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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최초의 서사무가 구지가, 최초의 서정시가 황조가. 그리고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에 서 있는 공무도하가. 구지가가 집단 창작(가야부족장들의 노래)이고 황조가가 개인 창작이라면, 공무도하가는 그 창작자가 애매하다.
우선, 이 노래를 가장 먼저 불렀음직한 사람으로 백수광부(익사자이자 이 노래의 주인공인 "님"이다)의 아내가 있다.
백수광부의 아내가 부른 노래를 듣고 아내에게 옮겨준 곽리자고가 있고,
남편 곽리자고의 말을 듣고 공후라는 악기를 연주해 이 노래를 부른 아내 여옥이 있다.(해서 이 노래 공무도하가의 또다른 별칭은 공후인이다.)
이 셋중 이 노래의 진짜 창작자는 누구일까. 고등학생용 참고서에도 중구난방이어서 백수광부의 아내로 적혀있는 것도 있고 여옥으로 적혀있는 것도 있다. 아직 어느것도 정설이 아니고, 앞으로도 무엇을 정설로 삼을 것인가는 알수 없는 일. 뭐 사실 알고 보면 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긴 하다.
노래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이 노래를 단순한 서정시가로 보지 않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유리왕의 황조가에서 드러난 화희(禾姬-쌀여자)와 치희(雉姬-꿩여자)의 다툼에서 치희가 떠나고 화희가 남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고구려가 수렵 중심의 국가체제를 농경 국가 체제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 보는 견해가 있듯, 이 노래 공무도하가역시 한 시대의 교체를 은유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하늘에서 환웅이 내려와 낳은 아들 단군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세운 나라 고조선은 천부인을 가지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다스리던 나라였다. 하늘과 인간 사이에는 반드시 매개자(무당)가 있다. 그러다 점점 하늘의 뜻은 잊혀져가고, 나라는 인간의 법칙, 즉 법률로 다스려진다. 그 과정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던 매개자인 무당의 권위는 추락하다못해 무화되어간다. 백수광부는 그 무당이었을 것이다. 권위가 추락한 것에 분개하여 술을 마시고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백수광부의 죽음을 지켜보는 곽리자고가 고조선의 진졸, 즉 일종의 공무원이었다는 것또한 의미심장하다.
그야말로 미실, 미실의 시대 안녕히. 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래서, 나에게는 이 노래 공무도하가의 현대적 은유로 읽힌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해 가는 장철수(백수광부)와 시대와 영합해 점점 더 그 권력을 키워가는 박옥출(권력? 정치?). 그리고 그들을 냉정히 지켜보는 관찰자 문정수(곽리자고)와 문정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노목희(여옥). 그리고 여기에 장철수를 도와 함께 소멸해가는 후에(백수광부의 처)까지 구도를 잡아보면,
김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가 손에 잡힌다. 그리고 아마, 고조선의 시대 교체도 이와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여, 이 사람,
글 참, 잘 쓴다. 무시무시하도록.
김훈의 그 지나치게 단정하여 끝간데 없이 화려한 문체도 여전하고, 이 문체가 과연 현대물에 어울릴까 했던 기우도 말끔히 씻어주었다. 신문기사를 써 내려가듯 감상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과 사건 중심으로만 써 내려 간 문장들인데 그 문장과 문장사이의 빈 공간에서 저절로 감상이 솟아난다. 확실히, 세상엔, 말하여 지지 않는 것이 더욱 강한 법이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에 이어 세번째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난다. 백수광부는 죽었고, 곽리자고는 그 이야기를 여옥에게 전달할 뿐이며, 여옥은 그저 무심한 노래 한곡을 만들고 끝이 났다. 노목희가 그린 낙타 그림에 대한 묘사나 번역(이 번역이라는 부분 또한 여옥의 역할과 겹친다)한 타이웨이 교수의 책 제목인 <시간 너머로>에 관한 부분이 결국 김훈이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 아닐까.
낙타가 콧구멍을 사막의 바람 앞에 열어놓고 지평선 너머의 물과 나무와 풀의 냄새를 맡듯이 타이웨이 교수는 역사의 지평 너머로 사라진 인간의 체취를 맡고 있다고 서평자는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맡아내는 인간의 체취는 선과 악, 이성과 비이성, 합리와 불합리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고
(p.204)
인간은 과연 물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인가. 그 물을 건너가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상이 있기는 한것인가. 물을 건너 간 그곳에 펼쳐진 세상 또한 물 이쪽의 세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과거의 세상이 그러했듯 현재의 세상도 이러하고 미래의 세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타이웨이 교수의 입을 빌어 김훈이 말한다.
일연은 무너진 황룡사의 잿더미와 그 참상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연에게 그 잿더미는 기록할 만한 가치에 미달했던 모양입니다.일연은오히려 애초에 황룡사를 지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었던 유토피아의 원형에 관하여 썼습니다. 부서질 수 없고 불에 탈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그는 썼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야만에 맞서는 그의 싸움이었습니다. 저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많은 노래와 이야기 들은 그가 한 생애에 걸친 유랑의 길 위에서 채집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노래와 이야기 들은 모두 잿더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야만과 살육의 시대에 쓸리며 소진되었지만, 원리와 현상이 다르지 않다고 믿었던 점에서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습니다.
(p.96-97)
결국 김훈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강을 건너가지 못한, 그럼에도 부서질 수 없고 불에 탈 수 없는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p.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야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그리고 인간은 결국 낙타와 같이 시간을 건너 시간 너머로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