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발부는 수지부모요로 시작하는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옛날 가락이 있다. 몸, 터럭, 피부, 즉 우리 몸이 부모로부터 받은 거라는 뜻인데, 이건 곧이 곧대로 읽은 경우다. 누가 모르나, 부모에게 받은 거, 인간 복제한다 해도 최소한의 것은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이게 속뜻은 만만치 않다.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잘 간수해야 한다는 거면 좋은 거고, 나쁘게 보면 내 몸의 주인이 오로지 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 몸 함부로 굴리지 말라는 뜻도 되지만, 내 몸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녀? 어떤 뜻으로 받아들일지는 옛날 가락 읽는 사람 마음이겠으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요를 떠들어대는 족속들은 대가 그렇고 그렇거나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니, 떠드는 속내가 의심스러울 때가 더 많다.

잘라서 말하는데 아무리 부모가 날 낳아주고 껍질주고 터럭주었대도 내 몸은 내 거인 것이다. 이게 확고하게 세팅 안 되면 다른 거 다 부질없고, 속절없고, 무의미하다. 한번 따져볼까? 내 몸은 내 거다. 그러니 내 몸에 붙은 내 머리카락도 내 거다. 내 머리카락을 빡빡 밀고 다니든 치렁치렁 기르고 다니든 내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하면 그만이다. 머리가 왜 그 모양이야 하고 옆에서 구시렁거리고 훈계할 거 없다. 길러보니 정말 간섭하는 사람 많았다. 그런 걸 그냥 내버려두질 못하는 게 이 땅덩어리 사람들 심사다. 간섭하고 싶어서 미친다. 말로 간섭 못하면 시선으로라도 찔러보고 싶어서 난리를 친다.

내 몸은 내 거다. 그러니 내 몸에 뭘 걸치든 그것도 상관할 바 아니다. 옷에서 독이 뿜어져나와 다른 사람 몸에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한, 뭘 걸치든 내버려둬야 옳다. 그걸 가지고 품위가 있네 없네, 누굴 모독하네 마네 하는 건 옷을 대단한 걸로 보는 페티시즘 신봉자들뿐이다. 부도덕한 것도 아니고 불법도 아닌데 법전 뒤적이는 거 정말 꼴사나운 짓이다.

눈에 빤히 보이는 내 몸도 내 거라는 것이 잘 인정되지 않는 판에 몸 안에 들어 있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인격을 인정 받는 건 정말 어렵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요를 뒤집어 내 자식은 내 거라는 생각이 많은 부모들 머릿속에 콱 박혀 있다. 자식의 몸과 마음은 자식 것인데, 그걸 착각하고 조몰락주물락한다. 인격모독도 이만저만 아니다.

학교 가면 선생은 학생의 몸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벌주고 패고 그런다. 내 몸은 내 재산이고 남의 몸은 남의 재산인데, 그걸 맘대로 다룬다. 이거 어찌보면 절도요 강도다. 회사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 몸을 내 것으로 삼는다. 이리 가라, 저리 서라 이래라저래라한다.

근대 이후 만들어진 모든 법은 나는 내 신체의 주인이라는 명제에 근거하고 있다. 이 명제가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의 시작점이다. 길가는 사람 무작정 붙잡고 불심검문하는 거 한번 따져보자. 길가는 사람 붙잡는 거, 이거 안 된다. 자기 몸에 붙은 발로 멀쩡하게 걸어가는데 왜 잡는가. 남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거 꺼내보자고 하는 거 이거 안 된다. 눈에 보이는 명백한 잘못 안 했는데 보자는 거 말도 안 된다. 영장 없이는 체포할 수 없는, 인신구속을 당하지 않을 자유, 남에게 해 안 끼치면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여행의 자유, 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든 건드리지 못할 사상의 자유, 내 입으로 내가 떠드는데 내버려둬야 할 언론의 자유, 이른바 헌법에 보장된 모든 자유가 바로 이 명제, 내 몸은 내 거다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명제에 근거해서 법을 만들어야 근대국가인 거고, 그 법 실천해야 근대화된 거다. 조국 근대화한답시고 남의 몸 함부로 잡아다 족치고, 일하는 사람들 몸뚱이를 멋대로 이리 굴리고 저리 패대기치면 안 되는 거다. 그건 근대화가 아니라 공업화였을 뿐이고, 야만화였을 뿐이다.

