생긴 이후 일이며, 음악에 관한 모든 실제적인 지식은 어떤 적당한 기보법이 만들어진 이후에야 가능한 일로서 그 이전의 일들은 상상으로밖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음악의 발상에 관한 설은 세계의 어느 민족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데 신이 음악을 만들었다는 신수설(神授說)과 자연발생설(自然發生說)을 들 수가 있다.
미개한 민족에 있어서도 어떤 형태이든간에 음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음악은 분명히 인간의 본능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음악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같이 시작되어, 지금 남아 있는 벽화나 고분의 유물, 그리고 지구상에 아직 남아 있는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디언, 오세아니아 종족들과 같은 원시집단의 음악연주와 실제로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문화풍토를 지니고 있는 중국, 인도, 샴, 일본 등이나 다른 동양인 집단의 고대음악 연주들을 통하여 상상으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개한 원시시대의 원시인들의 음악은 영적인 것과 연관된 일련의 신앙적인 것에 연루된다. 신앙을 필요로 하여 음악이 발생되었고, 이러한 음악은 마법의 기능으로 병을 고친다고 생각했고, 노동이나 전쟁에 사용하기 위하여 음악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음악의 발자취는 문명의 발상지인 국가들 즉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도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 지역의 고대국가들의 음악도 종교의식과 관련된 것들이고 그 이외에는 궁정에서의 향연이나 오락등을 위한 것과 전쟁에 사용하기 위한 음악들로 추정된다. 이 시대의 음악은 화성도 대위법도 없는 단선율로서 그 선율도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특히,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기원전 4,000년경에 벌써 매우 수준높은 음악이 있었다. 이들은 하프와 플루트 종류, 그리고 타악기등을 사용하였고 이집트 지방에서는 B.C 3.000년경에는 일종의 관현악도 행해졌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약 1,000년 늦게, 유대에서는 음악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달하여 B.C 1.000년경, 즉 다윗왕이나 솔로몬왕 시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이것은 구약성서에도 자주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음악은 B.C 1.000년경에 성하였는데, 그리이스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 발달해 있었고, 동화력이 강해서 자기들의 음악을 발전시켰고, 또한 고대 오리엔트 여러 민족의 음악을 흡수하고 동화하였다. 즉 고대의 음악은 그리이스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종합되고 체계화되어 그 수준을 한층 높였다. 그들은 음악을 단지 제사와 오락 뿐만 아니라 매우 지적으로 다루었으며 음악에 대한 철학성, 윤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논의되었고 과학적인 연구를 하였으며 음악을 교육상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고대의 대부분의 음악문화는 그리이스에서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리이스의 음악이론은 로마를 거쳐서 오늘날의 서양음악의 모체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이스 음악에 중요하게 담당되었던 악기는 키타라(Kethara)와 아울로스(Aulos)로서 이것은 시리아 지방에서 일찍이 발견된 것들이다.
중세의 음악
중세는 봉건사회제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도교의 사회로서 정치문화에 있어서 강력한 종교적 지배를 받던 시대였다. 중세기의 음악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의식과 결부시킨 성가(聖歌)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중세기에 유럽음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리스도교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교는 그 모태가된 유대교의 영향도 있지만 그밖에 음악을 존중하여 초기단계부터 독특한 의식음악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중세음악은 대체로 로마네스크 음악, 고딕음악, 세속음악 등으로 크게 구분한다.
(1) 로마네스크음악(Romanesque Music)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되었던 음악으로서 이것은 로마네스크미술과 통하는 양식이다. 그 주요한 것은 초기 기독교의 교회읨악으로서, 고대음악처럼 단선율이지마느 대체로 성악이며 기독교적인 가사르 가지고 있다. 이 음악은 4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 성가로 절정을 이룬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음악을 존중했으나, 처음에는 기독교 박해로 숨어서 음악을 하다가, 기원후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은 후에야 비로소 성대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은 처음에는 시리아, 팔레스티니, 소아시아 등지의 음악, 즉 유태적이거나 그리이스적인 음악들을 필요에 따라 적당히 기독교적으로 고쳐서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이 그후 로마의 각 지방에서 조금씩 서로 다른 양식의 음악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교회세력이 크게 떨치자 지금까지 지방에서 행해지던 교리와 의식, 성가등을 일정한 형식으로 통일시켜야겠다는 생각ㅇ르 갖게 되었다. 성가의 경우 밀리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39년경∼397년)가 개혁한 암브로시오 성가(Ambrosian Chant) 이래 2세기후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540∼604)가 제정한 그리고리우스 성가(Gregorian Chant)로서 마침내 그리스도교 음악을 통일시켰다. 이 전통적인 교회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는 단선율의 라틴어 가사로 된 단순한 것이지만 그 유동적인 선율은 실로 거룩하고 아름답다. 이 성가는 지금도 카톨릭교회에서 공식적인 음악으로 쓰여지고 있다.
(2) 고딕음악(Gothic Music)
대체로 10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네델란드와 로마를 중심으로 발달한 다성음악(Polypony)형식의 교회음악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교회의 건축양식에서 유래되었다. 다성음악은 구라파 북쪽 민족들 사이에 대략 6,7세기경부터 시도되었던 것을 10세기에 이르러서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이것은 rmEoRK지 노래되던 그레고리우스 성가를 정선율(定旋律, Cantus Firmus)로 하고 여기에 새로운 성부(오르가눔, Organum)를 추가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고딕음악은 음악을 교회 음악에서 벗어내어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 넣으려는 운동으로 눈부신 개혁과 시도가 계속된 14세기의 찬란한 아르스노바(Ars Nova, t새 예술)와 15세기가 되면서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인 다성 음악의 극치를 이룬 네델란드악파(Netherland School)의 음악을 포함하고 있다.
(3) 세속음악(Secular Music)
11세기경까지 유럽의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성직자들이 주도하였으나 12세기에 이르러 봉건사회의 기사계급은 그동안의 교회와 수도원의 전통적인 권위의 지배속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추구하였다. 또한 오랜 십자군 전쟁 이후 극단적인 종교열은 침체했고 동방의 화려한 이국문화의 접견으로 세속적 요소가 사회생활에 팽대해졌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세속음악은 점차 민중속에서 발전해 나갔다. 대부분의 세속음악은 단선율로서 악기와 함께 연주되었다. 이러한 세속음악은 12세기경부터 귀족계급인 남프랑스의 투르바두르(Troubadour)와 북프랑스의 투르베르(Trouvere)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작품도 많이 나왔다. 그들은 자작의 시에 노래를 즉흥저긍로 불렀다. 여러 곳의 왕ㅇ궁과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여 간단한 악기의 반주로 그것을 노래했다. 시의 sodyhd은 사랑노래와 발라드 풍의 이야기, 자연의 찬미, 종교적 또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인(藝人)도 고용하여 다녔는데 자작의 시를 그들에게 노래시켰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는 8세기경부터 종글뢰르(Jongleur) 영국에서는 민스트럴(Minstrel)이라고 했다. 13,4세기경에는 독일 남부에서 오스트리아에 걸쳐 미네쟁거(Minnesange)라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있었다. 이들은 기사계급이 많았는데 이후 세속음악은 점차 기사계급에서 교양있는 시민계급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독일의 마이스터징거(Miestersinger)이다. 이들은 16세기경까지 계속되는데 독창적으로 창작곡을 내는 것보다 기존의 성가나 세속음악을 수정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4) 기보법의 발달
그레고리 성가를 위한 기보법이 9세기경에 네우마(Neuma)라는 그리이스말로 창안되었으며 1세기경에는 이탈리아의 귀도 다레쪼(Guido d'Arezzo)는 네우마를 4개의 평행선상에 두고 음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기보법을 창안하였고, 또한 계명부르기를 고안하였다. 13세기경에는 쾰른의 성 요한 수도원의 수도사이며 교사인 프랑코 데 콜로니아(Franco de Colonia)에 의해 음의 높낮이뿐만 아닌 길이도 표시할 수 있는 정량기보법을 창안하였다. 오늘날의 5선보에 의한 편리한 기보법이 완성되기까지는 천여년의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르네상스의 음악
르네상스는 14세기경에서 16세기까지의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부흥운동을 말하는데 음악에 있어서는 대체로 16세기전반을 걸쳐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의 시기를 말한다. 중세의 교권의 지배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시민계급중심의 자유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정신을 기초로 하여 학문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과학과 예술분야에서 대단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학문과 문화의 놀라운 발전은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서 작곡가들은 심미적인 인본주의 작품을 만들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르네상스 음악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했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는 로마와 베네치아가 조금 다르다. 로마에서는 교회음악이 현저하게 발달했으며 오라토리오에 있어서도 크게 발달하였다. 베네치아에서는 주로 세속적인 음악과 기악의 현저한 발전이 있었으며 교회음악에는 화려한 2중창의 방법도 사용되었다. 로마에서의 대표적 작곡가인 팔레스트리나(G.P . Palestrina 1525년경 ∼1594)는 자유로운 대위법으로 작곡하고 복잡해진 대위법으로 단순화하고 한음에 한가사를 붙이는 새로운 시도와 무반주(A Cappella)양식의 교회 합창곡을 도입하여 미사곡을 비롯한 많은 종교곡으로 작곡하였다. 베네치아에서는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1510∼1586)와 그의 생질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1554년경∼1612)가 성악을 화려하고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특히 오르간을 비롯한 기악음악을 많이 발전시켰다. 같은 무렵에 독일에서도 르네상스적인 음악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네델란드 출신 라소(Orlando de Lassos 1532년경∼1594)인데 그는 많은 교회용 음악과 세속적인 여러 가지 합창곡을 썼는데, 그의 작품은 강렬하고 분방하며, 불협화음과 선율의 대비를 과감하게 썼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세속성악음악형식으로는 마드리갈(Madrigal)로서 그 음악적 특성이 다양하다. 세속 합창곡으로 목가적이거나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를 쓰는데 초기에는 종교음악과 유사한 조용한 느낌의 음악이었다. 점차 정교하면서도 대위법적으로 양식이 바뀌어 후기에 가서는 독창도 사용되는 다양한 양식을 갖게된다. 라소와 팔레스트리나, 몬테비르디(Momteverdi)등의 작곡가들이 중요한 작곡가이다.
독일 르네상스의 가장 현저하고 특징있는 현상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에 의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의 코랄(Choral)이다. 이 찬송가는 민요풍의 간소한 멜로디를 높은 성부에 놓고 음 대 음의 화성적인 것으로서 누구나 노래하기 쉬운 합창곡으로 가장 르네상스적이라 할 수 있다.
바로크의 음악
17세기 초에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혁신적인 젊은 음악가들이 일반 문화예술의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로운 양식, 다시 말해서 화성적인 반주를 가진 단선율의 양식을 장조 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노디아(Monodia)즉 단 음악이다. 이 단음악이 정착 되었을때 르네상스음악이 완성된 것이지만 이 선율음악은 대위법적인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서창적인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화성적인 반주로 가장 직접적인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독창가곡이나 오페라, 그리고 오라토리오로서 나타났는데, 이러한 양식에 의해 근대적인 음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 옛 겹선율에 의한 복음악이 모두 쇠퇴해버린 것은 아니며 당분간 신구 두 개 의 양식이 서로 접촉하고 영향을 주며 사용되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의 많은 음악가는 그 풍부한 화성적 가능성에서 복음악적인 방향으로 나갔고, 이에 반해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음 악가는 르네상스적인 단음악을 택하고 오페라나 아리아, 그리고 소나타와 협주곡의 양식을 창안 발전 시켰다.
이 두 개의 조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이든이나 모짜르트등의 고전음악에서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다. 이 르네상스 정신의 최고의 발현시대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부터 18세기 전 반기에 바하나 헨델이 대위법적인 음악을 완성한 복음악의 전성기에 이르는 약 150년간을 바 로크음악시대라고 부른다.
원래 바로크(Barock)라는 말은 주로 미술에서 사용된 시대양식의 개념으로서 스페인의 베라스케스, 네덜란드의 란브란트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변화있는 색채, 웅대한 구도, 장식 적인 곡선, 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 등이 바로크예술의 특징이다.
바로크 음악은 원칙적으로 저음에 기초를 두어 그위에서 화성적인 성부를 배정해 가는 통주 저음기법을 기반으로 대조적인 협주양식, 즉 강주와 약주, 전 합주와 독주, 밝은 것과 어두운 것과 같은 대비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감동과 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울 장식하고 화성에서 으뜸음을 중심으로 힘차고 색채감과 극감을 더해 준다. 그리고 마로크음악의 사회 적 바탕은 절대주의의 귀족 제도로서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의 분애로서 이탈리아가 그중심 이 되었다.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인간중신적 세계관이 팽배해져서 점차 시민계급을 성장시켰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합리적인 관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이것을 적용하여 카메라타 일원인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와 카치니(G. Caccini) 1545∼1618)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단성음악의 선율반주는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는데 이것은 작품전체를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통주저음(Basso Continuo)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통주저음은 저음부 아래에 화음을 지시하는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저음(Figured Bass)이라고도 부른다.
(1) 오페라(Opera)의 탄생
16세기말경 이탈리아 피렌체의 음악애호가 바르디(G. Bardi, 1534∼1562)의 집에 젊은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다. 1597년에 시인 리눗치니(O. Rinuccini, 1563∼1623)의 대본에 페리(J. Peri, 1561∼1633)가 오페라《다프네(Dafne)》를 작곡하였다. 두 번째 작품도 리눗치니 시(詩)에 페리와 카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ece)》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에우리디체뿐이다. 그런데 근대적 개념의 오페라에 접근되는 진보적인 오페라를 만든 사람은 몬테베르디(C. Monteverdi, 1567∼1643)이다. 그는 1607년 《오르페오(La Favola d' Orfeo)》를 상연하였는데 대규모의 합창과 관현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이전의 오페라라는 표현양식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기악의 서주로 시작하였고 댄스음악이 있고 신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1725)를 중심으로 한 나풀리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에서는 륄리(J. Baptiste Lully, 1632∼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2) 오라토리오(Oratorio)와 칸타타(Catata)
오페라보다 조금 늦게 종교음악의 한 형식으로 태어난 오라토리오는 초기의 모습이 오페라와 매우 유사하였다. 오라토리오의 특성은 오페라와 달리 종교적 내용으로 무대장치, 연기가 없다는 것이지만 초기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연극적인 형태를 모두 갖추었다. 최초의 오라토리오는 카발리에리(Emilo de Cavalieri, 1550년경∼1602년)의《영혼과 육체의 극》인데 성서적 내용이 약하고 연극적인 면이 강하여 오페라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하겠다. 그후 카리씨미(Giacomo Carissimi, 1605∼1674)가 쓴 《예프테, Jephte》로써 오라토리오의 음악양식을 확립하였다. 바로크말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헨델(George Friederch Handel, 1685∼1759)이다. 그는 극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여 합창을 증가시켰고, 소재도 성서적 내용이외에 고대 그리이스의 신화적 인물을등장시키는 등 기존의 오라토리오의 음악 양식에서 탈피하여 오라토리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불후의 명작 《메시아, Messiah》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범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
칸타타의 음악형식구조는 오라토리오와 유사하다. 다만 그 규모가 축소되어 전례용으로 사용되기 적합하였다. 17세기중엽부터는 성서적 내용 이외에도 서정적인 세속가사를 사용하여 칸타타의 영역을 넓혔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은 200여편의 코랄을 사용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여 바로크 칸타타의 최고경지를 이룩했다.
(3) 기악음악
바로크시대의 기악음악은 중세에세부터 내려오는 악기의 발달과 양식의 확립, 새로운 악기의 출현으로 성악음악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건반악기는 독주용악기로도 사용되었으나 통주저음의 필수적인 악기로 어떠한 기악음악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크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오르간을 위시하여 클라비코드, 쳄발로 등은 독주나 합주용 악기로 인기가 높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709년에는 크리스토포리(B. Cristofori, 1655∼1713)가 만든 피아노(Clavicembalo col Piano e Forte)가 등장하여 피아노 문헌의 첫장을 열었다. 현악기 부분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는데, 르네상스를 점유했던 비올족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현악기군을 이루는 바이올린 족으로 대치되어 관현악 음악의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크레모나(Cremona)출신의 아마티(N. Amati), 과르네리(G.B. Guarneri), 스트라디바리(A. Stradivari)등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우수한 악기를 만들어 바로크 현악을 더욱 수준 높은 음악으로 끌어 올렸다. 르네상스를 지배하던 루트는 바로크시대에 들어오면서 그 빛을 잃고 퇴조하여 그 명맥만을 유지시켰다.
관악기는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으나, 관현악에서 그 중요성이 더 새져서 악기의 사용 빈도수가 높아갔다.
바로크시대의 작곡가들은 르네상스시대에 유행했던 몇몇 기악형식을 여전히 사용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음악형식을 개발하여 근대적인 기악 음악으로 그 모습을 점차 바꾸어나갔다. 르네상스의 기악형식이었던 푸가(Fugue)는 바로크시대에 와서는 독립된 기악작품은 물론 성악, 합창곡에서도 그 기법이 사용되었다. 모음곡(Suite)은 무곡을 여러 개의 부분으로 확대해서 독주와 합주용의 기악 음악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모음곡은 주로 같은 조성의 알르망드(Allemande), 쿠랑트(Courante), 사라반드(Sarabande), 지그(Gigue)를 주로 하여 그밖에 지그의 앞과 뒤에 미뉴에트(Minuet), 부레(Bouree), 가보트(Gavotte)등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바로크시대에 와서 르네상스의 세속 성악음 들을 성악과 기악의 혼합 내지는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형태가 흔하였는데 이것이 다악장 형식의 소나타(Sonata)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었다. 많은 바로크 소나타는 두 개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하여 작곡되었는데 이것이 트리오 소나타이다. 다른 형태의 소나타로 (Sonata da Camera)와 교회소나타(Sonata de Chiesa)라는 두 종류로 분류지었고 일반적으로 같은 조성의 4악장으로 구성된다.
바로크시대의 협주곡은 합주협주곡(Comcerto Grosso)과 독주협주곡(Solo Concerto)의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합주협주곡의 확립자는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이고 독주협주곡은 3악장 형식으로 오늘날의 협주곡 악장의 구성원리를 제공하였다. 대표적 작곡가는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로서 근대적 개념의 협주곡 완성자이다. 관현악을 의미하는 신포니아(Sinfornia), 서곡(Overture), 협주곡(Concerto) 등이 있었으나 용어의 구분처럼 음악적 내용의 구분이나 표준은 서 있지 않았고 관현악의 형태도 아직 악기의 구성이나 기준이 일정치 않았다. 관현악의 주된 악기는 현악기였고 관악기나 타악기는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
1) 안토니오 비발디 - Antonio Vivaldi [1678-1741]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3) 요한 세바스찬 바하 - Johann Sebastisn Bach [1685-1750]
1) 안토니오 비발디 - Antonio Vivaldi [1678-1741]
비발디는 1678년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741년 7월28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시대의 바이올린 주자인 동시에 작곡가이다.
비발디는 바하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준 위대한 음악가로 40여곡의 오페라와 100여곡의 <콘체르토-그롯소>라고 하는 복수의 독주악기와 합주부로 구성되는 <대협주곡>과 단일협주 곡, 그리고 실내악곡, 성악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들 작품들이 객관적으로 반드시 최상급은 아니라 할지라도 충실하고 형식적으로 잘 정돈되어 바로크음악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사원의 바이올린 주자로 있던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또한 죠반니-레그렌치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는 1703년에 성직에 들어 갔으나 몸이 약해 미사를 하는 것은 면제를 받았다. 1709년에 베네치아의 자선병원 부속 음악학교의 바이올린 교사가 되었고 1716년에는 음악장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재직하였던 15 년 동안 수많은 협주곡과 성악곡을 작곡하였고, 후기에는 오페라 작곡과 함께 그 흥행에도 관여했다. 또한, 평생 500여개의 콘체르토와 45개에 달하는 오페라곡을 발표했다.
비발디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그가 같은 콘체르토를 500번이나 되풀이하였다고 할 만큼 그 의 작품은 일률적이고 반복되는 공통성이 있다. 전체작품 중 거의 반 이상이 바이올린 곡이며 100곡이상이 바순, 첼로, 오보에, 플루트 등의 협연곡이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강한 리듬과 넘치는 활력 그리고 거의 항상 사용되는 직선적인 주제 등이다. 바순 콘체르토로 어둡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표제적인 협주곡 "밤"과 같이 줄거리가 있는 음악을 여러 곡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사계"가 1725년에 발표되었다. 봄의 새노래, 여름의 폭풍, 가을의 추수, 추운 겨울을 상징하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악기의 음색을 새롭게 표현한 비발디의 음악은 많은 작곡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주요작품> "사계" [1725]
"올란도 핀토 파쪼" [1724]
"귀스티노" [1724]
"그리셀다" [1735]
"충실한 목동" [1737]
"바이올린 콘체르토"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유다"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독일 할레(Halle)에서 1685년에 출생한 헨델은 8세때에 이미 음악적 재질을 인정 받았으며, 1706년 함부르크가극장 관현악부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1705년 그의 처녀작 가극 <알 미라( Almira)>를 상영하는데 성공하였으며, 1706년에는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수 편의 가극을 상영하였다.
1710년에 귀국하여 하노버 선제후의 악사장으로 선임되었다가 1711 년 영국으로 건너가 가극<리날도(Rinaldo)>를 상연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로 런던 에 체류하면서 연금을 받았으며, 왕립 음악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실명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작풍이 웅대하고 장엄하여 영궁의 귀족적 취미와 신흥산업 부르조아 취미에 적합하였다. 많은 작품을 지었는데 가극 40, 성극 80, 서악 70외에 기악곡-합창곡이 많다.
<주요작품> "알미라" [1705]
"리날도" [1711]
"메시아" [1742]
"요한수난곡" [1724]
"수상음악" [1717]
"하프시코드모음곡" 등등...
3) 요한 세바스찬 바하 - Johann Sebastisn Bach [1585-1750]
바하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중부 츄우린겐의 산악지대 아이제나하에서 태어나, 1750년 7 월 28일 역시 독일의 아리프찌히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난 바로크 음악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작곡가이다.
"바하"라고 하면 마치 서양음악이 바하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는 일상 바하가 입에 오르게 되고 그의 음악의 고고한 고전미에 감동하고, 또 음악사를 논할 때 으례이 맨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 바하이다. 그만큼 역사에 남긴 바하의 업적과 비중이 크기 때문이며, 그의 음악이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줄 만큼 위대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바하가 나오기 전 17세기 경에는 음악은 여러 가지 양식이 잡다하게 생겨 혼란을 빚을 정도로 분파작용을 거듭하고 있었다. 18세기 전반에 있어서, 바하를 이러한 여러갈래의 양식을 자 화해시켜서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한 , 이를테면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한 위대한 대가라고 하겠다. 바하는 주로 과거의 전통을 따르기는 했으나, 당시의 새로운 양식도 흡수하여 대위법적이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도입한 독특한 음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근대적인 의미 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음악 양식, 이를테면 교향곡이니, 협주곡이니, 현악4중주니 하는 이른바 고전주의 양식을 수립한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와는 판이한 한계를 갖는 바하는 바로크음 악의 맨 마지막 정상을 이룬 대가이다.
바하는 음악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대대로 이가족에서는 유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전 후 200년 동안에 약 50명의 음악가가 나왔다니 대단한 음악적인 가계라고 하겠다. 바하도 어렸을때부터 음악가인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비롯한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10살때에는 불행이도 양친을 잃고 고향인 아이제나하를 떠나 올드루프에 있는 그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하의 손에 의해 양육되어 그 동안 오르가니스트인 형으로부터 크라비어와 오르간등을 배웠다. 바하는 15살이 되자, 류우네브르크에 있는 교회부속 학교에 들어가 고등 교육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였고 유명한 오르간 주자인 베므를 비롯한 당시의 대오르간 주자로 함부르크의 카라리이나 교회에 있는 디트리히-북스테푸데 등에게 지도를 받았다. 또한, 이웃 체레시를 자주 왕래하면서 프랑스식으로 편성된 궁정악단의 연주를 들어 프랑스음악에 대한 견식도 넓혔다.
그 후, 바하는 1703년 바이마르로 옮겨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다가 이룬슈타트의 오르간 주자로 다시 옮겼고, 1707년에는 뮤르하우젠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 이듬 해에 바이마르의 궁정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의 명예로운 지위를 얻어, 여기서는 직접 자기가 오르간의 설계를 하는등, 오르간에 많은 개량을 가했다. 또한, 그의 오르간 작품의 태반은 이때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바하는 교회음악에 대한 염원과 정열을 억누를 길이 없어 1723년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교회부속 학교 합창장겸 시의 음악 지휘자가 되었다. 바하는 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7년간 이 직에 충실히 근무하면서 맣은 작품을 썼다. 바하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걸쳐 있고, 그 수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랜 시간,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1829년에 멘델스존이 바하의 <마태수상곡>을 연주한 데서 일반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진가를 재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가 장 중요한 이유로는 그 작품의 성질이다. 작품의 태반이 종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따라 서 통속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구조가 복잡하고 내객이 깊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에 원인이 크다고 본다.
그의 작품이 다성부적이고 대위법적인 처리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이며, 당시에도 "너무 기교적이고 자연성이 없다" 는 비판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부한 인간적 감정이나 정화된 고고한 기풍이 느껴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요작품> "마태수난곡" [1727]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1734]
"커피 칸타타" [1735]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6번" [1721]
"토카타와 푸가 d단조"
"골드베르그 변주곡" [1742]
고전파음악
바로크 음악 시대의 최후의 완성자인 바하와 헨델이 복음악으로 바로크 양식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으나, 그들의 만년에는 한편에서 이에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고 있었다. 대 중들은 복잡한 다성부 음악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간결하고 선명한 음악을 희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취향에 따라 음악은 간결하고 솔직한 선율을 택하게 되었고, 이것을 화성 적인 반주로 뒷받침하는 단순한 화성적인 단음악 즉 호모포니(Homophony)음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음악은 선율이 그 진행이나 구조에서 기능적인 화성에 뿌리를 박게 되었고, 그 구조에서도 바로크 선율과 같이 자유분방하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4마디로 악 구를 이루어 반마침을 하고 8마디로 완전마침을 해서 독립된 악절을 이룬다는 성격적이고 규칙적, 내지는 균형적인 구성방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주도 대위법적 방법이 아니라 화성적인 것 또는 화음적인 것으로 펼친 화음과 같은 것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균형진 규칙적인 형식미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 형식도 간결하고 솔직한 것을 좋아 하게 되었고 모든 형식이 어떤 일정한 논리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양식을 클래식(classic) 즉 고전 음악이라고 이른다. 클래식이라는 어휘는 원래 "고전적" 이라는 뜻보다는 "모범적" 내지는 "표준적" 이라는 뜻에 가깝다. 그러나 오늘날 클래식이라는 말은 역사적인 또는 시대 적인 범주로 고전파음악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고전파 음악은 바하가 1750년에 세상을 떠난 무렵부터 더욱 융성을 보아 19세기의 30년경 까지 지배적인 세력을 갖고 음악의 모든 분야에 걸쳐 침투해서 실현을 보았다. 따라서 작곡 가들의 음악활동면에서 볼 때 고전파 음악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에 걸친 약 80년간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대의 커다란 업적이라고 한다면 화성음악의 확립, 소나타 형식의 확립과 발전, 기악의 확립과 발전 즉 교향곡, 근대적 협주곡, 현악 4중주, 피아노 3중주 등의 기악양식과 연주양식의 확립등이다.
고전파음악이란 말은 본래 당시 작곡가들이 붙인 말이 아니라 후세에 이르러 낭만주의 음악에 대해 그 이전의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다. 바로크시대의 사회적, 국가적 체제가 어디까지나 절대주의적 왕권 아래 있었으나, 점차 신흥 시민 계급이 대두하면서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사회문화의 건설을 희망하는 계몽주의 철학의 자유주의 물결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술분야도 과거 종교나 특정인만이 향유할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나 보다 넓게 수용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을 중시하는 고대 그리이스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져서 객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과 균형의 조화를 추구하는 음악을 지향하게되었다.
결과적으로 대위법적인 음악보다는 단순 명쾌한 선율을 지닌 화성음악을 선호하였고 개성적인 감각의 성악음악보다는 기악음악이 인기가 있게 되었다. 작곡가들은 이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음악기법을 창안하는 노력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소나타형식(Sonata Form)이라는 형식적인 틀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시대의 형식의 범주안에서 단순명료하고 질서와 절제를 중시하는 인간적인 음악이 주가 되므로서 종교음악 분야는 음악사상 처음으로 침체국면을 맞게 된다.
(1) 전기 고전파
전기 고전파는 바로크말기의 1720년경에서부터 고전 초엽의 1770년대의 음악을 가르킨다. 이 시기에는 당대한 바로크양식에서 벗어나 경쾌하고 단순 명료한, 그러면서도 가벼운 장식적 요소가 가미된 로코코(Rococo)양식이 나타난다. 감상적인 멜로디에 화성기법이 사용되었으며 독이 남부의 만하임악파에서는 소나타 형식의 발전과 함께 4악장제의 교향곡의 정형을 완성하였다. 작곡가로는 만하임악파(Demenico Scarlatti, 1685∼1757), 소나타형식을 창시한 바흐의 아들 임마누엘 바흐(Cari,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 등이 있다.
(2) 오페라의 개혁
18세기 전반을 주도했던 나폴리 오페라는 극적 사실을 경시하고 성악적 기교만을 강조하여 청중을 자극할 수 있는 감각 위주의 음악표현에만 치중하였다. 이러한 가수의 화려한 기교위주의 오페라는 극의 진행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막의 진행이 중단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욤멜리(N, Jommilli)와 트라에타(T. Traetta)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개혁의 의지를 일으켜서 새로운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루카(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0는 1762년 빈에서 새로운 구성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발표하여 오페라 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이어서 많은 혁신적인 오페라를 발표하여 이러한 개혁정신은 얼마간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지속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퇴색하여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로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오페라에 있어서 극과 음악이 모두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글루크의 이상은 19세기에야 비로소 베버(C.M Weber), 바그너(W. R. Wagner) 등에 의해서 실현하게 된다.
