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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 - 증보판
김연수.김애란.심보선.신형철.최은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by 김연수 외
읽은 날 : 2025.5.15.
나는 수능 2세대다. 수능으로 대학을 간 두 번째 학번이고, 어쩌면 수능체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첫 세대 일지도 모르겠다. 수능, 그러니까 ‘수학능력시험’이 학력고사를 대체하게 되리라는 발표가 나왔을 때 교육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교사들조차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수능’이 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그때도, 지금도 한다. 수학능력시험이라는 말을 처음들은 사람들은 수학數學실력 만으로 입시를 한다는 이야기냐고 물었고, 그 수학數學이 아니라 이 수학修學 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멍해졌다. 언어 그 자체로만 따졌을 때, 수학능력시험은 과거의 학력을 테스트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테스트하는 거니까. 잘 배웠느냐를 묻는 게 아니라, 잘 배울 수 있느냐를 묻는 시험. 도대체 뭘로 기준을 잡아야 하나.
나는 그 한가운데 학생으로 앉아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3월엔 지금도 그러하듯 모의고사를 보았고, 그때의 모의고사는 학력고사 형태였다. 그러니까 나는 실은, 학력고사라는 형태도 수능이라는 형태도 모두 교육현장에서 경험한 세대인지도.
6-7월경, 수능형 모의고사를 처음 보았을 때, 학교는 완전히 뒤집어 졌다. 말도 안 되는 성적 역전현상이 쏟아진 거다. 내신 1-2등급을 받던 아이가 수능모고는 550명중 400등 밖으로 밀려나고 내신이 엉망인 아이가 수능모고 등수는 전교 30등을 하는 식으로. 그 중 아이들을 가장 경악하게 만든 건 언어영역(지금의 국어영역)이었다. 시험에 출제된 모든 지문이 처음 보는 지문이었던 거다.
어쩌면 맞는 말이다. 수학능력이라는 건, 앞으로 뭔가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보겠다는 이야기고, 뭔가를 배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 해석능력, 요즘 유행하는 문해력이니까. 최초 수능 언어영역의 기조는 “교과서 외 출제” 였다. 그러니까, 문학으로 한정 지어 이야기하자면, 학교에서 문학 독해능력을 배워 새로운 문학작품을 제대로 해석해 내봐라, 하는 거다. 이론은 좋지.
입시에 특화된 지역(우리 지역은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다.)에 입시에 특화된 학교(그랬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를 포함한 그 지역 인문계고등학교는 4년제에 90%가 진학했다. 내 또래의 대학진학률을 생각할 때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치다)는 빠르게 적응했다. ‘수능도 학력고사를 가르친 방법으로 정복해 주지’로. 교과서 외 지문 출제가 기조야? 그렇다면 교과서 외의 지문을 전부 가르치겠다는 게 그들의 목표가 되었다. 이 무슨 6.25 중공군 인해전술도 아니고.
학교 앞 문구점을 겸하는 서점에 바로 각종 참고서와 문제집이 깔렸다. 현대시만 300편이 실린 문제집이 우리 앞에 등장했다. 교과서에 실릴 일이 없었던, 원래대로라면 대학 국문과에 가서나 배웠음직한 온갖 고전 시가와 가사와 산문이 몽땅 수록된 문제집도 나왔다. 나 현전하는 향가 25수에 정철이 쓴 모든 가사를 고등학교 때 배운 여자. 하하하하하하. (도대체 저 많은 작품을 다 읽고 해석할 시간이 어떻게 났냐고 묻지 마라.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다만 우리는 7시까지 등교해서 저녁 6시까지 꽉 채워 정규수업과 보충수업을 했고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으며 토요일엔 5시 하교, 방학 땐 오전엔 보충수업 오후엔 자율학습을 했다. 뭐 이쯤 하면 90%의 4년제 진학률이 납득이 되지 않나. 미친 세월이었다.)
그래. 시는 짧으니까 그렇다 치자. 고전이건 현대건 소설은 어쩔 건데? 심지어 해외 문학도 있는데? 중장편 소설이나 장편서사시는 어쩔 거야. 신동엽 <금강>이나 김동환 <국경의 밤>을 모두 문제집에 실을 거야? 입시와 돈에 관련되자 출판사들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중요작가의 주요작품을 모아놓은 단편집은 기본, 장편 소설의 다이제스트 판과 작품해설 모음집들이 즐비하게 깔렸다. 고전문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뒤돌아 생각해 보건대, 저작권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해적판이었음이 분명하다.
출간과정이야 어쨌건 전문가들에 의해 선별되어 최고의 작품성이 보장된 시에 최고의 평론가들이 요점정리를 해서 떠 먹여주는 해설집이라니. 10대 후반의 말랑한 뇌는 이해의 과정 없이도 그 모든 글귀를 전두엽에 때려 박았다. 이해가 없으니 감동이 있을 리가. 그러나 앎과 감동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고, 나는 그것들을 그냥 ‘알았다’. 이미 최고의 평론가가 얌전하게 해체해 가지런히 정리해 둔 글이니 나의 견해 따위는 무관했다. 문자는 그대로 뇌에 박혀 이것이 나의 해석인지 타인의 해석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작품 해설에 내가 토를 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냥 받아들이는 거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야심한 시간,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온갖 문학작품의 다이제스트판과 작품해설집을 읽던 시기가. (‘자율’ 학습이라고 해 놓고는 실은 강제여서 우리는 3년 내내 모든 학생들이 별 보고 나와 별 보고 들어가는 생활을 했다. 그때 우리는 야자가 없다던, 머리를 기를 수 있다던 서울의 여학생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아, 그 끔찍한 귀밑 3센치.) 미친 세월임에도 축복받은 시절이었다. 수능 언어영역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선생님들의 고육책은 많은, 실은 대부분의 아이들을 미치게 만들었지만(그리고 실제로 미친짓이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미셀 트루니에 식의 ‘교양인’이 아닌 ‘교육인’이 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그 미친 현대시 300편(만 배웠겠나요...) 문제집이 아니었다면 교과서 외의 시를 절대 읽지 않았을 것이고, 선생님이 읽으라고 해서 읽었던 그 많은 다이제스트판과 작품해설 모음집에서 본 대부분의 작품은 작가 낯가림이 심하고 독서 편식이 심한 나에게 그나마 작은 문이 되어주었다. 그때 열린 그 작은 문으로 나는 더듬더듬 문학의 세계를 헤쳐나가는 중이다.
이 책은 내가 그때 열었던 그 문보다 훨씬 아름답고, 그 문 너머의 세계를 궁금해지게 만든다. 이 문을 열고 나와보세요, 문 너머의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고 흥미롭답니다, 같이 걷지 않으실래요? 라고 유혹하는 아름다운 책이다.
우리 다 같이, 문을 열어 보아요. ^^
2025.5.19.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