남의 몸 함부로 건드리는 거, 그 몸에 붙어 있는 거 함부로 만지는 거 인격모독을 넘어 재산침해가 된다. 사람 대접, 어려운 거 아니다. 내 몸은 내 거고, 네 몸은 네 거인 거, 이걸 인정하고 실천하는 데서 시작된다. 시시껍질하게 옷가지고 트집 안 잡는 데서 출발한다. 남이야 뭘 입고 나오든 그냥 내버려뒀으면, 자기가 생각하기에 좀 창피하면 다음부터 안 했을 텐데 괜히 시비거는 바람에 그런 사람들만 웃음거리되고 만 거다. 왜 그런지 아나? 남의 몸 건드려서 그런 거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남의 몸 건드리지맛!            

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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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토론’ 신해철, 이번엔 패션문신…시청자들 또 논란
[OSEN 2006-07-07 09:08]

[OSEN=김지연 기자] 가수 신해철이 다시 한번 파격적인 패션으로 시청자들을 놀라게했다.

7월 6월 밤 12시 5분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신해철은 처음에는 검은색 계통의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토론에 참석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100분 토론’에 세 번째로 출연한 신해철은 작년 11월 3일 간통죄 존폐논란에 대한 토론회 당시 흰색 후드 티셔츠에 검은색 가죽 장갑, 큰 목걸이 등 튀는 의상때문에 프로그램이 끝난 후 시청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번 방송에서 신해철은 역시나 가죽장갑을 끼고 여러 개의 반지와 팔지를 착용하고 나오긴 했지만 말끔한 수트 차림으로 예전에 비해면 상당히 얌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체벌을 찬성하는 입장의 남성중학교 두영택 교사가 “신해철 씨처럼 비범한 아이들은 대화와 타협으로 대해야 한다”, “토론회에 가죽장갑을 끼고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의식이 있고 비범하다는 증거”라는 등으로 칭찬 아닌 칭찬(?)을 하자 체벌을 반대하는 입장의 신해철은 몸둘 바를 몰라하며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그러자 양쪽 팔에 요즘 유행하고 있는 패션 문신(타투) 여러 개가 눈에 띄어 시청자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다른 출연자들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신해철의 이와 같은 파격 패션에 시청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패널로 나오면 최소한 예의를 갖춘 복장을 착용 하고 나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쾌감과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라는 반대의견과 함께 “복장이 아닌 토론 내용만 가지고 얘기해야한다”, “신해철 씨 일부러 옷 벗을 때 정말 통쾌했다”는 지지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날 신해철은 자신의 학창시절과 현재 새벽에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겪은 일, 그리고 여러 해외 논문자료들을 준비해 ‘체벌 금지’를 주장했다.

hellow0827@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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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0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토론 재미나게 봤어요. 하교수는 엄청 짜증나는 스타일로 말하더군요. 차라리 두선생의 발언이 솔직하죠. 하지만 전 체벌에는 반대합니다. 체벌이 교육과 행동수정을 목적으로 한다는 걸 인정했다면 그 목적이 체벌로 거두어지던가 말이죠. 어제 전교조 선생의 말마따나 맞아서 사람되었다면 그 아인 안 맞고 다른 방법으로도 사람 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거죠. 어제 신해철 토론 잘 했습니다. 시원했어요. 패션문신 가지고 걸고 넘어질 건 아니지요..