(3)빈 고전파(Viennese Classics)
고전파음악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초에 걸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서 완성되고, 이어서 베토벤에 의해서 한층 더 충실하게 되고, 또 베토벤에 의해 또 다른 방향으로 인도되었다. 이 대가들은 주로 빈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이 완성기의 고전파음악을 빈 고전파음악이라고 한다.
빈 고전파의 첫 번째 대가인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은 화성적 단성율 음악에 크게 성공했고 2개의 대립되는 테마를 제시하여 그것을 발전시키고 다시 테마를 반복 재현하는 소나타형식을 완성시켰다. 또한 교향곡에 있어서 제 3악장에 미뉴에트를 고정 배치하여 제 1악장 소나타형식, 제 2악장 가요형식, 제 3악장 미뉴에트, 제 4악장 론도형식 또는 소나타 형식의 근대적 교향곡의 형태를 확립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104개의 교향곡, 83개의 현악 4중주곡, 24개의 오페라 《천지창조》를 비롯한 4개의 오라토리오, 14개의 미사곡, 20개의 피아노협주곡, 기타 수많은 종류의 곡이 있다. 한결같이 명랑하고 쾌활하며, 전형적인 고전파음악의 성격을 지닌 걸작들이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35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주옥같은 명작을 많이 남겼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독특한 유머 감각과 넘치는 창작적 기지로 시종 일관되어 있어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고전주의 오페라의 최고봉에 올라서 있다. 그리고 하이든이 확립한 소나타 형식에 풍부한 색채감과 음악다운 즐거움을 부여하여 자유분방하게 작곡하였다. 모차르트는 그야말로 음악을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의 작품은 41편의 교향곡을 포함하여 600여곡이 넘는데 모두 모범이 될 만한 것이며, 작곡의 중점을 오페라에 두었으나,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미사곡등 매우 광범위한 작곡활동을 하였다.
베토벤(Ludwing van Beethoven, 1770∼1827)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 완성된 고전파음악에 풍성한 생명을 주어 알찬 열매를 가져오는 마지막 매듭을 지었으며 낭만파의 새로운 장에 문을 열어 준 교량적 역할을 한 위대한 작곡가이다. 베토벤은 신체적 장애로 그의 창작세계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영원불멸한 그의 작품은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내고 만민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음악의 전 분야에 걸쳐 작곡된 그의 작품에는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개발한 고전형식에서 발전부의 확대, 코다부분의 계속적인 장려한 음악진행, 악장편성의 자유로운 취급, 교향곡의 제3악장에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로의 교체, 강약법의 급변 등 여거 형태의 독창적인 음악적 수법을 창안하여 새로운 진보적 경향을 수립함으로써 낭만주의의 문을 열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분류하여 일반적으로 작품시기를 3부분으로 구분한다.
제1기는 1802년경까지로서 이 무렵에는 주로 하이든, 모차르트의 양식을 따르거나 그 영향을 받은 시기로서,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1번과 제2번》, 피아노 소나타 《비창》과 《월광》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제2기는 1815년경까지로서, 이 시기의 작품은 그 자신 특유의 힘차고 그 내용이 심각한 것으로, 그의 독특한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시기로서, 교향곡 제3번에서 제8번까지, 《열정》등의 피아노 소나타, 《라즈모프스키》 현악4중주곡, 오페라《피델리오》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제3기는 마지막 시기로서 청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후의 영감을 통한 창작의 시기로서,《교향곡 제9번》, 《장엄미사》, 마지막《현악4중주곡》등이 있으며 모두 깊은 사색과 인생을 달관한 종교적 색채가 깃들어져 있는 음악사상 최고의 예술이라 하겠다.
1)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Franz Joseph Haydn [1732-1809]
2)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 Wolfgang Amadeus Morzart [1756-1791]
3) 루드비히 반 베에토벤 -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1)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Antonio Vivaldi [1678-1741]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남부 오스트리아의 헝가리에 가까운 로라우라는 빈촌에서 태어나, 1809년 5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77세로 세상을 떠난 고전 음악의 기초를 닦은 대가이다. 하이든은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익힌 사람이나, 가장 건실하고 자발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특히, 교향곡이니 협주곡이니, 혹은 현악 4중주곡이니 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근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여러 음악 양식을 처음으로 개척한 역사적으로도 커다란 업적을 남긴 작곡가이다.
하이든은 부친이 손수레의 수리공이었기 때문에 음악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라나 시골 음악 교사의 불완전한 지도를 받은 후, 8살 때 비인으로 나와 슈테판 교회의 아동 성가대에 들어 갔다. 17살 때 변성한 하이든은 이 합창대에서 나와 한때 빈곤한 생황을 보냈으나 이러 는 가운데에도 공부를 계속하며, 특히 에마누엘 바하의 소나타를 어렵게 입수하여 이를 분석 연구했다.
하이든은 23살때 처음으로 현악 4중주곡을 썼다. 이 곡들은 모르친 백작에게 인정되어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이어 헝가리의 가장 권력있고 부유한 귀족인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인정되어 1761년 그의 악단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얼마 후 그 악단의 책임자인악장이 되었다. 당시 는 귀족 전제 정치시대인 만큼, 누구나 그러하듯이 하이든도 귀족사회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고, 또한 고용주를 위해 쉴 사이 없이 작곡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그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1791년과 1794년에는 영국으로 초청되는 등 외국여행도 잦아졌다.
하이든은 선배들의 작품에 내재한 지배적인 공허한 감상을 버리고 그 자신의 주장을 강력 히 내세워 건실하고 순수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그의 음악에는 발랄한 생기와 독창성이 있고, 신선한 자연미가 흐른다. 하이든은 같은 시대의 모짜르트가 만하임악파의 영향을 받은것과 는 달리, 주로 에마누엘 바하의 <클라비어 소나타>에서 작곡기교를 배웠다. 대부분의 4중주 곡이 가장 과 교향곡, 그리고 최후의 오라토리오 <전치창조> <4계>등은 영원한 명작으로서 하이든의 음악성을 잘 나타낸 작품들이다.
<주요작품> 교향곡 6번 D장조 "아침" [1761]
교향곡 45번 F#장조 "고별" [1772]
교향곡 94번 G장조 "놀람" [1791]
교향곡 101번 D장조 "시계" [1794]
"천지창조" [1798]
"황제 4중주곡"
2)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 Wolfgang Amadeus Morzart [1756-1791]
모짜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잘쯔부르크에서 태어나 1791년 12월 5일 역시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35세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고전음악의 대가 모짜르트의 위대한 업적을 여기서 새삼스럽게 들추어 볼 것까지도 없지만 음악 역사상 지대한 영향력을 갖는 그의 많은 공적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소나타등 여러 음악형식과 교향곡이나, 협주곡이나, 현악 4중주곡 등의 실내악 등, 기악의 연주 양식을 개척하여 선배인 하이든은 물론 베에토벤 등에 영향을 주었을뿐더러 근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음악형식의 기틀을 닦았다는데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모드들 모짜르트를 천재의 모델 케이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일찍부터 천재적인 소질이 발휘되어 4살 때부터 잘쯔부르크 대사교, 즉 영주의 궁정악단 단원으로 있던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작곡을 배워 이미 6살 때부터는 비인을 비롯 각 지를 순회하며 연주를 했고, 7살때에는 파리를 방문, 그리고 다시 런던을 거쳐 신동이란 경탄과 찬사를 받고 10살에야 고향에 돌아왔다. 모짜르트는 다시 13살 때 이탈리아로 연주여행을 떠나 15살에 뀌국할 때까지 여러곳에서 천재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그러나, 고향인 잘쯔부르크의 영주로부터 냉대를 받아 그는21살 때 새로운 일터를 찾아 파리로 갔었지만 여기서도 정착할 수 있는 일자리나 여건은 찾지 못해 신동이란 지난날의 화려했던 연주경력을 가진 모짜르트도 실의를 안고 1770년 잘쯔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1781년 그는 다시 고향을 떠나 비인으로 가서 거기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작곡과 연주, 그리고 교수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작곡가로서 또는 연주가로서 성공을 했고 사회적인 지위도 확고할 만큼 생활은 항시 곤란했고 끝내는 빈곤과 과로로 35살이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짜르트는 그 비극적인 짧은 생애에 600곡이 넘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작품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기악, 성악을 불문하고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썼고 또 거의가 불멸의 명작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그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오페라, 종교음악 등의 규모가 큰 작품은 물론, 독주악기로서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중요한 작품을 쓰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다.
이 많은 작품의 양식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융합되어 있다. 이것은 모짜르트가 어렸을때 부터 연주 여행으로 여러 곳을 다니며 각양각색의 작품에 접했고 여러 가지 양식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파리여행때 만하임에서 새로운 기악양식을 익혔고, 이탈리아 여행에 서 오페라 양식을 영국에서 요한 크리스찬 바하로부터 새로운 피아노 작곡법을 그리고 파리에서 만하임파인 쇼오버어트로부터 새로운 실내악양식을 계시 받았었다.
또한 비인에서는 하이든으로부터 실내악 특히 "형악4중주곡"의 작곡법에 중요한 암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짜르트는 이러한 요소를 막연하게 도입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동화하고 순화시켜 여기에 깊은 감정과 정서를 넣어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한 것이다. 그의 선율은 무한히 아름답고 풍부하며 그의 형식은 명쾌하고 간결할뿐더러 화성은 밝고 섬세하다. 모짜르트 의 음악이 일반적으로 명랑하고 쾌활하다는 것은 정평이지만 그 저류에 흐르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와 서정미 는 때로는 절망감마져 느끼게 한다.
<주요작품> "피가로의 결혼" [1786]
"돈 조반니" [1787]
"마적" [1791]
"41번 쥬피터 교향곡" [1788]
"진혼곡" [1791,미완성]
"호른 협주곡 3번"
"대관식" [1779]
3) 루드비히 반 베에토벤 - Ludwing van Beethoven [1770-1827]
베에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본에서 태어나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고전주의 음악의 최후의 그리고 고금을 통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베에토벤의 음악이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인류의 정신 문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음악사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에서도 베에토벤은 드물게 보는 역사의 창조자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위대한 업적을 우리 인류문화에 남겨준 음악가라고 하겠다.
오늘날 온 인류가 베에토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정신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악성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우리 인류의 공통된 철할 세계를 추구하고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에토벤의 작품들은 곧 그의 사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생활의 반영이다. 따라서 그 의 전 작품은 베에토벤의 전 생애를 장식한 그의 역사인 동시에 그의 인간과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베에토벤의 생애를 불행한 일생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상 베에토벤처럼 고르지 못한 환경에서 일생을 보낸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가난했다거나 귀머거리가 되었다거나,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거나 하는 것으로만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생이 오직 인간의 공통된 운명과 대결하고 그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끝냈다는 심각한 정신 환경이 더욱 불행했을지 모른다. 베에토벤은 서부 독일의 본 시에서 태어나 그가 22세 때 비 인으로 가기까지 어린 시절을 여기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선제후 예배당의 가수로 있었으나 성질이 난폭하고 대단한 호주가여서 가정이 평온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족환경에서 자라난 베에토벤은 서너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 이론을 아버지의 가혹한 지도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그는 궁정 오르간주자인 에덴을 비롯 파이퍼 그리고 네에페에게 지도를 받아 일곱 살 때 공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었고, 열살 때에는 벌써 작곡을 하기 시작하여 천재적인 재능과 역량을 일찍부터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여러곳으로 순회연주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였고 자신의 기술도 닦아서 더욱 천분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술에 빠진 아버지가 나태한 탓으로 집안 신구들은 어린 베에토벤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 뒤 17살 때에는 선량한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9세때에는 아버지가 실직하는 바람에 가족은 더욱 어려워지고, 베에토벤이 동생들을 데리고 생활을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경에서도 그는 꾸준히 연구와 작곡에 정진하였다.
7세때에는 비인을 방문하여 모짜르트를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22살때에 아버지마 저 여의게 되어 온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도 지게 되었다. 그 후 비인으로 옮겨 귀족사회에도 출입하면서 피아노 연주가로 활약하였다. 1796년경 즉, 26살 때부터는 작곡도 인정을 받아 음악계에 확고한 지위를 잡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에게는 치명적인 운명이 닥쳐왔다. 그가 28살 때 귓병을 앓아 청각을 점차 잃게 되었다.
32살때에는 절망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베에토벤은 자결을 결심하고 비인 교외인 하이리겐시타트에서 비통한 유서를 쓰게 되나, 다시 생각을 돌리고 "나에게 신으로부터 내린 모든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죽어서는 안된다." 하고 결심한 그는 그 가혹한 운명과 싸우면서 작곡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와같이 베에토벤은 가족적으로나 일신상으로나 불행이 겹친 데다가 빈곤과 고난과 번민속에 살아 나왔고, 한편 이를 극복하고 그의 예술을 창조한 것이다. 베에토벤은 남달리 인간애가 풍부하였고 고독과 절망에서도 항시 환희와 희열로써 곤경을 극복해 갔다.
베에토벤은 또한 풍부한 감수성과 자유분방한 개성, 섬세한 감정과 생활의식 등을 내재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자기 사생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언제나 현대적이고 역사적인 인류개혁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귓병과 빈곤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현대를 의식하고 전 인류적인 인생관과 사고를 음악적 창작에 결부시켰다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창작활동의 이념은 개인적인 감각이나 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통하는 고민과 희열이 그것이다. 그의 예술의 특징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환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보편성에 있다고 본 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본다면 선배인 하이든, 모짜르트의 뒤를 이어 고전음악의 주요소인 형식을 한층 확장 완성 시켰고, 연주양식의 개척과 작곡 수법이나 관현악법에 있어서도 결정 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가장 특징인 자주성과 개성의 확립을 꾀하였고, 진취적이고 과감한 태도로써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세에 임했다.
<주요작품> 교향곡 제3번 "영웅" [1803]
교향곡 제5번 "운명" [1808]
교향곡 제6번 "전원" [1808]
교향곡 제9번 "합창" [1824]
피델리오 [1805]
피아노 소나타 "비창"
피아노 소나타 "월광"
낭만파음악
낭만주의는 19세기의 음악을 지배한 기본적인 지도 이념으로써, 특히 문예분야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 중요한 본질은 새로운 것을 희구하는 욕구, 개성의 존중, 자유에의 태도, 또한 새로운 시대 정신에의 동경등 이다. 따라서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 음악에서 존중하던 보편적인 형식과 이상화된 내용을 버리고 신기한 것을 쫓고 통제적인 울을 벗어나 개성적인 색조를 강화한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로 자기의 음악을 가지고 노래하려는 정신경향, 또한 시나 희화 등 음악 외적인 분야로부터의 새로운 자극을 희구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음악의 기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개혁을 갖게 되어 고전음악시대의 최고의 이상형식이던 소나타를 대담하게 변형 또는 포기하고 그 대신 자유롭고 유동적인 형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단일악장의 환상적인 소품 형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 선율은 고전음악 시대처럼 마디 수가 배수로 구성되는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것이 많아지고 당김 음이라든가 잇단음표 등을 자주 사용해서 다채로운 변화와 표현의 폭을 넓히고 그 음역도 확 대하고 때로는 비성가적인 음정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리듬도 자유롭게 되어 복잡한 겹리듬을 자주 쓰게 되었고, 화성도 아직 3화음을 원칙으로 하나 보다 자유롭고 변화를 가져와 불협화음을 자주 사용하고 대담한 조바꿈을 하게 되었다. 또한, 관현악 편성도 다양하고 확대되어 새로운 음색을 모색하게 되었고, 편성도 대대적인 편성으로 압도적인 음향을 요구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은 프랑스대혁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듯이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대두된 시기였다. 프랑스대혁명은 일반 시민계급이 특권계급에 대한 반발이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고, 그것은 18세기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이른바 계몽주의 사상과 그 문예사조등에 의해서 양성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계몽주의는 이성에 지나치게 편중하고 전통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19세기에 들어오자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냉철한 이성보다는 인간 본연의 감정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합리적인 것보다는 공상적, 목가적인 세계를 동경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먼저 개개인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낭만주의인데 예술가들도 자유에 대한 이상과 개인주의 사상에 심취하기에 이르렀고, 음악에 있어서도 역시 낭만적 요소가 깃들기 시작하였다. 고전주의 작곡가들은 형식성을 중심으로 하여 객관적인 아름다운을 추구한데 대하여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무엇보다도 자기표출이라는 주관성을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감정을 유일한 실마리로 삼고 있었다. 또한 산업혁명의 결과 부유한 자본주위 중산층이 형성되어 청중의 범위가 크게 확산되었고, 이러한 부유 중류계층들은 곧 작곡가들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작곡가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일반청중을 대상으로 곡을 써 나갔다. 청중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연주를 하였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여러 형태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폭넓게 독서했고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다루는 소재는 다양했다. 그리이스 신화에서부터 전설과 동화, 자연의 경관, 연인의 사랑 등 모든 것이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소재는 다양하고 풍부하게 음악으로 표현되어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 초기 낭만파
초기 낭만파음악은 베토벤의 중기에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18∼1826)가 1821년에 오페라 《사탄의 마수》를 발표하고 모차르트, 베토벤에세 바그너에 이르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악기에 의한 상징법, 혁신적인 악기사용, 독일의 전설을 소재로 사용하는 등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확고한 지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베버는 오페라 이외의 작품에서도 강한 극적 효과와 다양한 색채저거 효과를 거두어 낭만적인 경향을 추구하였다.
예술가곡과 즉흥곡으로써 시정이 흐르는 낭만 정신을 이끌어들인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는 600여곡의 가곡 작품에서 그의 끊임없이 샘솟는 선율을 서정시에 붙여, 다양하고 오묘한 화성을 창출하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낭만적인 정감속에 융합하였다.
교향곡, 실내악곡 그리고 피아노곡 등 그의 모든 작품들은 낭만적 풍취가 넘치는 낭만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2)중기 낭만파
낭만의 꽃이 피기 시작한 시기로서 서정적인 작은 형식을 자유롭게 다루며, 자매예술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표현법으로 주관적인 사고로서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멘델스존(Felix Jakob Ludwing Mendelssohn-Batholdy, 1809∼1847)은 시의 세계를 피아노에 도입시킨 '무언가의 창시자'로서, 그의 작품은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은 고전적인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나 《한 여름밤의꿈》,서곡《핑갈의동굴》,교향곡《스코틀랜드》《이탈리아》등의 표제음악에서 볼 수 있는 회화성은 분명히 낭만적인 꿈과 시(詩)가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기악곡 등으로 독일 낭만주의를 절정에 끌어올린 슈만(Rovert Schumann,1810∼1856)은 그의 피아노 음악에서 서정시와 관계되는 서정성을 밑바탕으로 하여 피아노 페달의 효과적인 사용, 대담한 반음계적 화성, 음형의 다양한 변화 등의 개성적인 표현이 뛰어났다. 그의 가곡은 문학과 음악이 가장 접근된 것으로서 아름다운 선율과 다양한 피아노 반주로 시의 이미지에 의한 내적 융합의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은 피아노의 온갖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피아노곡들이 대부분이며, 모두 아름답고 향기가 높다. 대개가 즉흥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꾸밈음과 템포의 변화, 독특한 장식음의 전개 등을 특색으로 하여 시적으로 표현된다. 이 시기에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 1868), 도니체티(Guetano, Donizetti, 1797∼18480,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68)로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프랑스에서도 오페라가 성행했는데, 낭만주의 사조에 의한 낭만적인 정서가 그들의 작품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3) 후기 낭만파
후기 낭만파 또는 신 낭만파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는 낭만주의 음악이 결실을 맺는 시대이며 또는 새로운 음악으로 변화되는 새로운 기운이 있는 시대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표제음악의 발달과 함께 교향시, 악극(Music Drama)이 창시되었고, 관현악이 발달하였으며 오페라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EH한 말기에는 무조(撫棗, Atona)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최초의 작곡자는 이탈리아의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이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명수로서,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서 새로운 기교를 연주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으며 그의 신기에 가까운 다채로운 표현을 당시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의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환상교향곡》을 발표하여 관현악에 새로운 효과를 시도하여 표제음악을 완성하였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고정관념(Idee Fixe)이란 것을 창안하여 음악의 줄거리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모티브로서 주인공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베를리오즈는 관현악의 규모를 확대시켰고 악기의 그 표현 능력을 극도로 발휘시켰다. 또 이와 같은 새로움을 헝가리의 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에 의해 교향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냈다. 리스트는 12곡의 교향시를 작곡하였는데 그 어떤 형식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또 악장을 나누지도 않는 음악으로 시적인 묘사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표제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오페라도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탈리아의 가극왕 베르디(Giusepe Verdi, 1813∼1901)는 민족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오페라를 작곡하여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 그는 초기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선율을 중시하여 작곡하였으나 당시 낭만주의 문예의 영향을 받은 중기 이후의 작품에서는 극적 진실을 추구하여 극과 음악이 함께 중요시되었고 관현악법도 충실한 명락들을 이루면서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품은《리골레토 Rigoletto》《춘희 La Traviata》《아이다 Aida》등의 많은 걸작들이 있다. 베르디 이후에 이탈리아 작곡가는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5∼1945)와 레온카발로(Ruggiero Leoncavallo, 1858∼1919)인데 이들은 신낭만주의 수법을 써서 현실생활의 잔인한 사건을 묘사적으로 다루는 베리스모(Verismo), 즉 사실주의 오페라를 시도했다. 이것은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토스카 Tosca》에 이어진다. 그의 작품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인 풍부한 서정적 선율에 탁월한 관현악법으로 《라보엠 La Boheme》《나비부인 Mudame Butterfly》등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비제(George Alexandre Leopold Bizert, 1838∼1875)가 오페라《카르멘 Carmen》을 발표하였다.
독일에서는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악극(樂劇, Music Drama)을 창시하였다. 기존의 전통적인 오페라의 불합리한 점을 과감히 정리하고 새로운 형식의 음악극을 만들어낸 그는 유도동기(誘導動機, Leit motiv)를 사용하여 극중 인물이나, 특정 장면을 나타냈고, 극의 단절을 방지하기 위하여 '무한선율(無限旋律, Unendliche Melodie)'를 창안하였다. 이런 수법의 악극으로 《크리스탄과 이졸데》가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는데 반음계의 빈번한 사용과 불협화음의 사용 등으로 재래의 기능 화성법의 한계를 넘어 조성의 붕괴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바그너파인 오스트리아의 브루크너(Anon Bruckner, 1824∼1896)는 오르간의 명수이면서 9개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의 창작활동으로 조용하고 종교적 달관을 느끼게하는 음악경지를 이루었고 볼프(Hugo Wolf, 1860∼1903)는 주로 가곡을통하여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였는데 슈베르트 이후의 독일 가곡의 문학적, 예술적 발전을 정상으로까지 끌어 올렸다. 이와같은 진보적인 신낭만주의는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음악계 전체의 지배적인 흐름이 되었는데, 그 반면에 고전파 음악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작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인데 그의 화성이나 선율은 중기 낭만파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그는 바흐와 베토벤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일 고전의 정수를 순수하게 지켰다. 4개의 교향곡 이외에 관현악곡, 피아노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신고전악파'라 불리울 만큼 절대음악에 온갖 힘을 경주한 작곡가였다. 그리고 그밖의 후기 낭만파 음악의 작곡가는 프랑스의 프랑크(C. Auguste, Frank, 1822∼1890)와 생상스(C, Camile Saint-Saens, 1835∼1921), 러시아적인 성격으로 독일 낭만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향곡 《비창》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등이 있고, 가곡과 교향곡 분야에 두루 뛰어나고 특히 거대한 규모의 작품을 쓴 오스트리아의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와 교향시에 표제적인 내용과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근대적인 작곡 수법을 가미하였고 200역곡의 예술가곡을 작곡하여 독일 리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R슈트라우스(Richad Respighi, 1879∼1936)등이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오페라 이외에 기악곡을 중시하여 능란한 관현악법으로 색채감있게 창작활동을한 레스피기(Ottorio Respighi, 1879∼1936)등이 있다.
한편, 이 시대에 파리와 빈, 그리고 런던을 중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경음악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오페레타(Operetta)의 세계였다. 파리에서는 오페라부파, 빈에서는 오페레타, 런던에서는 라이트 오페라(Light Opera)등으로 명칭이 달랐지만, 그 내용은 모두 친숙한 제재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특색으로 삼고 있다. 파리에서는《천국과 지옥》을 작곡한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 빈에서는 오페레타와 많은 왈츠의 명곡을 남긴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1804∼1849, 1825∼1899) 부자, 서곡《경기병》으로 유명한 주페(F, van Suppe, 1819∼1895), 런던에서는 설리번(A.S. Sullivan, 1842∼1900)등이 유명하다.
1)카알 마리아 폰 베버 - Carl Maria von Weber [1786-1836]
2)프란츠 슈베르트 - Franz Peater Schubert [1797-1828]
3) 펠릭스 멘델스존 - Felix Mendelssohn [1809-1847]
4) 프리데릭 쇼팽 - Fryderyk Chopin [1810-1849]
5) 로베르트 슈만 - Robert Schuman [1810-1856]
6) 프란츠 리스트 - Franz Liszt [1811-1886]
7) 리하르트 바그너 - Richard Wagner [1813-1883]
8) 쥬셉페 베르디 - Giuseppe Verdi [1813-1901]
9) 페테르 차이코프스키 - Peter Tchikovsky [1840-1893]
10) 안토닌 드보르작 - Antonin Dvoralk [1841-1904]
1) 카알 마리아 폰 베버- Carl Maria von Weber [1786-1836]
베버는 1786년 12월 18일 독일 류우베크에 가까운 오이틴에서 태어나 1826년 6월 5일 영국 런던에서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최초의 낭만파 작곡가 베버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과 형으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고, 부친이 순회극단의 책임자로서 여러 곳을 돌아다닌 관계로 베버는 극장과 무대의 기교를 이 익히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그를 무대음악, 특히 오페라의 작곡가로 완성시킨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그가 10살 때 오르간과 오보에 연주가인 호이슈겔에게 지도를 받았고, 12 살 때에는 잘쯔부르크에서 미하엘 하이든에게 피아노와 이론을 배웠다. 그 후 유명한 이론가 포오글러에게 사사하면서 선배 대가들의 많은 작품에 접했고, 또한 민속 선율도 연구한 동시 에 색채적인 관현악법도 익혔다. 베버는 10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13살 때에는 오페라를 썼다고 한다. 그는 1800년경까지 뮌헨에 체류하면서 최초의 오페라 <사랑과 술의 힘>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고 한편 피아노 연주가로서도 활약을 하였다.
그 후 1804년 브레슬러 가극장의 악장을 비롯하여 프라하의 가극장 지휘자 등 여러 곳에서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낭만적 오페라를 위한 수완을 닦았다. 그러다가 1816년 드레스덴의 궁정 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함과 동시에 외면적으로도 독일적이고 낭만적인 오페라를 작곡할 필요성을 느껴 민속적인 전통에 의한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1821년에 완성하였다. 이<마탄의 사수>는 의외로 대성공을 거두어 2년반 동안에 베를린에서만 공연50회를 기록하였다. 이 오페라의 평판이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아덴 가극장의 지배인으로부터 가극 작곡의 청탁이 들어와 베버는 1826년 2월에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건너갔다.
베버는 런던 체류중에 그의 최후의 오페라 <오베론>을 완성하여 4월에 초연한 결과 성공을 하였지만, 그는 건강을 해쳐 6월 5일에 귀국 직전 객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독일 낭만음악의 선구자 베버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 해도 독일 국민가극을 참다운 예술적 수준으로 올려 놓은 일일 것이다.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오페라라고 하면 으례히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를 상연하고 있었고 독일도 그 예외일 수는 없었다.
베버는 이러한 이탈리아의 전통에서 벗어나 독일 민속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참다운 국민가극의 창조에 힘을 기울였다. 비단 가극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작품에서도 낭만문학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고 과거의 형식위주의 전통을 깨뜨리고 내객을 묘사적으로 하는 동시에 색채적인 관현악법을 사용하였다. 대본도 처음으로 독일말로 쓴 그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는 독일 최초의 완전한 민족적 오페라인 동시에 최초로 완성된 낭만적 오페라이다.
베버의 극적인 성격은 음악을 표제에 따라서 자유로운 형식을 택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후의 낭만적 표제음악의 출발점이 되었다.
<주요작품> "마탄의 사수" [1821]
"오베론" [1826]
"오이뤼안데" [1823]
"무도회의 권유" [1819]
"전쟁과 승리" [1815]
"클라리넷 협주곡 제1번"
2) 프란츠 슈베르트 - Franz Peater Schubert [1797-1828]
슈베르트는 1797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가까운 리히텐터르에서 태어나, 1828년 11월 19일 역시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31살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슈베르트는 샘솟듯 넘쳐 흐르는 악장과 이것을 작품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직감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느낀 영감을 따라 애환을 그리고 감정을 음악에 도입시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서정의 음율을 노래한 것이다. 또, 가곡이란 장르를 통해 낭만주의, 독일 리이드의 세계 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슈베르트이다.
낭만적인 가곡에 있어서는 선배인 베에토벤이나 베버도 아직 눈 뜨지 못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에토벤이 아직 비인에 살고 있을 때, 같은 도시 안에서 31년이란 비극적인 짧은 생애를 한 시민으로서 보냈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학교 교원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의 합창단에서 노래하며 불완전하나마 음악 교육을 받은 이외에는 이렇다 할 체계적인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천재적인 재질은 14살에 이미가곡을 썼고, 17살때에는 <실 잣는 그레첸>, 18살때에는 <마왕>, <들장미> 등 유명한 가곡들을 연달아 작곡하였다.
