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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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편집위원/김우창, 유종호, 정명환, 안삼환


몇년째, 나의 북 콜렉팅 목록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포함되어 있는데, 하고많은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민음사판을 선택하여 콜렉팅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글에 나온다.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고 감동시키는 새로운 번역. 민음사에서는 모든 해외문학을 재번역해서 문학전집을 펴 내고 있다.

확실히, 세대마다 어필하는 문체는 따로 있다. 하다못해, 사건 중심의 대중소설조차 80년대 후반 삼중당 판 로맨스 소설은 도저히 읽지를 못하겠다. 옥수수수염 같이 빛나는 머리털, 또는 옥수수빛 머리털 이라고 번역해 놓은 문장을 보고 “오오, 멋진 머릿결이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옥수수수염을 직접 본 기억도 없다. 물론, 옥수수는 길거리에서 파는 알록달록한 빛깔의 참옥수수나  누리팅팅하다고 말하기조차 낯설어지는 기묘한 빛깔의 옥수수밖에 보지 못하였으니. 참고로, 나는 옥수수를 먹지 않는다. (아마 그 표현을 쓴 작가와 번역자는 분명, 밭에서 자라는 씩씩하고 싱그러운 옥수수를 매일 보고 자랐음에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저러한 묘사가 80년대 후반의 클리쉐였거나.)

정이현이라는 낯선 작가의 신작 소설집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이, 오호, 잘 읽히는 군. 이었다. 이어, 아하, 이것이 요즘 어필하는 문체구나 하는 생각.

21세기,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단어는 쿨(COOL)이다. 일종의 부사어(관형어?)로 시작된 이 단어는 곧 문화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문학까지 침투하였다. 심드렁, 관심없음, 가볍고 발랄하지만 묘하게 냉소적, 겉으로만의 친분, 내면과 외면의 전혀 다름, 내면과 외면의 완벽한 일치.(극과 극은 맞닿아 있다고, 쿨이라는 단어로는 이 두 가지의 뜻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 놀라운 단어다, It's so cool!!!)

우리 문학에서 이러한 쿨한 매력은 은희경 소설의 냉소로 시작하여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짓이다』에서 그해 한국을 발칵 뒤집었고, 김영하, 이지형(『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이 소설 역시 문체의 쿨함이 보통은 넘는다.)등으로 이어졌다. 95-6년 썰렁 개그가 히트를 칠 때는 뭐든 썰렁해야 살아남더니 쿨(가수가 아니다.)이 히트를 치니 쿨하지 않은 소설은 살아남지를 못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개인적으로 쿨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진 않달까. 마찬가지로 문학에 있어서의 쿨~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김영하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쿨~에 깊이가 있기 때문이고, 그가 쿨~ 이라는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얻어지는 놀라운 문학적 성취에 깊이 탄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봐도 김영하나 은희경의 그 냉소적 문체를 얕은 깊이를 감추기 위한 가소로운 가면으로 보기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쿨~은 매력이 있다, 분명. 심드렁하고, 가볍고, 스스로 무책임한데서 오는 타인의 무책임에대한 너그러움. 쿨 한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무책임한데 이유가 있다. 물론, 스스로 무책임하다는 것을 알아 책임질 일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칭찬할 만 하지만 그래서야 호모 폴리티쿠스(사회적, 정치적 인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가.

다시, 이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서, 정이현의 이 소설집의 문체는 최고로 쿨~하다. 요즈음의 감성에 가장 잘 어필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매력있고, 재미도 있다. 페이지도 쉽게 넘어가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별로 남는 것이 없다. 웹 세계의 좀 괜찮은 필진을 보유하고 있는 게시판의 설왕설래를 읽고나서, 아, 재미있다, 하고 돌아서는 것과 비슷한 심리랄까. 무엇보다 생각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소설은 여엉, 재미가 없다. 여기서 이 인물은 왜 이런 행동을 할까, 하는 고민을 전혀 던져주지 못하는 소설이다. 깊지 못한 사유를 가볍고 냉소적인 문체에 얹어 가려보려 애쓰지만, 글쎄, 매력적이지만 금방 바닥이 보이는 쿨~과 똑같다.

스스로는 냉소적인척, 관심없는 척, “늬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이게 내 스타일이야, 간섭하지 마.” 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 잔머리가 유리알처럼 환히 보인다. 그런 소설은 별로 재미가 없다. 산뜻하고 감각적인 문체인 것은 맞으나. 서로 전혀 다른 특질을 가지고 있지만, 시나리오 작가 고은님도 생각이 날락말락이다. 사유의 가벼움을 문체의 화려함으로 대충대충 어떻게 메꿔보려 노력하는 부분이.

뭐, 어쨌든, 작가가 쉽게 쓴 글이, 독자도 쉽게 읽히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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