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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로 가자"…反FTA 행진, 경찰 극력저지

 

서울 도심서 6만여명 궐기대회…부상자 속출

 

 

2006-07-12 오후 10:58:56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12일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하며 저지하는 경찰과 대치하며 서울의 도심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한미 FTA 저지 국민 총궐기 대회'가 이날 오후 4시30분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서울광장)에서 열렸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가 주최한 이날 집회에는 6만여 명(경찰 추산은 3만7천 명)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시민들은 서울광장에서 1부 행사를 가진 뒤 2부 행사로 광화문 방향으로 행진을 하려 했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 부닥쳤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중에서 부상자가 속출하고, 많은 수의 시민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이에 따라 3부 행사로 예정됐던 '청와대를 둘러싸는 인간띠 잇기' 행사는 결국 무산됐다.
  
  경찰은 이날 집회에 전ㆍ의경 203개 중대 2만4천여 명과 교통경찰 288명을 동원했고 물대포와 최루액까지 쏘면서 시민 시위대의 행진을 막았다.
  
  이날의 '국민 총궐기 대회'의 상황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본다.
  
  오후 2시: 농민, 노동자, 빈민 등 사전집회…"UR보다 심각할 것"
  
  장맛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서울시청 앞 광장에 3만여 명의 농민들이 모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가톨릭농민회 등 40여 개 농민단체가 이날 집회에 참가했다. 서울광장이 농민들로 가득 메워지자 인근 도로의 차량통행이 통제됐다.
  

▲ 범국민대회가 열린 12일 서울광장에는 종일 비가 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부분 비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얇은 비옷은 장대비를 온전히 막지 못했다. ⓒ프레시안

  
▲ 미국 대사관 앞을 지키고 있는 전경들(왼쪽), 오후 2시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농민 3만명이 모여 결의대회를 가졌다(오른쪽) ⓒ프레시안

  
▲ '한미FTA'라고 씌여진 현수막을 집회 참가자들이 단체로 찢고 있다. ⓒ프레시안

  전남 이리에서 올라온 농민 김규식(57) 씨는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남긴 기억이 자신을 새벽부터 집을 나서게 했다고 이야기했다. 김 씨는 "700만 명에 달하던 농민이 UR 협상 이후 350만 명 이하로 줄었다. 농민의 절반이 땅을 버리고 떠난 셈"이라며 "한미 FTA는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간에 서울역 광장에서는 민주노총 조합원 1만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한미 FTA 협상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폐기! 특수고용 노동3권 쟁취! 총파업 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에 앞서 민주노총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하루 일정으로 시한부 총파업에 들어갔다. 민주노총은 이날 총파업에 15만 명(정부추산 10만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또 농업협동조합 노동조합원 2천여 명은 서울 서대문구 농협박물관 앞에서, 전국빈민연합 회원 1천여 명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평택범국민대책위 회원 1500명은 광화문에서 각각 사전집회를 열었다.
  
  오후 4시30분: 서울광장에 7만여 명 운집…"멕시코, 그 비극의 전철을 밟으려나"
  
  오후 4시께 서울시내 곳곳에서 사전집회를 마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학생 등이 서울광장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6만여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모인 오후 4시30분께 '한미 FTA 저지 국민 총궐기 대회'가 시작됐다. 영화배우 문소리와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이 연단에 서서 '한미 FTA 저지 대국민 호소문'을 낭독했다.
  
▲ 서울역 광장에서 사전집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서울광장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프레시안

  
▲ 한미FTA반대 대국민 호소문을 낭독하는 영화배우 문소리와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 ⓒ프레시안

  
▲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 한미FTA는 이 아이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프레시안

  
▲ 서울역 앞에서 사전결의대회를 마치고 국민총궐기 본대회 장인 서울시청 앞 광장에 들어오고 있는 노동자들. ⓒ프레시안

  "한미 FTA는 미친 짓이다. 진정 멕시코, 그 비극의 전철을 밟으려는가? 12년 전 지구 반대편 멕시코에서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멕시코 대통령은 '모두를 위한 번영'이라 떠들어댔고, 멕시코 국민들은 미국처럼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미국과의 FTA를 '악마와의 키스'라고 부른다."
  
  호소문을 읽어내려가는 영화배우 문소리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비에 젖은 서울의 공기를 흔들었다.
  