이 당시 슈베르트는 부친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19살때에는 이것도 그만 두고, 아무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생활하며 가난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예리한 감성과 풍부한 정감으로 작품을 썼고, 그 에 필요한 가곡 기교도 스스로 습득하였다. 이리하여 슈베르트는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모짜르트와 베에토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한 창작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고전음악의 전통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낭만주의의 새로운 현대의 물결이 거셌고, 따라 서 그는 새 사조의 선각자로서 낭만음악을 썼던 것이다.
그를 엄격히 따지자면 고전적 낭만주의자라고 하겠다. 샘물처럼 흐르는 그의 선율은 서정이 젖어 있고, 그의 화성은 섬세하고 뭉클한 정감에 차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그의 재능을 잘 발휘한 것은 뭐니 해도 가곡일 것이다. 그의 노래는 섬세 한 감정과 약동하는 생명력, 깊은 통찰력 등, 필연적이고 유동적인 음악적 표현에서 이루어져 있다.
한편 기악곡에 있어서는 논리적인 구성감이 부족하다는 말을 흔히 듣고 있다. 그러나 전통 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마음에 떠오른 선율을 애용하였고, 이를 독특한 화성으로 뒷받침하며 소박한 감동을 유화한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 다양한 환상과 섬세한 감각이 곁들여 슈베르트의 유니크한 음악미가 생긴 것이다. 이것이 슈베르트의 예술이 낭만주의 정신에서 유연한 증좌이기도 하다. 이는 <미완성 교향곡>을 비롯한 10곡의 교향곡, 16곡 이상의 4중주 곡과 그밖에 실내악,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와 소품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주요작품>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1823]
"겨울 나그네" [1827]
"백조의 노래" [1828]
"숭어 5중주곡" [1829]
"미완성 교향곡 b장조" [1822]
"알폰소와 에스트렐라" [1822]
"마왕" [1815]
3) 펠릭스 멘델스존 - Felix Mendelssohn [1809-1847]
멘젤스존은 1809년 2월 3일 독일 함부프크에서 태어나, 1847년 11월 4일 역시 독일의 라이 프찌히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낭만파 작곡가이다.
멘젤스존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작곡가로서, 낭만주의 음악이 개화한 중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 음악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유태인계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역사상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부유한 가족 환경에서 자랐고, 또한 일생을 경제적인 구애나 빈곤을 모르고 지냈다. 이러한 환경이 음악가로서의 멘델스존에게 플러스가 되었는지 또는 마이너스가 되었는지 모르나, 어쨌든 그의 기질과 더불어 그의 음악이 밝고 경쾌한 반면, 중후한 맛이나 심각성이 없다는 대조적 반응이 이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대부분의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과거의 전통이나 질서에 대해 부정적 태도나 저항을 하는 사례에 비하여 그는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기존형식을 아무 주저없이 받아 들이는 보수적인 작곡가였다.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을 주로 베를린에서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데다가 일찍부터 모친으로부터 피아노지도를 받았으며 후에 피아노를 베르거에게, 그리고 작곡을 체르터에게 배우는 등 부모의 각별한 배려로 윤택한 음악 교육을 받아 일찍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9살 때 공개 연주를 하였고 11살때부터는 작곡을 시작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 의한 유명한 서곡을 쓴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7살때의 일이다.
그는 여러 차례의 여행으로 북쪽은 스코틀랜드로부터 남쪽은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온 유럽을 통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여행을 통해 가는 곳마다 인상과 감흥을 통 해 작곡의 소재를 얻어 작품을 썼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고전주의 적인 형식감을 이어받아 여기에 묘사적이고 표제적인 내객을 담은 작품들로 지방색이 짙은 리듬이나 멜로디, 여기에 색채적인 관현악법 등 낭만적인 감각이 짙게 풍긴다.
멘젤스존은 또한 1833년부터 듓셀르도르프의 교회음악과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서, 그리고 케른의 라인 음악제의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그는 창작가로서 뿐 아니라 연주가로서 지휘자로서 또한 교사로 서 분망한 생활을 해야했고 라이프찌히에 음악학교를 설립하는등, 사회적인 책임도 무거워져 겹친 과로로 38세라는 단명으로 일생을 마쳤다.
멘델스존은 낭만주의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보는 보수주의적인 음악가였으나, 그를 단적으로 말하면 정신은 낭만주의에다 형태는 고전주의적 질서와 조화의 감각을 가진 작곡가라고 하겠다. 그의 형식이 완벽에 가깝도록 완성된 데 비해 심각한 내객이 부족한 탓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뒤흔들 감동이 없다는 것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성격탓도 있겠지만 그의 생활 환경이 너무나 행복하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현실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 각된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에서 강렬한 열정이나 비창은 느낄 수 없지만, 밝은 빛과 시적이고 그림처럼 경쾌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세련된 형식은 그의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요작품>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 [1842]
교향곡 4번 "이탈리아" [1833]
교향곡 5번 "종교개혁" [1832]
서곡 "한 여름밤의 꿈" [1826]
"핑갈의 동굴" [1832]
"성 바울" [1836]
"무언가" [1829-45]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4) 프리데릭 쇼팽 - Fryderyk Chopin [1810-1849]
쇼팽은 1810년 2월 22dfl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 제라조바 노라에서 태어나 1849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난 폴란드의 작곡가이다.
고금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다루었고 또한 피아노음악을 작곡하고 있지만 쇼팽처럼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피아노가 갖은 특색을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성한 작곡가는 드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피아노를 노래시키고 피아노를 통해 시 를 읇은 사람은 바로 쇼팽인 것이다. 그를 가리켜 <피아노 시인>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피아노의 거장 안톤 루빈시타인의 찬사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쇼팽은 프랑스 사람을 아버지로 폴란드 사람을 어머니로 폴란드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로렌주 낸시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국내불안을 피해 17세때 단신 바르샤바로 온 사람이다. 처음에는 담배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그 공장 이 문을 닫게 되자 그 후 바르샤바에서 약 50㎞ 떨어진 제라조바 보라에 있는 스카르벡 백작의 아들 프레데릭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작부인의 먼 친척이 되는 폴란드 귀족 출신 유스티나 쿠지자노프스카와 1806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네아이가 태어 났는데 외아들인 쇼팽은 두번째 아이였다. 그러나 이 집안은 쇼팽이 태어나던 해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쇼팽은 그 혈통이 말해 주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속적인 요소와 프랑스의 세련된 감각이 그의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고, 쇼팽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주로 파리에서 나머지 반생을 보낸 것을 보면 그의 생애도 폴란드와 프랑스로 20년씩 반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쇼팽은 스스로 폴란드인이란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대단히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조국을 떠날 때 가지고 떠난 한줌의 흙은 일생을 통해 간 직했고 조국 폴란드가 국난을 겪을 때 마다 의연금을 보내는 등 한시도 그의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쇼팽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서 여섯 살 때에는 보히미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지브니라는 사람에게 정식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살 때에는 그 해 2월 26일 바르샤바 청중들 앞에 나타나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 데뷔해서 폴란드사람드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쇼팽은 즉흥연주에도 능해서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작곡가로서의 소양을 일찍부터 제시 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12세때 바르샤바 음악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인 요제프 엘스너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지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공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독창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지도법을 택했다. 이러한 방법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와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고금을 통한 독 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쇼팽은 피아노의 정식레슨을 받지 않고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쇼팽은 19살때 이상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연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상대는 당 시 바르샤바 음악학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타치아 그라도코프스카였다. 그러나 내성적인 쇼팽 은 그의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에서 특히 제2악장<아다지오>는 그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쇼팽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1830년 11월1일 그의 나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세계여정에 올랐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국을 영원히 떠나는 여정이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몰랐었다.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친구들이 보내준 한 줌의 흙을 간직하고 보다 넓은 예술활동의 무대를 찾아 바르샤바를 떠났다.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와 더불어 세계 여정에 오른 쇼팽은 처음에 비인에 들렸으나 그 전해에 들려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따뜻하게 맞이할 선배 음악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기대에 부풀 었던 그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바르샤바혁명이 일어나 폴란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외교적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와 폴란드사람을 적대 시하게 되었다. 친구인 티투스는 조국으로 되돌아 갔고 홀로 남은 그는 고독과 실의의 구렁 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인에 더 이상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아 쇼팽은 런던으로의 여권을 얻어 1831년 7월, 21세때 비인을 떠났다.
쇼팽은 1831년 9월말에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당시 정치적으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쇼팽에게는 자연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어 쇼팽의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 그리고 영원한 안주의 고장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파리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나 사회풍조로나 자유를 고가하고 있었고 문화인, 지식인, 예술가들이 유럽전역에서 모여 들어 당시 전성을 이룬 낭만주의 사조에 물들 고 있을 때였었다. 그는 멘델스존과 리스트 그밖에 카르크브랜너 등의 음악인들의 따뜻한 도 움을 얻어 활동하게 되었고 우연히 파리에서 만난 옛 친지인 폴란드 귀족 라지뷜공작의 주선으로 로스차일드 남작의 사교 모임에도 드나들게 되어 파리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연주와 작 곡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의 악단에서의 기반이 확고해지고 사회적인 명성도 높아진 쇼팽은 1836년 겨울 그 나이 26세때 친구인 리스트의 소개로 인기 여류작가였던 죨쥬상드와 알게 되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으로서는 상드와 같은 활동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의 애정과 간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 두 사람은 9년간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쇼팽은 그녀로부터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생활 속에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길지 못해 1846년 11월 36세때 그는 상드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그 와 동시에 그의 건강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한 곡의 작품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생활을 위해 1848년 영국에 건너갔고 옛날 그의 피아노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호의 딸 젠스터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 연주여행을 했으나 이것이 건강에 치명상을 주어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건강의 악화로 1849년 10월17일 오전 2시 쇼팽은 파리 프랑스 봔둠 자택에서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파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가 20년전 고국을 떠날 때 가지고 온 폴란드 흙이 유해위에 뿌려졌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고국의 바르샤바 성 십자교회에 안치 되었다.
그의 작품중에 실내악곡과 가곡등이 약간 있으나 뭐니 해도 피아노 작품이 쇼팽의 본질이며 이는 단지 피아노를 통한 음악의 시를 엮은 낭만주의 작곡가라는 것을 지나 피아노 그 자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쇼팽의 인생이요 철학이라는데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쇼팽의 작품중에 폴로네이즈나 마즈르카는 분명히 폴란드적이지만 전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화려한 장식적인 요소나 섬세한 감각은 파리에서 출입한 귀족사회의 취미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국적불명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흐르고 있는 그의 정신과 감정은 어디까지나 폴란드적이며 이것은 외적의 침략을 받은 고 국에의 애국심으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폴란드적인 체질과 더불어 그의 작품의 특징은 깊은 서정과 풍부한 정서, 여기에 고상한 품위가 큰 매력이 되고 있다.
<주요작품> "즉흥 환상곡 c# op.66 [1835]
"뱃노래 F# op.60" [1846]
"피아노 콘체르토 no,1 e" [1380]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폴로네이즈" [1831]
"피아노 트리오" [1829]
"첼로 소나타" [1846]
"군대 폴로네이즈"
5) 로베르트 슈만 - Robert Schuman [1810-1856]
슈만은 1810년 6월 8일 독일 작센주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나 1856년 7월 29일 역시 독일의 본에 가까운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슈만은 라인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자살을 기도하고,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은 사인 동시에 장차 장인이 될 뷔이크와 법정에서 대결하는 등, 그의 전기에 심심치 않은 화제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사생활이 다사 다난 하기도 했으나 그는 낭만주의 음악을 위해서도 선 두에서 싸웠고 또 많은 업적도 남겼다. 그러기에 슈만하면 독일 낭만파 음악의 대표적인 작 곡가로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슈만은 소년 시절부터 쟌 파울이라든가 호프만등의 문학작품을 가까이 함으로써, 낭만적인 환상을 풍부히 하고 감정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이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하여, 그 의 음악은 자연 낭만적인 시정이 넘치게 되었다. 따라서 슈만의 음악은 순수한 음악적인 구 성보다는, 시적으로 노래를 하고 자기의 낭만적인 환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슈만은 같은 시대의 리스트나 바그너 처럼 기교주의나 화려한 외면을 꾸미는 방향에는 공감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바하나 베에토벤, 슈베르트 등으로 이어 내려온 전통에 입각한 자기 나름의 방향에서 창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멘델스존을 높이 평가하고 브라암스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한편 슈만의 음악은 규모가 큰 곡에 있어서는 고전적인 구성에 집착된 느낌도 있고, 피아노 외에는 악기의 취급이나 균형이 미숙하게 다루어지며, 특히 관현악의 기교에 숙달되지 못하여 높이 평가되지는 않지만 내객에 내포된 낭만적인 환상과 정열, 그리고 꿈과 동 경은 대단히 신중한 것이다.
슈만은 음악에 때해서는 조숙하여 7살때에는 교회의 오르간주자로부터 지도를 받은 것을 비롯해서 점차 음악에 흥미를 가져 작곡도 하게 되었다. 부친은 음악 공부에 비교적 이해하는 태도였지만, 모친은 음악가의 장래성에 불안을 느껴 음악 전공을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슈만이 16세때 누님이 정신병으로 죽었고 이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보다 내성적이고 몽상적으로 되어 문학과 음악에 인생의 위안을 찾았다. 모친은 그를 법률가로 입신시키기 위해 라이츠찌히에서 법률공부를 시켰으나, 본인은 오히려 철학이라든가 역사에 흥미를 가졌고, 프리드리히 뷔이크 밑에서 본격적인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뷔이크의 딸인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클라라와 알게 되었다. 1830년 슈만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격한 나머지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모친의 승낙을 얻어 뷔이크의 지도를 다시 받아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20살이 된 슈만은 손가락이 잘 돌지 않아 너무 무리한 훈련을 한 결과 손가락을 다쳐서 사용불능이 되자 작곡으로 방향을 돌려 지휘자인 도른 에게 이론을 배웠고 바하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슈만은 한편 음악이론에도 붓을 들어 1822년 쇼팽을 소개한 유명한 글을 발표한 이래 34년 에는 <신음악 시보>의 주필로서 독일음악의 전통과 진정한 낭만음악의 옹호를 위해 싸우기 도 했다. 그리고 한편 피아노곡 등 작곡에도 열을 내었다. 1843년에는 멘델스존이 창립한 라이프찌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고 1847년에는 합창단의 지휘자로, 그리고 1850년에는 <듓 세르돌르프>시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창작에는 쉬지 않고 정열을 쏟아 많은 작품을 썼으나 정신병이 점점 악 화되어 1854년 2월 27일에 라인 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조되어 1856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엔데니히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주요작품> "여인의 일생과 사랑" [1840]
"시인의 사랑" [1840]
"가곡집" [1840]
"아베그 변주곡" [1830]
"환상 소곡집" [1837]
"어린이의 정경" [1838]
"낙원과 페리" [1843]
"파우스트에서의 한 장면" [1853] "피아노 5중주 e 장조" [1842]
6) 프란츠 리스트 - Franz Liszt [1811-1886]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의 라이딩그에서 태어나, 1886년 7월31일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19세기에 있어서 피아노 음악의 거장으로서, 또한 희귀한 연주 기교의 명인으로서 먼저 들 수 있는 사람이 리스트이다. 리스트는 화려한 연주가로서 전 구라파를 석권했으나, 그는 단지 한 피아니스트로 시종하기에는 너무나 풍운아의 기질과 패기가 넘쳤다고 보겠다. 이는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교사, 평론가, 그리고 승려로서의 다양한 그의 생활 행각이 잘 입증하여 주고 있다.
리스트는 그야말로 19세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으로서 그가 남긴 발자취는 단지 역사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바그너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었고, 후세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음악가라 하겠다.
리스트의 부친은 게스테르하지 후작의 관리인 이었으며, 음악적인 재능도 있어서 피아노도 치고 첼로도 즐기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이 부친의 영향과 교육을 받아 피아노 연주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리스트는 1820년 9세 때, 처음으로 에덴부르크에서 공개 연주회를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결과 귀족들이 장학금을 대주어 10살 때에는 비인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가족들과 같이 라이딩그를 떠나 비인으로 이사를 하였다. 비인에서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피아노 교칙본으로 유명한 체르니에게 피아노 지도를 받았고, 한편 살리에르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리스트는 1833년 22세 때 말리 더그백작부인과 알게 되어 나중에는 가정을 꾸미게 된다. 이 말리 더그부인과는 성격차이로 39년경부터 불화가 잦아 1844년에는 끝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4년후 러시아로 연주여행을 할 때 키에프에서 알게 된 카로리네 뷔트겐슈타인 후작부인과 다시 두 사람은 생활을 같이 하게 된다. 물론, 이러는 사이에도 리스트는 창작에 강한 의욕을 보여 연달아 작품을 썼고, 28년 경부터는 거장적인 연주가로서 여러 나라에서 절찬을 받으며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야말로 비인이나 베를린도 리스트가 석권해버리다시피 하여 퀘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연주 생활도 카로리네 부인의 권고로 1947년36세때 와이마르에 정착하여 창작에만 전념하게 된다. 리스트는 낭만파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여러 방면에 걸쳐 밚 은 작품을 쓴 다작가로서 여러 종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교향악시와 피아노 곡이다. 리스트가 활약하던 때는 바야흐로 낭만주의가 무르익던 시대로서 특히, 그가 살던 파리는 여러 예술의 근원지로서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문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유고, 라마르티이느, 졸쥬 상드등과 친교함으로써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여기에 리스트는 구성이 크고 복잡 다채로운 표현력을 갖는 관현악에 자기의 이상을 찾게 되어 드디어는 시적인 상념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교향악시>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피아노곡들은 19세기의 거장들이 갖는 어려운 연주 기교를 구사하여 화려한 효과를 내는 풍조를 따르고 있다.
19곡으로 된<헝가리안 랩소디(헝가리 광시곡)>, 12곡으로 된 <초절 기교용 연습곡>등이 그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러한 피아노 작품에서의 기교라든가 효과는, 동 시대는 물론 후세의 연주가나 작곡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리스트의 업적으로는 형식에 있어서 주제를 변용, 사용하여 전체의 곡을 유기적으로 형성하는 등, 그리고 연주가로서, 교사로서의 공적, 또한 베에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의 재 인식, 바하, 그밖에 피아노 레퍼토리의 확대, 지휘에 있어서 바그너를 비롯한 동시대작 곡가의 작품은 물론 선배 대가들의 명곡을 소개하는 등, 그의 업적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주요작품> "피아노협주곡 A장조" [1839]
"단테교향곡" [1855-56]
"파우스트 교향곡" [1857]
"오르페우스" [1854]
"레 프렐뤼드" [1848]
"헝가리광시곡" [1839-47]
"동 상슈" [1824-25]
7) 리하르트 바그너 - Richard Wagner [1813-1883]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나,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70세로 객사를 한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베를리오즈에서 시작되어 리스트에 이르러 꽃을 피웠던 후기 낭만주의 즉, 신 낭만주의는 바그너에 와서 최고도에 달했고 완성의 과정에 왔다. 웅대하고 대규모적인 구상과 방대한 표 현 양식, 대담한 화성법과 반음계적인 도입에 의한 조바꿈의 연속, 형식의 자유로운 확장, 관현악의 대규모적 편성과 웅장한 음향의 표출 등 작곡 기교의 개혁뿐 아니라 그의 생애를 걸고 완성한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체인 악극을 창시함으로써 이른바,바그너 주의로 온 구라파를 휩쓸었던 바그너의 역사상 업적이야말로 영원불멸의 금자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그너는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보여준 천재적인 음악 재능은 나타나지 않았고, 단지 연극에 흥미를 보여 14살 때에 5막짜리 비극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 무렵 베에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음악에 눈 뜨게 되어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작곡 이론을 배웠다. 바그너는 이때부터 교향곡과 그밖에 큰 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20살 때 뷰르츠브르그 극장의 합창 지휘자로 취임함과 동시에 순수한 기악 작곡을 그만 두고 오페라에 전념하였다. 바그너는 21살 때 마그데브르그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24살때에는 <리이거>의 악장이 되었으나 전부터 파리에서 성공할 것을 꿈꾸던 바그너는 1837년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 갔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생을 하며 편곡같은 하찮은 일을 해 주고 호구지책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작곡만은 꾸준히 계 속하였고 드레스덴의 혁명운동에 가담한 나머지 추방령이 내려, 그는 스위스로 도망을 갔다.
1862년에 바그너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되어, 2년후에 바이야안 의 젊은 루우드비히2세의 후원으로 자유로운 창작을 하여 1862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했고, 1867년에는 <뉴유 룬 베르그의 마이스타징거>를 완성했다. 바그너는 자작의 음악극을 이상적으로 공연하기 위 해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건설하여 대대적인 악극<니벨룽겐의 반지>로써 개장을 했다.바그너 의 작품은 대개 3기로 나누어진다.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을 그대로 따른 제 1기, 외면적으로는 아직 전통적인 오페라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극과 음악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기교적으로는 지도동기라고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짧은 동기의 사용 등 많은 발전을 보던 제 2기, 오페라 양식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극과 밀착해서 이어지는 무한 선율과 지도 동기의 사용, 아리아의 폐지와 서곡을 전주곡으로 대치하는 등 완전한 악극을 확립한 제3기로 나누어 진다.
<주요작품> "연애 금지" [1836]
"리엔치" [1842]
"방황하는 네델란드인" [1843]
"탄호이저" [1845]
"로엔그린" [1850]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5]
"니벨룽겐의 반지" [1876]
"파르지팔" [1882]
"황제행진곡" [1871]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1868]
8) 쥬셉페 베르디 - Giuseppe Verdi [1813-1901]
베르디는 1813년 10월 9일 이탈리아의 파르마 현 브세토에 가까운 롱코레라는 농촌에서 태 어나, 1901년 1월 27일 역시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19세기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19세기의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공교롭게도 베르디가 세상에 태어난 해에 독일에서는 악극의 창시자 바그너가 탄생하였다. 베르디는 행상을 상대로 하는 조그마한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을 열광적으로 좋아 하였다. 7세 때 교회의 미사 성제의 시동이 된 베르디는 교회 오르간에 흥미를 갖고 이 를 배워, 10세때에는 노령으로 인해 은퇴하는 오르가니스트의 뒤를 이어 베르디가 오르간 주법을 배웠다. 그리고 밀라노 음악 학교로부터는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입학을 하지는 못하였다.
베르디는 후에 스칼라 좌의 성악 지도자 빈첸초 라뷔나에게 주로 대위법을 배웠다. 1835년 22세 때에는 고향인 브세토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그 후 본격적인 가극의 작곡과 라 스칼라 좌의 공연을 위해 1839년 가족과 더불어 밀라노로 이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리하여 그 해에 그의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초 백작 오베르트>가 초연되어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 때부터 그는 계속 오페라의 명작들을 작곡하여 그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바그너처럼 전 구라파를 휩쓴 극음악의 대가가 되었다. 베르디는 물론 바그너와 달라서 철학적 또는, 사상적 배경이 없고, 솔직하고 인간적인 작품을 썼다. 그의 수법은 전통적이었으나, 자연적으로 새로 운 풍조도 도입하고, 새로운 극적 구성도 시도할 뿐더러 관현악법도 무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리는데 노력했다. 그의 작품의 중심은 역시 성악의 선율이며 관현악도 섬세하고 화려하지만, 결국 노래의 배경을 이루는데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는 생기있고 극적으로 힘찬 박력이 있으며, 베르디는 풍부한 영감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하겠다.
베르디는 26세 때에 최초의 오페라 <오베르토>를 발표한 이래 많은 오페라 작품을 썼는데, 그의 초기의 작품들은 전통에 따르고 있고, 노래의 선율에 중점을 두고 있기는 하나, 그 선율이 활기에 차 있어 성공을 하였다.그러나 그는 이러한 전통적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극적 인 오페라를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리고레토>이다. 여기서는 종래의 선율을 풍부하게 살리면서 전에 보지 못한 극적인 구성과 박력을 갖게 되고 인물 성격의 묘사를 정확하게 하였다. 그후 양식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착잡한 줄거리에 너무 극적이 아닌 그러나 풍부한 선율로 유명해진 <트로바토오레>, 애절하고 낭만적인<라 트라비아타> 등을 만들었다.
베르디는 그의 긴 생애를 거의 오페라에 바쳤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작품은 그리 없고 1874년에 시인 만쏘오니의 죽음을 애도한 장대하고 극적인 그리고 기묘하고 박력에 넘친<진 혼곡(레퀴엠)>을 발표하여, 19세기 최대의 레퀴엠을 남겼다.
<주요작품> "오베르토" [1838]
"나부코" [1842]
"맥베스" [1847]
"리골레토" [1851]
"일 트로바토레" [1853]
"라 트라비아타" [1853]
"아이다" [1871]
"오델로" [1887]
"팔스타프" [1893]
9) 페테르 차이코프스키 - Peter Tchikovsky [1840-1893]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1893년 11월 6일 역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레닌그라드)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 등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음악계를 휩쓸고 있을 때,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전통에 바탕을 든 보편적인 어법으로 음악을 쓴 사람이다.
그는 5인조의 공식적인 생각에 공감을 갖지 못했고 그 과장된 만네리즘을 싫어해서 무엇보다 그는 순수한 감정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 보편적이고 영원성이 있는 음악을 썼다. 물론 러시아의 민족 음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소재로 사용하였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공통적인 수법으로 일반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기교는 민족주의 5 인조보다 우수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감정 내객은 대가다운 풍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이 그의 음악을 오늘날에도 세계인류가 애호하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러시아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비로소 세계적으로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근경인 시골에서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모친의 지도로 피아노를 배우고 지방의 민요를 익혔다. 그러나 그가 10살 때, 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하자, 그 곳 법률 학교에 입학하였다. 1859년 19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과 정열에 못이겨 22살 때 페테르부르그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음 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최초의 대작인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것은 1868년 그가 28살 때이다. 이 곡이 성공하자 그는 계속 작품을 내놓았다. 차이코프스키가 돈 많은 철도 운영자의 미망인 맥크 부인으로부터 연금 6,000루불을 원조 받기 시작한 것은 1876년부터이다. 이로써, 생활이 안정되어 작곡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877년에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 미류후와 마 음에 없는 동정 결혼을 한 결과, 3개월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충격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고생을 하게 되나, 그는 한때 이탈리아, 스위스등지로 요양을 하기도 하였다. 1878년 음악원을 사직한 차이코프스키는 구라파 여러 나라와 미국 등으로 순방하면서 자작품을 지휘 연주한 외에는 주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893년 그의 <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5일후,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 "대 서곡" [1812]
"백조의 호수" [1877]
"잠자는 숲속의 미녀" [1890]
"호두까기 인형" [1892]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1869]
"비창 교향곡" [1893]
"만프레드" [1885]
"유진 오네긴" [1870]
10) 안토닌 드보르작 - Antonin Dvoralk [1841-1904]
드보르작은 1841년 9월 8일 보히미아(지금의 체코슬라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약20마일 떨어 진 네라호제베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1904년 5월 1일 역시 체코의 프라하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난 체코의 민족주의 작곡가이다.
드보르작은 고깃간 겸 여관을 경영하는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사를 계승시킬 부친의 의사와는 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 바이올린을 곧잘 연주했고, 민속 음 악에 친근해졌다. 1857년 16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2년 후 에 졸업을 하였다. 그러나 드보르작으로서는 이 학교 교육보다는 당시 작곡가 겹 지휘자였던 카레르벤들 과의 교우에 의해 얻어진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단한 노력형으로 여기 저기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도 있었고, 사적인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주자로도 일했다. 이와같이 생활고와 싸우면서 착실히 공부하며 작곡도 꾸준히 하였다.
그의 초기의 작품은 고전적인 견실한 기초위에 민족적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후에 스메타나에게 인정되어 더욱 민족주의에 기울어 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메타나의 음악을 모방하지 는 않았으며 민족적인 감정을 개성적인 입장에서 표현하였다. 드보르작은 스메타나처럼 세련미는 없지만 소박하고 생기에 차 있을 뿐더러 박력과 정열이 넘친다.
그의 음악가로서의 영감은 슈베르트에 비할 만큼 풍부하고 자연적이며 항시 발랄한 음악성이 충만되어 있다.
그의 작품중에서 가장 드보르작의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향곡과 실내악이다. 특히 9 개의 교향곡은 견실한 고전적 구성으로써 체코적 감정을 노래한 근대 체코 교향곡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1890년 드보르작은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 이론과 관현악법, 악식론 등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1892년 51세때 뉴요오크 국민음악원 원장으로 초청되어 도미하였다. 이때의 산물이 유 명한 <신세계교향곡>, 현악4중주곡 <아메리카>등이다.
드보르작은 1895년 다시 체코로 귀국해서 작곡과 교육에 전념을 하였으며, 1901년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스메타나에 의해 확립된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이 처음으로 세계적으로 발전한 것은 드보르작의 공이라고 하겠다.
<주요작품> "미국" [1893]
"성 루드밀라" [1886]
"미사" [1887]
"레퀴엠" [1890]
"신세계 교향곡 e단조" [1893]
"첼로 교향곡" [1895]
"쟈코뱅" [1897]
"자연, 삶, 사랑" [1892]
국민악파음악
19세기 말경 러시아, 보헤미아 및 북유럽 등에서 나타난 민족주의 음악인데 음악의 기법상으로는 낭만파음악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표현되어 있는 민족적인 색채는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기법에 의해서 한층 더 명확한 민족주의 음악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국민주의 음악이 맨 처음 활발하게 일어난 나라는 러시아로서 글린카(M.I. Glinka, 1804∼1857)로 러시아 최초의 오페라《황제에게 바친 목숨》을 발표한 이후에 이른바 '5인조'가 국민주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5인조의 리더인 발라키레프(M.A. Balakirew, 1837∼1887)은 오페라 《이고르 공》등을 작곡했고, 오페라《보리스 고두노프》와 모음곡《전람회의 그림》등을 작곡한 무소르그스키(M.P. Mussorgsky, 1839∼1881), 관현악법의 대가로서 《세헤라자데》등을 작곡한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리고 큐이(C, Cui, 1835∼1918)등이 있다. 보헤미아의 첫 번째 국민주의 작곡가는 스메타나(B, Smetana, 1824∼1884)이다. 그는 리스트의 영향을 받아《몰다우》등 6개의 교향시 연작인 《나의 조국》, 오페레타《팔려간 신부》등으로 보헤미아의 국민 음악을 확립하였고, 드보르작(A. Dvorak, 1841∼1904)은 교향곡《신세계》등 음악적 비중이 높은 곡들을 작곡하여 민족음악의 금자탑을 쌓았다. 그 외에 노르웨이의 그리그(E, Grieg, 1843∼1907), 핀란드의 시벨리우스(J. Sibelius, 1865∼1958), 스페인의 알베니츠(I. Albeniz, 1860∼1909), 팔랴(M.D Falla, 1876∼1946)등이 있다.