Xoxov 2006-07-0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체벌엔 반대해요.어제 잠 자느냐고 못 봤는데 다시보기로 해처리의 카리쓰마를 봐야겠어요.^^
 
 전출처 : 가넷 > 유홍준 교수가 말하는 '추사 김정희 삶과 예술'

유홍준 교수가 말하는 '추사 김정희 삶과 예술'


"추사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추사체가 뭐냐 하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빨래 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8일 오후 광주 의재미술관에서는 '완당과 완당바람전' 개막에 맞춰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삶과 예술에 관한 명지대 유홍준 교수<왼쪽 사진>의 강연회가 있었다. '완당평전'을 쓴 유교수는 추사의 글씨와 글씨체,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인생에 대하여 두시간 동안 강의를 했다. 강의내용을 요약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잔서완석루'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선게비불(禪偈非佛, 사진왼쪽)'과 '판전(板殿, 사진위)'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괴이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선게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파격이라 하기보다는 어린애 글씨 같은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추사 글씨체 변화에 대하여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규수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유배가던 길에 있었던 일로 두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 서생으로 요즘으로치면 지방작가였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이 시골 개울물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삼만의 '운학유천'. 시골서생의 순수함이 있다.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원교글씨.
그런 창암이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완당은 이때까지만 해도 배 갑판 밑에 모여 사는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들이 쭉 배석해 있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은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전주를 떠난 완당은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대웅보전(大雄寶殿)' 네 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 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써준 것이다. 획이 기름지고 윤기가 난다.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 획이 가늘면서 힘과 멋이 함께 들어있다.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가지 전설은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원교의 글씨를 낮추어보는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9년뒤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당은 대둔사에 다시 들러 떼어 내리게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으며, 전주에 들러 창암 이삼만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완당은 강상(江上)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절부터 완당 글씨의 특징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 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글자의 구성에서 디자인적인 변형이 대담해지고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붓끝에는 힘이 실리고, 획에 금석기가 있으며 필세에 생동감이 있는 등 추사체의 참 멋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때 씌어진 명작 현판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은 유명한 단계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선비의 마음을 말한다. 이 현판 글씨는 글자의 구성미, 즉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또하나 현판 글씨로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작품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이 현판글씨는 구성미가 아주 뛰어나다. 그리고 글자에 유머와 파격을 주어 추사체의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히 밝은 명(明)자의 획을 삐뚜로 쓴 것이나, 앉을 좌(坐)를 흙 토(土)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쓴 데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것도 한쪽 궁둥이를 슬쩍 들고 비스듬히 앉은 듯 네모의 양감이 다르다.
말년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최고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
최고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高會夫妻兒女孫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이다.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년) 오늘날 추사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유경이었다.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 단계로 나뉘어진다.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 간의 만년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해 "철종 7년, 10월10일 갑오. 전(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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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만이 좆잡고 졸라 반성해야한다.

이하 미친년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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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6-07-0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들이 지식인이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미 FTA, 잃는게 더 많아.. 반발 예상

미국과 경쟁상대 안돼, 계층간 양극화 가속화로 사회문제
 
서성훈 기자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이 열띤 강의를 하고 있다.    
[e조은뉴스=서성훈 기자]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미FTA가 우리나라에 치명타를 안겨줄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태인 '前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하, 전 비서관)은 지난 5일 오후6시 경주시 A프리텔 2층에서 열린 '한미FTA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한국은 미국과는 자유무역의 경쟁 상대가 되지않고 FTA 체결시 국내 다양한 업종의 타격과 계층간 양극화가 가속화 될것이라고 밝혔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미국이 FTA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지적재산권, 투자, 서비스 등 세가지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미국이 맺을려고하는 FTA는 높은 수준의 FTA"라고 말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미국주도 FTA의 특성은 공격적 자유주의, 경쟁적 자유주의로의 선회와 완전 경제통합 전 단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라며 "현재 상황에서는 경제가 낮은 나라가 FTA를 많이 맺고 있다"라고 전했다.
 
특히, 정 전 비서관은 "정부는 당연한 요구는 하지않고 쇠고기 수입도 허용하고 투자협정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 워낙 급하게 하니 뭐가 뭔지 모른다, 그 만큼 준비를 안하고 있다"라고 맹비난했다. 또한 정부는 "우리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므로, 한미FTA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라면서 "우리나라의 대외 의존도 70%는 굉장이 높은 숫자"라고 지적하며 "대외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내수를 키워서 내외 수요간의 균형을 도모하는게 온당하다"라고 반대로 주장했다.
 