  오후 5시10분: 광화문 향해 행진 시작…"노무현 정권 심판하자"
  
  서울광장에서의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5시 10분 무렵부터 '한미 FTA 졸속 강행하는 노무현 정권 심판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범국민대회의 2부 행사인 광화문 거리 행진과 3부 행사인 청와대 주위 인간띠 잇기 행사를 위해서였다. 이들의 행진을 경찰이 막아서자 집회 참가자들은 행진대오를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 한 대오는 종로 1가를 지나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도착했다.
  
  경찰은 전경차를 줄지어 세워놓고 시위대를 저지했다. 곳곳에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고 최루액을 뿌리며 시위대를 막았다. 직장인들의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광화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다른 한 대오는 안국동 종로경찰서 앞 사거리에서, 또 다른 대오는 사직터널 근처에서 각각 경찰과 대치했다.
  
  오후 7시를 전후해 광화문 일대의 경찰 방어선이 시위대의 몸싸움에 뚫렸다. 이에 따라 시위대가 분산되어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했지만, 경찰이 곧 후속 방어선을 구축했다.
  
▲ 서울역 광장에서 사전집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서울광장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프레시안

  
▲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던 시민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왼쪽),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던 도중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피를흘리는 집회 참가자(오른쪽). ⓒ프레시안

  오후 8시45분: 집회 해산…다수의 시민들 부상
  
  광화문, 안국동, 사직터널 등에서 흩어져 경찰과 대치하며 행진을 시도하던 시위대는 오후 8시 45분 무렵 집회를 정리하고 해산했다. 이날 여러 대오로 나뉘어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다.
   
 
  김경락 성현석 송호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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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2차 한미 FTA저지 국민대회
<1차 한미 FTA저지 범국민대회>
어제의 시위는 오전에 모일 때부터 약간의 살벌함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연이어 나타난 한국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졸속진행의 허와 국민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현재 신라호텔에서 협상대표단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점, 그리고 타산지석으로 다른 나라들의 사례등이 방송을 타면서 분위기는 반전을 도모하는 시기였고, 원래 계획상 10만의 시위군중을 동원하고자 했을 만큼 한미 FTA 반대여론이 다소간의 힘을 받아 안으니 참가자들의 마음가짐이 이전 집회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을 듯합니다. 우라도 운동화 끈 동여매고 참석하고 왔습니다. 오후 2시부터 각 분야별 집회를 시작해서 (노동자는 서울역, 농축수산 관련 농민들은 시청앞, 그리고 영화인 대책위는 광화문) 4시에 서울 시청앞 광장에 집결했습니다. 이후 30여분의 짧은 집회를 끝내고 청와대를 인간띠로 둘러싸는 행사를 가지기 위해 청와대를 향했습니다.

경찰은 광화문 교보빌딩을 중심으로 청와대로 향하는 모든 입구(좁은 골목까지)를 원천봉쇄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중심의 1진, 농민 중심의 2진, 그리고 노동자, 농민, 영화인등이 섞인 3진이 각각 다른 길로 움직였는데 그중에 가장 전투력이 강력한 노동자 중심의 1진에 주요 경찰력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농민 중심의 2진이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청와대 근처의 사직터널까지 진격했습니다. 우라가 있었던 3진은 완전히 막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교보문고 앞에서 고립되는 상황까지 갔었습니다.(밑 사진) 청와대를 향하는 평화행진이 원천봉쇄로 막히자 공권력과의 약간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물대포가 출동했는데 장마비로 온몸이 이미 다 젖었는데 그래도 쏘더군요. 미친넘들-!)다른 진영은 잘 모르겠고 (우라가 있었던 곳보다 더 심했다고 합니다만.) 우라가 있던 3진은 몇 번의 몸싸움을 시도하였으며(짜부(?)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 한분이 방패에 찍혀 발목을 다친 것을 목격한 정도입니다.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수수께끼 중에 “이 세상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답은 ‘온비 다맞아’였습니다. (배둘레햄도 있습니다만.) 오늘 우라를 포함한 한미 FTA 저지를 위한 2차 범국민대회를 참석코자 시청앞 광장에 모인 5만여 명의 인파들은 말 그대로 “온비 다맞아” 였습니다. 어제 밤부터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 없이 때론 폭우로, 때론 가랑비로 정체를 바꾸면서 계속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으면 됩니다. 눈이 와서 추우면 외투를 껴입으면 됩니다. 하지만 국가 경제가 붕괴되면 그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한미 FTA에 관한 서적 <낯선 식민지, 한미 FTA / 이해영 저>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이 만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의 정부나 국민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냉소적 리얼리즘이라 할까, 노철학자의 통찰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가 생애 마지막 저서에서 내지른 한마디는 여전히 울림이 크다.』그렇습니다. 우리는 IMF 사태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정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융, 단 한분야의 파산을 가져왔던 IMF로 수많은 노숙자들을 배출했는데 그것의 10배정도의 함량을 가지고 있는 경제전반의 FTA를 진행하면서 우리 정부의 준비를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자본으로 도배가 된다면 사회전반에 걸쳐 구조조정의 핵폭탄이 투하될 것입니다.(일례로 미국과 FTA를 맺었던 멕시코는 50%가 빈곤층으로 추락했고, 캐나다는 노숙자들이 그 이전보다 5배 이상이 늘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국민은 국민위에 군림하는 정부를 가졌고, 그 정부위에 군림하는 재벌들이 있고, 또 그 위에는 ‘삼성’이 버티고 있는 나라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영화인 우라가 비 맞고 거리에 나가는 이유입니다.<사진출처 : 오마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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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권영길 “한·미 FTA 체결하면 GDP 오히려 감소”