발라키레프(1837-1910 : 러시아)
작품은 많지 않으나, 관현악곡, 가곡, 피아노곡 등은 서정적인 시적 감정이 풍부하다.
보로딘(1833-1887 : 러시아)
의학 박사로서 교향시 <중앙 아시아의 광야에서>, <이고르공> 등의 걸작을 남겼다.
차이코프스키(1840-1893 : 러시아)
국민 악파 5인조와는 다르게 서구풍의 수법으로 낭만파 음악을 썼다. 그러나 그의 작품 교향곡 <비창>, 무용 모음곡 <백조의 호수>,<호도까기 인형> 등에서는 역시 다채로운 슬라브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무소르그스키(1837-1881 :러시아)
방종한 생활로 정신 착란이 되어 절명하였으나, 오페라 <보리스고두노프>, 교향시 <벌거숭이산의 하룻밤>,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리이크(1843-1907 : 노르웨이)
그리이크는 청년시절에 독일로 유학하여 작곡과 피아노를 배워,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귀국 후에는 자기 나라의 풍토와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음악을 만들어 , 노르웨이 국민음악의 토대를 쌓았다. 그의 음악은 서정성과 북유럽의 향토색을 풍부히 표현한 신선감이 넘치는 작품으로 사랑받는다.
시벨리우스(1865-1957 : 필란드)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으나, 교향시 <핀란디아>가 유명하다.
스메타나(1824-1884 : 보헤미아)
스메타나는 어릴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19세 때에 프라하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그 이후로 피아니스트나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작곡 활동을 계속하여, 수많은 뛰어난 작품을 썼다. 오페레타<팔려간 신부>, 교향시 <나의 조국>이 유명하다.
드보르자크(1841-1904 : 보헤미아)
뉴욕 음악원의 초청으로 아메리카로 건너가 그 곳에서 3년간 지냈다. 그 때 작곡한 유명한 교향곡 <신세계>에서는 아메리카 흑인 민요를 교묘한 솜씨로 집어 넣은 것으로, 이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음빛깔이 다채로운 관현악법으로 다루어져서 누구나 좋아하는 명곡이다.
근대현대음악
20세기는 새음악 (독. Neue Musik, 라. Musica nova, 동시대음악 Contemporary Music, 현대음악 Modern Music, 전위음악 Anant-grade)의 시대이다. 새로운 음악이란 말은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시대가 바뀌면서 과거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거와의 단절이 이렇게 심했던 적은 없었는데, 이는 조성의 포기(쇤베르크)와 모든 전통적인 '음악' '작품'이라는 개념을 포기한 일(존케이지)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세기라고 불리는 19세기는 인류의 역사에 일대 변혁을 야기시켰다. 특히 그 후반에 이르러서는 인류의 생활과 직접 관련되는 수많은 발명과 고안이 이루어졌다. 교통과 전파 매체의 발달로 세계는 더욱 작게 만들어져서 오늘의 새로운 창조를 그 이튿날에는 이미 옛것이 되게 함으로서, 인류사에 끊임없는 창조의 불길을 질렀던 것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보급은 이것을 더 빠르게 진행시켰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당연히 미(美)에 대한 인간의 감각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표준적인 심미관(審美觀)이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20세기에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음악들의 공존을 보여 준다.
지나간 세월의 음악, 다른 민족들의 음악, 이런 모든 음악들의 자료가 음반과 녹음기의 발명으로 쉽게 들을 수 있어 모든 음악과 예술에 대한 지식이 확대되어 간 것이다. 거기에다 전제정치와 제 1,2차 세계대전에 의한 공포와 재난, 인류전멸의 위험, 경제대공황, 빈부격차, 빈국과 부국의 대립, 동서대립에 의한 긴장상태, 말세론적 위기감, 미래세계에 대한 동경, 공상과학세계 등 급속하게 변화하는 과학문명과 사회의 갖가지 불안감 등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가치 기준과 의식 상태가 변화하게 되고 또한 이와 함께 미(美)의 개념이 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달라지게 된 것이다.
현대음악의 특징인 다원주의와 불협화음은 통일된 세계상의 결핍, 인간과 자연의 조화상실, 인간의 내적 부조화를 증거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 중의 하나가 음악이라는 과거의 미적 작고고 원칙은 근본적으로 부정된다. 이제 음악이 무조건적으로 '아름답다'든지 조화스러워야 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진실'해야 하기 때문에 추(醜)할 수도 있다. '음악'과 '음악예술작품'의 개념에 대한 태도가 변한다. 20세기의 음악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적 현상들을 관철시켜, 이것이 옛 음악관과 함께 병존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새로운 현상들에는 신고전주의와 같은 보편적 양식도 있고, 수많은 개성적 해결 방안의 것들도 있다. 다양성은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악파, 지향성, 유행성, 모델은 점차 빠르게 변화하여 지속성을 띠지 못한다.
보편적인 구분, 즉 기악과 성악, 오페라, 교향곡, 소나타 등의 구분이 20세기에는 더욱 명확한 것이 못된다. 예외와 혼합, 그리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서양음악이 이국적 요소를 도입하는데 그쳤으나, 20세기는 이국의 문화와 음악으로부터 서양음악의 존립과 표현을 위한 내적 자극을 찾으려고 한다. 특히 인도를 비롯한 동양음악은 높은 정신성과 섬세한 음악 전통으로 매력적 자극제가 되고 있다. 작곡가들은 새로운 것을 연주 기술면에서도 찾았다. 이제까지의 악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20세기의 기본사고에 따라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서 해당 악기의 원래 목적을 크게 왜곡시키기도 한다. 세계 곳곳의 악기를 구입하거나 제작하여 사용하거나 새로운 악기를 발명하기도 하여 새로운 음향을 찾는다.
1900년 전후(前後)의 음악
후기 낭만의 1850년 이후 리스트와 바그너의 작품에서 조성(調性, Tonality)은 더욱 애매해져 무조적인 경향으로 점차 나아갔다. 1890년경을 낭만주의 음악의 해체로 보고 있는데 그 후 그 유산을 풍부하게 받으면서 또는 그 반동으로 새 양식이 대두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문학과 회화 등 자매예술과의 영향도 많이 나타난다.
(1)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
프랑스의 드뷔시가 창안한 인상주의 음악은 낭만주의에서 현대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악파이다. 이 음악은 프랑스의 인상파의 회화와 상징문학에서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인상파 회화에서는 빛과 그림자를 중시하는 야외 회화를 주장하였고, 형태를 그리는 선보다는 색채와 분위기적 인상을 중시하였다.
음악에 있어서도 이와 흡사하여 선율이나 형식의 명확성 대신에 감정을 강조하는 색채적 음악을 썼다. 자연계의 여러 가지 현상,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외계로부터의 자극에 대하여 예술가가 받은 순간적인 감응이며 응답이다. 그러므로 인상이란 외계의 묘사가 아니라 한번 마음에 자극된 내적인 인상을 결국 주관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음악의 다이내믹한 감동보다는 음빛깔, 뉘앙스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한다. 기법상으로는 화음진행이 색채적이고, 연속적인 불협화음과 선법, 5음음계등 예외적인 음계 등을 사용하였다.
드뷔시는 1892년에 말라르메(S, Mallarme, 1842∼1898)의 상징시에 작곡한 《목신의 오후에서의 전주곡》으로 인상주의 수법을 확립시켰다. 그 외에도 관현악 작품《녹턴집, Nocturnes》《영상 Imagine》《바다 La Mer》가 인상주의의 대표적 작품들이고, 팔랴(M, Falla)의 《스페인 정원에서의 밤들》과 레스피기(O. Respighi)의 《로마의 소나무》등이 있다.
(2) 원시주의(Primitivism)
19세기말 극도의 문화적인 성숙에 따른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동경에서 온 것이다. 이국적인 제재를 음악에 도입하여 새로운 것을 표현하려 하였다. 원시음악은 당시 음악의 지나치게 세련된 연약한 음악에 대해서 원시 예술의 힘찬 원기를 되찾아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음악이라 하겠다. 기법상으로는 일정한 리듬을 집요하게 반복하거나 홀수박자 또는 폴리리듬(Polyrhythm)등을 사용하였고 강하고 자극적인 색채 감각 등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스트라빈스키(I. Stravinsky)로서 그의 3대 발레인《불새》《페츠루시카》《봄의 제전》등의 작품이 대표작이다.
(3) 표현주의(Expressionism)
20세기 초반에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주로 비엔나에서 활동한 작곡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외적인 형태의 표현으로서의 인상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내면적인, 특히 잠재의식적인 일면을 표현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정치정세는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어 유럽사회는 불안에 차고 사람들의 마음은 어두웠으며 정신은 안정을 잃고 있었다. 쇤베르크 등의 작곡가들은 고착된 표피성, 이중윤리, 순응주의, 허구적 달콤함으로 특징이 지워진 시민사회를 거부하고 도전적인 진실, 깨어 있는 감수성, 불편함까지도 감수하는 철저함을 추구한다.
표현주의는 극단성, 대조성, 거의 광란에 가까운 격정을 많이 보여주는데 그후 이러한 극단적인 것은 새로운 음악의 본질이 되어 고전적 균형을 철저히 기피하게 된다. 표현주의 기법의 특징은 철저히 주관적이고, 멜로디는 무조(無調, Atonality)이고 화성은 극단적인 불협화음, 거칠게 연주되는 악기들의 음색대조 등을 들 수 있다. 표현주의 작품으로는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와 교향시곡《펠레아스와 멜리장드》등을 들 수 있다.
(4)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신고전주의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주관적인 정서의 과잉, 방대한 관현악의 편성, 표제음악적인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등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신고전주의는 객관성과 형식성을 보이는 낭만주의 이전의 음악관념으로 복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18세기 고전주의 양식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고전주의의 기본적으로 19세기 낭만주의 이전의 간결한 형식미를 추구하지만 예기치 않은 전조, 선율의 혼합, 그리고 강렬한 화성, 불협화음 등의 20세기 성향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서는 스트라빈스키(I. Stravinsky)의《풀치넬라》, 《피아노와 목관악기를 위한 협주곡》, 《시편 교향곡》, 힌데미트(P. Hindemith)의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비올라를 위한 4개의 협주곡 op.36》, 그리고 프로고피에프(S. Prokofiev)의 오페라《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피아노 협주곡》,《고전 교향곡》등이 있다. 그리고 바르토크(B. Bartok)는 민족음악을 바탕으로 하는 음악 어법으로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말하자면 그는 민족적 신고전주의 작곡가로 간주할 수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미크로코스모스》,《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등이 있다.
(5) 12음주의(Dodacaphonism)
12음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을 12음음악이라 하는데 이는 쇤베르크가 종래의 조성 음악에서 벗어나 철저한 무조성의 체계화를 시도하여 창조한 것이다. 이 기법은 한 옥타브 안에 있는 반음을 포함한 12개의 서로 다른 음을 1회식 일정한 순서에 따라 사용하는 것인데 먼저 세리(Serie)라고 하는 음렬(音列, Tonreihe)을 만들어 이 세리를 역행, 전위, 역행전위 등으로 진행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전통음악의 음조직을 해체하고 12개의 음을 모두 평등한 가치로서 독립시켜 새로운 음의 표현을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장대한 곡에 이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 음악은 쇤베르크의 제자 베베른과 베르크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제2차 대전 후에는 여러나라에 보급되어 더욱 새로운 발전을 보였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쇤베르크의《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 오페라《모세와 아론》, 베르크의《바이올린, 피아노,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실내합주곡》, 베베른 작품《칸타타 No.I, op.29)등이 있다.
(6) 신즉물주의(Neue Suchlichkiet, 新卽物主義)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을 철저히 하려는 것으로 표현주의에의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다. 표현주의가 강한 주관성에 기초하고 있는데 대하여, 신즉물주의는 대상물의 본질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정확하나 묘사를 의도하는 예술운동으로서, 다분히 실용성이 인정되는 운동이었다. 특별한 경우와 목적을 위해 작곡되어 청중과 연주가의 거리감을 좁혀서 음악적인 이해를 보다 쉽게 하려는데 있다. 그래서 극단적인 전위적 기법보다는 단순한 자료를 사용한다. 힌데미트(P. Hindemith) 의 《플린의 음악제》, 《우리는 도시를 세운다》, 영국왕 조지5세가 서거하였을 때 작곡한 《장송곡》이 있다.
1945년 이후의 음악
제2차세계대전이 1945년에 끝나자 지금까지 폐쇄되었던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길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런 제대로 궤도에 올라 새로운 양식의 예술 활동이 나타나기는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직후에는 반낭만적인 사조가 강한데 비해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메시앙과 같이 르네상스와 주세기의 기교의 부활을 꾀하는 작곡 활동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는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개척해 나가려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양식과 기법에 의한 1950년대부터의 새로운 음악을 좁은 의미에서 아방가르드(Avant-grade,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 구체음악(Musique Concrete, 具體音樂)
1948년에 프랑스의 파리 방송국에서 쉐퍼(Pierre Shaeffer, 1910∼1984)가 처음 시도한 이후 1950년 파리에서 최초의 음악회를 가졌던 새로운 표현 방법이다. 이것은 악보에 음을 적는 대신에 음악이나 말을 직접 녹음시켜서 연주한다. 문닫는 소리, 자동차 소음, 병따는 소리 등 현실에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음향을 녹음하여 테이프에 담고 편집한다. 녹음한 것들을 서로 겹치게 하거나 테이프의 회전 속도를 조절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을 미국에서는 테이프 레코더 음악(Tape Recorder Music)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러한 구체음악은 착상부재가 너무 단순하다는 비판을 받은 후 전자음악으로 방향이 전환된다.
(8) 전자음악(Elektronische Music, 電子音樂)
최초의 전자음악 스튜디오는 1951년 쾰른의 북서 독일 방송국에 설치되었는데 그 책임자는 아이메르트(H. Eimert, 1897∼1972)였고, 이어 밀라노, 파리, 미국 등으로 확산되어 갔다. 전자 기술적으로 확성시키기만 하는 음악은 여기에 속하지 않고 전자로 만들어낸 음향이나 작품만을 전자음악이라 한다. 이 음악은 구체음악처런 전자음향 발전기를 통하여 만들어진 소리를 녹음 테이프에 집어넣고, 그 테이프를 편집하여 얻어진 소재로 구성된다. 발음기로 나온 순음을 겹치게 하고, 뛰게 하고, 메아리지게 동시적으로 울리게 하는 등의 여러 방법으로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저자음악과 일반적 소음을 결합시키기도 하고 준비된 녹음 테이프와 연주자가 같이 연주하기도 한다. 이것은 1960년대의 신디사이저(Electronic Music Synthesizer)의 등장으로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전자음악을 행하고, 후에 재결합하고, 혼합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전자 음악의 시대로 가고 있다.
전자음악은 아이메르트와 베이어(R. Beyer)등이 시작했으나 전자음악의 권위자는 스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으로는 《전자음악》,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콘카테(Konkate)》, 《소년의 노래》등이 있다.
(9)우연성의 음악(Music of Chance Operation, 偶然性)
불정확성 음악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통적 음악 개념으로는 음악이라고 보기 어려운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아방가르드이다. 이 음악은 일정한 법칙이나 제한이 없다. 작곡가는 기존하는 음표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련의 기호 같은 음표를 대신하기도 한다. 연주자는 작곡자의 의도를 자유롭게 이해하고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물론 연주는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고 작품은 녹음을 해야만 보존될 수 있다. 미국의 존 케이지(John Cage, 1912∼)와 스토크하우젠은 우연성 음악을 많이 실행하였다. 존 케이지의 《상상적인 풍경화, op.4)는 12개의 라디오를 각각 다른 주파수에 맞춰 놓고 두 사람의 연주자가 나와 주파수와 음량을 조절한다. 1954년에 발표한 그의 작품 피아노곡《4분 33초》에서는 피아니스트가 악기 앞에 앉은 채로 아무 연주도 하지 않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피아노 뚜껑을 닫고 퇴장한다. 말하자면 그 시간이 들려오는 잡음이라든가 듣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 고동소리 그 모두가 다 음악이라는 것이다. 스토크하우젠의 작품 《피아노곡 11번》은 19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6가지의 다른 빠르기와 강약, 여러 가지 스타카토와 레가토 등으로 순서 없이 연주한다. 타악기를 위한 작품《싸이클》에서는 악보가 원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연주자는 어느 방향에서 시작해도 결국 시작 지점으로 오게 된다. 이와 같은 경향은 12음기법 음악과 같이 너무나 치밀한 작곡법에 대한 반발과 세계대전 이후 계속된 세계 정세의 불안과 긴장의 연속 등에 기인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관현악의 어떤 파트에 대하여 대략 지시만 해주고 연주자가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작곡법은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재료, 테크닉, 합리주의가 매력을 상실하고 예술과 음악에 새로운 것에 대한 추진력이 쇠퇴한다. 50∼60년대의 고립적 성향 대신에 청중과 공동체에의 접근이 시도된다. 주관적 감정은 나르시즘적 성향까지 띠는 일이 많고, 사회와도 긍정적으로 연결된다. 교향곡, 현악4중주, 오페라 등과 같은 옛 장르들과 기존 장르들의 복합형태가 선호된다. 이 음악들은 50∼60년대의 혼란하고 다양성을 보이던 아방가르드 음악처럼 많은 말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음악의 모델은 고전 음악이 아니고 낭만주의 음악에 가깝다. 하지만 다양한 개성은 그대로 존속된다. 항상 좋은 질의 음악은 오늘날도 어떤 프로그램이나 악파를 통해 나오지 않고 작곡가 개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1) 클로드 애시유 드뷔시 -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2)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i Rakhmaninov [1873-1943]
3) 아놀트 쇤 베르크 - Arnold Schonberg [1874-1951]
4) 프리츠 크라이슬러 - Fritz Kreisler [1875-1963]
1) 클로드 애시유 드뷔시 -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드뷔시는 1862년 8월 22일 프랑스 산 제르만 안 레이에서 태어나 1918년 3월 25일 역시 프랑스의 파리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근대 작곡가이다.
근대음악에서 맨 먼저 낭만 음악에 반기를 든 사람이 드뷔시이다. 이 사람은 음악을 감각 적인 면에서 구성하는 이른바, 인상주의를 주장한 개척자로서, 그를 인상파 음악의 시조라고 도 한다. 드뷔시는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1살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을 하였고, 1884 년 22살 때에는 칸타타<방탕아>로 로마 대상을 받아 로마로 유학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앞에 약 반년 가량, 러시아의 부호이며 차이코프스키의 경제적인 후원자였던 멕크부인의 주선으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처음 들어 본 것도 이 때이며, 그는 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열광해 버렸다.
드뷔시에게는 로마 유학 3년이 견디기 어려운 무미건조한 생활이었던 모양으로 1887년 3년 의 시한을 채우지 못하고 2년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드뷔시도 처음에는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었고, 당시의 인상주의 시인 보오드레르에 경주하였다. 또, 그는 벨레느라든가 마라르메 등의 시인들과도 친교를 가져 문학적인 교양도 쌓았다.
20세기 음악 혁명의 기수인 드뷔시도 그의 초기의 작품 이를테면, <방탕아>라든가 피아노 곡인 <아라베스크>혹은 <베르자모 조곡> 등에는 아직 후기 낭만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다. 그러나 드뷔시는 점차 바그너에서 멀어져서 사티의 주장에 공감하여 문학과 예술의 사조와 동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져 인상주의의 표현양식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드뷔시가 후기 낭만주의 특히, 당시 음악계를 석권하고 있던 바그너주의와 손을 끊고 새로운 음악 즉, 인상주의음악을 창시한 첫 작품이 마라르메의 시에 의한<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다.
이 관현악곡이 작곡된 것은 1892년 인데, 2년 후인 1894년 12월, 파리의 국민 음악 협회에서 초 연 되었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소동은 1829년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을 처음 발표할 때 이상으로 컸다고 한다. 드뷔시가 주장한 인상주의 음악은 원래 미술 계에서 일어난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외계의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감각적 인상만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물체의 형태가 아니라 색채와 빛, 그 리고 생기이다. 선은 확실치 않지만 색채만은 아름답고 감각적인 농도가 있다.
드뷔시는 이것을 음악에 옮기려고 했고, 한편 당시 문학에서 쓰이던 상징주의 즉, 반자연주의적인 태도에서 주관적인 기분을 표현하고 명확한 관념보다는 막연한 느낌, 환각과 같은 정조를 중요시하는 이 상징주의를 음악에 실현시킨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선을 취급하는 법칙 즉, 조성이라든가, 음계라든가, 대위법도 보다 자유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규칙적인 박자의 관념도 없어지고 까다로운 화성법도 기능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색채적으로 취급 되었다.
이리하여 드뷔시는 이 인상주의 수법으로 근대 오페라의 특이한 존재인 <페레아스와 메리 산드>를 비롯하여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성악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작품> "방탕아"
"아라베스크"
"페레아스와 메리산드"
2)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i Rakhmaninov [1873-1943]
라흐마니노프는 1873, 4월 1일 러시아의 북부지방 노브고로드의 오네그라는 조그마한 마을 에서 태어나,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오니아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피아노의 거장인 동시에 작곡가이다.
라흐마니노프는 보기 드문 거인적인 스케일의 피아니스트로서, 뛰어난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이에 못지 않게 화려하고 호담한 지극히 개성적인 표현을 하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작곡가로서의 라흐마니노프의 창작 중심은 역시 피아노 음악이라 하겠다. 라흐마니노 프는 차이코프스키, 안톤 루빈스타인, 그라즈노프, 이런 사람들 처럼 러시아적인 경향을 다분 히 갖는 작곡가로서, 같은 러시아 작곡가인 무소르그스키나 보로디 등의 국민악파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기에 이 보편성으로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라흐마니노프는 9살 때, 페테부르그 음악원에 들어갔다가 3년후에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 학을 하였다. 여기서는 피아노를 시로티에게, 작곡을 타니에포와 알렌스키에게 배웠다. 재학 중에는 작곡과 피아노에 비범한 재능을 보여 유명했고, 1892년 그가 학교를 나올 무렵에는 오페라 <아레코>를 써서 작곡의 특별상인 금 메달을 타기도 하였다. 학교를 나온 라흐마니노프는 우선 피아노연주가로서, 러시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연주활동을 했고 외국에도 연 주 여행을 함으로써 차차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897년부터 99년까지 3년간은 모스크바의 시립 가극장에서 지휘자로 활약을 하였다.
그 후 런던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초청을 받아 지휘자로서, 독주자로서의 명성을 떨친 후 1902년에는 비인악단에 나타나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03년 러시아에 돌아온 그는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여자 음악 학교 교수로, 이듬해에는 황실가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3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1906년에는 독일 드레스덴으로 옯겨 작곡 생활을 하면서 연주자와 지휘자로 구라파 여러 나라의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그 이듬해부터 1913년까지 모스크바 교향악 협회 지휘자로 활약을 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영주하였다.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주관적인 정서를 앞세운, 지극히 환상적인 데가 있으며, 이것을 명확하고 힘찬 형식감에 담아 구성하고 있다.
그 특색이라면 감미롭고 풍부한 정감으로 노래시키는 선율, 그리고 기복의 선이 굵은 다이너미즘의 형식과 당당하고, 대범한 긴장도에 있다고 하겠다. 러시아 민속적인 소재를 서구적, 특히 독일 낭만적인 수법으로 처리하고, 여기에 슬라브적인 끈질긴 정서와 애수가 흐르는 환상이 빚어진다.
<주요작품> "아레코" [1892]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죽음의 섬"
3) 아놀트 쇤 베르크 - Arnold Schonberg [1874-1951]
쇤베르크는 1874년 9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태어나, 1951년 7월 13일 미국 로스앤 젤레스의 교외 산타모니카에 있는 자택에서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현대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 즉, 현대 음악에 혁신적인 영향을 준 지도적인 작곡가를 든다면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그리고 쇤베르크 이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쇤베르크는 이른바 12음의 음악의 발명과 동시에 완성자로서 20세기 전반기에 있어서 위대한 존재인 동시에 같은 시대는 물론, 그 이후의 세대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이다.
자아 비판적인 자세와 창조의 논리적 엄격한 그리고, 미학적인 철저함에 있어서 쇤베르크 처럼 독창적이고 견고한 천재는 최근의 음악 사상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쇤베르크는 그 혁신적인 기법과 반 역사적인 사상에 의해 20세기의 음악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 왔으며, 그 의 제자들인 알반 베르크라든가 베베른 등과 더불어 이른바 비인 12음 악파라고 일컬어지는 유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음악의 도시 비인의 습관에 따라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이라든가 첼로를 켜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모여서 실내악을 연주하며 즐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을 위해 여러 가지 작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식으로 작곡 기술을 배우고 이론을 배운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젊은 작곡가들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체므린스키와 알게 되어 그에게 작품을 보일 기회가 있었다.
체므린스키는 쇤베르크의 재능을 인정,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이러는 동안 그 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이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음악교육이었다.
쇤베르크는 이 사이에 작곡을 하여 초기의 현악 4중주곡과 가곡을 썼다. 그리고 1899년에 는 현악 6중주곡인 유명한 정야를 완성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작품들은 아직 후기 낭만주의 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쇤베르크 특유의 관능미를 표시하고 있으며, 또 교 향악시<페라아스와 메리잔데>는 4도로 만든 화음이나 온음으로만 구성된 <온음 음계>를 사용하는 등 혁신적인면도 있지만, 전체로서는 아직 바그너의 후기 낭만주의의 테두리를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이 후기낭만주의의 묘사적 경향과 인상파의 인상 존중의 사고방식을 불안하고 내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나 정신의 힘을 표출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이른바, 이 표현주의는 조성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무조를 채택하게 되고, 종래의 음 체계를 파괴하여 8도 속에 포함되어 있는 12음에 모두 평등한 중요성을 주어서 이를 일정한 순서로 나열하고 이 음열을 토대로 음악을 구성하는 이른바, 12음 기법을 완성한 것이다.
쇤베르크는 1933년 나치스에 쫓겨서 파리로 나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작품번호50에 이르는 작품을 섰다. 쇤베르크의 음악을 아직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가 개혁한 양식은 현대 작곡가로서 크건 적건간에 영향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요작품> 현악 4중주 제 4번 "기대" [1909]
"행복한 손" [1913]
"오늘부터 내일 까지" [1929]
"모세와 아론" [1932,미완성]
"필레아스와 멜리장드" [1902-3]
"구레의 노래"
"달의 피에로"
"근대 시편" [미완]
4) 프리츠 크라이슬러 - Fritz Kreisler [1875-1963]
크라이슬러는 1875년 2월2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태어나, 1963년 2월 29일 뉴우요오크 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바이올린의 거장이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어렸을 때 바이올린에 비상한 재질을 보였다. 그는 7살 때에 비인 음악원에 들어가 헤르메스베르그에게 지도를 받았으며, 우등생으로 졸업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10살밖에 안 되었다. 그는 다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메서어르에게, 작곡을 드 리이브에게 배우고, 1887년 12살 때 졸업하였다. 크라이슬러는 이듬해인 1888년 뉴우요오크 의 스타인 웨이홀에서 데뷔 연주를 가짐으로써 성공적인 연주가로서의 스타아트를 한 것이다. 그는 이어 피아니스트인 모리츠 로오젠 터어르와 더불어 미국의 여러 곳을 연주 여행도 했으나, 그 후 그는 음악을 중단하고 비인에서 의학 공부를 했으며, 또 로마와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였다.
크라이슬러는 1899년 베를린에서 다시 데뷔 연주를 가져 깊이 있는 인간미를 보여주었고, 190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미국 연주 여행에서 열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는 한 대 자신의 연주가로서의 생명이나 기능에 대해 회의를 느껴 고민도 하고 음악을 포기할 까지 가졌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이끈 것은 1902년 한 미국 여성 할리에트 리이스와 알게된 후의 일이다. 리이스의 집안은 담배제조업을 하는 대 부호였다. 무명의 바이올니스트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끝내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그는 이 리이스의 열성어린 격려와 내조에 특별한 용기를 얻어 마침내 연주가로서 입신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크라이슬러는 1904년부터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날로 올라가 온 구라파를 열광시키는 성공을 거듭했다. 그는 1904년 런던 필하모니협회로터 <베에토벤 금패>를 받았다. 그런데 1914년 제1차대전이 일어나자 지원병으로 종군하여 러시아의 기병과 싸우자 부상을 입고 제대하였다. 그는 1915년 다시 전 세계로 연주여행을 떠나, 이때부터 약 20년간 크라이슬러의 전성시대가 계속 된다.
크라이슬러는 독일 나치스 세력이 오스트리아로 미치자 국적을 프랑스로 옯겼고 그 후 1943년 미국으로 귀화하여 여생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는 20세기 후반에 있어서 최대의 바이올니스트로서 연주는 온화하고 고귀한 품격이 있을 뿐더러 아름다운 음색과 친근한 호소력, 그리고 마음속으로부터 즐기며 바이올린을 노래시키는 비인 기질의 연주가라고 하겠다.
