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는 두 분의 할머니가 계셨다. 당연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낳아주신 분들이 계신 것이야 생물학적 진리니까. 아버지의 어머니였던 친할머니 조아지 여사는 내가 25살이 되었던 2003년에 작고하셨고 어머니의 어머니였던 외할머니 강점선 여사는 내가 30, 첫째를 낳은 이듬해인 2007년에 별세하셨다. 두 분 모두 구순을 넘은 연세에도 꽤나 정정하게 살아가시다 3-4개월의 병상생활을 끝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두분의 생물학적인 할머니가, 내가 충분히 기억을 할만한 나이까지 살다 가셨다.

 

그러나 그 두 분께 나라는 손녀가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든다.

아버지는 23녀 중 자녀 서열로는 넷째 자식이었고 어머니 역시 23녀 중 셋째 자식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었으나 장남도 막내도 아니었고, 엄마 역시 남동생 둘을 둔 셋째 딸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서열상 그다지 의미없는 자식이 낳은 손자인 데다 맏손자도 아니고 막내 손자도 아니고 심지어 아들 손자도 아닌, 둘째 아들이 낳은 셋째딸, 셋째 딸이 낳은 셋째딸. 심지어 내 뒤로도 동부동모 동생이 하나 더 있는 셋째 딸. 자손이 번성했던 두 할머니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의 존재였던 게다. 친할머니는 큰아버지 집에 사셨고, 외할머니는 큰외삼촌의 집에 사셨다. 한 집에서 본인 손으로 거둬 키운 손주만도 이미 셋, 둘인 상황이었고, 그 중에는 그 귀한 아들 손자도 있었으니 흔해빠진 손녀딸 따위 뭐.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친할머니가 나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음을 확신한다.

 

내가 대학을 들어간 이후, 두 분 할머니는 나를 서울년이라고 부르고 지칭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두 분은 같은 지칭을 썼지만 친할머니의 서울년에는 못마땅해 비아냥 거리는 어조가, 외할머니의 서울년에는 은근히 기특해하는 어조가 섞여있었다. 두 분이 딱히 나의 학업이나 진로에 관심이 있어 대학을 어디로 갔는지를 알고 기억한 건 아니었다. 친할머니는 사촌오빠도, 동갑내기 사촌도 가지 않은(못한?) 대학을 서울씩이나 가서 다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들 등골 빼먹는 년으로 나를 기억했다. 차마 등골 타령은 하지 못하니 서울년이라는 지칭으로 오금을 박으셨던 거다. 그 지점에서는 외할머니도 비슷했다. 다만 딸 등골 빼먹는 년이긴 했으나 그래도 좀 기특한 이유로 빼 먹으니 봐 줄만한 정도였으려나.

 

박완서의 단편소설 <해산바가지>에 보면 딸 아들을 가리지 않고 생명 그 자체를 귀하게 받아 섬기는 시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며느리가 임신을 하면 출산일을 짚어보며 참 좋은 시기에 아이를 낳는구나, 라고 순하게 말하더라는, 며느리 첫 국밥 끓일 미역을 불릴 박바가지를 구하러 다니는 이야기. 해산바가지로 쓸 박바가지이기에 정한 곳에서 반듯하고 예쁜 모양으로 자란 박을 특별히 구하는 이야기. 박완서는 딸만 내리 넷을 낳고 막내로 아들을 낳는다. 박완서의 시어머니는 딸을 낳았다고 구박하는 일이 한번도 없었고, 손녀를 구박하거나 미워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그와 대비되어 나의 출생에 관련된 이야기는 놀랍다. 771, 마당의 간장독이 얼어 쩡쩡 터지더라는 엄동의 음력 섣달에 이미 딸을 둘을 낳은 엄마에게 산기가 왔다. 이모할머니와 함께 찾아와 둘째 아들의 셋째 자식 탄생을 기다리며 산모의 첫국밥이 될 미역국을 끓이고 있던 나의 친할머니는 셋째도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끓여놓은 미역국을 수챗구멍에 확 쏟아 버리고는 며느리 얼굴은커녕 손녀 얼굴도 한번 보지 않고 집에 가 버리셨단다. 그 덕에 날 낳은 직후 엄마는 첫국밥도 첫기저귀도 손수 끓이고 빨았다나. 이미 나의 친할머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난 뒤에 들은 이야기라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한 인간이 동성의 한 여성에게 이렇게까지 악하고 못되게 굴 수도 있구나, 그 사람이 나에게 핏줄을 물려준 나의 친할머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을 뿐.