이밖에 정부는 "한미 FTA를 맺으면 1조7천억달러의 거대한 시장을 선점하여 수출이 증가할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며 가장 이익을 볼수 있는 자동차의 경우, "관세철폐로 1년에 0.5%의 가격을 인하할수 있다,  2만달러 짜리 중형차를 수출한다고 하는 경우 1년에 10만원 정도"여서 이것으로 일본제 사용자가 차를 한국제로 바꾸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 전 비서관은 "정부가 한미 FTA가 양극화를 해소할 것이라고 주장한다"며 이는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그는 이와 관련, "외국기업에 밀려서 줄줄이 도산하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힘을 키운 초국적 기업이 또다른 이익을 위해 훌쩍 넘어가는 시나리오가 실현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고 분석하며 "정부가 여러 시나리오에 대한 점검조차 하지 않고 엄청난 쇼크를 국민경제에 가하려고 한다"라고 비난했다.
 
정 전 비서관은 본지 기자의 "한미 FTA 협상을 통해 농업분야가 개방 된다면 우리나라 농업분야는 어느정도 타격을 입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약  8조정도 타격 받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확실한 것은 낙농-축산 쪽의 타격이 클 것"이라며 최근에 칼로스라는 쌀이 국내에서 잘 팔리지 않는데 미국은 "한국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입 맛에 맞게 개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 전 비서관이 꼽은 한미 FTA로 인한 양극화 문제를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수출부문의 격차 확대,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 기술에 따른 격차 확대, 지역간 격차확대, 초국적 기업 이전 위협에 따른 임금 상승 한계 등이다.
 
멕시코는 NAFTA로 농민반란, 도시빈민 형성과 미국 이민, 산업과 농업의 파괴, 개방화-민영화-자유화로 인한 공공성파괴 등을 겪고있다.
 
▲강연을 듣고 있는 시민들의 진지한 모습

 정 전 비서관은 FTA가 "체결되면 수출투자가 늘어날 것이 없다, 제조업 직접투자도 늘어날  이유가 없다"라며 "미국의 서비스가 들어오면 인수 합병후 대량 정리해고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 전 비서관은 "한미 FTA 7장으로 알려진 투자에 관한 장은 독소조항을 안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투자자- 정부 제소권은 초국적 기업이 자신의 이윤확보를 방해하는 정부의 법과 제도, 관행을 제 3의 민간기구에 제조할수있게 한다는 점에서 위헌소지를 안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정 전 비서관에 따르면 구체적인 사례로는 메탈클래드건과 UPS 건을 꼽을수 있다. 메탈클래드가 인수한 곳에 암환자가 발생하고 침출수가 나오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으나 이들이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자기의 사업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제소해 보상금을 받아갔다. 또, UPS는 캐나다 우체국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정부 보조금에 의한 불공정 거래라며 제소했다. 
 
정 전 비서관은 "UPS가 이기면 수도전기, 가스문제가 해결되나"라며 초다국적 기업으로 인해 "한나라의 공공서비스가 완전히 무너질수 있으며 가격도 올라갈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한미FTA는 "관세를 낮추는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법제도, 관습을 바꾸는 것"이라며 "전부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모 은행장은 한미FTA가 IMF의 10배다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라며 ' 본인은 생각해보니 100배는 더 되지 않을까"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는 전문가들의 FTA에 대한 인식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정 전 비서관은 "한미 FTA는 무역 협정이 아니라 경제 통합협정"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는 "전문분야에서 이뤄지고 우리 얘들까지 간다고 생각한다"며 일부에서 "결과보고 반대해라고 하지만, 결과 나오면 끝이다"라고 절박함을 전했다.
 
정 전 비서관은 "양국 초안을 공개하면 미국 초안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민간의 전문가들이 일일이 지적할수  있다"고 말하며 "FTAA의 경우 캐나다 정부는 웹사이트에 초안을 다공개 했다"며 한미FTA 초안을 공개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정 전 비서관은 또 "몰라서 또는 알고도 쉬쉬하다가 나중에 부작용이 나타날때 현 정부는 역사적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라고 초안 공개에 소극적인 정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이날 강연회는 민주노동당경주-민주노총경주시협의회 주최로 열렸으며 100여명의 민주노동당 당원과 노동자, 농민들이 참석해 수차례 질문을 하는등 비상한 관심을 보인 가운데 오후 8시 40분경에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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