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응달 박완서 소설전집 5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1993년 9월
평점 :
절판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은 대부분 최소한 한번은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뜻밖에 낯이 설었다.  

이 책은 약간, 파격적이다. 전혀 박완서 스럽지 않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가장 박완서 스럽다. 나는 이 책을 93년에 나온 세계사판 박완서 전집에서 읽었지만, 이 책은 실제 1978년 <여성동아>(문예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 주기 바람)에 1년 반동안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사실 작가들은 연재와 비문학지에 작품 발표라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한때는 신문 연재 소설이 소설의 대표적인 발표 지면이었고, 실제 신문 연재 소설중에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동아일보)나 최인호의 상도(발표지 기억안남. 신문이었음) 박경리의 토지 5부 (문화일보)등은 장편 소설로서의 훌륭한 성취를 이루어 내지만, 대부분 비문학지에 연재되는 소설은 통속성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혐의의 시선을 짙게 받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박완서의 소설 중 가장 통속적이다. 숲 속의 별장 같은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밀실, 그곳에 모여든 각자 모두 구린 구석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명 한명 죽어나가는 상황. 그리고 유일하게 순결한 누군가에 의한 범인 탐색. (오, 이쯤되면 크리스티 여사가 부럽지 않지 않나?)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박완서스러움을 잃지 않지만, 어차피 상황이나 인물 모두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관계로 박완서의 묘사는 빛을 그다지 발하지 못한다. 사실 이쯤되면 앗,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에도 오롱이 조롱이가 나오는 건가, 싶기까지 하다. 어떤 상황의 어떤 인물에게도, 그리고 어떠한 관계에도 충분히 그럴법한 이유를 제공해 주는게 박완서 선생님의 최대의 장점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면이 부족하다.  

주인공 자명과 민우의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도 억지스럽고, 사실 자명이 민우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다. 이야기는 미혼모인 자명이 민우의 유혹(?)에 이끌려 6살난 아들 윤명을 데리고 저택집으로 들어가 저택집의 과거와 비밀, 2살 어린 시어머니 소희 부인의 비밀을 하나하나 추적하고 밝혀내는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자명이 이 저택집으로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부자연스러운데다 인물들이 죄다, 지나치게 드라마틱하다. 게다가 도무지 이유없이 등장했다 사라져버리는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자면, 윤명의 아버지인 윤재. 윤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명이 윤재의 집에서 당하는 수모는, 이야기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자명의 배경으로 그런 장치를 해 놨었어야 했나 싶고(그냥 사연있는 미혼모쯤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민우의 어머니가 굳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영우의 어머니는 더욱 갑작스럽다. 박완서의 소설에서는 사실 이렇게 군더더기 인물이 거의 없는 편인데 이 소설은 유난하다. 이야기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구도로 흘러가고, 결말은 더욱 작위적이다. 박완서 선생님 작품이라고 하기엔 이 작품은 뭔가, 죄송스럽게도 2%가 부족하다.  

그래도 어쨌든, 박완서 선생님도 이런 소설을 쓴 적이 있다고, 한국적인(?) 추리소설은 이런게 나온다고, 박완서 스럽게 가독성은 역시 최고라고. 주저리 주저리.  

2010.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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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1-10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이 쓰셨다는 데, 제목을 보곤 모르겠더니...내용을 보니 읽은 책이네요~^^
저 이 책에 추리소설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쫌 남사시려웠는데...ㅠ.ㅠ

아시마 2011-01-10 15:19   좋아요 0 | URL
전 솔직히... 추리소설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남사시러웠던 정도가 아니라, 이 책을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요. -_-;;;

매문이 필요하신 분도 아니었을텐데.. 왜 이런 글을 쓰셨을까요? 에효.

아, 맞다. 근데 이 소설의 아우라가 한참 뒤, 2000년대에 쓰신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풍겨져 나와요. 저는 이 두 장편이 은근히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더라구요. 내용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뭐랄까 사람들의 속물성이 가지고 오는 그 기묘한 은밀함에 대한 탐구? 뭐 그런거요. 아직 정확히 머릿속으로 정리가 안되어서 말이 막 꼬이네요. -_-;;;

여튼, 마음은 아프지만 의미는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에(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식의 추리기법을 차용한 소설은 전혀 쓰시지 않으셨어요.) 리뷰 한편 남겼어요. ^^;;;

78년작이니까요. 소설가도 변신을 하지만 대한민국의 소설작법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던 8-90년대 아니겠어요. 이해해야지요. 하하하... 그 시기 나온 한국 추리는 다 요모냥 요꼴... ;;;;

blanca 2011-01-1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소설이 있었어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아니고--;; 근데 박샘이 의외로 통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지점을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일단 너무 재미있잖아요. 정말 너무 훌륭한 작가인데 재미 없는 작품을 쓰는 이들도 많아서....

그런데 저는 왜 자꾸 혼자서 박완서샘 책 전작주의를 90%는 했다,고 착각하는 거죠? ㅋㅋㅋ 캐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아시마님, 저 담주에 이사가는데 <도시의 흉년>은 아주 어수선한 가운데 주문해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서울 진짜 너무 추워요. 여하튼 아시마님이 돌아오셔서 저는 너무 기쁘다는^^;;

아시마 2011-01-11 16:10   좋아요 0 | URL
박완서 샘 작품을 전작하시려면 일단 세계사판 장편소설 전집(19권까진가 나와있고요)이랑 문학동네에서 나온 단편소설 전집 6권+푸르매 출판사에서 나온 <환각의 나비>라는 박완서 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을 읽으면 큰 줄기는 잡히는 거고, 나머지는 에세이집들이랑 근간이라고 보시면 되요. 아주 오래된 농담 이후의 책들은 아직 전집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여행기랑 일기도 따로 있고 박완서 선생님 작품 해설집이랑 작가앨범(웅진판), 작가세계에서 나온 박완서 편, 뭐 이런것들까지 챙기면 한 80%쯤은 전작 콜렉션 하신 셈이 되요. 워낙에 다작하시는 분인데다 예전에 나왔던 에세이 중에 절판된 것들이 좀 있어요. 소설로만 다작이 아니고, 에세이랑 산문들도 워낙에 많이 쓰셔서... 짧은 산문인데도 정말 버릴것이 없다는게 박완서 샘의 장점이죠. 저도 옛날 80년대 초반에 나온 에세이집 <혼자 부르는 합창>은 아직 구해보지 못했어요.

아, 도시의 흉년은 세계사판 박완서 전집에 상, 하 두권으로 들어가 있구요, 그거 말고, 하권 이후의 이야기가 있는 속편이 또 있는데, 그건 새로 발간하지 않으시는 듯 해요. 저도 예전 세로읽기로만 읽었던 기억이 나요.

<도시의 흉년>은 박완서 샘 작품 중에 제가 또 특별나게 손꼽는 작품이거든요. 빠져드시면 ㅎㅎㅎㅎㅎㅎ 짐정리가 늦어지실 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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