<주요작품>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아름다운 로즈마린"
"중국의 북"
"비인 광시곡"
출 처 : http://blog.naver.com/nayaleejk/6630887
서양음악사
고대의 음악
음악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처음으로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인류가 역사를 알게 된 것은 말이 있고, 글이 생긴 이후 일이며, 음악에 관한 모든 실제적인 지식은 어떤 적당한 기보법이 만들어진 이후에야 가능한 일로서 그 이전의 일들은 상상으로밖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음악의 발상에 관한 설은 세계의 어느 민족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데 신이 음악을 만들었다는 신수설(神授說)과 자연발생설(自然發生說)을 들 수가 있다.
미개한 민족에 있어서도 어떤 형태이든간에 음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음악은 분명히 인간의 본능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음악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같이 시작되어, 지금 남아 있는 벽화나 고분의 유물, 그리고 지구상에 아직 남아 있는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디언, 오세아니아 종족들과 같은 원시집단의 음악연주와 실제로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문화풍토를 지니고 있는 중국, 인도, 샴, 일본 등이나 다른 동양인 집단의 고대음악 연주들을 통하여 상상으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개한 원시시대의 원시인들의 음악은 영적인 것과 연관된 일련의 신앙적인 것에 연루된다. 신앙을 필요로 하여 음악이 발생되었고, 이러한 음악은 마법의 기능으로 병을 고친다고 생각했고, 노동이나 전쟁에 사용하기 위하여 음악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음악의 발자취는 문명의 발상지인 국가들 즉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도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 지역의 고대국가들의 음악도 종교의식과 관련된 것들이고 그 이외에는 궁정에서의 향연이나 오락등을 위한 것과 전쟁에 사용하기 위한 음악들로 추정된다. 이 시대의 음악은 화성도 대위법도 없는 단선율로서 그 선율도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특히,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기원전 4,000년경에 벌써 매우 수준높은 음악이 있었다. 이들은 하프와 플루트 종류, 그리고 타악기등을 사용하였고 이집트 지방에서는 B.C 3.000년경에는 일종의 관현악도 행해졌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약 1,000년 늦게, 유대에서는 음악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달하여 B.C 1.000년경, 즉 다윗왕이나 솔로몬왕 시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이것은 구약성서에도 자주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음악은 B.C 1.000년경에 성하였는데, 그리이스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 발달해 있었고, 동화력이 강해서 자기들의 음악을 발전시켰고, 또한 고대 오리엔트 여러 민족의 음악을 흡수하고 동화하였다. 즉 고대의 음악은 그리이스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종합되고 체계화되어 그 수준을 한층 높였다. 그들은 음악을 단지 제사와 오락 뿐만 아니라 매우 지적으로 다루었으며 음악에 대한 철학성, 윤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논의되었고 과학적인 연구를 하였으며 음악을 교육상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고대의 대부분의 음악문화는 그리이스에서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리이스의 음악이론은 로마를 거쳐서 오늘날의 서양음악의 모체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이스 음악에 중요하게 담당되었던 악기는 키타라(Kethara)와 아울로스(Aulos)로서 이것은 시리아 지방에서 일찍이 발견된 것들이다.
중세의 음악
중세는 봉건사회제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도교의 사회로서 정치문화에 있어서 강력한 종교적 지배를 받던 시대였다. 중세기의 음악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의식과 결부시킨 성가(聖歌)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중세기에 유럽음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리스도교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교는 그 모태가된 유대교의 영향도 있지만 그밖에 음악을 존중하여 초기단계부터 독특한 의식음악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중세음악은 대체로 로마네스크 음악, 고딕음악, 세속음악 등으로 크게 구분한다.
(1) 로마네스크음악(Romanesque Music)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되었던 음악으로서 이것은 로마네스크미술과 통하는 양식이다. 그 주요한 것은 초기 기독교의 교회읨악으로서, 고대음악처럼 단선율이지마느 대체로 성악이며 기독교적인 가사르 가지고 있다. 이 음악은 4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 성가로 절정을 이룬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음악을 존중했으나, 처음에는 기독교 박해로 숨어서 음악을 하다가, 기원후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은 후에야 비로소 성대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은 처음에는 시리아, 팔레스티니, 소아시아 등지의 음악, 즉 유태적이거나 그리이스적인 음악들을 필요에 따라 적당히 기독교적으로 고쳐서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이 그후 로마의 각 지방에서 조금씩 서로 다른 양식의 음악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교회세력이 크게 떨치자 지금까지 지방에서 행해지던 교리와 의식, 성가등을 일정한 형식으로 통일시켜야겠다는 생각ㅇ르 갖게 되었다. 성가의 경우 밀리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39년경∼397년)가 개혁한 암브로시오 성가(Ambrosian Chant) 이래 2세기후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540∼604)가 제정한 그리고리우스 성가(Gregorian Chant)로서 마침내 그리스도교 음악을 통일시켰다. 이 전통적인 교회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는 단선율의 라틴어 가사로 된 단순한 것이지만 그 유동적인 선율은 실로 거룩하고 아름답다. 이 성가는 지금도 카톨릭교회에서 공식적인 음악으로 쓰여지고 있다.
(2) 고딕음악(Gothic Music)
대체로 10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네델란드와 로마를 중심으로 발달한 다성음악(Polypony)형식의 교회음악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교회의 건축양식에서 유래되었다. 다성음악은 구라파 북쪽 민족들 사이에 대략 6,7세기경부터 시도되었던 것을 10세기에 이르러서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이것은 rmEoRK지 노래되던 그레고리우스 성가를 정선율(定旋律, Cantus Firmus)로 하고 여기에 새로운 성부(오르가눔, Organum)를 추가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고딕음악은 음악을 교회 음악에서 벗어내어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 넣으려는 운동으로 눈부신 개혁과 시도가 계속된 14세기의 찬란한 아르스노바(Ars Nova, t새 예술)와 15세기가 되면서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인 다성 음악의 극치를 이룬 네델란드악파(Netherland School)의 음악을 포함하고 있다.
(3) 세속음악(Secular Music)
11세기경까지 유럽의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성직자들이 주도하였으나 12세기에 이르러 봉건사회의 기사계급은 그동안의 교회와 수도원의 전통적인 권위의 지배속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추구하였다. 또한 오랜 십자군 전쟁 이후 극단적인 종교열은 침체했고 동방의 화려한 이국문화의 접견으로 세속적 요소가 사회생활에 팽대해졌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세속음악은 점차 민중속에서 발전해 나갔다. 대부분의 세속음악은 단선율로서 악기와 함께 연주되었다. 이러한 세속음악은 12세기경부터 귀족계급인 남프랑스의 투르바두르(Troubadour)와 북프랑스의 투르베르(Trouvere)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작품도 많이 나왔다. 그들은 자작의 시에 노래를 즉흥저긍로 불렀다. 여러 곳의 왕ㅇ궁과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여 간단한 악기의 반주로 그것을 노래했다. 시의 sodyhd은 사랑노래와 발라드 풍의 이야기, 자연의 찬미, 종교적 또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인(藝人)도 고용하여 다녔는데 자작의 시를 그들에게 노래시켰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는 8세기경부터 종글뢰르(Jongleur) 영국에서는 민스트럴(Minstrel)이라고 했다. 13,4세기경에는 독일 남부에서 오스트리아에 걸쳐 미네쟁거(Minnesange)라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있었다. 이들은 기사계급이 많았는데 이후 세속음악은 점차 기사계급에서 교양있는 시민계급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독일의 마이스터징거(Miestersinger)이다. 이들은 16세기경까지 계속되는데 독창적으로 창작곡을 내는 것보다 기존의 성가나 세속음악을 수정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4) 기보법의 발달
그레고리 성가를 위한 기보법이 9세기경에 네우마(Neuma)라는 그리이스말로 창안되었으며 1세기경에는 이탈리아의 귀도 다레쪼(Guido d'Arezzo)는 네우마를 4개의 평행선상에 두고 음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기보법을 창안하였고, 또한 계명부르기를 고안하였다. 13세기경에는 쾰른의 성 요한 수도원의 수도사이며 교사인 프랑코 데 콜로니아(Franco de Colonia)에 의해 음의 높낮이뿐만 아닌 길이도 표시할 수 있는 정량기보법을 창안하였다. 오늘날의 5선보에 의한 편리한 기보법이 완성되기까지는 천여년의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르네상스의 음악
르네상스는 14세기경에서 16세기까지의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부흥운동을 말하는데 음악에 있어서는 대체로 16세기전반을 걸쳐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의 시기를 말한다. 중세의 교권의 지배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시민계급중심의 자유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정신을 기초로 하여 학문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과학과 예술분야에서 대단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학문과 문화의 놀라운 발전은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서 작곡가들은 심미적인 인본주의 작품을 만들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르네상스 음악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했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는 로마와 베네치아가 조금 다르다. 로마에서는 교회음악이 현저하게 발달했으며 오라토리오에 있어서도 크게 발달하였다. 베네치아에서는 주로 세속적인 음악과 기악의 현저한 발전이 있었으며 교회음악에는 화려한 2중창의 방법도 사용되었다. 로마에서의 대표적 작곡가인 팔레스트리나(G.P . Palestrina 1525년경 ∼1594)는 자유로운 대위법으로 작곡하고 복잡해진 대위법으로 단순화하고 한음에 한가사를 붙이는 새로운 시도와 무반주(A Cappella)양식의 교회 합창곡을 도입하여 미사곡을 비롯한 많은 종교곡으로 작곡하였다. 베네치아에서는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1510∼1586)와 그의 생질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1554년경∼1612)가 성악을 화려하고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특히 오르간을 비롯한 기악음악을 많이 발전시켰다. 같은 무렵에 독일에서도 르네상스적인 음악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네델란드 출신 라소(Orlando de Lassos 1532년경∼1594)인데 그는 많은 교회용 음악과 세속적인 여러 가지 합창곡을 썼는데, 그의 작품은 강렬하고 분방하며, 불협화음과 선율의 대비를 과감하게 썼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세속성악음악형식으로는 마드리갈(Madrigal)로서 그 음악적 특성이 다양하다. 세속 합창곡으로 목가적이거나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를 쓰는데 초기에는 종교음악과 유사한 조용한 느낌의 음악이었다. 점차 정교하면서도 대위법적으로 양식이 바뀌어 후기에 가서는 독창도 사용되는 다양한 양식을 갖게된다. 라소와 팔레스트리나, 몬테비르디(Momteverdi)등의 작곡가들이 중요한 작곡가이다.
독일 르네상스의 가장 현저하고 특징있는 현상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에 의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의 코랄(Choral)이다. 이 찬송가는 민요풍의 간소한 멜로디를 높은 성부에 놓고 음 대 음의 화성적인 것으로서 누구나 노래하기 쉬운 합창곡으로 가장 르네상스적이라 할 수 있다.
바로크의 음악
17세기 초에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혁신적인 젊은 음악가들이 일반 문화예술의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로운 양식, 다시 말해서 화성적인 반주를 가진 단선율의 양식을 장조 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노디아(Monodia)즉 단 음악이다. 이 단음악이 정착 되었을때 르네상스음악이 완성된 것이지만 이 선율음악은 대위법적인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서창적인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화성적인 반주로 가장 직접적인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독창가곡이나 오페라, 그리고 오라토리오로서 나타났는데, 이러한 양식에 의해 근대적인 음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 옛 겹선율에 의한 복음악이 모두 쇠퇴해버린 것은 아니며 당분간 신구 두 개 의 양식이 서로 접촉하고 영향을 주며 사용되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의 많은 음악가는 그 풍부한 화성적 가능성에서 복음악적인 방향으로 나갔고, 이에 반해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음 악가는 르네상스적인 단음악을 택하고 오페라나 아리아, 그리고 소나타와 협주곡의 양식을 창안 발전 시켰다.
이 두 개의 조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이든이나 모짜르트등의 고전음악에서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다. 이 르네상스 정신의 최고의 발현시대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부터 18세기 전 반기에 바하나 헨델이 대위법적인 음악을 완성한 복음악의 전성기에 이르는 약 150년간을 바 로크음악시대라고 부른다.
원래 바로크(Barock)라는 말은 주로 미술에서 사용된 시대양식의 개념으로서 스페인의 베라스케스, 네덜란드의 란브란트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변화있는 색채, 웅대한 구도, 장식 적인 곡선, 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 등이 바로크예술의 특징이다.
바로크 음악은 원칙적으로 저음에 기초를 두어 그위에서 화성적인 성부를 배정해 가는 통주 저음기법을 기반으로 대조적인 협주양식, 즉 강주와 약주, 전 합주와 독주, 밝은 것과 어두운 것과 같은 대비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감동과 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울 장식하고 화성에서 으뜸음을 중심으로 힘차고 색채감과 극감을 더해 준다. 그리고 마로크음악의 사회 적 바탕은 절대주의의 귀족 제도로서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의 분애로서 이탈리아가 그중심 이 되었다.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인간중신적 세계관이 팽배해져서 점차 시민계급을 성장시켰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합리적인 관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이것을 적용하여 카메라타 일원인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와 카치니(G. Caccini) 1545∼1618)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단성음악의 선율반주는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는데 이것은 작품전체를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통주저음(Basso Continuo)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통주저음은 저음부 아래에 화음을 지시하는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저음(Figured Bass)이라고도 부른다.
(1) 오페라(Opera)의 탄생
16세기말경 이탈리아 피렌체의 음악애호가 바르디(G. Bardi, 1534∼1562)의 집에 젊은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다. 1597년에 시인 리눗치니(O. Rinuccini, 1563∼1623)의 대본에 페리(J. Peri, 1561∼1633)가 오페라《다프네(Dafne)》를 작곡하였다. 두 번째 작품도 리눗치니 시(詩)에 페리와 카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ece)》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에우리디체뿐이다. 그런데 근대적 개념의 오페라에 접근되는 진보적인 오페라를 만든 사람은 몬테베르디(C. Monteverdi, 1567∼1643)이다. 그는 1607년 《오르페오(La Favola d' Orfeo)》를 상연하였는데 대규모의 합창과 관현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이전의 오페라라는 표현양식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기악의 서주로 시작하였고 댄스음악이 있고 신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1725)를 중심으로 한 나풀리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에서는 륄리(J. Baptiste Lully, 1632∼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2) 오라토리오(Oratorio)와 칸타타(Catata)
오페라보다 조금 늦게 종교음악의 한 형식으로 태어난 오라토리오는 초기의 모습이 오페라와 매우 유사하였다. 오라토리오의 특성은 오페라와 달리 종교적 내용으로 무대장치, 연기가 없다는 것이지만 초기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연극적인 형태를 모두 갖추었다. 최초의 오라토리오는 카발리에리(Emilo de Cavalieri, 1550년경∼1602년)의《영혼과 육체의 극》인데 성서적 내용이 약하고 연극적인 면이 강하여 오페라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하겠다. 그후 카리씨미(Giacomo Carissimi, 1605∼1674)가 쓴 《예프테, Jephte》로써 오라토리오의 음악양식을 확립하였다. 바로크말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헨델(George Friederch Handel, 1685∼1759)이다. 그는 극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여 합창을 증가시켰고, 소재도 성서적 내용이외에 고대 그리이스의 신화적 인물을등장시키는 등 기존의 오라토리오의 음악 양식에서 탈피하여 오라토리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불후의 명작 《메시아, Messiah》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범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
칸타타의 음악형식구조는 오라토리오와 유사하다. 다만 그 규모가 축소되어 전례용으로 사용되기 적합하였다. 17세기중엽부터는 성서적 내용 이외에도 서정적인 세속가사를 사용하여 칸타타의 영역을 넓혔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은 200여편의 코랄을 사용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여 바로크 칸타타의 최고경지를 이룩했다.
(3) 기악음악
바로크시대의 기악음악은 중세에세부터 내려오는 악기의 발달과 양식의 확립, 새로운 악기의 출현으로 성악음악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건반악기는 독주용악기로도 사용되었으나 통주저음의 필수적인 악기로 어떠한 기악음악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크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오르간을 위시하여 클라비코드, 쳄발로 등은 독주나 합주용 악기로 인기가 높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709년에는 크리스토포리(B. Cristofori, 1655∼1713)가 만든 피아노(Clavicembalo col Piano e Forte)가 등장하여 피아노 문헌의 첫장을 열었다. 현악기 부분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는데, 르네상스를 점유했던 비올족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현악기군을 이루는 바이올린 족으로 대치되어 관현악 음악의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크레모나(Cremona)출신의 아마티(N. Amati), 과르네리(G.B. Guarneri), 스트라디바리(A. Stradivari)등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우수한 악기를 만들어 바로크 현악을 더욱 수준 높은 음악으로 끌어 올렸다. 르네상스를 지배하던 루트는 바로크시대에 들어오면서 그 빛을 잃고 퇴조하여 그 명맥만을 유지시켰다.
관악기는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으나, 관현악에서 그 중요성이 더 새져서 악기의 사용 빈도수가 높아갔다.
바로크시대의 작곡가들은 르네상스시대에 유행했던 몇몇 기악형식을 여전히 사용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음악형식을 개발하여 근대적인 기악 음악으로 그 모습을 점차 바꾸어나갔다. 르네상스의 기악형식이었던 푸가(Fugue)는 바로크시대에 와서는 독립된 기악작품은 물론 성악, 합창곡에서도 그 기법이 사용되었다. 모음곡(Suite)은 무곡을 여러 개의 부분으로 확대해서 독주와 합주용의 기악 음악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모음곡은 주로 같은 조성의 알르망드(Allemande), 쿠랑트(Courante), 사라반드(Sarabande), 지그(Gigue)를 주로 하여 그밖에 지그의 앞과 뒤에 미뉴에트(Minuet), 부레(Bouree), 가보트(Gavotte)등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바로크시대에 와서 르네상스의 세속 성악음 들을 성악과 기악의 혼합 내지는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형태가 흔하였는데 이것이 다악장 형식의 소나타(Sonata)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었다. 많은 바로크 소나타는 두 개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하여 작곡되었는데 이것이 트리오 소나타이다. 다른 형태의 소나타로 (Sonata da Camera)와 교회소나타(Sonata de Chiesa)라는 두 종류로 분류지었고 일반적으로 같은 조성의 4악장으로 구성된다.
바로크시대의 협주곡은 합주협주곡(Comcerto Grosso)과 독주협주곡(Solo Concerto)의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합주협주곡의 확립자는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이고 독주협주곡은 3악장 형식으로 오늘날의 협주곡 악장의 구성원리를 제공하였다. 대표적 작곡가는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로서 근대적 개념의 협주곡 완성자이다. 관현악을 의미하는 신포니아(Sinfornia), 서곡(Overture), 협주곡(Concerto) 등이 있었으나 용어의 구분처럼 음악적 내용의 구분이나 표준은 서 있지 않았고 관현악의 형태도 아직 악기의 구성이나 기준이 일정치 않았다. 관현악의 주된 악기는 현악기였고 관악기나 타악기는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
1) 안토니오 비발디 - Antonio Vivaldi [1678-1741]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3) 요한 세바스찬 바하 - Johann Sebastisn Bach [1685-1750]
1) 안토니오 비발디 - Antonio Vivaldi [1678-1741]
비발디는 1678년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741년 7월28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시대의 바이올린 주자인 동시에 작곡가이다.
비발디는 바하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준 위대한 음악가로 40여곡의 오페라와 100여곡의 <콘체르토-그롯소>라고 하는 복수의 독주악기와 합주부로 구성되는 <대협주곡>과 단일협주 곡, 그리고 실내악곡, 성악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들 작품들이 객관적으로 반드시 최상급은 아니라 할지라도 충실하고 형식적으로 잘 정돈되어 바로크음악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사원의 바이올린 주자로 있던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또한 죠반니-레그렌치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는 1703년에 성직에 들어 갔으나 몸이 약해 미사를 하는 것은 면제를 받았다. 1709년에 베네치아의 자선병원 부속 음악학교의 바이올린 교사가 되었고 1716년에는 음악장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재직하였던 15 년 동안 수많은 협주곡과 성악곡을 작곡하였고, 후기에는 오페라 작곡과 함께 그 흥행에도 관여했다. 또한, 평생 500여개의 콘체르토와 45개에 달하는 오페라곡을 발표했다.
비발디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그가 같은 콘체르토를 500번이나 되풀이하였다고 할 만큼 그 의 작품은 일률적이고 반복되는 공통성이 있다. 전체작품 중 거의 반 이상이 바이올린 곡이며 100곡이상이 바순, 첼로, 오보에, 플루트 등의 협연곡이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강한 리듬과 넘치는 활력 그리고 거의 항상 사용되는 직선적인 주제 등이다. 바순 콘체르토로 어둡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표제적인 협주곡 "밤"과 같이 줄거리가 있는 음악을 여러 곡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사계"가 1725년에 발표되었다. 봄의 새노래, 여름의 폭풍, 가을의 추수, 추운 겨울을 상징하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악기의 음색을 새롭게 표현한 비발디의 음악은 많은 작곡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주요작품> "사계" [1725]
"올란도 핀토 파쪼" [1724]
"귀스티노" [1724]
"그리셀다" [1735]
"충실한 목동" [1737]
"바이올린 콘체르토"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유다"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독일 할레(Halle)에서 1685년에 출생한 헨델은 8세때에 이미 음악적 재질을 인정 받았으며, 1706년 함부르크가극장 관현악부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1705년 그의 처녀작 가극 <알 미라( Almira)>를 상영하는데 성공하였으며, 1706년에는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수 편의 가극을 상영하였다.
1710년에 귀국하여 하노버 선제후의 악사장으로 선임되었다가 1711 년 영국으로 건너가 가극<리날도(Rinaldo)>를 상연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로 런던 에 체류하면서 연금을 받았으며, 왕립 음악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실명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작풍이 웅대하고 장엄하여 영궁의 귀족적 취미와 신흥산업 부르조아 취미에 적합하였다. 많은 작품을 지었는데 가극 40, 성극 80, 서악 70외에 기악곡-합창곡이 많다.
<주요작품> "알미라" [1705]
"리날도" [1711]
"메시아" [1742]
"요한수난곡" [1724]
"수상음악" [1717]
"하프시코드모음곡" 등등...
3) 요한 세바스찬 바하 - Johann Sebastisn Bach [1585-1750]
바하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중부 츄우린겐의 산악지대 아이제나하에서 태어나, 1750년 7 월 28일 역시 독일의 아리프찌히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난 바로크 음악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작곡가이다.
"바하"라고 하면 마치 서양음악이 바하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는 일상 바하가 입에 오르게 되고 그의 음악의 고고한 고전미에 감동하고, 또 음악사를 논할 때 으례이 맨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 바하이다. 그만큼 역사에 남긴 바하의 업적과 비중이 크기 때문이며, 그의 음악이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줄 만큼 위대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바하가 나오기 전 17세기 경에는 음악은 여러 가지 양식이 잡다하게 생겨 혼란을 빚을 정도로 분파작용을 거듭하고 있었다. 18세기 전반에 있어서, 바하를 이러한 여러갈래의 양식을 자 화해시켜서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한 , 이를테면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한 위대한 대가라고 하겠다. 바하는 주로 과거의 전통을 따르기는 했으나, 당시의 새로운 양식도 흡수하여 대위법적이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도입한 독특한 음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근대적인 의미 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음악 양식, 이를테면 교향곡이니, 협주곡이니, 현악4중주니 하는 이른바 고전주의 양식을 수립한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와는 판이한 한계를 갖는 바하는 바로크음 악의 맨 마지막 정상을 이룬 대가이다.
바하는 음악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대대로 이가족에서는 유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전 후 200년 동안에 약 50명의 음악가가 나왔다니 대단한 음악적인 가계라고 하겠다. 바하도 어렸을때부터 음악가인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비롯한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10살때에는 불행이도 양친을 잃고 고향인 아이제나하를 떠나 올드루프에 있는 그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하의 손에 의해 양육되어 그 동안 오르가니스트인 형으로부터 크라비어와 오르간등을 배웠다. 바하는 15살이 되자, 류우네브르크에 있는 교회부속 학교에 들어가 고등 교육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였고 유명한 오르간 주자인 베므를 비롯한 당시의 대오르간 주자로 함부르크의 카라리이나 교회에 있는 디트리히-북스테푸데 등에게 지도를 받았다. 또한, 이웃 체레시를 자주 왕래하면서 프랑스식으로 편성된 궁정악단의 연주를 들어 프랑스음악에 대한 견식도 넓혔다.
그 후, 바하는 1703년 바이마르로 옮겨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다가 이룬슈타트의 오르간 주자로 다시 옮겼고, 1707년에는 뮤르하우젠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 이듬 해에 바이마르의 궁정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의 명예로운 지위를 얻어, 여기서는 직접 자기가 오르간의 설계를 하는등, 오르간에 많은 개량을 가했다. 또한, 그의 오르간 작품의 태반은 이때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바하는 교회음악에 대한 염원과 정열을 억누를 길이 없어 1723년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교회부속 학교 합창장겸 시의 음악 지휘자가 되었다. 바하는 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7년간 이 직에 충실히 근무하면서 맣은 작품을 썼다. 바하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걸쳐 있고, 그 수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랜 시간,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1829년에 멘델스존이 바하의 <마태수상곡>을 연주한 데서 일반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진가를 재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가 장 중요한 이유로는 그 작품의 성질이다. 작품의 태반이 종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따라 서 통속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구조가 복잡하고 내객이 깊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에 원인이 크다고 본다.
그의 작품이 다성부적이고 대위법적인 처리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이며, 당시에도 "너무 기교적이고 자연성이 없다" 는 비판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부한 인간적 감정이나 정화된 고고한 기풍이 느껴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요작품> "마태수난곡" [1727]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1734]
"커피 칸타타" [1735]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6번" [1721]
"토카타와 푸가 d단조"
"골드베르그 변주곡" [1742]
고전파음악
바로크 음악 시대의 최후의 완성자인 바하와 헨델이 복음악으로 바로크 양식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으나, 그들의 만년에는 한편에서 이에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고 있었다. 대 중들은 복잡한 다성부 음악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간결하고 선명한 음악을 희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취향에 따라 음악은 간결하고 솔직한 선율을 택하게 되었고, 이것을 화성 적인 반주로 뒷받침하는 단순한 화성적인 단음악 즉 호모포니(Homophony)음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음악은 선율이 그 진행이나 구조에서 기능적인 화성에 뿌리를 박게 되었고, 그 구조에서도 바로크 선율과 같이 자유분방하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4마디로 악 구를 이루어 반마침을 하고 8마디로 완전마침을 해서 독립된 악절을 이룬다는 성격적이고 규칙적, 내지는 균형적인 구성방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주도 대위법적 방법이 아니라 화성적인 것 또는 화음적인 것으로 펼친 화음과 같은 것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균형진 규칙적인 형식미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 형식도 간결하고 솔직한 것을 좋아 하게 되었고 모든 형식이 어떤 일정한 논리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양식을 클래식(classic) 즉 고전 음악이라고 이른다. 클래식이라는 어휘는 원래 "고전적" 이라는 뜻보다는 "모범적" 내지는 "표준적" 이라는 뜻에 가깝다. 그러나 오늘날 클래식이라는 말은 역사적인 또는 시대 적인 범주로 고전파음악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고전파 음악은 바하가 1750년에 세상을 떠난 무렵부터 더욱 융성을 보아 19세기의 30년경 까지 지배적인 세력을 갖고 음악의 모든 분야에 걸쳐 침투해서 실현을 보았다. 따라서 작곡 가들의 음악활동면에서 볼 때 고전파 음악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에 걸친 약 80년간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대의 커다란 업적이라고 한다면 화성음악의 확립, 소나타 형식의 확립과 발전, 기악의 확립과 발전 즉 교향곡, 근대적 협주곡, 현악 4중주, 피아노 3중주 등의 기악양식과 연주양식의 확립등이다.
고전파음악이란 말은 본래 당시 작곡가들이 붙인 말이 아니라 후세에 이르러 낭만주의 음악에 대해 그 이전의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다. 바로크시대의 사회적, 국가적 체제가 어디까지나 절대주의적 왕권 아래 있었으나, 점차 신흥 시민 계급이 대두하면서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사회문화의 건설을 희망하는 계몽주의 철학의 자유주의 물결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술분야도 과거 종교나 특정인만이 향유할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나 보다 넓게 수용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을 중시하는 고대 그리이스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져서 객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과 균형의 조화를 추구하는 음악을 지향하게되었다.
결과적으로 대위법적인 음악보다는 단순 명쾌한 선율을 지닌 화성음악을 선호하였고 개성적인 감각의 성악음악보다는 기악음악이 인기가 있게 되었다. 작곡가들은 이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음악기법을 창안하는 노력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소나타형식(Sonata Form)이라는 형식적인 틀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시대의 형식의 범주안에서 단순명료하고 질서와 절제를 중시하는 인간적인 음악이 주가 되므로서 종교음악 분야는 음악사상 처음으로 침체국면을 맞게 된다.
(1) 전기 고전파
전기 고전파는 바로크말기의 1720년경에서부터 고전 초엽의 1770년대의 음악을 가르킨다. 이 시기에는 당대한 바로크양식에서 벗어나 경쾌하고 단순 명료한, 그러면서도 가벼운 장식적 요소가 가미된 로코코(Rococo)양식이 나타난다. 감상적인 멜로디에 화성기법이 사용되었으며 독이 남부의 만하임악파에서는 소나타 형식의 발전과 함께 4악장제의 교향곡의 정형을 완성하였다. 작곡가로는 만하임악파(Demenico Scarlatti, 1685∼1757), 소나타형식을 창시한 바흐의 아들 임마누엘 바흐(Cari,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 등이 있다.
(2) 오페라의 개혁
18세기 전반을 주도했던 나폴리 오페라는 극적 사실을 경시하고 성악적 기교만을 강조하여 청중을 자극할 수 있는 감각 위주의 음악표현에만 치중하였다. 이러한 가수의 화려한 기교위주의 오페라는 극의 진행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막의 진행이 중단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욤멜리(N, Jommilli)와 트라에타(T. Traetta)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개혁의 의지를 일으켜서 새로운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루카(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0는 1762년 빈에서 새로운 구성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발표하여 오페라 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이어서 많은 혁신적인 오페라를 발표하여 이러한 개혁정신은 얼마간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지속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퇴색하여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로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오페라에 있어서 극과 음악이 모두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글루크의 이상은 19세기에야 비로소 베버(C.M Weber), 바그너(W. R. Wagner) 등에 의해서 실현하게 된다.
