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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제주일기
정우열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이곳이 아닌 그곳의 삶 『올드독의 제주일기』by. 정우열
읽은 날 : 2024.8.11.
책장을 전체적으로 정비하다 새삼 놀랐다. 서가 한 코너를 책에 관한 책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지만 시골살이에 관한 책도 그만큼이나 많았다. 그렇다, 나는 시골살이를 꿈 꾼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누구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은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소망을 현실로 옮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뭘까. 이곳이 아닌 그곳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관하여 소설가 정미경은 기가막힌 한마디를 남겼다. 구심력과 원심력이라니.
두고 온 곳으로의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큰 사람들은 혀뿌리에 감기는 모래를 묵묵히 삼킬 수 있다.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문학동네, 2010, p.104
‘두고 온 곳’이란 크게 봐서는 나라일 것이고 작게 봐서는 고향 도시, 또는 뿌리내렸던 어떤 곳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 이걸 시간적인 차원으로 본다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현실에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원심력이 커진다. 또는 구심력이 강한데도 두고 온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늘 떠나온 삶을 살았고, 떠나갈 준비를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이 아닌 저곳의 삶을 늘 꿈꾸는 거다. 스무살부터는 늘 떠돌이의 삶이다, 라고 말을 한다면 왜 그렇게 생각해? 라는 질문을 듣게 될 것 같지만, 떠돌이라는 게 그렇다. 정착하지 못한 사람이 떠돌이라고 생각한다면, 음, 나는 떠돌이가 아닌 건 확실한데,(한 도시에 30년 가까이 살았으니) 그렇다고 이곳에 정착할 이유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말하겠다, 아니오. 라고. 이쯤되면 서울도 내게 억울함을 느낄 거다. 이제 그만 나 좀 사랑해주지 않겠니, 서울에 이만큼 살았으면 사랑할 때도 됐잖니. 라고 말할지도.
서울이 싫다는 게 아니다. 이만큼만 되어도 나로서는 얼마나 큰 발전인지 모르겠다. 예전엔 서울이 싫다고 외쳐댔으니까. 다만, 굳이 서울이어야 할 이유를 나는 찾지 못했다는 거지. 굳이 떠날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여기에 살고 있고, 그러니 언제든 훌훌 털고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알아알아. 쉽게 떠나지 못할 거라는 거.
시골살이의 장소로 꿈꾸는 곳은 보통은 강원도의 산골이거나 지리산 자락 어디메라서 제주도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제주도는 택배비가 3000원에서 5000원 정도 추가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더욱 음, 제주는 여행지로만 두는 게 좋겠어, 라고.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이유는 표지에 있는 한줄,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냅니다.” 라는 말 때문이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의 대사로 유명한 “おげんきですか? わたしはげんきです。” 이 대사가 가진 다정함이 좋아서 나도 자주 썼다. 당신의 안부를 묻고, 나의 안부를 전해 당신을 안심시키는 말. 이곳을 떠나 그곳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이곳에 남은 사람에게 이 말을 해야 할 의무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의 다정함을 나는 편애한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라, 이 친구 우울종자로세. 흠.
제주에 대한 예찬은 있으나 애착은 없다. 서울에 살고 있는 내가, ‘굳이 이곳이 아닐 이유가 없어서’ 그저 살고 있듯 정우열의 제주살이도 비슷해보인다. 말하자면 ‘굳이 제주가 아닐 이유가 없어서’ 그냥 살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라는 느낌. 내가 좋아하는 시골살이 특유의 다정다감함이 없다. 그렇다고 건조한 것도 아니고. 이 사람도 참 힘든 한 시기를 제주에 기대어 지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가 있어서, 당신이 이 한 시기를 잘 넘기고 있어서.
우정이라는 건 좀 더 어렴풋하되 덜 흔들리는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지금은 비록 소원하거나 섭섭하더라도 한때 주었던 마음, 받았던 호의, 함께 보낸 시간 같은 걸 마음속에 좀 더 단단히 고정해두고 자주 꺼내 보는 습관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현재가 어떻든 대역죄를 지은 게 아닌 한, 과거의 어떤 중요했던 순간에 의지해 우정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쪽이 이 부박하고 부질없는 세상 속에서 그나마 우리를 지켜내는 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p.209
의도하지 않게 30년 지기와 거리를 두고 있는 중이다. 그 친구의 탓도 아니고 싸운 것도 아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나에게 있는데, 친구는 나의 거리두기에 몇 번 서운함을 표하다 이제는 이 거리가 지금의 나에게는 정말로 절실한 거라는 것을 납득한 뒤엔 내 멋대로의 거리를 그냥 내버려 둬 준다. 고맙다. 친구에게 이 구절을 보내주었다.
시골살이에 관한 책이 서가 한편을 꽉 채운 것을 보고 조금의 위기감을 느낀다. 사라지고 싶다는 내 마음을 내가 나에게 들켰다. 앗 따거.
2024.8.26.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