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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호밀밭으로의 초대
"무슨 일이든 상관하지 않을 테고.그저 아무도 나를 모르고,나도 다른 사람들을 모르는 곳에 가는 걸로 족했다.그곳에서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살 참이었다."(…)누구라도 내게 말하고 싶으면,종이에 써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귀찮아지게 될 것이다.그렇게만 되면 평생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내게 되리라.(…)"죽을 때까지 거기서 사는 것이다.오두막집은 숲 가까이에 지을 것이다.(…)음식도 손수 요리해서 먹을 것이고,결혼하고 싶어지면,나와 똑같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귀여운 여자를 만날 것이다.그 여자는 내 오두막에서 같이 살 것이다."
영화 <넬 Nell>에서 조디 포스터는 산속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그런 그녀를 연구하기 위해 박사들이 오면서 여러가지 해프닝이 일어난다.조디 포스터(넬)을 세상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혹은 사회화를 위한 갖은 노력들을 한다.하지만 놀랍게 조디포스터에게도 나름대로의 먹고 사는 구조가 있다.비록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아니더라도 조디포스터에게는 자기만의 삶의 양식과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그것은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능력이다.바로 미메시스(mimesis).바람속에서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그녀의 두팔은 좌우로 흔들거리면서 자연을 미메시스한다.아직 타락하지 않는 넬의 언어는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세상의 때묻은 않은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다.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처럼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홀든은 확실히 미쳤다.미친 게 분명하다.미쳐있는 세상에 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손해다.특히 홀든처럼 혹은 조디포스터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에게는 치명적이다.차라리 이성의 스위치를 내리고 미쳐가는 세상에 몸을 섞여 사는 게 건강에도 좋으며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착한 학생'과 '착한 자녀'로 살아가는 게 유일한 방법일게다.홀든이 지금 건강이 악화돼 요양원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이른 바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권력의 망속으로 뛰어들어 돈과 명예따위를 성취한다면 홀든이 행복해할까?적어도 홀든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와 행복은 거기에 없다.
선택이 주어지지 않는 삶.이제 홀든의 삶은 바둑판처럼 정해져있다.내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정한 삶에 브레이크를 걸고 방향을 틀 수 없는 무력감은 홀든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다.적당히 공부해서 적당히 좋은 대학에 적당한 직업에 적당한 아내와 함께 살고 그만그만한 아이들을 키우며 살다가 죽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바라는 삶이다.이처럼 획일적으로 옭아메는 세상은 홀든더러 이렇게 살아가는 게 정답(!)이라는 강령이 깔려있다.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홀든의 입에 재갈을 물린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불만인 것이다.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언어'를 앗아가고 남은 메아리처럼 끝없이 따라다니는 우울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그래서 홀든은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침묵을 지키고 싶어했을지 모른다.그러면 홀든이 바라는 삶과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 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그럴 때면 어딘가에서 내?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절벽은 아찔하다.순간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추락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에 청춘의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다.바로 이곳에서 홀든은 원하지 않는 선택과 이미 짜여진 삶의 모양으로부터의 강요때문에 절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뛰어내려야 하는 아이들을 구출해낸다.깍아지듯 위태로운 절벽과는 대비되는 호밀밭에서 평평한 땅에서 노는 아이들은 홀든의 보살핌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미.쳐.서 행복의 의미를 진정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세상 사람들이 행복은 저기 너머에 있다고 손짓할 때 홀든과 호밀밭의 아이들은 자기의 언어를 발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자연을 미메시스했던 조디포스터처럼 호밀밭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어린 아이는 '아직 정해지지 않는 삶'속에 '자신의 것'으로 '새로 채워넣고 그려넣어야 할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이처럼 홀든은 이 하얀 캠버스에 누구의 방해와 간섭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호밀밭의 파수꾼.얼마나 근사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