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온 여인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에 온 여인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2.28.

 

읽는 내내 박완서의 소설 욕망의 응달이 떠올랐다. 미리 말해두지만, 박완서 선생은 자신의 장편소설 전집을 세계사에서 이미 출간한 상태였지만 죽기 전 그 책과 목록을 다시 정리하여 결정판 전집목록을 만들었다. 박완서의 결정판 장편 전집에서 욕망의 응달은 빠진다. 박완서 선생은 그 소설을 사장시키길 원했다.

 

장소 그 자체가 이야기를 장악하는 소설들이 있다. 최근에 읽어 기억나는 책은 종로구 옥인동 벽수산장을 배경으로 한 심윤경의 영원한 유산이나 인천 대불호텔을 배경으로 한 강화길의 대불호텔의 유령이 있다. 둘 다 구한말이라는 시대와 그 집에 얽힌 역사를 배경으로 유령처럼 보이지만 유령이 아닌 사람과 사람처럼 보이지만 유령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장소의 특성과 맞물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이럴 때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책에도 푸른 저택이라는 특정 장소가 나온다. 그러나 심윤경이나 강화길의 책에서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한 사연을 지닌 장소는 아니다. 박완서의 책에 등장하는 저택집처럼, 이 책의 푸른저택은 어떤 시대 배경이나 역사를 지닌 장소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는 데 의의가 있는 곳이다. 각자의 사연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곳. 그들이 만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 말이다. 또한 박경리의 푸른저택과 박완서의 저택집은 세상과 유리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세상과의 분리, 단절은 시대와 현실과도 분리 단절됨을 의미한다. 이제 여기에 모인 인물들은 세상이 무슨 난장판이 되든 상관없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간다.

 

박경리의 인물은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토지에서 길상이는 서희를 떠보려 불쌍한 과수댁과 살림을 차리는 시늉을 한다. 그녀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에게 매달려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길상이는 그녀와 살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 아주 개자식이다. 이런 개자식 길상이를 끝내 미워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은 길상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길상이가 사랑하는 존재인 서희의 매력에 있다. 독자가 용이의 간통과 두 집 살림에 대해 눈을 감게 되는 것은 박경리가 오래오래 공을 들여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을 독자에게 설득시킨 덕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용이라는 인물 자체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낸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작가는 그러한 설득에 실패한다. 오 부인의 강사장의 동생에 대한 집착과 구분되지 않는 애정의 문제라든가 주인공 신성표가 처음 석영희에게 마음이 갔다가 오세정으로 마음이 옮겨가고 그 마음이 다시 나의화로 옮겨가는 과정 등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 덕에 이 소설은 기괴한 인물들이 기괴한 말과 행동을 하는 광대놀음에 그치고 만다. 안타깝다.

 

다시, 박완서 선생은 죽기 전 자신의 장편 중 한 권인 욕망의 응달을 영원히 사장시키는 선택을 하였다. 박경리 선생도 아마 그러고 싶은 작품이 있기는 있지 않았을까.

 

추리 소설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독자에게 찾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텐데, 이 소설에도 그렇고 박완서 선생의 욕망의 응달에도 그렇고, ‘추리소설의 기법을 차용한운운의 헌사에 가까운 광고 문구가 참 많다. . 어쩌면 작가 본인들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만약 진짜 그랬다면 더욱 안타까울밖에.

 

2025.1.4.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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