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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서녀명란전 1~8 세트 - 전8권
관심즉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2월
평점 :
97년 제2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전혜성의 소설 『마요네즈』는 36세의 전기대필작가(한마디로 자서전 대필작가다)와 그녀의 어머니와의 이야기다. 소설의 제목을 제공하는 주인공의 어머니(36세의 딸을 둔 노인이 머릿결을 위해 머리에 마요네즈를 뒤집어 쓰고 있다가 기절했던가...)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완결짓지 않고 영원히 써 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실제로 대하소설 토지는 이 소설이 나오기 3년 전인 1994년 8월에 완결된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이지만, <퇴마록> 시리즈의 작가 이우혁은 (퇴마록은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전, 하이텔에 연재된다) 퇴마록이 인기를 얻은 초기에 여러번 그런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각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설정을 그대로 가져다가 자기가 이야기를 (일종의 오마주인가? 팬픽인가?) 써도 되느냐고. 물론 이우혁은 매번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온라인 연재소설의 가치를 형편없이 매기던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약간의 시사점은 있다.
소설을 영어로 novel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novel은 1740년 사무엘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이 쓴 <파멜라Pamela>로 본다. 그럼 그 이전까지는 소설이 없었나 하면 그건 아니고, 파멜라는 이야기가 로망스(낭만적인 이야기)에서 노벨로 넘어가는 분기점으로 보면 된다. 로망스와 노벨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는 대학시절 열심히 배웠던 거 같은데 지금 기억나는 건 로망스는 인물, 주인공 중심적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매우 high 하다. 귀족이거나, 공주, 왕자, 최소한 기사가 주인공이 되면 그건 로망스고 주인공의 신분이 점점 비천해지면(파멜라는 하녀다) 그건 노벨이다. 중세 기사도 문학이 모두 로망스다. 그리고 이 로망스의 전통은 노벨이 등장하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까지도 로맨스 장르로 이어진다. (요즘 리젠시 물의 대표작인 넷플릭스의 브리저튼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이 드라마역시 줄리아 퀸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물론 20세기의 작품이고.)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로맨스(로망스)의 힘은 주인공에 있다. 고귀한 신분에 하나같이 재자가인인 로맨스의 주인공들은 쉽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독자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끝이나지 않기를 바란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머리에 마요네즈를 뒤집어쓰는 철없는 엄마마냥. (참고로, 박경리 선생님의 소설 토지를 누가 감히 로맨스라고 할까마는, 몇몇 평론가들에 의해 박경리의 인물들이 지나치게 빼어난 외모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노벨적이지 않고 로망스적이라는 비판을 받은바 있다. 실제 토지의 주인공은 모두 돌올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들이다. 남녀 불문.)
이런 독자들의 애정은 한편의 소설을 한도끝도 없이 늘어지게 만든다. 그야말로 장편대하서사시가 되는 것이다. 독자가 그 소설을 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인공에 몰두했던 애정은 동심원이 번져나가듯 주인공 주변의 인물로 방울방울 번져나가 주인공이 낳은 자식들의 연애담에 스핀오프 형식의 주인공 부모의 연애담까지 작가가 써 내게 만든다. 이 애정이 넘쳐나면 세기말 이우혁이 받았던 제의까지를 하게 되는 사태가 오고, 드라마가 인기가 있으면 상플(상상플러스)이라고 해서 이미 끝난 드라마 주인공들의 후일담을 시청자들이 직접 글로 써서 온라인에 연재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은밀한 고백이지만, 나도 몹시 좋아하는 상플이 하나 있긴 하다.)
이 모든 것은, 배경이고 뭐고 다 필요없이 오직 인물, 인물, 인물에만 집중하게 되는 로맨스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결과다. 올해 넷플릭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드라마 브리저튼은 총 9권의 시리즈 물이다.(브리저튼 8남매가 각 권의 주인공들 되시겠다.)
이 소설 서녀명란전은 중국드라마 <녹비홍수>의 원작 소설이다. 한국에서야 <녹비홍수>가 인기 있으니 그 원작소설까지 가져다 번역한 것이지만, 본디 중국에서는 소설 <서녀명란전>이 인기를 얻자 드라마로 제작된 거다.
내용은 별 거 없다. 중국 명나라(로 추정된다. 드라마에는 송대를 배경으로 잡았다)때 성씨 집안의 이야기다. 줄리아 퀸 의 브리저튼 시리즈의 중국 버전이려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성씨 집안의 서녀 명란이다. 위로 정실 소생의 큰오빠, 큰언니, 첩실 소생의 작은 오빠, 작은 언니, 다시 정실소생의 언니가 있고 명란이다. 여섯째라고 불리는 건 여섯번째로 태어난 아이여서 그렇다. 드라마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또 다른 첩실의 몸에서 난 일곱째 남동생도 있다. 소설은 명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명란의 아버지 성굉, 할머니 성노老부인, 본처 왕씨와 총애받는 첩실 임이랑 등의 이야기가 잘 녹아 들어간다. 브리저튼 자녀 각자에게 한권씩의 분량을 준 줄리아퀸 과는 달리 서녀명란전은 제목이 <성씨이야기>가 아닌만큼 명란의 이야기로 8권의 책을 다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각 형제와의 친교와 알력이 곧 명란의 생활이 되느니만큼 형제들의 이야기도 다양하게 들어가 있다. 지루할 수도 있겠고, 중심이 되는 사건이라는 게 딱히 없느니만큼 산만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작가는 다양한 가정사 이야기와 현대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꽤나 자극적이고도 엽기적일 수도 있는 사건들로 지루할 틈이 없이 채워나간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재.미.있.다.
드라마<녹비홍수>를 먼저 봐 버린 관계로 주인공 고정엽의 얼굴이 참으로 못생긴 중국 배우 풍소봉의 얼굴로 겹쳐보이는 것만 아니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수도 있는데. (뜬금없지만, 난 내가 읽은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나 드라마는 웬만해서는 보지 않고,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소설은 반드시 찾아본다. 그래서 난, 해리포터 영화 안봤다. 내 나름의 원칙에서 벗어난 유일한 작품은 반지의 제왕이다. 이건 피터 잭슨 만세 외치면서 봤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여덟권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소설을, 중심 사건없이도 읽게 만드는 힘이란 뭘까 하고. 결국은 인물, 인물, 인물. 작가의 입장에서 공들여 만들어 낸 매력적인 인물을 버리기가 아까우니 계속해서 시리즈물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소설도, 영화, 드라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