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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로 150매 분량을 쓴 정성일의 평도 대단하지만 뭔가 아쉬운 게 있었다.그래서일까?허문영의 <괴물>평을 읽고 이 사람 영화를 정말 제대로 보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을 언급한 평론가는 허문영이 유일하기 때문이다.영화를 보고 왔다고 블로그에 속삭이는 네티즌들이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여지껏 숱하게 나온 괴물에 대한 평들 중에 최고다.한달전에 내가 쓴 허접한 괴물 리뷰랑 비교해보시라.공감 9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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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그들은 누구인가?<괴물>
 
내가 보는 것을 당신도 보고 있는가, 라고 묻는 영화 <괴물>

지난호 이 지면에 실린 정성일의 <괴물>평은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으로 끝맺고 있다. 다른 이의, 아마도 다른 의견을 초대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사적으로도 전영객잔의 다른 두 필자가 <괴물>에 대해 쓰기를 몇 차례나 권했다. 내키지 않는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썼고 게다가 정성일이 150매 분량으로 쓴 영화에 대해 같은 지면에 곧이어 쓴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소리 듣기 힘든 일이다.

결국 쓰게 된 건, <괴물>을 두 번째 봤을 때 첫인상과 좀 달랐기 때문이다. <괴물>은 훨씬 복잡하고 불균질한 영화였다. 한마디쯤 더 붙여도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정성일의 대의에 동의한다. 이 글은 일종의 첨언이다. 나는 그와 같은 의문에서 시작해 얼마간 다른 경로를 거쳐서 몇 가지 의견을 첨부하려 한다. 그리고 <괴물>을 새로운 영웅의 도착이라고 말한 3주 전 이 지면에서의 내 결론을 보충하려 한다.

많이 말해지진 않았지만 실은 누구라도 공유할 첫 번째 의문은 <괴물>의 괴물이 별로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메기와 아구와 초대형 골뱅이를 합쳐놓은 형상의 이 괴물은 물 밖을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첫 등장에선 비탈에서 저 혼자 굴러떨어질 만큼 어설프다. 게다가 조스처럼 현실의 생명체도 아니다. 에일리언 이후에 수없이 등장한 엄청난 크기와 괴력의 영화 속 괴물 곁에 놓으면 이 괴물은 차라리 초라하다. 한 네티즌은 “총 한방으로도 넘어지는데, 왜 군대를 동원해 로켓포로 죽이지 않지?”라고 순박한 댓글을 달았는데, 정당한 의문이다.

이것과 연관된 두 번째 의문은 박강두 가족을 제외하고는 괴물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영화 속의 많은 사람들은 괴물이 전파하는 것으로 선전되는 바이러스는 무서워하지만 정작 괴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건 얼핏 이야기의 억지처럼 보인다. 괴수영화의 장르적 쾌감이란 면에서 보면 <괴물>은 엉성한 영화다. 두 가지 의문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대답은 시원찮은 괴물이지만 어쨌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살려둬야 괴수영화가 성립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를 실망스럽게 본 소수의 관객은 이런 식의 평판을 여기저기에 올려놓았다.

이 의문을 전혀 제기하지 않고 찬미하거나,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좋다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나는 이 의문에 <괴물>의 대답이 얼마간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면에서 시작해보자.

<괴물>은 정치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실패한 사업가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한강 다리 중간에서 자살하려는 듯 난간에 매달려 있다. 동료 두명이 그를 말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수면을 바라보던 사내는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린다. “…커다랗고 시커먼 게 있어… 물속에….” 그의 시선이 향한 강 수면에는 여러 겹의 동심원이 퍼져나가고 있지만 물속에 뭐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온 동료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뭐가 있다는 거야”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사내는 좀전의 애처롭던 표정을 지우고 갑자기 싸늘한 조소를 띠며 이죽거린다.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그리고는 귀찮다는 말투로 “잘 살아들” 하고 강으로 뛰어든다.

이 장면은 <괴물>의 세 번째 신이며, 2006년 10월이란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앞의 두 장면은 괴물 탄생의 전사(2000년 2월9일, 미8군, 다량의 포름알데히드 방류)와 괴물의 성장(2002년 6월, 한강, 작은 돌연변이 물고기 발견)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 세 번째 장면은 여러모로 이상하다. 영화의 주인공인 박강두 가족은 네 번째 신에서부터 등장하므로, 이 장면은 이야기 전개상으로 꼭 필요하지는 않다. 중년 사내들은 이 장면 말고는 등장하지 않으며, 괴물의 형상도 보여주지 않는다. 괴물의 도착을 암시하며 불안감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투신하는 사내의 표정과 대사는 단순한 희생자이거나 발견자의 역할을 뛰어넘는 과잉이다.

