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 끝나면 어김없이 정은임의 영화음악이 흘러나왔다.그곳에선 늦은 야밤에도 영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어졌다.내가 전적으로 영화를 보는 눈을 얻은 9할은 정영음이였다.얼마전 그녀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바자회를 열었단다.언제 죽은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벌써 그렇게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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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적인 글쓰기를 중단한 진중권의 글.....
지난 7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정은임 아나운서가 8월4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스타’라고 한다. 정말로 사랑받는 사람이었나 보다. 일개(?) 아나운서로서 팬클럽을 가졌다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녀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니, 그들의 사랑에는 철없는 애들의 얼빠진 스타 숭배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진지함 혹은 깊숙함이 있다. 도대체 어떤 여인이었을까?
정씨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1990년대 초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으로 기억한다. 특히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와 함께 진행한 꼭지는 청취자들에게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했고, 그 프로그램을 듣고 자란 ‘영화의 아이들’이 오늘날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만들어내는 대중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정은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를 갖고 있다. 진보의 이념이 퇴색해 가던 1990년대에,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 금지된 운동권 영화를 소개하고, 그 영화의 삽입곡이라며 운동가를 틀어주고, 심지어 빨갱이 노래인 <인터내셔널>을 영화음악이라고 내보냈다. 어떤 이들은 라디오에서 이런 노래를 들은 것을 평생 잊지 못할 감격으로 기억한다. 그들의 눈에는 정은임이 아마도 야무진 투사로, 공중파에 침투한 게릴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은 이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두 측면이 서로 뗄 수 없이 결합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어느 신문 기사는 그녀의 프로그램을 ‘공중파라는 한계 속에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듣게 해준 방송’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그 방송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안쪽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그 안쪽의 콘텍스트를 이루는 영화의 바깥 또한 들을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인격에서 겹쳐지는 우연을 다시 기대할 수 있을까? 설사 그런 아나운서가 또 나타나도, 이제는 청취자들이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니다. 천만 단위로 동원이 이루어지는 시대의 영화는 과거와는 다른 유형의 팬을 찍어낸다. 실제로 지난해 컴백한 은 채 1년도 못 채우고 퇴출되었다. 그래서 정은임은 반복이 불가능한 ‘일회적’ 현상이다. 죽어서 라디오의 전설로 남을 수밖에 없다.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10월23일 새벽 정은임은 저들이 ‘노동귀족’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얘기했다. 그보다 몇 시간 뒤에 배달된 어느 조간 신문의 칼럼에서 나 역시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모두 잠든 그 날 새벽에 한 아나운서가 음악 방송에서 고공 크레인에서 목숨을 끊은 노동자 얘기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이게 고맙다. 정말 고맙다.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내가 고마워해야 할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공 크레인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이 땅보다 어쩌면 그곳이 방송하기에는 더 좋을지 모르겠다. 저 위에서 그녀는 아직도 방송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