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를 더욱더 남에게 보일세라 꼭꼭 싸안고 가는 일련의 행위다.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련의 상흔들, 또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덧나지 않게 덮어놓고 조심스레 외면하는 나날들. 결국 삶이란- 메마른 사막을 짐까지 지고 묵묵히 지나는 낙타처럼 조용한 견딤에 다름 아니다.

한강의 첫 소설집이기도 한 이 책에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각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각의 상처를 싸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아이 둘을 데리고 동반 자살을 하려 했던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나와, 어미와 아비가 차례로 죽고, 의붓 어미의 친정을 외가로 삼아 살아야 하는 자흔의 동거를 담은 소설 《여수의 사랑》, 아비가 죽은 직후, 동네 아이들에게 맞아 죽은 동생을 보아야 했던 인규(《질주》). 자신으로 인하여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일란성 쌍둥이를 보며 살아가던 동걸(《야간 열차》), 사생아로 태어나 미쳐 죽은 생모를 보고 삶을 내동댕이쳐 버린 재헌(《저녁빛》), 아내는 집을 나가고, 심장병을 앓다 죽은 딸을 둔 황씨와 가난한 어머니와 여동생을 버리고 도망쳐 두 번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된 정환(《진달래 능선》), 순진했기에 사기를 당하고 혈육에게서조차 경원시 되어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는 나, 영진(《어둠의 사육제》).

이 인물들에서 보이는 바, 한강의 작중 인물들은 모두 '가족관계'의 파탄, 또는 가족 누군가의 죽음 등이 원인이 되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가족이 무엇이던가. 가족은 한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 사회에서 거칠게 투쟁하며 상처 입은 인간이 편안히 쉬며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는 곳이 아닌가. 그 가족관계가 상처의 원인이 된다면 그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 불가가 되고 만다.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험난한 세상을 고아처럼 외롭게 떠돈다. 그들의 고통은 '희망 없음'에 있으며, 한강은 상처받은 인물들을 제시하여 그들의 지난한 삶을 그려낼 뿐 작중인물의 누구에게도 상처 치유나 회복의 희망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끝끝내 힘겨운 '견딤'만이 남는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의 이러한 '상처'에 저항하지 않는다. 극복하려는 의지도 없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꿋꿋하게 견디어 나갈 뿐이다.

모든 소설이 인생의 전환점이나 해법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단지 이렇게 상처의 벌건 속살을 보여줄 뿐 그것을 덮고 아물리려 노력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는 아무래도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그저, 상처가 이렇게 있으니 그것을 견디라고만 말한다. 그것뿐, 이라고 한다.

서정적인 문장들의 갈피갈피에 숨어있는 상처의 기록들.

작가 한강이 이러한 상처에 희망을 던져주기 까지는 앞으로도 몇 년, 이라는 지난한 세월이 흘러야만 한다. 그녀는 2002년이 되어야 비로소 상처의 극복과 치유를 이야기 한다.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는 장편소설을 통하여.

70년에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태어나 93년에 등단한 천재적이라면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작가. 24-25살, 젊은 작가의 희망없이 치열한 내면을 보여주는

썩, 괜찮은,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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