사내는 아마도 부도를 맞았거나 해직당했을 것이다. 정성일은 이 장면을 “자본주의 시장의 ‘결과’를 분단체제하의 반(半)식민지국가에 상주하고 있는 주한미군 부대의 ‘결과’가 잡아먹은 것”이라고 읽었다. 동의한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좀더 복합적이라고 생각한다. 한 대사가 귀에 박힌다.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자기 연민에 가득 차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표정으로 자살하려던 자가 갑자기 표정을 바꿔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이건 유의해야 할 대사다.

그의 대사를 풀어보면 이렇다. 자살하려는 사내가 보기에 두 동료는 이전에도 둔해빠졌고 지금도 둔해빠졌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이전에도 지금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그들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지 못한 것은 저 심연 속에 있는 커다랗고 시커먼 것, 괴물이다. 이전에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이 장면만으로는 알 수 없다. 짐작건대 그것은 사내를 자살에 이르게 한 어떤 나쁜 질서일 것이다. 죽음을 부르는 또 다른 그리고 은유로서의 괴물이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실체로서의 괴물이 있다. 사내는 응시한다. 그의 죽음을 그리고 언젠가 두 동료의 죽음을 기다릴 두 괴물을. 그러나 두 동료는 보지 못한다.

사내는 지금 괴물 혹은 자신을 자살로 이끈 질서를 규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니다. 혹은 나쁜 질서의 희생자가 됨으로써 동정과 연민을 얻기 위해 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게 목적이라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달려온 동료에게 그렇게 냉혈한 같은 표정으로 욕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이 장면에서 강물의 동심원밖에 볼 수 없는 관객은 사내로부터 두 동료와 같은 자리에서 욕을 먹고 있다. 사내의 욕은 <괴물> 전체를 관류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보고 있는가?

<괴물>에서 ‘본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과 함께 가장 중요한 행위다. 네 번째 시퀀스에서 이상한 구경거리이던 괴물이 인간을 먹기 위해 달려오는 것을 처음 보는 사람은 낮에도 끝없이 자는 한심한 남자 박강두다. 현서가 괴물에게 끌려간 뒤 매점 안에 매달린 곰 박제의 눈을 박강두는 본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생각한다. 매점 안에서 다른 가족이 졸거나 말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졸기 시작했던 박강두가 매점 옆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의 눈을 처음 본다. 둔치의 다른 사람들은 괴물이 자신을 먹기 위해 달려올 때만 뒤늦게 알아차리고 도망간다. 하지만 응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박강두는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동심원조차 없이 얼어붙은 강물 위를 본다. 세상은 잠들었고, 강 건너의 모든 건물에는 불이 다 꺼져 있는데 강두는 홀로 보려 한다. 아직은 그만이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실재와 대면하기를 촉구하는 질문이다

괴물의 인육 만찬이 처음 벌어지는 네 번째 시퀀스의 흥미로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전철신이다. 괴물의 살육 행각을 넓게 보여주기 위해선 아마도 크레인이나 헬기를 이용한 버즈 아이숏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는 카메라를 달리는 전철 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고 괴물의 살육을 구경하는 승객의 시선을 보여준다. 괴물의 행위가 전철에까지 미칠 가능성은 없으므로, 승객이 보는 것은 자신의 안전은 완벽하게 보장되는 구경이다. 그들은 살육의 사파리 공원에 와 있다. 승객의 위치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위치와 질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관객인 우리는 보는 그들을 본다. 이 신에서 질문 하나가 추가된다. 당신이 보고 있다면 그것을 ‘어디서’ 보고 있는가.