 

친할머니의 별세소식을 직장에 전하며 휴가를 청하는 나에게 주어지는 주변의 위로는, 그래서 매우 낯설고도 난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라니. 조금도 슬프지 않은 내가 민망하여 슬픈척 침통한 낯색을 가장해야 했던 순간의 부끄러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것만 같은 나에 대한 실망. 그래도 할머닌데 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아무렇지도 않은 손녀딸이라니 이럴 수가.

 

장례가 진행되고 할머니의 입관을 지켜보는 내내, 할머니와 평생을 함께 살았던 큰집의 사촌 언니는 기절할 듯 울었다. 거기서 맨송맨송한 얼굴로 서 있던 나는, 내내 그 생각만 하였다. , 나 아무래도 쓰레기인 것 같아. 그 순간 내가 조금이라도 슬픈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엄마를 잃은 아들인 아버지에 대한 약간의 연민 정도였을까, 나에게 친할머니의 죽음은 이름도 모르고 얼굴만 알던 어느 노파의 죽음과 비슷했다. 그렇게 느끼는 내가, 나는 스스로 부끄러웠다.

 

심윤경이 술이 들어가면 동기들과 선배들에게 사랑하는 할머니를 잃었다고,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었는지 아느냐고 꼬장을 부리기도(p.21)” 했던 것과는 전혀 달리 나에게는 친할머니에대해 추억할 어떤 것도 없었다. 그분에게 나는 소중하지 않은 존재였고, 당연히 나에게도 그분은 소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그저 팩트였다.

 

할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은 애초에 없었다. 처음부터 없던 것이기에,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없었다.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그런 내가 할머니라는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한 건 내 자식을 낳고 난 다음이었다. 친가, 외가와 다섯 시간 떨어진 서울에서 태어나 5년간 해외를 떠돌았던 내 자식들에게도 할머니란 일년에 두세번쯤 만나는 생물학적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는 각종 매체(, 영화,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조부모와 손자녀의 애정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내가 잃은 것, 애초에 갖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럽게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꿀짱아에게 함께 사는 할머니가 없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거대한 빈 구멍을 내가 인식한 날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무턱대고 믿어주고 기특하게 여겨주는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p.162)

 

심윤경은 딸 꿀짱아에게 그런 존재, 엄마이자 할머니가 되어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할머니가 어떤 분이셨던가를 추억하며 이 글을 썼다. 오오, 부럽기도 하지.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나의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던가. 나를 서울년이라고 칭하던 분, 단 한번의 포옹의 기억도 없는 분. 딸년에게 주는 세뱃돈이 아까워 손주의 세배마저 거절하시던 분. 내 이름을 모를 거라는 사실에 올 한해 내 용돈을 몽땅 걸 수도 있는 분.

 

심윤경이 말했듯, “모든 할머니들이 똑같지는 않다”(p.166)지만, 하필 내 할머니는 왜 그런 분이셨을까. 나 역시 살갑지 않은 손녀였으나, 세상의 모든 사랑은 내리사랑, 내가 살가울 틈을 조금도 주지 않는 분이셨던 것은 확실했다. 그분은 온 몸으로 나의 존재 자체를 평생 거부하다 가신 분이셨다. 내가 그분께 손톱만큼의 애정이라도 가졌더라면 만날 때마다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될 만큼의 확실하고도 명백한 거절이었다. 증오에 가까운. 오직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할머니라는 존재를 상상해 본다. “내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터전이 되어준 나의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사람이었다”(p.181)는 그 관용적이고 만만한 존재. 내가 잃은 것은, 애초에 가지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터전이었다. 터전을 잃은 나는 타지를 떠도는 실향민처럼, 이곳 저곳을 기웃댄다. 거칠고 척박한 땅을 일구어내려 애를 쓴다. 그리고, 내 자식도 그렇겠지. 적어도 시대가 바뀐 덕분에, 거절과 증오를 받을 일은 없음이 다행일지도.

 

시부모든 친정부모든 어른과의 합가는 배우자에게 참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생각한다. 할머니라는 존재를 잃은, 함께사는 이모 고모 삼촌의 존재를 잃은 현대의 영혼들에 관하여. 잃은 것이 무엇인지, 가져본 적이 없어 알지도 못하는 그 존재에 대하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