(3)빈 고전파(Viennese Classics)
고전파음악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초에 걸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서 완성되고, 이어서 베토벤에 의해서 한층 더 충실하게 되고, 또 베토벤에 의해 또 다른 방향으로 인도되었다. 이 대가들은 주로 빈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이 완성기의 고전파음악을 빈 고전파음악이라고 한다.
빈 고전파의 첫 번째 대가인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은 화성적 단성율 음악에 크게 성공했고 2개의 대립되는 테마를 제시하여 그것을 발전시키고 다시 테마를 반복 재현하는 소나타형식을 완성시켰다. 또한 교향곡에 있어서 제 3악장에 미뉴에트를 고정 배치하여 제 1악장 소나타형식, 제 2악장 가요형식, 제 3악장 미뉴에트, 제 4악장 론도형식 또는 소나타 형식의 근대적 교향곡의 형태를 확립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104개의 교향곡, 83개의 현악 4중주곡, 24개의 오페라 《천지창조》를 비롯한 4개의 오라토리오, 14개의 미사곡, 20개의 피아노협주곡, 기타 수많은 종류의 곡이 있다. 한결같이 명랑하고 쾌활하며, 전형적인 고전파음악의 성격을 지닌 걸작들이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35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주옥같은 명작을 많이 남겼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독특한 유머 감각과 넘치는 창작적 기지로 시종 일관되어 있어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고전주의 오페라의 최고봉에 올라서 있다. 그리고 하이든이 확립한 소나타 형식에 풍부한 색채감과 음악다운 즐거움을 부여하여 자유분방하게 작곡하였다. 모차르트는 그야말로 음악을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의 작품은 41편의 교향곡을 포함하여 600여곡이 넘는데 모두 모범이 될 만한 것이며, 작곡의 중점을 오페라에 두었으나,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미사곡등 매우 광범위한 작곡활동을 하였다.
베토벤(Ludwing van Beethoven, 1770∼1827)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 완성된 고전파음악에 풍성한 생명을 주어 알찬 열매를 가져오는 마지막 매듭을 지었으며 낭만파의 새로운 장에 문을 열어 준 교량적 역할을 한 위대한 작곡가이다. 베토벤은 신체적 장애로 그의 창작세계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영원불멸한 그의 작품은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내고 만민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음악의 전 분야에 걸쳐 작곡된 그의 작품에는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개발한 고전형식에서 발전부의 확대, 코다부분의 계속적인 장려한 음악진행, 악장편성의 자유로운 취급, 교향곡의 제3악장에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로의 교체, 강약법의 급변 등 여거 형태의 독창적인 음악적 수법을 창안하여 새로운 진보적 경향을 수립함으로써 낭만주의의 문을 열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분류하여 일반적으로 작품시기를 3부분으로 구분한다.
제1기는 1802년경까지로서 이 무렵에는 주로 하이든, 모차르트의 양식을 따르거나 그 영향을 받은 시기로서,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1번과 제2번》, 피아노 소나타 《비창》과 《월광》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제2기는 1815년경까지로서, 이 시기의 작품은 그 자신 특유의 힘차고 그 내용이 심각한 것으로, 그의 독특한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시기로서, 교향곡 제3번에서 제8번까지, 《열정》등의 피아노 소나타, 《라즈모프스키》 현악4중주곡, 오페라《피델리오》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제3기는 마지막 시기로서 청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후의 영감을 통한 창작의 시기로서,《교향곡 제9번》, 《장엄미사》, 마지막《현악4중주곡》등이 있으며 모두 깊은 사색과 인생을 달관한 종교적 색채가 깃들어져 있는 음악사상 최고의 예술이라 하겠다.
1)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Franz Joseph Haydn [1732-1809]
2)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 Wolfgang Amadeus Morzart [1756-1791]
3) 루드비히 반 베에토벤 -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1)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Antonio Vivaldi [1678-1741]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남부 오스트리아의 헝가리에 가까운 로라우라는 빈촌에서 태어나, 1809년 5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77세로 세상을 떠난 고전 음악의 기초를 닦은 대가이다. 하이든은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익힌 사람이나, 가장 건실하고 자발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특히, 교향곡이니 협주곡이니, 혹은 현악 4중주곡이니 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근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여러 음악 양식을 처음으로 개척한 역사적으로도 커다란 업적을 남긴 작곡가이다.
하이든은 부친이 손수레의 수리공이었기 때문에 음악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라나 시골 음악 교사의 불완전한 지도를 받은 후, 8살 때 비인으로 나와 슈테판 교회의 아동 성가대에 들어 갔다. 17살 때 변성한 하이든은 이 합창대에서 나와 한때 빈곤한 생황을 보냈으나 이러 는 가운데에도 공부를 계속하며, 특히 에마누엘 바하의 소나타를 어렵게 입수하여 이를 분석 연구했다.
하이든은 23살때 처음으로 현악 4중주곡을 썼다. 이 곡들은 모르친 백작에게 인정되어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이어 헝가리의 가장 권력있고 부유한 귀족인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인정되어 1761년 그의 악단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얼마 후 그 악단의 책임자인악장이 되었다. 당시 는 귀족 전제 정치시대인 만큼, 누구나 그러하듯이 하이든도 귀족사회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고, 또한 고용주를 위해 쉴 사이 없이 작곡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그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1791년과 1794년에는 영국으로 초청되는 등 외국여행도 잦아졌다.
하이든은 선배들의 작품에 내재한 지배적인 공허한 감상을 버리고 그 자신의 주장을 강력 히 내세워 건실하고 순수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그의 음악에는 발랄한 생기와 독창성이 있고, 신선한 자연미가 흐른다. 하이든은 같은 시대의 모짜르트가 만하임악파의 영향을 받은것과 는 달리, 주로 에마누엘 바하의 <클라비어 소나타>에서 작곡기교를 배웠다. 대부분의 4중주 곡이 가장 과 교향곡, 그리고 최후의 오라토리오 <전치창조> <4계>등은 영원한 명작으로서 하이든의 음악성을 잘 나타낸 작품들이다.
<주요작품> 교향곡 6번 D장조 "아침" [1761]
교향곡 45번 F#장조 "고별" [1772]
교향곡 94번 G장조 "놀람" [1791]
교향곡 101번 D장조 "시계" [1794]
"천지창조" [1798]
"황제 4중주곡"
2)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 Wolfgang Amadeus Morzart [1756-1791]
모짜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잘쯔부르크에서 태어나 1791년 12월 5일 역시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35세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고전음악의 대가 모짜르트의 위대한 업적을 여기서 새삼스럽게 들추어 볼 것까지도 없지만 음악 역사상 지대한 영향력을 갖는 그의 많은 공적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소나타등 여러 음악형식과 교향곡이나, 협주곡이나, 현악 4중주곡 등의 실내악 등, 기악의 연주 양식을 개척하여 선배인 하이든은 물론 베에토벤 등에 영향을 주었을뿐더러 근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음악형식의 기틀을 닦았다는데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모드들 모짜르트를 천재의 모델 케이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일찍부터 천재적인 소질이 발휘되어 4살 때부터 잘쯔부르크 대사교, 즉 영주의 궁정악단 단원으로 있던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작곡을 배워 이미 6살 때부터는 비인을 비롯 각 지를 순회하며 연주를 했고, 7살때에는 파리를 방문, 그리고 다시 런던을 거쳐 신동이란 경탄과 찬사를 받고 10살에야 고향에 돌아왔다. 모짜르트는 다시 13살 때 이탈리아로 연주여행을 떠나 15살에 뀌국할 때까지 여러곳에서 천재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그러나, 고향인 잘쯔부르크의 영주로부터 냉대를 받아 그는21살 때 새로운 일터를 찾아 파리로 갔었지만 여기서도 정착할 수 있는 일자리나 여건은 찾지 못해 신동이란 지난날의 화려했던 연주경력을 가진 모짜르트도 실의를 안고 1770년 잘쯔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1781년 그는 다시 고향을 떠나 비인으로 가서 거기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작곡과 연주, 그리고 교수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작곡가로서 또는 연주가로서 성공을 했고 사회적인 지위도 확고할 만큼 생활은 항시 곤란했고 끝내는 빈곤과 과로로 35살이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짜르트는 그 비극적인 짧은 생애에 600곡이 넘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작품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기악, 성악을 불문하고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썼고 또 거의가 불멸의 명작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그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오페라, 종교음악 등의 규모가 큰 작품은 물론, 독주악기로서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중요한 작품을 쓰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다.
이 많은 작품의 양식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융합되어 있다. 이것은 모짜르트가 어렸을때 부터 연주 여행으로 여러 곳을 다니며 각양각색의 작품에 접했고 여러 가지 양식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파리여행때 만하임에서 새로운 기악양식을 익혔고, 이탈리아 여행에 서 오페라 양식을 영국에서 요한 크리스찬 바하로부터 새로운 피아노 작곡법을 그리고 파리에서 만하임파인 쇼오버어트로부터 새로운 실내악양식을 계시 받았었다.
또한 비인에서는 하이든으로부터 실내악 특히 "형악4중주곡"의 작곡법에 중요한 암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짜르트는 이러한 요소를 막연하게 도입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동화하고 순화시켜 여기에 깊은 감정과 정서를 넣어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한 것이다. 그의 선율은 무한히 아름답고 풍부하며 그의 형식은 명쾌하고 간결할뿐더러 화성은 밝고 섬세하다. 모짜르트 의 음악이 일반적으로 명랑하고 쾌활하다는 것은 정평이지만 그 저류에 흐르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와 서정미 는 때로는 절망감마져 느끼게 한다.
<주요작품> "피가로의 결혼" [1786]
"돈 조반니" [1787]
"마적" [1791]
"41번 쥬피터 교향곡" [1788]
"진혼곡" [1791,미완성]
"호른 협주곡 3번"
"대관식" [1779]
3) 루드비히 반 베에토벤 - Ludwing van Beethoven [1770-1827]
베에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본에서 태어나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고전주의 음악의 최후의 그리고 고금을 통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베에토벤의 음악이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인류의 정신 문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음악사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에서도 베에토벤은 드물게 보는 역사의 창조자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위대한 업적을 우리 인류문화에 남겨준 음악가라고 하겠다.
오늘날 온 인류가 베에토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정신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악성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우리 인류의 공통된 철할 세계를 추구하고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에토벤의 작품들은 곧 그의 사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생활의 반영이다. 따라서 그 의 전 작품은 베에토벤의 전 생애를 장식한 그의 역사인 동시에 그의 인간과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베에토벤의 생애를 불행한 일생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상 베에토벤처럼 고르지 못한 환경에서 일생을 보낸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가난했다거나 귀머거리가 되었다거나,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거나 하는 것으로만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생이 오직 인간의 공통된 운명과 대결하고 그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끝냈다는 심각한 정신 환경이 더욱 불행했을지 모른다. 베에토벤은 서부 독일의 본 시에서 태어나 그가 22세 때 비 인으로 가기까지 어린 시절을 여기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선제후 예배당의 가수로 있었으나 성질이 난폭하고 대단한 호주가여서 가정이 평온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족환경에서 자라난 베에토벤은 서너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 이론을 아버지의 가혹한 지도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그는 궁정 오르간주자인 에덴을 비롯 파이퍼 그리고 네에페에게 지도를 받아 일곱 살 때 공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었고, 열살 때에는 벌써 작곡을 하기 시작하여 천재적인 재능과 역량을 일찍부터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여러곳으로 순회연주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였고 자신의 기술도 닦아서 더욱 천분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술에 빠진 아버지가 나태한 탓으로 집안 신구들은 어린 베에토벤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 뒤 17살 때에는 선량한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9세때에는 아버지가 실직하는 바람에 가족은 더욱 어려워지고, 베에토벤이 동생들을 데리고 생활을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경에서도 그는 꾸준히 연구와 작곡에 정진하였다.
7세때에는 비인을 방문하여 모짜르트를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22살때에 아버지마 저 여의게 되어 온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도 지게 되었다. 그 후 비인으로 옮겨 귀족사회에도 출입하면서 피아노 연주가로 활약하였다. 1796년경 즉, 26살 때부터는 작곡도 인정을 받아 음악계에 확고한 지위를 잡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에게는 치명적인 운명이 닥쳐왔다. 그가 28살 때 귓병을 앓아 청각을 점차 잃게 되었다.
32살때에는 절망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베에토벤은 자결을 결심하고 비인 교외인 하이리겐시타트에서 비통한 유서를 쓰게 되나, 다시 생각을 돌리고 "나에게 신으로부터 내린 모든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죽어서는 안된다." 하고 결심한 그는 그 가혹한 운명과 싸우면서 작곡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와같이 베에토벤은 가족적으로나 일신상으로나 불행이 겹친 데다가 빈곤과 고난과 번민속에 살아 나왔고, 한편 이를 극복하고 그의 예술을 창조한 것이다. 베에토벤은 남달리 인간애가 풍부하였고 고독과 절망에서도 항시 환희와 희열로써 곤경을 극복해 갔다.
베에토벤은 또한 풍부한 감수성과 자유분방한 개성, 섬세한 감정과 생활의식 등을 내재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자기 사생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언제나 현대적이고 역사적인 인류개혁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귓병과 빈곤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현대를 의식하고 전 인류적인 인생관과 사고를 음악적 창작에 결부시켰다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창작활동의 이념은 개인적인 감각이나 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통하는 고민과 희열이 그것이다. 그의 예술의 특징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환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보편성에 있다고 본 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본다면 선배인 하이든, 모짜르트의 뒤를 이어 고전음악의 주요소인 형식을 한층 확장 완성 시켰고, 연주양식의 개척과 작곡 수법이나 관현악법에 있어서도 결정 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가장 특징인 자주성과 개성의 확립을 꾀하였고, 진취적이고 과감한 태도로써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세에 임했다.
<주요작품> 교향곡 제3번 "영웅" [1803]
교향곡 제5번 "운명" [1808]
교향곡 제6번 "전원" [1808]
교향곡 제9번 "합창" [1824]
피델리오 [1805]
피아노 소나타 "비창"
피아노 소나타 "월광"
낭만파음악
낭만주의는 19세기의 음악을 지배한 기본적인 지도 이념으로써, 특히 문예분야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 중요한 본질은 새로운 것을 희구하는 욕구, 개성의 존중, 자유에의 태도, 또한 새로운 시대 정신에의 동경등 이다. 따라서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 음악에서 존중하던 보편적인 형식과 이상화된 내용을 버리고 신기한 것을 쫓고 통제적인 울을 벗어나 개성적인 색조를 강화한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로 자기의 음악을 가지고 노래하려는 정신경향, 또한 시나 희화 등 음악 외적인 분야로부터의 새로운 자극을 희구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음악의 기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개혁을 갖게 되어 고전음악시대의 최고의 이상형식이던 소나타를 대담하게 변형 또는 포기하고 그 대신 자유롭고 유동적인 형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단일악장의 환상적인 소품 형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 선율은 고전음악 시대처럼 마디 수가 배수로 구성되는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것이 많아지고 당김 음이라든가 잇단음표 등을 자주 사용해서 다채로운 변화와 표현의 폭을 넓히고 그 음역도 확 대하고 때로는 비성가적인 음정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리듬도 자유롭게 되어 복잡한 겹리듬을 자주 쓰게 되었고, 화성도 아직 3화음을 원칙으로 하나 보다 자유롭고 변화를 가져와 불협화음을 자주 사용하고 대담한 조바꿈을 하게 되었다. 또한, 관현악 편성도 다양하고 확대되어 새로운 음색을 모색하게 되었고, 편성도 대대적인 편성으로 압도적인 음향을 요구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은 프랑스대혁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듯이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대두된 시기였다. 프랑스대혁명은 일반 시민계급이 특권계급에 대한 반발이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고, 그것은 18세기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이른바 계몽주의 사상과 그 문예사조등에 의해서 양성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계몽주의는 이성에 지나치게 편중하고 전통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19세기에 들어오자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냉철한 이성보다는 인간 본연의 감정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합리적인 것보다는 공상적, 목가적인 세계를 동경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먼저 개개인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낭만주의인데 예술가들도 자유에 대한 이상과 개인주의 사상에 심취하기에 이르렀고, 음악에 있어서도 역시 낭만적 요소가 깃들기 시작하였다. 고전주의 작곡가들은 형식성을 중심으로 하여 객관적인 아름다운을 추구한데 대하여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무엇보다도 자기표출이라는 주관성을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감정을 유일한 실마리로 삼고 있었다. 또한 산업혁명의 결과 부유한 자본주위 중산층이 형성되어 청중의 범위가 크게 확산되었고, 이러한 부유 중류계층들은 곧 작곡가들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작곡가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일반청중을 대상으로 곡을 써 나갔다. 청중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연주를 하였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여러 형태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폭넓게 독서했고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다루는 소재는 다양했다. 그리이스 신화에서부터 전설과 동화, 자연의 경관, 연인의 사랑 등 모든 것이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소재는 다양하고 풍부하게 음악으로 표현되어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 초기 낭만파
초기 낭만파음악은 베토벤의 중기에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18∼1826)가 1821년에 오페라 《사탄의 마수》를 발표하고 모차르트, 베토벤에세 바그너에 이르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악기에 의한 상징법, 혁신적인 악기사용, 독일의 전설을 소재로 사용하는 등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확고한 지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베버는 오페라 이외의 작품에서도 강한 극적 효과와 다양한 색채저거 효과를 거두어 낭만적인 경향을 추구하였다.
예술가곡과 즉흥곡으로써 시정이 흐르는 낭만 정신을 이끌어들인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는 600여곡의 가곡 작품에서 그의 끊임없이 샘솟는 선율을 서정시에 붙여, 다양하고 오묘한 화성을 창출하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낭만적인 정감속에 융합하였다.
교향곡, 실내악곡 그리고 피아노곡 등 그의 모든 작품들은 낭만적 풍취가 넘치는 낭만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2)중기 낭만파
낭만의 꽃이 피기 시작한 시기로서 서정적인 작은 형식을 자유롭게 다루며, 자매예술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표현법으로 주관적인 사고로서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멘델스존(Felix Jakob Ludwing Mendelssohn-Batholdy, 1809∼1847)은 시의 세계를 피아노에 도입시킨 '무언가의 창시자'로서, 그의 작품은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은 고전적인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나 《한 여름밤의꿈》,서곡《핑갈의동굴》,교향곡《스코틀랜드》《이탈리아》등의 표제음악에서 볼 수 있는 회화성은 분명히 낭만적인 꿈과 시(詩)가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기악곡 등으로 독일 낭만주의를 절정에 끌어올린 슈만(Rovert Schumann,1810∼1856)은 그의 피아노 음악에서 서정시와 관계되는 서정성을 밑바탕으로 하여 피아노 페달의 효과적인 사용, 대담한 반음계적 화성, 음형의 다양한 변화 등의 개성적인 표현이 뛰어났다. 그의 가곡은 문학과 음악이 가장 접근된 것으로서 아름다운 선율과 다양한 피아노 반주로 시의 이미지에 의한 내적 융합의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은 피아노의 온갖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피아노곡들이 대부분이며, 모두 아름답고 향기가 높다. 대개가 즉흥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꾸밈음과 템포의 변화, 독특한 장식음의 전개 등을 특색으로 하여 시적으로 표현된다. 이 시기에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 1868), 도니체티(Guetano, Donizetti, 1797∼18480,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68)로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프랑스에서도 오페라가 성행했는데, 낭만주의 사조에 의한 낭만적인 정서가 그들의 작품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3) 후기 낭만파
후기 낭만파 또는 신 낭만파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는 낭만주의 음악이 결실을 맺는 시대이며 또는 새로운 음악으로 변화되는 새로운 기운이 있는 시대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표제음악의 발달과 함께 교향시, 악극(Music Drama)이 창시되었고, 관현악이 발달하였으며 오페라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EH한 말기에는 무조(撫棗, Atona)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최초의 작곡자는 이탈리아의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이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명수로서,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서 새로운 기교를 연주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으며 그의 신기에 가까운 다채로운 표현을 당시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의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환상교향곡》을 발표하여 관현악에 새로운 효과를 시도하여 표제음악을 완성하였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고정관념(Idee Fixe)이란 것을 창안하여 음악의 줄거리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모티브로서 주인공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베를리오즈는 관현악의 규모를 확대시켰고 악기의 그 표현 능력을 극도로 발휘시켰다. 또 이와 같은 새로움을 헝가리의 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에 의해 교향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냈다. 리스트는 12곡의 교향시를 작곡하였는데 그 어떤 형식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또 악장을 나누지도 않는 음악으로 시적인 묘사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표제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오페라도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탈리아의 가극왕 베르디(Giusepe Verdi, 1813∼1901)는 민족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오페라를 작곡하여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 그는 초기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선율을 중시하여 작곡하였으나 당시 낭만주의 문예의 영향을 받은 중기 이후의 작품에서는 극적 진실을 추구하여 극과 음악이 함께 중요시되었고 관현악법도 충실한 명락들을 이루면서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품은《리골레토 Rigoletto》《춘희 La Traviata》《아이다 Aida》등의 많은 걸작들이 있다. 베르디 이후에 이탈리아 작곡가는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5∼1945)와 레온카발로(Ruggiero Leoncavallo, 1858∼1919)인데 이들은 신낭만주의 수법을 써서 현실생활의 잔인한 사건을 묘사적으로 다루는 베리스모(Verismo), 즉 사실주의 오페라를 시도했다. 이것은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토스카 Tosca》에 이어진다. 그의 작품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인 풍부한 서정적 선율에 탁월한 관현악법으로 《라보엠 La Boheme》《나비부인 Mudame Butterfly》등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비제(George Alexandre Leopold Bizert, 1838∼1875)가 오페라《카르멘 Carmen》을 발표하였다.
독일에서는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악극(樂劇, Music Drama)을 창시하였다. 기존의 전통적인 오페라의 불합리한 점을 과감히 정리하고 새로운 형식의 음악극을 만들어낸 그는 유도동기(誘導動機, Leit motiv)를 사용하여 극중 인물이나, 특정 장면을 나타냈고, 극의 단절을 방지하기 위하여 '무한선율(無限旋律, Unendliche Melodie)'를 창안하였다. 이런 수법의 악극으로 《크리스탄과 이졸데》가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는데 반음계의 빈번한 사용과 불협화음의 사용 등으로 재래의 기능 화성법의 한계를 넘어 조성의 붕괴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바그너파인 오스트리아의 브루크너(Anon Bruckner, 1824∼1896)는 오르간의 명수이면서 9개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의 창작활동으로 조용하고 종교적 달관을 느끼게하는 음악경지를 이루었고 볼프(Hugo Wolf, 1860∼1903)는 주로 가곡을통하여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였는데 슈베르트 이후의 독일 가곡의 문학적, 예술적 발전을 정상으로까지 끌어 올렸다. 이와같은 진보적인 신낭만주의는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음악계 전체의 지배적인 흐름이 되었는데, 그 반면에 고전파 음악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작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인데 그의 화성이나 선율은 중기 낭만파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그는 바흐와 베토벤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일 고전의 정수를 순수하게 지켰다. 4개의 교향곡 이외에 관현악곡, 피아노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신고전악파'라 불리울 만큼 절대음악에 온갖 힘을 경주한 작곡가였다. 그리고 그밖의 후기 낭만파 음악의 작곡가는 프랑스의 프랑크(C. Auguste, Frank, 1822∼1890)와 생상스(C, Camile Saint-Saens, 1835∼1921), 러시아적인 성격으로 독일 낭만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향곡 《비창》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등이 있고, 가곡과 교향곡 분야에 두루 뛰어나고 특히 거대한 규모의 작품을 쓴 오스트리아의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와 교향시에 표제적인 내용과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근대적인 작곡 수법을 가미하였고 200역곡의 예술가곡을 작곡하여 독일 리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R슈트라우스(Richad Respighi, 1879∼1936)등이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오페라 이외에 기악곡을 중시하여 능란한 관현악법으로 색채감있게 창작활동을한 레스피기(Ottorio Respighi, 1879∼1936)등이 있다.
한편, 이 시대에 파리와 빈, 그리고 런던을 중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경음악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오페레타(Operetta)의 세계였다. 파리에서는 오페라부파, 빈에서는 오페레타, 런던에서는 라이트 오페라(Light Opera)등으로 명칭이 달랐지만, 그 내용은 모두 친숙한 제재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특색으로 삼고 있다. 파리에서는《천국과 지옥》을 작곡한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 빈에서는 오페레타와 많은 왈츠의 명곡을 남긴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1804∼1849, 1825∼1899) 부자, 서곡《경기병》으로 유명한 주페(F, van Suppe, 1819∼1895), 런던에서는 설리번(A.S. Sullivan, 1842∼1900)등이 유명하다.
1)카알 마리아 폰 베버 - Carl Maria von Weber [1786-1836]
2)프란츠 슈베르트 - Franz Peater Schubert [1797-1828]
3) 펠릭스 멘델스존 - Felix Mendelssohn [1809-1847]
4) 프리데릭 쇼팽 - Fryderyk Chopin [1810-1849]
5) 로베르트 슈만 - Robert Schuman [1810-1856]
6) 프란츠 리스트 - Franz Liszt [1811-1886]
7) 리하르트 바그너 - Richard Wagner [1813-1883]
8) 쥬셉페 베르디 - Giuseppe Verdi [1813-1901]
9) 페테르 차이코프스키 - Peter Tchikovsky [1840-1893]
10) 안토닌 드보르작 - Antonin Dvoralk [1841-1904]
1) 카알 마리아 폰 베버- Carl Maria von Weber [1786-1836]
베버는 1786년 12월 18일 독일 류우베크에 가까운 오이틴에서 태어나 1826년 6월 5일 영국 런던에서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최초의 낭만파 작곡가 베버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과 형으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고, 부친이 순회극단의 책임자로서 여러 곳을 돌아다닌 관계로 베버는 극장과 무대의 기교를 이 익히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그를 무대음악, 특히 오페라의 작곡가로 완성시킨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그가 10살 때 오르간과 오보에 연주가인 호이슈겔에게 지도를 받았고, 12 살 때에는 잘쯔부르크에서 미하엘 하이든에게 피아노와 이론을 배웠다. 그 후 유명한 이론가 포오글러에게 사사하면서 선배 대가들의 많은 작품에 접했고, 또한 민속 선율도 연구한 동시 에 색채적인 관현악법도 익혔다. 베버는 10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13살 때에는 오페라를 썼다고 한다. 그는 1800년경까지 뮌헨에 체류하면서 최초의 오페라 <사랑과 술의 힘>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고 한편 피아노 연주가로서도 활약을 하였다.
그 후 1804년 브레슬러 가극장의 악장을 비롯하여 프라하의 가극장 지휘자 등 여러 곳에서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낭만적 오페라를 위한 수완을 닦았다. 그러다가 1816년 드레스덴의 궁정 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함과 동시에 외면적으로도 독일적이고 낭만적인 오페라를 작곡할 필요성을 느껴 민속적인 전통에 의한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1821년에 완성하였다. 이<마탄의 사수>는 의외로 대성공을 거두어 2년반 동안에 베를린에서만 공연50회를 기록하였다. 이 오페라의 평판이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아덴 가극장의 지배인으로부터 가극 작곡의 청탁이 들어와 베버는 1826년 2월에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건너갔다.
베버는 런던 체류중에 그의 최후의 오페라 <오베론>을 완성하여 4월에 초연한 결과 성공을 하였지만, 그는 건강을 해쳐 6월 5일에 귀국 직전 객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독일 낭만음악의 선구자 베버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 해도 독일 국민가극을 참다운 예술적 수준으로 올려 놓은 일일 것이다.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오페라라고 하면 으례히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를 상연하고 있었고 독일도 그 예외일 수는 없었다.
베버는 이러한 이탈리아의 전통에서 벗어나 독일 민속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참다운 국민가극의 창조에 힘을 기울였다. 비단 가극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작품에서도 낭만문학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고 과거의 형식위주의 전통을 깨뜨리고 내객을 묘사적으로 하는 동시에 색채적인 관현악법을 사용하였다. 대본도 처음으로 독일말로 쓴 그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는 독일 최초의 완전한 민족적 오페라인 동시에 최초로 완성된 낭만적 오페라이다.
베버의 극적인 성격은 음악을 표제에 따라서 자유로운 형식을 택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후의 낭만적 표제음악의 출발점이 되었다.
<주요작품> "마탄의 사수" [1821]
"오베론" [1826]
"오이뤼안데" [1823]
"무도회의 권유" [1819]
"전쟁과 승리" [1815]
"클라리넷 협주곡 제1번"
2) 프란츠 슈베르트 - Franz Peater Schubert [1797-1828]
슈베르트는 1797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가까운 리히텐터르에서 태어나, 1828년 11월 19일 역시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31살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슈베르트는 샘솟듯 넘쳐 흐르는 악장과 이것을 작품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직감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느낀 영감을 따라 애환을 그리고 감정을 음악에 도입시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서정의 음율을 노래한 것이다. 또, 가곡이란 장르를 통해 낭만주의, 독일 리이드의 세계 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슈베르트이다.
낭만적인 가곡에 있어서는 선배인 베에토벤이나 베버도 아직 눈 뜨지 못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에토벤이 아직 비인에 살고 있을 때, 같은 도시 안에서 31년이란 비극적인 짧은 생애를 한 시민으로서 보냈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학교 교원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의 합창단에서 노래하며 불완전하나마 음악 교육을 받은 이외에는 이렇다 할 체계적인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천재적인 재질은 14살에 이미가곡을 썼고, 17살때에는 <실 잣는 그레첸>, 18살때에는 <마왕>, <들장미> 등 유명한 가곡들을 연달아 작곡하였다.