권영길 “한·미 FTA 체결하면 GDP 오히려 감소”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경우 국내총생산(GDP)이 0.42% 증가할 것이라고 밝힌 것과 관련, 근거자료로 사용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연구 결과가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민주노동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는 권영길 의원은 12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KIEP 방식에 의거해 직접 시연하니 이들의 연구결과와 다르게 나왔다”며 “정부는 원 데이터를 공개해 조작 의혹을 해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 의원은 구체적으로 GDP가 0.42% 증가한다는 정부의 주장과 달리 KIEP의 조사방법을 직접 시연해본 결과 오히려 GDP가 0.32%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해 기준으로 약 2조 6000억원이 감소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권 의원 측은 KIEP가 사용한 미국 퍼듀(Purdue)대학의 세계무역분석프로젝트(GTAP) 프로그램을 자체 구입해 경제적 효과를 직접 시연했다고 강조했다.


권 의원은 또한 “이외에도 KIEP의 연구분석에 동원된 근거들이 일관되지 않았다는 게 밝혀져 정부의 한·미 FTA 경제효과 주장에 대한 신뢰는 더욱 의심을 받게 됐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체 연구 결과 GDP 상승효과가 있다는 KIEP의 주장은 장밋빛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현실적 근거가 희박한 ‘자본축적 효과’, ‘생산성 1% 증대 효과’,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완전고용의 달성’이라는 임의적인 가정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정부는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경제학적 수치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경제학적 방법론은 검증 가능하고 재연을 통해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 있을 때 학문적 공신력과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권 의원은 “현재 정부는 KIEP 보고서의 주장(결론)만 원용하고 있을 뿐,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과 데이터에 대한 공개는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는 마치 여론조사의 주장(결과)만 공개하고 질문지 및 원 데이터는 공개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그는 “국책연구기관인 KIEP가 ‘지적 재산권’ 운운하며 학문적 검증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도 가관이며, 국무총리실은 실제로 조작으로 드러날까봐 두려워서 자료거부를 묵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질타하며 원 데이터 일체를 제출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김유정 (actionyj@dailyseop.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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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오늘 비가 올게 뭐람.

집회시작한지 몇시간도 안돼서 해산해버렸다.

늦게 도착한 친구는 집회 다 끝났다는 말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빨간 색 바탕에 하얀 색의 한미 FTA반대라는

문구가 지하철 출입구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걸 보고

기운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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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자본주의란 무엇인가(1)

 

맑스경제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자본』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맑스주의를 연구하고 그것을 혁명적 투쟁의 지침으로 하려는 사람은 『자본』을 가장 진실한 태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초학자에게 직접 『자본』을 읽으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글은 맑스경제학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맑스의 논지에 따라 평이하게 전개하여 『자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1) 유물사관과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치