보는 행위에 연관된 <괴물>의 두 질문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으며 둘 다 질문 안에 힐난을 품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당신도 함께 보고 있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이며, ‘당신은 왜 보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힐난이다. 이미 말했듯이 <괴물>이란 영화에서 박강두 가족 외에는 아무도 괴물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 질문은 정치적 질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관객을 직접 향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관객인 우리는 괴물을 볼 수 있고, 괴물에 끌려간 현서의 운명에 가슴 아파하며, 괴물에 무관심한 세상과 현서를 방치해 죽음으로 내몬 국가기관과 제도에 화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힐난으로부터 관객인 우리는 면제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한강에 괴물이 있을 리 없기에 우리는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 동정하거나 화를 내다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봉준호 감독은 괴수영화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으려 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를 알고 있다. <괴물>은 실재한 사건을 직접 다룬 <살인의 추억>과 다르다. 실재한 미군의 독극물 방류를 원인으로 제시한다 해도, 현실에서 있을 리 없는 괴물을 등장시키는 순간, 초현실적인 괴수영화로 소비된다. 관객의 관심은 살육의 스펙터클이 되며, 괴물을 물리치는 영웅의 활극이 된다. 괴물에 끌려가 하수구에 갇힌 현서가 그토록 기다렸던 119, 의사, 군인, 경찰의 무능력을 영화가 아무리 조롱하고 괴물의 원인을 미군이라고 명시해도 그 정치적 발언들은 괴물의 살육과 활극의 쾌감 사이로 사라진다. 이건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은 안간힘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다. ‘당신은 어디서 그걸 보고 있는가’, 달리 말하면 ‘당신이 보고 있는 <괴물>이라는 괴수영화를 당신은 어디서 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첫 번째 질문보다 형식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실존적이다. 이건 첫 번째 질문이 실은 관객에게 던져진 질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우리에게 안전한 구경꾼의 장소에서 둔치로 내려와 실재와 대면하기를 촉구하는 질문이다. <괴물>에서 정치적 상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너무 명시적이기 때문이다. 미군이 방류한 독극물 때문에 괴물이 태어났다는 설정은 너무 직접적이어서 알레고리라고 말하기에도 쑥스러울 정도다. 봉준호는 관객에게 몰랐던 걸 알려주려는 게 아니다. 저렇게 명료한 것을 당신은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보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까. <괴물>에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시퀀스에서 제기한 질문을 끝내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장치들이 있다. 나는 그 장치들이 이 영화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한강 둔치와 둔치 밖 세상과의 인위적 단절이다. 세상은 괴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뉴스에서 괴물의 모습은 한번도 비쳐지지 않으며, 괴물의 정체에 대해서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괴물의 존재를 믿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건 매우 부자연스럽다. 수많은 목격자가 있는 괴물을 세상이 말하지 않는다는 건 믿기 어렵다. 사실적인 묘사를 한다면, 인터넷에는 휴대폰으로 촬영된 괴물 사진으로 뒤덮일 것이며, 언론은 연일 괴물을 뉴스의 스타로 만들어낼 것이다. 어떤 이는 괴물의 살육장면을 비디오테이프로 만들어 팔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군대는 출동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대목에서 핍진성을 포기하고 한강 둔치와 그 밖의 세계를 분리시키면서, 갑작스럽게 지정학적 알레고리를 동원한다. 이제 괴물은 한강 둔치에만 등장하고 둔치 밖의 세상은 괴물을 보지 않는 것으로 설정된다. 둔치는 게토이며, 세상 사람들은 그곳이 없는 것처럼 믿고 사는 풍문의 땅이다.

여기서 바이러스가 중요해진다. 바이러스에게는 경계가 없다. 구경꾼의 자리를 위협하는 건 괴물이 아니라 바이러스다. 더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괴물의 정체에 대해서 결코 말하지 않던 세상이 바이러스에는 신경과민증에 걸린다. <괴물>은 여기서 세상 사람들에게 생활세계 밖에서 보여지는 것을 결정하는 언론을 참혹하게 비난한다. 뉴스는 제시간에 나오지 않으며, 그들은 괴물을 보지 않았으며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이러스만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바이러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괴물을 ‘보는’ 무식한 강두만이 ‘No virus’를 알게 된다).

가장 신랄한 장면 가운데 하나. 강두 가족이 병원을 탈출한 뒤에 남주에 관한 뉴스가 TV에 나온다. 제목은 ‘도주한 신궁’이다.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딴 선수를 신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제목을 단다. 그렇게 해야 팔리는 제목이 되기 때문이다. 더 웃기는 건 ‘바이러스 보균자 관리 엉망’이라는 소제목에 따라 나오는 자료 화면이다. 동메달을 딴 뒤, 남주는 동료 선수와 악수를 하고, 화면은 두 선수의 악수하는 손을 클로즈업한다. 괴물이 설령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 해도, 괴물이 처음 강 밖으로 나왔을 때, 남주는 둔치가 아니라 TV에 나오는 바로 그 경기장에 있었다. TV는 그 시점의 남주를 이미 바이러스 보균자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문제는 괴물이라는 대상의 해석이 아니라 명백한 대상을 보는가 보지 않는가이다. <괴물>은 정치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둔치 밖 사람들이 괴물을 말하지 않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자살한 사내와 똑같은 질문을 어쩔 수 없이 계속 떠올린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당신도 보고 있는가.