이 당시 슈베르트는 부친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19살때에는 이것도 그만 두고, 아무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생활하며 가난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예리한 감성과 풍부한 정감으로 작품을 썼고, 그 에 필요한 가곡 기교도 스스로 습득하였다. 이리하여 슈베르트는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모짜르트와 베에토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한 창작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고전음악의 전통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낭만주의의 새로운 현대의 물결이 거셌고, 따라 서 그는 새 사조의 선각자로서 낭만음악을 썼던 것이다.
그를 엄격히 따지자면 고전적 낭만주의자라고 하겠다. 샘물처럼 흐르는 그의 선율은 서정이 젖어 있고, 그의 화성은 섬세하고 뭉클한 정감에 차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그의 재능을 잘 발휘한 것은 뭐니 해도 가곡일 것이다. 그의 노래는 섬세 한 감정과 약동하는 생명력, 깊은 통찰력 등, 필연적이고 유동적인 음악적 표현에서 이루어져 있다.
한편 기악곡에 있어서는 논리적인 구성감이 부족하다는 말을 흔히 듣고 있다. 그러나 전통 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마음에 떠오른 선율을 애용하였고, 이를 독특한 화성으로 뒷받침하며 소박한 감동을 유화한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 다양한 환상과 섬세한 감각이 곁들여 슈베르트의 유니크한 음악미가 생긴 것이다. 이것이 슈베르트의 예술이 낭만주의 정신에서 유연한 증좌이기도 하다. 이는 <미완성 교향곡>을 비롯한 10곡의 교향곡, 16곡 이상의 4중주 곡과 그밖에 실내악,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와 소품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주요작품>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1823]
"겨울 나그네" [1827]
"백조의 노래" [1828]
"숭어 5중주곡" [1829]
"미완성 교향곡 b장조" [1822]
"알폰소와 에스트렐라" [1822]
"마왕" [1815]
3) 펠릭스 멘델스존 - Felix Mendelssohn [1809-1847]
멘젤스존은 1809년 2월 3일 독일 함부프크에서 태어나, 1847년 11월 4일 역시 독일의 라이 프찌히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낭만파 작곡가이다.
멘젤스존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작곡가로서, 낭만주의 음악이 개화한 중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 음악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유태인계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역사상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부유한 가족 환경에서 자랐고, 또한 일생을 경제적인 구애나 빈곤을 모르고 지냈다. 이러한 환경이 음악가로서의 멘델스존에게 플러스가 되었는지 또는 마이너스가 되었는지 모르나, 어쨌든 그의 기질과 더불어 그의 음악이 밝고 경쾌한 반면, 중후한 맛이나 심각성이 없다는 대조적 반응이 이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대부분의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과거의 전통이나 질서에 대해 부정적 태도나 저항을 하는 사례에 비하여 그는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기존형식을 아무 주저없이 받아 들이는 보수적인 작곡가였다.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을 주로 베를린에서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데다가 일찍부터 모친으로부터 피아노지도를 받았으며 후에 피아노를 베르거에게, 그리고 작곡을 체르터에게 배우는 등 부모의 각별한 배려로 윤택한 음악 교육을 받아 일찍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9살 때 공개 연주를 하였고 11살때부터는 작곡을 시작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 의한 유명한 서곡을 쓴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7살때의 일이다.
그는 여러 차례의 여행으로 북쪽은 스코틀랜드로부터 남쪽은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온 유럽을 통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여행을 통해 가는 곳마다 인상과 감흥을 통 해 작곡의 소재를 얻어 작품을 썼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고전주의 적인 형식감을 이어받아 여기에 묘사적이고 표제적인 내객을 담은 작품들로 지방색이 짙은 리듬이나 멜로디, 여기에 색채적인 관현악법 등 낭만적인 감각이 짙게 풍긴다.
멘젤스존은 또한 1833년부터 듓셀르도르프의 교회음악과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서, 그리고 케른의 라인 음악제의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그는 창작가로서 뿐 아니라 연주가로서 지휘자로서 또한 교사로 서 분망한 생활을 해야했고 라이프찌히에 음악학교를 설립하는등, 사회적인 책임도 무거워져 겹친 과로로 38세라는 단명으로 일생을 마쳤다.
멘델스존은 낭만주의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보는 보수주의적인 음악가였으나, 그를 단적으로 말하면 정신은 낭만주의에다 형태는 고전주의적 질서와 조화의 감각을 가진 작곡가라고 하겠다. 그의 형식이 완벽에 가깝도록 완성된 데 비해 심각한 내객이 부족한 탓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뒤흔들 감동이 없다는 것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성격탓도 있겠지만 그의 생활 환경이 너무나 행복하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현실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 각된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에서 강렬한 열정이나 비창은 느낄 수 없지만, 밝은 빛과 시적이고 그림처럼 경쾌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세련된 형식은 그의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요작품>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 [1842]
교향곡 4번 "이탈리아" [1833]
교향곡 5번 "종교개혁" [1832]
서곡 "한 여름밤의 꿈" [1826]
"핑갈의 동굴" [1832]
"성 바울" [1836]
"무언가" [1829-45]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4) 프리데릭 쇼팽 - Fryderyk Chopin [1810-1849]
쇼팽은 1810년 2월 22dfl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 제라조바 노라에서 태어나 1849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난 폴란드의 작곡가이다.
고금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다루었고 또한 피아노음악을 작곡하고 있지만 쇼팽처럼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피아노가 갖은 특색을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성한 작곡가는 드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피아노를 노래시키고 피아노를 통해 시 를 읇은 사람은 바로 쇼팽인 것이다. 그를 가리켜 <피아노 시인>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피아노의 거장 안톤 루빈시타인의 찬사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쇼팽은 프랑스 사람을 아버지로 폴란드 사람을 어머니로 폴란드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로렌주 낸시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국내불안을 피해 17세때 단신 바르샤바로 온 사람이다. 처음에는 담배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그 공장 이 문을 닫게 되자 그 후 바르샤바에서 약 50㎞ 떨어진 제라조바 보라에 있는 스카르벡 백작의 아들 프레데릭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작부인의 먼 친척이 되는 폴란드 귀족 출신 유스티나 쿠지자노프스카와 1806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네아이가 태어 났는데 외아들인 쇼팽은 두번째 아이였다. 그러나 이 집안은 쇼팽이 태어나던 해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쇼팽은 그 혈통이 말해 주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속적인 요소와 프랑스의 세련된 감각이 그의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고, 쇼팽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주로 파리에서 나머지 반생을 보낸 것을 보면 그의 생애도 폴란드와 프랑스로 20년씩 반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쇼팽은 스스로 폴란드인이란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대단히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조국을 떠날 때 가지고 떠난 한줌의 흙은 일생을 통해 간 직했고 조국 폴란드가 국난을 겪을 때 마다 의연금을 보내는 등 한시도 그의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쇼팽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서 여섯 살 때에는 보히미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지브니라는 사람에게 정식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살 때에는 그 해 2월 26일 바르샤바 청중들 앞에 나타나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 데뷔해서 폴란드사람드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쇼팽은 즉흥연주에도 능해서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작곡가로서의 소양을 일찍부터 제시 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12세때 바르샤바 음악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인 요제프 엘스너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지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공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독창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지도법을 택했다. 이러한 방법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와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고금을 통한 독 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쇼팽은 피아노의 정식레슨을 받지 않고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쇼팽은 19살때 이상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연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상대는 당 시 바르샤바 음악학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타치아 그라도코프스카였다. 그러나 내성적인 쇼팽 은 그의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에서 특히 제2악장<아다지오>는 그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쇼팽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1830년 11월1일 그의 나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세계여정에 올랐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국을 영원히 떠나는 여정이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몰랐었다.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친구들이 보내준 한 줌의 흙을 간직하고 보다 넓은 예술활동의 무대를 찾아 바르샤바를 떠났다.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와 더불어 세계 여정에 오른 쇼팽은 처음에 비인에 들렸으나 그 전해에 들려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따뜻하게 맞이할 선배 음악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기대에 부풀 었던 그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바르샤바혁명이 일어나 폴란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외교적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와 폴란드사람을 적대 시하게 되었다. 친구인 티투스는 조국으로 되돌아 갔고 홀로 남은 그는 고독과 실의의 구렁 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인에 더 이상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아 쇼팽은 런던으로의 여권을 얻어 1831년 7월, 21세때 비인을 떠났다.
쇼팽은 1831년 9월말에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당시 정치적으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쇼팽에게는 자연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어 쇼팽의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 그리고 영원한 안주의 고장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파리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나 사회풍조로나 자유를 고가하고 있었고 문화인, 지식인, 예술가들이 유럽전역에서 모여 들어 당시 전성을 이룬 낭만주의 사조에 물들 고 있을 때였었다. 그는 멘델스존과 리스트 그밖에 카르크브랜너 등의 음악인들의 따뜻한 도 움을 얻어 활동하게 되었고 우연히 파리에서 만난 옛 친지인 폴란드 귀족 라지뷜공작의 주선으로 로스차일드 남작의 사교 모임에도 드나들게 되어 파리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연주와 작 곡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의 악단에서의 기반이 확고해지고 사회적인 명성도 높아진 쇼팽은 1836년 겨울 그 나이 26세때 친구인 리스트의 소개로 인기 여류작가였던 죨쥬상드와 알게 되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으로서는 상드와 같은 활동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의 애정과 간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 두 사람은 9년간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쇼팽은 그녀로부터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생활 속에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길지 못해 1846년 11월 36세때 그는 상드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그 와 동시에 그의 건강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한 곡의 작품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생활을 위해 1848년 영국에 건너갔고 옛날 그의 피아노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호의 딸 젠스터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 연주여행을 했으나 이것이 건강에 치명상을 주어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건강의 악화로 1849년 10월17일 오전 2시 쇼팽은 파리 프랑스 봔둠 자택에서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파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가 20년전 고국을 떠날 때 가지고 온 폴란드 흙이 유해위에 뿌려졌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고국의 바르샤바 성 십자교회에 안치 되었다.
그의 작품중에 실내악곡과 가곡등이 약간 있으나 뭐니 해도 피아노 작품이 쇼팽의 본질이며 이는 단지 피아노를 통한 음악의 시를 엮은 낭만주의 작곡가라는 것을 지나 피아노 그 자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쇼팽의 인생이요 철학이라는데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쇼팽의 작품중에 폴로네이즈나 마즈르카는 분명히 폴란드적이지만 전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화려한 장식적인 요소나 섬세한 감각은 파리에서 출입한 귀족사회의 취미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국적불명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흐르고 있는 그의 정신과 감정은 어디까지나 폴란드적이며 이것은 외적의 침략을 받은 고 국에의 애국심으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폴란드적인 체질과 더불어 그의 작품의 특징은 깊은 서정과 풍부한 정서, 여기에 고상한 품위가 큰 매력이 되고 있다.
<주요작품> "즉흥 환상곡 c# op.66 [1835]
"뱃노래 F# op.60" [1846]
"피아노 콘체르토 no,1 e" [1380]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폴로네이즈" [1831]
"피아노 트리오" [1829]
"첼로 소나타" [1846]
"군대 폴로네이즈"
5) 로베르트 슈만 - Robert Schuman [1810-1856]
슈만은 1810년 6월 8일 독일 작센주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나 1856년 7월 29일 역시 독일의 본에 가까운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슈만은 라인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자살을 기도하고,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은 사인 동시에 장차 장인이 될 뷔이크와 법정에서 대결하는 등, 그의 전기에 심심치 않은 화제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사생활이 다사 다난 하기도 했으나 그는 낭만주의 음악을 위해서도 선 두에서 싸웠고 또 많은 업적도 남겼다. 그러기에 슈만하면 독일 낭만파 음악의 대표적인 작 곡가로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슈만은 소년 시절부터 쟌 파울이라든가 호프만등의 문학작품을 가까이 함으로써, 낭만적인 환상을 풍부히 하고 감정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이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하여, 그 의 음악은 자연 낭만적인 시정이 넘치게 되었다. 따라서 슈만의 음악은 순수한 음악적인 구 성보다는, 시적으로 노래를 하고 자기의 낭만적인 환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슈만은 같은 시대의 리스트나 바그너 처럼 기교주의나 화려한 외면을 꾸미는 방향에는 공감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바하나 베에토벤, 슈베르트 등으로 이어 내려온 전통에 입각한 자기 나름의 방향에서 창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멘델스존을 높이 평가하고 브라암스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한편 슈만의 음악은 규모가 큰 곡에 있어서는 고전적인 구성에 집착된 느낌도 있고, 피아노 외에는 악기의 취급이나 균형이 미숙하게 다루어지며, 특히 관현악의 기교에 숙달되지 못하여 높이 평가되지는 않지만 내객에 내포된 낭만적인 환상과 정열, 그리고 꿈과 동 경은 대단히 신중한 것이다.
슈만은 음악에 때해서는 조숙하여 7살때에는 교회의 오르간주자로부터 지도를 받은 것을 비롯해서 점차 음악에 흥미를 가져 작곡도 하게 되었다. 부친은 음악 공부에 비교적 이해하는 태도였지만, 모친은 음악가의 장래성에 불안을 느껴 음악 전공을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슈만이 16세때 누님이 정신병으로 죽었고 이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보다 내성적이고 몽상적으로 되어 문학과 음악에 인생의 위안을 찾았다. 모친은 그를 법률가로 입신시키기 위해 라이츠찌히에서 법률공부를 시켰으나, 본인은 오히려 철학이라든가 역사에 흥미를 가졌고, 프리드리히 뷔이크 밑에서 본격적인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뷔이크의 딸인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클라라와 알게 되었다. 1830년 슈만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격한 나머지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모친의 승낙을 얻어 뷔이크의 지도를 다시 받아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20살이 된 슈만은 손가락이 잘 돌지 않아 너무 무리한 훈련을 한 결과 손가락을 다쳐서 사용불능이 되자 작곡으로 방향을 돌려 지휘자인 도른 에게 이론을 배웠고 바하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슈만은 한편 음악이론에도 붓을 들어 1822년 쇼팽을 소개한 유명한 글을 발표한 이래 34년 에는 <신음악 시보>의 주필로서 독일음악의 전통과 진정한 낭만음악의 옹호를 위해 싸우기 도 했다. 그리고 한편 피아노곡 등 작곡에도 열을 내었다. 1843년에는 멘델스존이 창립한 라이프찌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고 1847년에는 합창단의 지휘자로, 그리고 1850년에는 <듓 세르돌르프>시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창작에는 쉬지 않고 정열을 쏟아 많은 작품을 썼으나 정신병이 점점 악 화되어 1854년 2월 27일에 라인 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조되어 1856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엔데니히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주요작품> "여인의 일생과 사랑" [1840]
"시인의 사랑" [1840]
"가곡집" [1840]
"아베그 변주곡" [1830]
"환상 소곡집" [1837]
"어린이의 정경" [1838]
"낙원과 페리" [1843]
"파우스트에서의 한 장면" [1853] "피아노 5중주 e 장조" [1842]
6) 프란츠 리스트 - Franz Liszt [1811-1886]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의 라이딩그에서 태어나, 1886년 7월31일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19세기에 있어서 피아노 음악의 거장으로서, 또한 희귀한 연주 기교의 명인으로서 먼저 들 수 있는 사람이 리스트이다. 리스트는 화려한 연주가로서 전 구라파를 석권했으나, 그는 단지 한 피아니스트로 시종하기에는 너무나 풍운아의 기질과 패기가 넘쳤다고 보겠다. 이는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교사, 평론가, 그리고 승려로서의 다양한 그의 생활 행각이 잘 입증하여 주고 있다.
리스트는 그야말로 19세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으로서 그가 남긴 발자취는 단지 역사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바그너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었고, 후세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음악가라 하겠다.
리스트의 부친은 게스테르하지 후작의 관리인 이었으며, 음악적인 재능도 있어서 피아노도 치고 첼로도 즐기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이 부친의 영향과 교육을 받아 피아노 연주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리스트는 1820년 9세 때, 처음으로 에덴부르크에서 공개 연주회를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결과 귀족들이 장학금을 대주어 10살 때에는 비인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가족들과 같이 라이딩그를 떠나 비인으로 이사를 하였다. 비인에서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피아노 교칙본으로 유명한 체르니에게 피아노 지도를 받았고, 한편 살리에르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리스트는 1833년 22세 때 말리 더그백작부인과 알게 되어 나중에는 가정을 꾸미게 된다. 이 말리 더그부인과는 성격차이로 39년경부터 불화가 잦아 1844년에는 끝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4년후 러시아로 연주여행을 할 때 키에프에서 알게 된 카로리네 뷔트겐슈타인 후작부인과 다시 두 사람은 생활을 같이 하게 된다. 물론, 이러는 사이에도 리스트는 창작에 강한 의욕을 보여 연달아 작품을 썼고, 28년 경부터는 거장적인 연주가로서 여러 나라에서 절찬을 받으며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야말로 비인이나 베를린도 리스트가 석권해버리다시피 하여 퀘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연주 생활도 카로리네 부인의 권고로 1947년36세때 와이마르에 정착하여 창작에만 전념하게 된다. 리스트는 낭만파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여러 방면에 걸쳐 밚 은 작품을 쓴 다작가로서 여러 종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교향악시와 피아노 곡이다. 리스트가 활약하던 때는 바야흐로 낭만주의가 무르익던 시대로서 특히, 그가 살던 파리는 여러 예술의 근원지로서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문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유고, 라마르티이느, 졸쥬 상드등과 친교함으로써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여기에 리스트는 구성이 크고 복잡 다채로운 표현력을 갖는 관현악에 자기의 이상을 찾게 되어 드디어는 시적인 상념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교향악시>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피아노곡들은 19세기의 거장들이 갖는 어려운 연주 기교를 구사하여 화려한 효과를 내는 풍조를 따르고 있다.
19곡으로 된<헝가리안 랩소디(헝가리 광시곡)>, 12곡으로 된 <초절 기교용 연습곡>등이 그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러한 피아노 작품에서의 기교라든가 효과는, 동 시대는 물론 후세의 연주가나 작곡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리스트의 업적으로는 형식에 있어서 주제를 변용, 사용하여 전체의 곡을 유기적으로 형성하는 등, 그리고 연주가로서, 교사로서의 공적, 또한 베에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의 재 인식, 바하, 그밖에 피아노 레퍼토리의 확대, 지휘에 있어서 바그너를 비롯한 동시대작 곡가의 작품은 물론 선배 대가들의 명곡을 소개하는 등, 그의 업적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주요작품> "피아노협주곡 A장조" [1839]
"단테교향곡" [1855-56]
"파우스트 교향곡" [1857]
"오르페우스" [1854]
"레 프렐뤼드" [1848]
"헝가리광시곡" [1839-47]
"동 상슈" [1824-25]
7) 리하르트 바그너 - Richard Wagner [1813-1883]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나,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70세로 객사를 한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베를리오즈에서 시작되어 리스트에 이르러 꽃을 피웠던 후기 낭만주의 즉, 신 낭만주의는 바그너에 와서 최고도에 달했고 완성의 과정에 왔다. 웅대하고 대규모적인 구상과 방대한 표 현 양식, 대담한 화성법과 반음계적인 도입에 의한 조바꿈의 연속, 형식의 자유로운 확장, 관현악의 대규모적 편성과 웅장한 음향의 표출 등 작곡 기교의 개혁뿐 아니라 그의 생애를 걸고 완성한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체인 악극을 창시함으로써 이른바,바그너 주의로 온 구라파를 휩쓸었던 바그너의 역사상 업적이야말로 영원불멸의 금자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그너는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보여준 천재적인 음악 재능은 나타나지 않았고, 단지 연극에 흥미를 보여 14살 때에 5막짜리 비극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 무렵 베에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음악에 눈 뜨게 되어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작곡 이론을 배웠다. 바그너는 이때부터 교향곡과 그밖에 큰 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20살 때 뷰르츠브르그 극장의 합창 지휘자로 취임함과 동시에 순수한 기악 작곡을 그만 두고 오페라에 전념하였다. 바그너는 21살 때 마그데브르그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24살때에는 <리이거>의 악장이 되었으나 전부터 파리에서 성공할 것을 꿈꾸던 바그너는 1837년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 갔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생을 하며 편곡같은 하찮은 일을 해 주고 호구지책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작곡만은 꾸준히 계 속하였고 드레스덴의 혁명운동에 가담한 나머지 추방령이 내려, 그는 스위스로 도망을 갔다.
1862년에 바그너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되어, 2년후에 바이야안 의 젊은 루우드비히2세의 후원으로 자유로운 창작을 하여 1862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했고, 1867년에는 <뉴유 룬 베르그의 마이스타징거>를 완성했다. 바그너는 자작의 음악극을 이상적으로 공연하기 위 해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건설하여 대대적인 악극<니벨룽겐의 반지>로써 개장을 했다.바그너 의 작품은 대개 3기로 나누어진다.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을 그대로 따른 제 1기, 외면적으로는 아직 전통적인 오페라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극과 음악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기교적으로는 지도동기라고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짧은 동기의 사용 등 많은 발전을 보던 제 2기, 오페라 양식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극과 밀착해서 이어지는 무한 선율과 지도 동기의 사용, 아리아의 폐지와 서곡을 전주곡으로 대치하는 등 완전한 악극을 확립한 제3기로 나누어 진다.
<주요작품> "연애 금지" [1836]
"리엔치" [1842]
"방황하는 네델란드인" [1843]
"탄호이저" [1845]
"로엔그린" [1850]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5]
"니벨룽겐의 반지" [1876]
"파르지팔" [1882]
"황제행진곡" [1871]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1868]
8) 쥬셉페 베르디 - Giuseppe Verdi [1813-1901]
베르디는 1813년 10월 9일 이탈리아의 파르마 현 브세토에 가까운 롱코레라는 농촌에서 태 어나, 1901년 1월 27일 역시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19세기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19세기의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공교롭게도 베르디가 세상에 태어난 해에 독일에서는 악극의 창시자 바그너가 탄생하였다. 베르디는 행상을 상대로 하는 조그마한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을 열광적으로 좋아 하였다. 7세 때 교회의 미사 성제의 시동이 된 베르디는 교회 오르간에 흥미를 갖고 이 를 배워, 10세때에는 노령으로 인해 은퇴하는 오르가니스트의 뒤를 이어 베르디가 오르간 주법을 배웠다. 그리고 밀라노 음악 학교로부터는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입학을 하지는 못하였다.
베르디는 후에 스칼라 좌의 성악 지도자 빈첸초 라뷔나에게 주로 대위법을 배웠다. 1835년 22세 때에는 고향인 브세토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그 후 본격적인 가극의 작곡과 라 스칼라 좌의 공연을 위해 1839년 가족과 더불어 밀라노로 이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리하여 그 해에 그의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초 백작 오베르트>가 초연되어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 때부터 그는 계속 오페라의 명작들을 작곡하여 그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바그너처럼 전 구라파를 휩쓴 극음악의 대가가 되었다. 베르디는 물론 바그너와 달라서 철학적 또는, 사상적 배경이 없고, 솔직하고 인간적인 작품을 썼다. 그의 수법은 전통적이었으나, 자연적으로 새로 운 풍조도 도입하고, 새로운 극적 구성도 시도할 뿐더러 관현악법도 무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리는데 노력했다. 그의 작품의 중심은 역시 성악의 선율이며 관현악도 섬세하고 화려하지만, 결국 노래의 배경을 이루는데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는 생기있고 극적으로 힘찬 박력이 있으며, 베르디는 풍부한 영감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하겠다.
베르디는 26세 때에 최초의 오페라 <오베르토>를 발표한 이래 많은 오페라 작품을 썼는데, 그의 초기의 작품들은 전통에 따르고 있고, 노래의 선율에 중점을 두고 있기는 하나, 그 선율이 활기에 차 있어 성공을 하였다.그러나 그는 이러한 전통적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극적 인 오페라를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리고레토>이다. 여기서는 종래의 선율을 풍부하게 살리면서 전에 보지 못한 극적인 구성과 박력을 갖게 되고 인물 성격의 묘사를 정확하게 하였다. 그후 양식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착잡한 줄거리에 너무 극적이 아닌 그러나 풍부한 선율로 유명해진 <트로바토오레>, 애절하고 낭만적인<라 트라비아타> 등을 만들었다.
베르디는 그의 긴 생애를 거의 오페라에 바쳤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작품은 그리 없고 1874년에 시인 만쏘오니의 죽음을 애도한 장대하고 극적인 그리고 기묘하고 박력에 넘친<진 혼곡(레퀴엠)>을 발표하여, 19세기 최대의 레퀴엠을 남겼다.
<주요작품> "오베르토" [1838]
"나부코" [1842]
"맥베스" [1847]
"리골레토" [1851]
"일 트로바토레" [1853]
"라 트라비아타" [1853]
"아이다" [1871]
"오델로" [1887]
"팔스타프" [1893]
9) 페테르 차이코프스키 - Peter Tchikovsky [1840-1893]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1893년 11월 6일 역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레닌그라드)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 등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음악계를 휩쓸고 있을 때,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전통에 바탕을 든 보편적인 어법으로 음악을 쓴 사람이다.
그는 5인조의 공식적인 생각에 공감을 갖지 못했고 그 과장된 만네리즘을 싫어해서 무엇보다 그는 순수한 감정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 보편적이고 영원성이 있는 음악을 썼다. 물론 러시아의 민족 음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소재로 사용하였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공통적인 수법으로 일반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기교는 민족주의 5 인조보다 우수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감정 내객은 대가다운 풍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이 그의 음악을 오늘날에도 세계인류가 애호하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러시아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비로소 세계적으로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근경인 시골에서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모친의 지도로 피아노를 배우고 지방의 민요를 익혔다. 그러나 그가 10살 때, 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하자, 그 곳 법률 학교에 입학하였다. 1859년 19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과 정열에 못이겨 22살 때 페테르부르그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음 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최초의 대작인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것은 1868년 그가 28살 때이다. 이 곡이 성공하자 그는 계속 작품을 내놓았다. 차이코프스키가 돈 많은 철도 운영자의 미망인 맥크 부인으로부터 연금 6,000루불을 원조 받기 시작한 것은 1876년부터이다. 이로써, 생활이 안정되어 작곡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877년에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 미류후와 마 음에 없는 동정 결혼을 한 결과, 3개월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충격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고생을 하게 되나, 그는 한때 이탈리아, 스위스등지로 요양을 하기도 하였다. 1878년 음악원을 사직한 차이코프스키는 구라파 여러 나라와 미국 등으로 순방하면서 자작품을 지휘 연주한 외에는 주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893년 그의 <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5일후,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 "대 서곡" [1812]
"백조의 호수" [1877]
"잠자는 숲속의 미녀" [1890]
"호두까기 인형" [1892]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1869]
"비창 교향곡" [1893]
"만프레드" [1885]
"유진 오네긴" [1870]
10) 안토닌 드보르작 - Antonin Dvoralk [1841-1904]
드보르작은 1841년 9월 8일 보히미아(지금의 체코슬라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약20마일 떨어 진 네라호제베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1904년 5월 1일 역시 체코의 프라하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난 체코의 민족주의 작곡가이다.
드보르작은 고깃간 겸 여관을 경영하는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사를 계승시킬 부친의 의사와는 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 바이올린을 곧잘 연주했고, 민속 음 악에 친근해졌다. 1857년 16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2년 후 에 졸업을 하였다. 그러나 드보르작으로서는 이 학교 교육보다는 당시 작곡가 겹 지휘자였던 카레르벤들 과의 교우에 의해 얻어진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단한 노력형으로 여기 저기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도 있었고, 사적인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주자로도 일했다. 이와같이 생활고와 싸우면서 착실히 공부하며 작곡도 꾸준히 하였다.
그의 초기의 작품은 고전적인 견실한 기초위에 민족적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후에 스메타나에게 인정되어 더욱 민족주의에 기울어 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메타나의 음악을 모방하지 는 않았으며 민족적인 감정을 개성적인 입장에서 표현하였다. 드보르작은 스메타나처럼 세련미는 없지만 소박하고 생기에 차 있을 뿐더러 박력과 정열이 넘친다.
그의 음악가로서의 영감은 슈베르트에 비할 만큼 풍부하고 자연적이며 항시 발랄한 음악성이 충만되어 있다.
그의 작품중에서 가장 드보르작의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향곡과 실내악이다. 특히 9 개의 교향곡은 견실한 고전적 구성으로써 체코적 감정을 노래한 근대 체코 교향곡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1890년 드보르작은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 이론과 관현악법, 악식론 등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1892년 51세때 뉴요오크 국민음악원 원장으로 초청되어 도미하였다. 이때의 산물이 유 명한 <신세계교향곡>, 현악4중주곡 <아메리카>등이다.
드보르작은 1895년 다시 체코로 귀국해서 작곡과 교육에 전념을 하였으며, 1901년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스메타나에 의해 확립된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이 처음으로 세계적으로 발전한 것은 드보르작의 공이라고 하겠다.
<주요작품> "미국" [1893]
"성 루드밀라" [1886]
"미사" [1887]
"레퀴엠" [1890]
"신세계 교향곡 e단조" [1893]
"첼로 교향곡" [1895]
"쟈코뱅" [1897]
"자연, 삶, 사랑" [1892]
국민악파음악
19세기 말경 러시아, 보헤미아 및 북유럽 등에서 나타난 민족주의 음악인데 음악의 기법상으로는 낭만파음악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표현되어 있는 민족적인 색채는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기법에 의해서 한층 더 명확한 민족주의 음악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국민주의 음악이 맨 처음 활발하게 일어난 나라는 러시아로서 글린카(M.I. Glinka, 1804∼1857)로 러시아 최초의 오페라《황제에게 바친 목숨》을 발표한 이후에 이른바 '5인조'가 국민주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5인조의 리더인 발라키레프(M.A. Balakirew, 1837∼1887)은 오페라 《이고르 공》등을 작곡했고, 오페라《보리스 고두노프》와 모음곡《전람회의 그림》등을 작곡한 무소르그스키(M.P. Mussorgsky, 1839∼1881), 관현악법의 대가로서 《세헤라자데》등을 작곡한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리고 큐이(C, Cui, 1835∼1918)등이 있다. 보헤미아의 첫 번째 국민주의 작곡가는 스메타나(B, Smetana, 1824∼1884)이다. 그는 리스트의 영향을 받아《몰다우》등 6개의 교향시 연작인 《나의 조국》, 오페레타《팔려간 신부》등으로 보헤미아의 국민 음악을 확립하였고, 드보르작(A. Dvorak, 1841∼1904)은 교향곡《신세계》등 음악적 비중이 높은 곡들을 작곡하여 민족음악의 금자탑을 쌓았다. 그 외에 노르웨이의 그리그(E, Grieg, 1843∼1907), 핀란드의 시벨리우스(J. Sibelius, 1865∼1958), 스페인의 알베니츠(I. Albeniz, 1860∼1909), 팔랴(M.D Falla, 1876∼1946)등이 있다.
