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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평점 :
『영원한 천국』by 정유정
읽은 날 : 2025.4.5.
1. ‘사이버 가수’ 아담이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8년 1월이다. 당시 기술로서는 최첨단이었겠으나 지금의 눈이 아닌 그때의 눈으로 보아도 이미 어설프기 그지없는 3D 그래픽에 아이고, 이건 좀 무리수 아닌가 중얼거리며 그냥 신경을 껐는데 의외로 엄마가 아담을 몹시 신기해했다. 그래서 저건 대체 뭐냐? 고 묻는 엄마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망연했던 기억이 있다.
2. 키오스크의 일반화와 함께 디지털 소외계층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음식점에서 식음료 주문을 하지 못하거나, 택시 호출을 하지 못해 길에 하염없이 서 있게 되는 노년층에 관한 이야기들.
3. 나의 음악취향은 매우 올드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바, 사람은 20대 초, 가장 감성적으로 말랑할 때 들었던 음악을 평생 듣게 된다는데 내가 그러하다. 요즘 출퇴근시 듣는 플레이 리스트 안의 음악들은 죄다 세기말의 음악이다. 좋아하는 가수도 거기에 멈춰있는 나는 요즘 아이돌은커녕 버추얼 아이돌의 이야기로 넘어가면 ‘저건 대체 뭐냐’ 라고 묻던 엄마의 얼굴과 닮은 얼굴이 된다.
4. 정유정에 대한 나의 평이 박한 것에 비하면, 정유정이 출간한 모든 소설을 다 읽어왔다. 그리고 정유정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갔다. 정유정이 그리는 인물에 동의하기는 어려우나 한국 작가로는 드물게 서사에 강한 작가라는 점만은 인정한다. 좋아하지 않는 작가의 신작을 진득하게 읽어가는 재주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식으로 평가가 조금씩 상향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역시 소설가는 서사지.
5. 헌데 이 소설을 읽고는 좀 당황했다. 여전히 순간순간 몰아치는 서사의 재주는 발군인데 이 소설 자체는 당황스러웠다. <롤라>라는 가상의 세계와 ‘롤라 극장’과 ‘드림시어터’와 설계자. 아담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끝내 실패한 엄마처럼 버추얼 아이돌의 가치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내가 이 소설의 세계에 몰입하기는 어려웠다. 소설이란 모름지기 이 소설 속 ‘롤라 극장’이 그러하듯 ‘자신의 자아가 서사 속 주인공의 자아로 대체되기에 가상의 삶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p.20)하는데에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순간순간 시스템 오류를 일으켜 이야기에서 튕겨지는 기분이었다.
6. 어느새 사이버 가수 아담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나이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과학과 신기술의 발달은 그때의 속도와는 비교도 안되게 빠르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 것인가 독자를 납득시키는데에 실패한 작가의 문제인 것인가.
7. 2004년 개봉해 브래드 피트의 절정기 미모를 영원히 감상할 수 있게 한 영화 《트로이》. 바다의 요정 테티스와 인간 남자 펠레우스 사이에 태어난 아킬레우스는 갓난아기였을 때 테티스가 저승의 강 스틱스에 빠트려 상처 입지 않는(죽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준다. 죽어서 불멸의 명성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삶으로 인해 그는 잊혀지는 존재가 될 뿐이다. 결국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면 불멸의 영광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신탁에 참전한다.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언젠가 죽거든.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아킬레스가 신녀 브리셰이스에게 하는 말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 여지가 있다. 불멸과 영원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8. 일회성과 유한함 때문에 오늘이, 지금이, 이 순간이, 인간의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롤라>라는 공간과 거기에 대한 인물들의 집착에 동의하지 못했기에 끊임없이 소설에서 튕겨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아, 나도 이제 버추얼 아이돌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디지털 소외계층이 되었기에 이 소설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인가.
9. 작가는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욕망’에 대한 이야기”(p.523 작가 후기에서)라고 말하지만 음, 글쎄. 120204년의 지구는 새하얀 얼음별이 되어 지구상 동식물 대부분이 멸종을 맞(p.384)았고, 인간은 <롤라>에 업로드 되어 혼자의 고독한 삶을 ‘영원’ 히 살아간다. 가상 공간에 업로드 된 인간도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감각으로 인지하는 몸이 있다는 것만으로 몸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신동집의 시 <오렌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래, 그 가상공간에서라도 살면 되잖니, 영혼이라고 할지 정신이라고 할지가 있으니까. 실체가 뭐가 중요하니, 싶다가, 내가 다시 소설에서 튕겨나와 버린 순간은 이 부분이다.
버스 승강장을 지나자 어둠의 벽이 나를 막아섰다. 이 벽은 그의 영역이 시작되는 경계선이었다. …… 나는 몸을 돌리고 벽을 향해 섰다. 어둠의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발을 디디자 만경로가 등 뒤로 물러나며 벽이 닫혔다. 동시에 황막한 사막이 나를 감쌌다. 내 거처로 들어온 것이었다. (p.394)
그러니까 말이다. <롤라>에 업로드 된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으로 구축된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 살아간다. 그 안에서 만나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죄다 내 기억에서 불러낸 사람들일 뿐이다. 아. 이 고독의 극한을 보여주는, 고통의 영원이라니. 이건 마치 영원히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아 우주를 홀로 떠돌고 있는 인간을 볼 때와 같은 고통이다. 그래서 경주를 다시 <롤라>로 불러들이기 위해 애를 쓰는 해상의 노력이 이해되지 않았고, 해상을 롤라에 업로드 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이의 노력도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가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졌으니까. 말이야 업로드지만 결국은 죽는 거잖아. 그나마 업로드라도 하면 영혼이, 아니 정신이 남아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업로드 하지 못하고 죽은 연인에 대한 기억은 간직한채 고독속 영원을 누리는 삶이라니. 이게 과연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맙소사.
10. 결국은 <롤라>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에 따라 이 소설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다. 롤라를 긍정할 수 있어야 이 소설 전체를 따라갈 수 있는데. 음. 1998년의 아담을 보며 했던 생각을 또 한다. 무리수예요. 기원전 8세기부터 호메로스 옹이 외쳤잖아요? 영원과 불멸은 달라요! 인간은 소멸할 수 있기에 아름답고 가치있는 거예요.
11. 몸과 영혼(정신)이 분열되어 정신만이 남은 메트릭스의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고, 이미 지난 세기 말에 워쇼스키 형제가 말했답니다. 우리 이미 한번 봤잖아요. 그 세상 별로예요.
2025.4.6.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