  유물사관은 맑스에 의해 발견된 사회의 발전법칙에 관한 과학이며, 자본주의사회를 변혁하는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무기이다. 우리들은 이 이론을 확실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유물사관은 모든 관념적인 역사관 -역사를 어떤 사상이나 영웅의 자의적인 창조로 보거나, 시민사회를 유일한 사회형태로서 영원화(永遠化)하거나, 또한 역사를 단지 개별적인 제현상의 계열로 보는 역사관-과 화해하기 어려우며 대립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사회의 역사에도 자연의 역사와 같이 변증법적으로 객관적인 운동법칙이 관철된다고 보는 역사관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사회현상의 분야에 대한 유물론의 수미일관한 연장, 적용」(레닌, 『칼 맑스』)이며 따라서 사회적 의식을 사회적 존재로부터 설명하는 것의 요구로부터 출발한다. 맑스는 『경제학 비판』의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은 그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일정의,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로부터 독립한 관계, 생산관계로 들어간다. 이 생산관계는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의 발전단계에 조응한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만든다. 이것이 현실의 토대이며, 그리고 이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서고, 또한 이것에 일정의 사회적 의식적 제형태가 조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인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라 한다.


  나아가 맑스는 사회 발전의 ‘원동력’(모순)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개념을 부여하면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의 어느 단계에서 그 생산력이 종래 그 내부에서 작동해 왔던 현존의 생산관계와, 혹은 같은 것을 법률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소유관계와 모순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형태에서 그 질곡으로 변한다. 그 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가 혹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혁된다. 하나의 사회구성체는 모든 생산력이 발전하기까지는 결코 몰락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새로운 보다 고도의 생산관계는 그 물질적인 존재의 제조건이 과거의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부화하고 끝날 때까지 결코 종래의 것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역사의 일반적 결론인 이러한 유물사관을 실마리로 하여 사회적 생산과정의 역사에 관하여 보다 구체적인 개념을 갖게 된다. 크게 말하면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연속된 시대로서 원시공산제,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적 사회를 들 수 있다. 사회의 생산력이 발전하여 잉여생산이 가능하게 되면, 사유재산이 발생하고 타인의 잉여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적대적인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것이 된다. 즉, 노예제적, 봉건제적, 그리고 최후의 적대적 관계인 자본주의는 계급사회 아래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생산력을 실현하고, 다음의 새로운 사회=사회주의사회의 물질적 제조건을 창출한다.


 각각의 생산관계에 대하여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이하에서 전개하는 역사적 발전과정은 지역에 따라, 혹은 전형적인(유럽) 또는 보다 뒤처진(아시아), 제조건이 상호간에 교차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사회가 어떤 형태로 경험했는지 또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는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자연적(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 재산인 대지와 소박하게 관계하고, 자급자족 경제를 영위했다. 여기서는 잉여생산물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사유재산도 계급대립도 없었다. 극히 적은 잉여생산물이 발생한 경우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귀속됐다. 사회적 질서는 관습이나 전통의 힘으로서 씨족의 장로나 부인이 갖고 있었던 권위 또는 존경에 의해 담보되었다. 사람들을 강제하기 위한 특수한 기구는 생산력의 낮음 때문에 그 유지가 불가능했으며 또한 불필요하기도 했다.


 공동체 내부에서 생산력의 일정의 발전 또는 새로운 생활기반을 구하기 위한 씨족의 이동은 다른 공동체와의 교역이나 전쟁을 가져왔으며, 농촌공유지를 가진 도시를 출현시켰다. 여기서는 이미 공동체의 순수한 자연적인 성격은 파괴되고, 많은 성원이 채무자로 혹은 피정복자로서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다른 자는 이러한 노예의 소유자가 되었다. 노예와 노예 소유자, 이것이 최초의 큰 계급분열이었다. 노예소유자는 토지나 농구 등의 생산수단과 함께 노예를 완전히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했다. 노예는 말하는 도구에 불과했으며, 가혹하게 착취당했으며 종종 몸까지 바칠 것이 요구되었다. 지배자는 이런 착취관계를 유지하고 피지배자를 억압하기 위해서 권력관계인 국가를 만들어내고, 법률에 의해 이것을 강제화했다. 철학자는 이것을 변호하는 사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노예제사회는 자기 자신의 재생산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노예를 수탈하는 것에 의해 스스로 붕괴하고 말았다. 이것은 끊임없는 노예해방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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