발라키레프(1837-1910 : 러시아)
작품은 많지 않으나, 관현악곡, 가곡, 피아노곡 등은 서정적인 시적 감정이 풍부하다.
보로딘(1833-1887 : 러시아)
의학 박사로서 교향시 <중앙 아시아의 광야에서>, <이고르공> 등의 걸작을 남겼다.
차이코프스키(1840-1893 : 러시아)
국민 악파 5인조와는 다르게 서구풍의 수법으로 낭만파 음악을 썼다. 그러나 그의 작품 교향곡 <비창>, 무용 모음곡 <백조의 호수>,<호도까기 인형> 등에서는 역시 다채로운 슬라브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무소르그스키(1837-1881 :러시아)
방종한 생활로 정신 착란이 되어 절명하였으나, 오페라 <보리스고두노프>, 교향시 <벌거숭이산의 하룻밤>,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리이크(1843-1907 : 노르웨이)
그리이크는 청년시절에 독일로 유학하여 작곡과 피아노를 배워,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귀국 후에는 자기 나라의 풍토와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음악을 만들어 , 노르웨이 국민음악의 토대를 쌓았다. 그의 음악은 서정성과 북유럽의 향토색을 풍부히 표현한 신선감이 넘치는 작품으로 사랑받는다.
시벨리우스(1865-1957 : 필란드)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으나, 교향시 <핀란디아>가 유명하다.
스메타나(1824-1884 : 보헤미아)
스메타나는 어릴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19세 때에 프라하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그 이후로 피아니스트나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작곡 활동을 계속하여, 수많은 뛰어난 작품을 썼다. 오페레타<팔려간 신부>, 교향시 <나의 조국>이 유명하다.
드보르자크(1841-1904 : 보헤미아)
뉴욕 음악원의 초청으로 아메리카로 건너가 그 곳에서 3년간 지냈다. 그 때 작곡한 유명한 교향곡 <신세계>에서는 아메리카 흑인 민요를 교묘한 솜씨로 집어 넣은 것으로, 이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음빛깔이 다채로운 관현악법으로 다루어져서 누구나 좋아하는 명곡이다.
근대현대음악
20세기는 새음악 (독. Neue Musik, 라. Musica nova, 동시대음악 Contemporary Music, 현대음악 Modern Music, 전위음악 Anant-grade)의 시대이다. 새로운 음악이란 말은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시대가 바뀌면서 과거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거와의 단절이 이렇게 심했던 적은 없었는데, 이는 조성의 포기(쇤베르크)와 모든 전통적인 '음악' '작품'이라는 개념을 포기한 일(존케이지)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세기라고 불리는 19세기는 인류의 역사에 일대 변혁을 야기시켰다. 특히 그 후반에 이르러서는 인류의 생활과 직접 관련되는 수많은 발명과 고안이 이루어졌다. 교통과 전파 매체의 발달로 세계는 더욱 작게 만들어져서 오늘의 새로운 창조를 그 이튿날에는 이미 옛것이 되게 함으로서, 인류사에 끊임없는 창조의 불길을 질렀던 것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보급은 이것을 더 빠르게 진행시켰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당연히 미(美)에 대한 인간의 감각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표준적인 심미관(審美觀)이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20세기에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음악들의 공존을 보여 준다.
지나간 세월의 음악, 다른 민족들의 음악, 이런 모든 음악들의 자료가 음반과 녹음기의 발명으로 쉽게 들을 수 있어 모든 음악과 예술에 대한 지식이 확대되어 간 것이다. 거기에다 전제정치와 제 1,2차 세계대전에 의한 공포와 재난, 인류전멸의 위험, 경제대공황, 빈부격차, 빈국과 부국의 대립, 동서대립에 의한 긴장상태, 말세론적 위기감, 미래세계에 대한 동경, 공상과학세계 등 급속하게 변화하는 과학문명과 사회의 갖가지 불안감 등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가치 기준과 의식 상태가 변화하게 되고 또한 이와 함께 미(美)의 개념이 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달라지게 된 것이다.
현대음악의 특징인 다원주의와 불협화음은 통일된 세계상의 결핍, 인간과 자연의 조화상실, 인간의 내적 부조화를 증거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 중의 하나가 음악이라는 과거의 미적 작고고 원칙은 근본적으로 부정된다. 이제 음악이 무조건적으로 '아름답다'든지 조화스러워야 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진실'해야 하기 때문에 추(醜)할 수도 있다. '음악'과 '음악예술작품'의 개념에 대한 태도가 변한다. 20세기의 음악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적 현상들을 관철시켜, 이것이 옛 음악관과 함께 병존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새로운 현상들에는 신고전주의와 같은 보편적 양식도 있고, 수많은 개성적 해결 방안의 것들도 있다. 다양성은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악파, 지향성, 유행성, 모델은 점차 빠르게 변화하여 지속성을 띠지 못한다.
보편적인 구분, 즉 기악과 성악, 오페라, 교향곡, 소나타 등의 구분이 20세기에는 더욱 명확한 것이 못된다. 예외와 혼합, 그리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서양음악이 이국적 요소를 도입하는데 그쳤으나, 20세기는 이국의 문화와 음악으로부터 서양음악의 존립과 표현을 위한 내적 자극을 찾으려고 한다. 특히 인도를 비롯한 동양음악은 높은 정신성과 섬세한 음악 전통으로 매력적 자극제가 되고 있다. 작곡가들은 새로운 것을 연주 기술면에서도 찾았다. 이제까지의 악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20세기의 기본사고에 따라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서 해당 악기의 원래 목적을 크게 왜곡시키기도 한다. 세계 곳곳의 악기를 구입하거나 제작하여 사용하거나 새로운 악기를 발명하기도 하여 새로운 음향을 찾는다.
1900년 전후(前後)의 음악
후기 낭만의 1850년 이후 리스트와 바그너의 작품에서 조성(調性, Tonality)은 더욱 애매해져 무조적인 경향으로 점차 나아갔다. 1890년경을 낭만주의 음악의 해체로 보고 있는데 그 후 그 유산을 풍부하게 받으면서 또는 그 반동으로 새 양식이 대두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문학과 회화 등 자매예술과의 영향도 많이 나타난다.
(1)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
프랑스의 드뷔시가 창안한 인상주의 음악은 낭만주의에서 현대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악파이다. 이 음악은 프랑스의 인상파의 회화와 상징문학에서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인상파 회화에서는 빛과 그림자를 중시하는 야외 회화를 주장하였고, 형태를 그리는 선보다는 색채와 분위기적 인상을 중시하였다.
음악에 있어서도 이와 흡사하여 선율이나 형식의 명확성 대신에 감정을 강조하는 색채적 음악을 썼다. 자연계의 여러 가지 현상,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외계로부터의 자극에 대하여 예술가가 받은 순간적인 감응이며 응답이다. 그러므로 인상이란 외계의 묘사가 아니라 한번 마음에 자극된 내적인 인상을 결국 주관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음악의 다이내믹한 감동보다는 음빛깔, 뉘앙스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한다. 기법상으로는 화음진행이 색채적이고, 연속적인 불협화음과 선법, 5음음계등 예외적인 음계 등을 사용하였다.
드뷔시는 1892년에 말라르메(S, Mallarme, 1842∼1898)의 상징시에 작곡한 《목신의 오후에서의 전주곡》으로 인상주의 수법을 확립시켰다. 그 외에도 관현악 작품《녹턴집, Nocturnes》《영상 Imagine》《바다 La Mer》가 인상주의의 대표적 작품들이고, 팔랴(M, Falla)의 《스페인 정원에서의 밤들》과 레스피기(O. Respighi)의 《로마의 소나무》등이 있다.
(2) 원시주의(Primitivism)
19세기말 극도의 문화적인 성숙에 따른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동경에서 온 것이다. 이국적인 제재를 음악에 도입하여 새로운 것을 표현하려 하였다. 원시음악은 당시 음악의 지나치게 세련된 연약한 음악에 대해서 원시 예술의 힘찬 원기를 되찾아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음악이라 하겠다. 기법상으로는 일정한 리듬을 집요하게 반복하거나 홀수박자 또는 폴리리듬(Polyrhythm)등을 사용하였고 강하고 자극적인 색채 감각 등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스트라빈스키(I. Stravinsky)로서 그의 3대 발레인《불새》《페츠루시카》《봄의 제전》등의 작품이 대표작이다.
(3) 표현주의(Expressionism)
20세기 초반에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주로 비엔나에서 활동한 작곡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외적인 형태의 표현으로서의 인상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내면적인, 특히 잠재의식적인 일면을 표현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정치정세는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어 유럽사회는 불안에 차고 사람들의 마음은 어두웠으며 정신은 안정을 잃고 있었다. 쇤베르크 등의 작곡가들은 고착된 표피성, 이중윤리, 순응주의, 허구적 달콤함으로 특징이 지워진 시민사회를 거부하고 도전적인 진실, 깨어 있는 감수성, 불편함까지도 감수하는 철저함을 추구한다.
표현주의는 극단성, 대조성, 거의 광란에 가까운 격정을 많이 보여주는데 그후 이러한 극단적인 것은 새로운 음악의 본질이 되어 고전적 균형을 철저히 기피하게 된다. 표현주의 기법의 특징은 철저히 주관적이고, 멜로디는 무조(無調, Atonality)이고 화성은 극단적인 불협화음, 거칠게 연주되는 악기들의 음색대조 등을 들 수 있다. 표현주의 작품으로는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와 교향시곡《펠레아스와 멜리장드》등을 들 수 있다.
(4)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신고전주의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주관적인 정서의 과잉, 방대한 관현악의 편성, 표제음악적인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등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신고전주의는 객관성과 형식성을 보이는 낭만주의 이전의 음악관념으로 복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18세기 고전주의 양식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고전주의의 기본적으로 19세기 낭만주의 이전의 간결한 형식미를 추구하지만 예기치 않은 전조, 선율의 혼합, 그리고 강렬한 화성, 불협화음 등의 20세기 성향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서는 스트라빈스키(I. Stravinsky)의《풀치넬라》, 《피아노와 목관악기를 위한 협주곡》, 《시편 교향곡》, 힌데미트(P. Hindemith)의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비올라를 위한 4개의 협주곡 op.36》, 그리고 프로고피에프(S. Prokofiev)의 오페라《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피아노 협주곡》,《고전 교향곡》등이 있다. 그리고 바르토크(B. Bartok)는 민족음악을 바탕으로 하는 음악 어법으로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말하자면 그는 민족적 신고전주의 작곡가로 간주할 수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미크로코스모스》,《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등이 있다.
(5) 12음주의(Dodacaphonism)
12음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을 12음음악이라 하는데 이는 쇤베르크가 종래의 조성 음악에서 벗어나 철저한 무조성의 체계화를 시도하여 창조한 것이다. 이 기법은 한 옥타브 안에 있는 반음을 포함한 12개의 서로 다른 음을 1회식 일정한 순서에 따라 사용하는 것인데 먼저 세리(Serie)라고 하는 음렬(音列, Tonreihe)을 만들어 이 세리를 역행, 전위, 역행전위 등으로 진행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전통음악의 음조직을 해체하고 12개의 음을 모두 평등한 가치로서 독립시켜 새로운 음의 표현을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장대한 곡에 이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 음악은 쇤베르크의 제자 베베른과 베르크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제2차 대전 후에는 여러나라에 보급되어 더욱 새로운 발전을 보였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쇤베르크의《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 오페라《모세와 아론》, 베르크의《바이올린, 피아노,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실내합주곡》, 베베른 작품《칸타타 No.I, op.29)등이 있다.
(6) 신즉물주의(Neue Suchlichkiet, 新卽物主義)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을 철저히 하려는 것으로 표현주의에의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다. 표현주의가 강한 주관성에 기초하고 있는데 대하여, 신즉물주의는 대상물의 본질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정확하나 묘사를 의도하는 예술운동으로서, 다분히 실용성이 인정되는 운동이었다. 특별한 경우와 목적을 위해 작곡되어 청중과 연주가의 거리감을 좁혀서 음악적인 이해를 보다 쉽게 하려는데 있다. 그래서 극단적인 전위적 기법보다는 단순한 자료를 사용한다. 힌데미트(P. Hindemith) 의 《플린의 음악제》, 《우리는 도시를 세운다》, 영국왕 조지5세가 서거하였을 때 작곡한 《장송곡》이 있다.
1945년 이후의 음악
제2차세계대전이 1945년에 끝나자 지금까지 폐쇄되었던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길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런 제대로 궤도에 올라 새로운 양식의 예술 활동이 나타나기는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직후에는 반낭만적인 사조가 강한데 비해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메시앙과 같이 르네상스와 주세기의 기교의 부활을 꾀하는 작곡 활동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는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개척해 나가려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양식과 기법에 의한 1950년대부터의 새로운 음악을 좁은 의미에서 아방가르드(Avant-grade,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 구체음악(Musique Concrete, 具體音樂)
1948년에 프랑스의 파리 방송국에서 쉐퍼(Pierre Shaeffer, 1910∼1984)가 처음 시도한 이후 1950년 파리에서 최초의 음악회를 가졌던 새로운 표현 방법이다. 이것은 악보에 음을 적는 대신에 음악이나 말을 직접 녹음시켜서 연주한다. 문닫는 소리, 자동차 소음, 병따는 소리 등 현실에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음향을 녹음하여 테이프에 담고 편집한다. 녹음한 것들을 서로 겹치게 하거나 테이프의 회전 속도를 조절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을 미국에서는 테이프 레코더 음악(Tape Recorder Music)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러한 구체음악은 착상부재가 너무 단순하다는 비판을 받은 후 전자음악으로 방향이 전환된다.
(8) 전자음악(Elektronische Music, 電子音樂)
최초의 전자음악 스튜디오는 1951년 쾰른의 북서 독일 방송국에 설치되었는데 그 책임자는 아이메르트(H. Eimert, 1897∼1972)였고, 이어 밀라노, 파리, 미국 등으로 확산되어 갔다. 전자 기술적으로 확성시키기만 하는 음악은 여기에 속하지 않고 전자로 만들어낸 음향이나 작품만을 전자음악이라 한다. 이 음악은 구체음악처런 전자음향 발전기를 통하여 만들어진 소리를 녹음 테이프에 집어넣고, 그 테이프를 편집하여 얻어진 소재로 구성된다. 발음기로 나온 순음을 겹치게 하고, 뛰게 하고, 메아리지게 동시적으로 울리게 하는 등의 여러 방법으로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저자음악과 일반적 소음을 결합시키기도 하고 준비된 녹음 테이프와 연주자가 같이 연주하기도 한다. 이것은 1960년대의 신디사이저(Electronic Music Synthesizer)의 등장으로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전자음악을 행하고, 후에 재결합하고, 혼합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전자 음악의 시대로 가고 있다.
전자음악은 아이메르트와 베이어(R. Beyer)등이 시작했으나 전자음악의 권위자는 스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으로는 《전자음악》,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콘카테(Konkate)》, 《소년의 노래》등이 있다.
(9)우연성의 음악(Music of Chance Operation, 偶然性)
불정확성 음악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통적 음악 개념으로는 음악이라고 보기 어려운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아방가르드이다. 이 음악은 일정한 법칙이나 제한이 없다. 작곡가는 기존하는 음표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련의 기호 같은 음표를 대신하기도 한다. 연주자는 작곡자의 의도를 자유롭게 이해하고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물론 연주는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고 작품은 녹음을 해야만 보존될 수 있다. 미국의 존 케이지(John Cage, 1912∼)와 스토크하우젠은 우연성 음악을 많이 실행하였다. 존 케이지의 《상상적인 풍경화, op.4)는 12개의 라디오를 각각 다른 주파수에 맞춰 놓고 두 사람의 연주자가 나와 주파수와 음량을 조절한다. 1954년에 발표한 그의 작품 피아노곡《4분 33초》에서는 피아니스트가 악기 앞에 앉은 채로 아무 연주도 하지 않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피아노 뚜껑을 닫고 퇴장한다. 말하자면 그 시간이 들려오는 잡음이라든가 듣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 고동소리 그 모두가 다 음악이라는 것이다. 스토크하우젠의 작품 《피아노곡 11번》은 19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6가지의 다른 빠르기와 강약, 여러 가지 스타카토와 레가토 등으로 순서 없이 연주한다. 타악기를 위한 작품《싸이클》에서는 악보가 원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연주자는 어느 방향에서 시작해도 결국 시작 지점으로 오게 된다. 이와 같은 경향은 12음기법 음악과 같이 너무나 치밀한 작곡법에 대한 반발과 세계대전 이후 계속된 세계 정세의 불안과 긴장의 연속 등에 기인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관현악의 어떤 파트에 대하여 대략 지시만 해주고 연주자가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작곡법은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재료, 테크닉, 합리주의가 매력을 상실하고 예술과 음악에 새로운 것에 대한 추진력이 쇠퇴한다. 50∼60년대의 고립적 성향 대신에 청중과 공동체에의 접근이 시도된다. 주관적 감정은 나르시즘적 성향까지 띠는 일이 많고, 사회와도 긍정적으로 연결된다. 교향곡, 현악4중주, 오페라 등과 같은 옛 장르들과 기존 장르들의 복합형태가 선호된다. 이 음악들은 50∼60년대의 혼란하고 다양성을 보이던 아방가르드 음악처럼 많은 말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음악의 모델은 고전 음악이 아니고 낭만주의 음악에 가깝다. 하지만 다양한 개성은 그대로 존속된다. 항상 좋은 질의 음악은 오늘날도 어떤 프로그램이나 악파를 통해 나오지 않고 작곡가 개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1) 클로드 애시유 드뷔시 -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2)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i Rakhmaninov [1873-1943]
3) 아놀트 쇤 베르크 - Arnold Schonberg [1874-1951]
4) 프리츠 크라이슬러 - Fritz Kreisler [1875-1963]
1) 클로드 애시유 드뷔시 -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드뷔시는 1862년 8월 22일 프랑스 산 제르만 안 레이에서 태어나 1918년 3월 25일 역시 프랑스의 파리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근대 작곡가이다.
근대음악에서 맨 먼저 낭만 음악에 반기를 든 사람이 드뷔시이다. 이 사람은 음악을 감각 적인 면에서 구성하는 이른바, 인상주의를 주장한 개척자로서, 그를 인상파 음악의 시조라고 도 한다. 드뷔시는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1살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을 하였고, 1884 년 22살 때에는 칸타타<방탕아>로 로마 대상을 받아 로마로 유학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앞에 약 반년 가량, 러시아의 부호이며 차이코프스키의 경제적인 후원자였던 멕크부인의 주선으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처음 들어 본 것도 이 때이며, 그는 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열광해 버렸다.
드뷔시에게는 로마 유학 3년이 견디기 어려운 무미건조한 생활이었던 모양으로 1887년 3년 의 시한을 채우지 못하고 2년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드뷔시도 처음에는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었고, 당시의 인상주의 시인 보오드레르에 경주하였다. 또, 그는 벨레느라든가 마라르메 등의 시인들과도 친교를 가져 문학적인 교양도 쌓았다.
20세기 음악 혁명의 기수인 드뷔시도 그의 초기의 작품 이를테면, <방탕아>라든가 피아노 곡인 <아라베스크>혹은 <베르자모 조곡> 등에는 아직 후기 낭만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다. 그러나 드뷔시는 점차 바그너에서 멀어져서 사티의 주장에 공감하여 문학과 예술의 사조와 동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져 인상주의의 표현양식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드뷔시가 후기 낭만주의 특히, 당시 음악계를 석권하고 있던 바그너주의와 손을 끊고 새로운 음악 즉, 인상주의음악을 창시한 첫 작품이 마라르메의 시에 의한<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다.
이 관현악곡이 작곡된 것은 1892년 인데, 2년 후인 1894년 12월, 파리의 국민 음악 협회에서 초 연 되었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소동은 1829년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을 처음 발표할 때 이상으로 컸다고 한다. 드뷔시가 주장한 인상주의 음악은 원래 미술 계에서 일어난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외계의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감각적 인상만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물체의 형태가 아니라 색채와 빛, 그 리고 생기이다. 선은 확실치 않지만 색채만은 아름답고 감각적인 농도가 있다.
드뷔시는 이것을 음악에 옮기려고 했고, 한편 당시 문학에서 쓰이던 상징주의 즉, 반자연주의적인 태도에서 주관적인 기분을 표현하고 명확한 관념보다는 막연한 느낌, 환각과 같은 정조를 중요시하는 이 상징주의를 음악에 실현시킨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선을 취급하는 법칙 즉, 조성이라든가, 음계라든가, 대위법도 보다 자유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규칙적인 박자의 관념도 없어지고 까다로운 화성법도 기능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색채적으로 취급 되었다.
이리하여 드뷔시는 이 인상주의 수법으로 근대 오페라의 특이한 존재인 <페레아스와 메리 산드>를 비롯하여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성악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작품> "방탕아"
"아라베스크"
"페레아스와 메리산드"
2)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i Rakhmaninov [1873-1943]
라흐마니노프는 1873, 4월 1일 러시아의 북부지방 노브고로드의 오네그라는 조그마한 마을 에서 태어나,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오니아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피아노의 거장인 동시에 작곡가이다.
라흐마니노프는 보기 드문 거인적인 스케일의 피아니스트로서, 뛰어난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이에 못지 않게 화려하고 호담한 지극히 개성적인 표현을 하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작곡가로서의 라흐마니노프의 창작 중심은 역시 피아노 음악이라 하겠다. 라흐마니노 프는 차이코프스키, 안톤 루빈스타인, 그라즈노프, 이런 사람들 처럼 러시아적인 경향을 다분 히 갖는 작곡가로서, 같은 러시아 작곡가인 무소르그스키나 보로디 등의 국민악파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기에 이 보편성으로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라흐마니노프는 9살 때, 페테부르그 음악원에 들어갔다가 3년후에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 학을 하였다. 여기서는 피아노를 시로티에게, 작곡을 타니에포와 알렌스키에게 배웠다. 재학 중에는 작곡과 피아노에 비범한 재능을 보여 유명했고, 1892년 그가 학교를 나올 무렵에는 오페라 <아레코>를 써서 작곡의 특별상인 금 메달을 타기도 하였다. 학교를 나온 라흐마니노프는 우선 피아노연주가로서, 러시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연주활동을 했고 외국에도 연 주 여행을 함으로써 차차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897년부터 99년까지 3년간은 모스크바의 시립 가극장에서 지휘자로 활약을 하였다.
그 후 런던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초청을 받아 지휘자로서, 독주자로서의 명성을 떨친 후 1902년에는 비인악단에 나타나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03년 러시아에 돌아온 그는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여자 음악 학교 교수로, 이듬해에는 황실가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3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1906년에는 독일 드레스덴으로 옯겨 작곡 생활을 하면서 연주자와 지휘자로 구라파 여러 나라의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그 이듬해부터 1913년까지 모스크바 교향악 협회 지휘자로 활약을 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영주하였다.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주관적인 정서를 앞세운, 지극히 환상적인 데가 있으며, 이것을 명확하고 힘찬 형식감에 담아 구성하고 있다.
그 특색이라면 감미롭고 풍부한 정감으로 노래시키는 선율, 그리고 기복의 선이 굵은 다이너미즘의 형식과 당당하고, 대범한 긴장도에 있다고 하겠다. 러시아 민속적인 소재를 서구적, 특히 독일 낭만적인 수법으로 처리하고, 여기에 슬라브적인 끈질긴 정서와 애수가 흐르는 환상이 빚어진다.
<주요작품> "아레코" [1892]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죽음의 섬"
3) 아놀트 쇤 베르크 - Arnold Schonberg [1874-1951]
쇤베르크는 1874년 9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태어나, 1951년 7월 13일 미국 로스앤 젤레스의 교외 산타모니카에 있는 자택에서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현대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 즉, 현대 음악에 혁신적인 영향을 준 지도적인 작곡가를 든다면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그리고 쇤베르크 이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쇤베르크는 이른바 12음의 음악의 발명과 동시에 완성자로서 20세기 전반기에 있어서 위대한 존재인 동시에 같은 시대는 물론, 그 이후의 세대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이다.
자아 비판적인 자세와 창조의 논리적 엄격한 그리고, 미학적인 철저함에 있어서 쇤베르크 처럼 독창적이고 견고한 천재는 최근의 음악 사상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쇤베르크는 그 혁신적인 기법과 반 역사적인 사상에 의해 20세기의 음악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 왔으며, 그 의 제자들인 알반 베르크라든가 베베른 등과 더불어 이른바 비인 12음 악파라고 일컬어지는 유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음악의 도시 비인의 습관에 따라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이라든가 첼로를 켜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모여서 실내악을 연주하며 즐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을 위해 여러 가지 작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식으로 작곡 기술을 배우고 이론을 배운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젊은 작곡가들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체므린스키와 알게 되어 그에게 작품을 보일 기회가 있었다.
체므린스키는 쇤베르크의 재능을 인정,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이러는 동안 그 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이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음악교육이었다.
쇤베르크는 이 사이에 작곡을 하여 초기의 현악 4중주곡과 가곡을 썼다. 그리고 1899년에 는 현악 6중주곡인 유명한 정야를 완성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작품들은 아직 후기 낭만주의 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쇤베르크 특유의 관능미를 표시하고 있으며, 또 교 향악시<페라아스와 메리잔데>는 4도로 만든 화음이나 온음으로만 구성된 <온음 음계>를 사용하는 등 혁신적인면도 있지만, 전체로서는 아직 바그너의 후기 낭만주의의 테두리를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이 후기낭만주의의 묘사적 경향과 인상파의 인상 존중의 사고방식을 불안하고 내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나 정신의 힘을 표출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이른바, 이 표현주의는 조성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무조를 채택하게 되고, 종래의 음 체계를 파괴하여 8도 속에 포함되어 있는 12음에 모두 평등한 중요성을 주어서 이를 일정한 순서로 나열하고 이 음열을 토대로 음악을 구성하는 이른바, 12음 기법을 완성한 것이다.
쇤베르크는 1933년 나치스에 쫓겨서 파리로 나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작품번호50에 이르는 작품을 섰다. 쇤베르크의 음악을 아직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가 개혁한 양식은 현대 작곡가로서 크건 적건간에 영향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요작품> 현악 4중주 제 4번 "기대" [1909]
"행복한 손" [1913]
"오늘부터 내일 까지" [1929]
"모세와 아론" [1932,미완성]
"필레아스와 멜리장드" [1902-3]
"구레의 노래"
"달의 피에로"
"근대 시편" [미완]
4) 프리츠 크라이슬러 - Fritz Kreisler [1875-1963]
크라이슬러는 1875년 2월2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태어나, 1963년 2월 29일 뉴우요오크 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바이올린의 거장이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어렸을 때 바이올린에 비상한 재질을 보였다. 그는 7살 때에 비인 음악원에 들어가 헤르메스베르그에게 지도를 받았으며, 우등생으로 졸업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10살밖에 안 되었다. 그는 다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메서어르에게, 작곡을 드 리이브에게 배우고, 1887년 12살 때 졸업하였다. 크라이슬러는 이듬해인 1888년 뉴우요오크 의 스타인 웨이홀에서 데뷔 연주를 가짐으로써 성공적인 연주가로서의 스타아트를 한 것이다. 그는 이어 피아니스트인 모리츠 로오젠 터어르와 더불어 미국의 여러 곳을 연주 여행도 했으나, 그 후 그는 음악을 중단하고 비인에서 의학 공부를 했으며, 또 로마와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였다.
크라이슬러는 1899년 베를린에서 다시 데뷔 연주를 가져 깊이 있는 인간미를 보여주었고, 190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미국 연주 여행에서 열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는 한 대 자신의 연주가로서의 생명이나 기능에 대해 회의를 느껴 고민도 하고 음악을 포기할 까지 가졌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이끈 것은 1902년 한 미국 여성 할리에트 리이스와 알게된 후의 일이다. 리이스의 집안은 담배제조업을 하는 대 부호였다. 무명의 바이올니스트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끝내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그는 이 리이스의 열성어린 격려와 내조에 특별한 용기를 얻어 마침내 연주가로서 입신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크라이슬러는 1904년부터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날로 올라가 온 구라파를 열광시키는 성공을 거듭했다. 그는 1904년 런던 필하모니협회로터 <베에토벤 금패>를 받았다. 그런데 1914년 제1차대전이 일어나자 지원병으로 종군하여 러시아의 기병과 싸우자 부상을 입고 제대하였다. 그는 1915년 다시 전 세계로 연주여행을 떠나, 이때부터 약 20년간 크라이슬러의 전성시대가 계속 된다.
크라이슬러는 독일 나치스 세력이 오스트리아로 미치자 국적을 프랑스로 옯겼고 그 후 1943년 미국으로 귀화하여 여생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는 20세기 후반에 있어서 최대의 바이올니스트로서 연주는 온화하고 고귀한 품격이 있을 뿐더러 아름다운 음색과 친근한 호소력, 그리고 마음속으로부터 즐기며 바이올린을 노래시키는 비인 기질의 연주가라고 하겠다.
<주요작품>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아름다운 로즈마린"
"중국의 북"
"비인 광시곡"
출 처 : http://blog.naver.com/nayaleejk/6630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