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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평점 :
『빛과 실』 by 한강
읽은 날 : 2025.4.27.
1. 매년의 노벨문학상 발표날이 되면 온갖 언론사와 문학단체에서 시인 고은의 집 앞을 찾아가 지랄 발광 난장판을 벌여대던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난장판에 지친 고은은 발표날 즈음이면 집을 비우기 시작했다 한다.
2. 김혼비, 박태하의 『전국 축제 자랑』에는 웃지도 차마 울지도 못할 장면이 하나 기록된다. 벌교 꼬막축제에서 펼쳐진 ‘작가 조정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위한 발대식’. 심지어 조정래 작가를 모셔다 놓고 한 행사였다. 맙소사.
강소국 반열에 들어섰지만 한국인들 스스로도 너무 잘 인지하고 있는 사회 각 분야의 ‘빈약한 기초’를 단박에 덮어 줄 외부의 권위로 지나치게 자주 소환되는 노벨상, 그 K-노벨상-집착의 한쪽 끝이 이곳 벌교까지 닿아있었다. 세상에 노벨 문학상을 받자고 발대식을 한다는 발상이 가능하다니!
김혼비, 박태하 『전국 축제 자랑』, 민음사, 2021, p.247
3. 그래서 2024년 한강의 수상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앞통수와 뒤통수를 동시에 쳤다. 그 중 제일 억울할 사람은 언론과 문학계의 호들갑에 매번 이름이 오르내리던 그 작가들일 게다. ‘억울할’ 거란 무심한 언사조차 억울할 것을 알고 있지만, 대체 어찌 설명해야 하지. 작가님들의 무고함을 제가 압니다. 라고 해야하나.
4. 2024년 노벨상 수상 이후, 한강의 첫 책이 나왔다. 이 책이 15,000원이다. 페이지수를 세는 정도가 아니라 글자의 갯수를 세어야겠다. 문지, 너무하지 않습니까.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문장은 여전히 아름다운 울림이 있다. ‘한국문학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라는 찬사는 2001년 김훈의 『칼의 노래』에 동인문학상을 수여하며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이 한 찬사인데, 슬쩍 빌려다 써 본다. ‘한국문장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라고.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한국어 문장이라니.
6.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의 한 구절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p.20)라는 구절을 읽었다. 한강은 그 죽은 자들에게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으로 그들의 언어를 기록한다. 이미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한강의 경구 역시 그 언어에서 답을 찾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p.19)
7. 아마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에, 작가가 쓴 일기에 가까운 글 「출간 후에」첫 장은 한강이 이 소설을 얼마나 힘들게 썼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이렇게 못하지 싶게. 그 모든 고통과 인내 속에서도 작가는 쓰고 싶었기에 썼을 것이고, 써야만 했었기에 썼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
더 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p.41)
울면서 장편을 완성한 한강은 “더 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축한다.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죽은 자들에게 빌려드려 언어로 기록하는 일은 참혹했다. 과연 가능할까 회의하며 포기하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하고, 그럼에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여 다시 시작하는 나날들. ‘더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축하게 되는 그 심정. 그 노력의 결과가 노벨상이다.
8.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p.74)에 기대어 가이없어 보이는 노력을 하게 되는 일. 그것이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다. 박경리가 말하듯,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 이라 해도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 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박경리, 『거리의 악사』, 민음사, 1977, p.10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이 산문은 『토지』의 자서自序로 쓰였다.)이다.
9. 작가의 희망 찾기에 무한 감사를.
2025.4.27.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