누구와도 닮지 않은 공동체 영웅의 탄생

<괴물>의 또 다른 흥미로운 장치는 감정적 몰입의 중단이다. <괴물>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괴물이 가족 중 두 사람을 죽이고, 다른 가족이 괴물과 싸워 이긴다. 공포, 슬픔, 분노, 승리감이 당연히 이 영화가 지닌 감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감정도 지속되지 않는다. 부적격자 가족 중에서 그나마 멀쩡했고 제일 유능했던 늙은 가장 박희봉의 시신 앞에서 자식들이 흐느낀다. 슬픈 음악이 흐르면서 장면 전환이 이뤄지면(음악은 계속 흐른다), TV 화면에 뉴스 앵커가 나온다.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팔을 잃었던 도널드 하사가 끝내 숨졌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이 장면은 도널드의 죽음도 함께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TV의 멍청함을 야유하기 위해서인데도, 한 곡조의 비장한 음악으로 이어붙여져 있다.

세상을 공포로 떨게 해야 할 괴물은 첫 등장한 지 1분도 안 돼 비탈에서 저 혼자 미끌어져 넘어진다. 봉준호식 유머로 명명되는 인물들의 부적절한 언행은 아무리 비장한 상황에서도 웃긴다. “새끼 잃은 부모 속썩는 냄새는 10리 밖에도 진동하는 법”이라고 박희봉이 말하는데 옆에서 새끼 잃은 아비 강두는 졸고 있다. 여기엔 세 번째 신에서 자살한 사내의 표변하는 얼굴도 포함될 것이다. ‘에이전트 옐로우’의 환경오염을 규탄하는 시위대는 신장개업 때 쓰는 미친 듯이 흐느적거리는 바람풍선을 앞세우고 시위를 벌인다.

적어도 <괴물>에서라면 감정의 중단과 유머와 야유의 발작적 개입은, 단순한 상업적 전략도 혹은 캐릭터 묘사의 방식도 아니다(괴물은 어떤 캐릭터기에 멍청하게 굴러떨어지는가). 봉준호는 끈질기게 살육과 활극의 장르적 쾌감으로부터 이 영화를 방어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가 원하는 건 인간적 분노나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우리가 <괴물>을 바라보는 위치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의 상기가 아닐까. 그래서 괴물이 불타는 장면의 촌스런 CG는 이상한 방식의 소격효과처럼 보인다.

봉준호가 괴물을 미군의 독극물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정할 때, 그리고 각종 국가기구들과 전문가들을, 심지어 몽매한 시민운동까지 비웃을 때, 나는 그것이 특정한 정치노선의 반영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굳이 이름 붙인다면 그건 개인주의적이며 수평적 질서를 지향하는 세계시민적 태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대작 상업영화로 유통될 괴수영화로 그 태도를 말하려 했을 때, 그래서 대상과 문제를 세계 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려 했을 때, 그에게 그 질문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괴물>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예민한 설정은 무명의 노숙자다. 그는 남일이 돈을 건네자 소주병으로 머리를 깐 뒤,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냐, 심심한데 잘됐다” 하며 따라 나선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강두 가족과 협력해 괴물을 불태운다. 마지막 장면의 매점에는 몇달 전까지도 노숙자였던 세주가 강두 곁에 잠들어 있다. <괴물>은 불안정한 가족애에서 출발해 노숙자와 하층민의 빈민 전선, 혹은 루저들의 연대로 나아간다. 그들은 현서를 구하지 못했지만, 대신 하나의 생명을 구했고, 그와 새로운 연대를 만들었다. 작은 연대를 지키기 위해 강두는 밤을 샌다. 기성 질서와 싸울 의지는 보이지 않으므로 그를 계급 영웅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만이 괴물의 재등장을 응시한다. 미욱하고 어설픈 그야말로, 세상을 저주하며 자학과 자살로 연민을 구한 지금까지의 주인공을 물러나게 할 만한 새로운 영웅이다.

 
글: 허문영 영화평론가, 전 씨네21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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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6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장해야겠다.

극장에서 보고 싶었는데

뒤늦게 다운 받아서 봤다.

올해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영화중에 단연 최고다.

이런 영화는 정말 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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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8-1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식 나오죠? 이 영화, 그런가요?

Xoxov 2006-08-1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문식의 연기가 압권입니다.공필두에서는 이문식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죠.ㅋ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 끝나면 어김없이 정은임의 영화음악이 흘러나왔다.그곳에선 늦은 야밤에도 영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어졌다.내가 전적으로 영화를 보는 눈을 얻은 9할은 정영음이였다.얼마전 그녀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바자회를 열었단다.언제 죽은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벌써 그렇게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http://www.worldost.com/

http://jinbonuri.com/bbs/view.php?id=fight_board2&no=85952

최근 공적인 글쓰기를 중단한 진중권의 글.....

지난 7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정은임 아나운서가 8월4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스타’라고 한다. 정말로 사랑받는 사람이었나 보다. 일개(?) 아나운서로서 팬클럽을 가졌다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녀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니, 그들의 사랑에는 철없는 애들의 얼빠진 스타 숭배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진지함 혹은 깊숙함이 있다. 도대체 어떤 여인이었을까?

정씨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1990년대 초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으로 기억한다. 특히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와 함께 진행한 꼭지는 청취자들에게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했고, 그 프로그램을 듣고 자란 ‘영화의 아이들’이 오늘날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만들어내는 대중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정은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를 갖고 있다. 진보의 이념이 퇴색해 가던 1990년대에,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 금지된 운동권 영화를 소개하고, 그 영화의 삽입곡이라며 운동가를 틀어주고, 심지어 빨갱이 노래인 <인터내셔널>을 영화음악이라고 내보냈다. 어떤 이들은 라디오에서 이런 노래를 들은 것을 평생 잊지 못할 감격으로 기억한다. 그들의 눈에는 정은임이 아마도 야무진 투사로, 공중파에 침투한 게릴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은 이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두 측면이 서로 뗄 수 없이 결합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어느 신문 기사는 그녀의 프로그램을 ‘공중파라는 한계 속에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듣게 해준 방송’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그 방송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안쪽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그 안쪽의 콘텍스트를 이루는 영화의 바깥 또한 들을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인격에서 겹쳐지는 우연을 다시 기대할 수 있을까? 설사 그런 아나운서가 또 나타나도, 이제는 청취자들이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니다. 천만 단위로 동원이 이루어지는 시대의 영화는 과거와는 다른 유형의 팬을 찍어낸다. 실제로 지난해 컴백한 은 채 1년도 못 채우고 퇴출되었다. 그래서 정은임은 반복이 불가능한 ‘일회적’ 현상이다. 죽어서 라디오의 전설로 남을 수밖에 없다.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10월23일 새벽 정은임은 저들이 ‘노동귀족’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얘기했다. 그보다 몇 시간 뒤에 배달된 어느 조간 신문의 칼럼에서 나 역시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모두 잠든 그 날 새벽에 한 아나운서가 음악 방송에서 고공 크레인에서 목숨을 끊은 노동자 얘기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이게 고맙다. 정말 고맙다.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내가 고마워해야 할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공 크레인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이 땅보다 어쩌면 그곳이 방송하기에는 더 좋을지 모르겠다. 저 위에서 그녀는 아직도 방송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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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사랑하는 여고생 비올라 존슨은 자신의 축구팀이 학교에서 해체되자, 학교를 무단결석한 그녀의 쌍둥이 남매 세바스챤 대신, 그가 다니는 사립 기숙고등학교의 축구팀에서 2주간 뛸 결심을 한다. 모두가 비올라를 세바스챤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그녀는 세바스챤의 룸메이트 듀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듀크의 시선은 언제나 아름다운 올리비아에게로 향해있고, 더욱 황당한 것은 그 올리비아가 세바스챤으로 변신한 비올라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진짜 세바스챤이 캠퍼스로 돌아오면서 상황은 더욱 긴박해지는데...

 

혼자보기에 아까워서 소개하는데 초초초강추.죽인다.말이 필요없다.그냥 보시라.5번정도를 본 것 같다.우울할 때 세바스찬으로 변신한 바이올라와 올리비아를 보면 기분이 상쾌해진다.개인적으로 영화 괴물보다 10배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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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테스트 영화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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