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 The Silenc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남기는 게 사실 불가능하다. 영화가 하나의 주제로 명확히 표현되기 위한 연속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게 최소한의 서사가 아주 없진 않지만 서사가 무의미한 게 베리만 영화다. <침묵>굳이 말하라면 어긋난 자매애 혹은 한 비극적 가족사쯤 될 수 있지만 느낌만 있을 뿐이다.<늑대의 시간>도 같은 범주에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남편과 헤어진 한 여자의 이야기다. 남편의 트리우마와 무의식과 의식의 혼재 속에서 결국 영적으로는 헤어진다. 이 느낌의 실체도 열심히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를 찾아내야한다는 강박 관념때문에 머리를 굴린 탓이다. 영화들은 굉장히 추상적이다. 추상적 텍스트는 여러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기는 하지만 왜 꼭 해석을 해야하나, 하는 피곤함이 몰려오기도 한다.-.-   

인물을 클로즈업할 때 사용하는 카메라 앵글의 다양성은 인물들을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카메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인물들이 주는 인상이 강렬하고 진지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진지해질 수 밖에 없다. 인물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구별하려고 애쓰다보면 부질없어지는 순간이 도래한다. 그럼 베리만의 추상적 메시지들은 그냥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면 되지않나...
 

인간의 의식은 명료하지않다. 말이나 이미지같은 수단들을 통해 모호함을 명료하게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상식은 상식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은 섞여서 그물처럼 엉킨다. 스크린을 보면서도 영화보고 난 후 자장면 먹을 생각에 자장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인간의 뇌는 고차원적 멀티 기능을 장착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형이하학적 생각도 동시에 할 수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짬뽕 이미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실제로 우리 의식이 하는 일이다. 

베리만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가 가진 멀티 기능보다 더 사양이 높은 기능을 장착하고 있다. 이전 장면에서는 아내한테 총을 쏘고는 다음  장면에서는 아들인지 아니면 어린 자신이지와 몸싸움을 하고 있다. 아들 혹은 어린 자신 같은 어린 남자아이의 공격에 분노해서 소년을 죽인다. 그뿐이다. 소년과 남자의 관계도 모르고 남자가 살의를 느끼는 이유도 모른다. 또 실제인지 단지 남자의 생각인지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건 남자가 분열적 행동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켜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미지의 문화사 - 역사는 미술과 어떻게 만나는가, 심산 픽처링 히스토리 1
피터 버크 지음, 박광식 옮김 / 심산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지금은 방마다 시계가 있는 것처럼 카메라가 한 집에 여러 대 있는 게 당연하다. 카메라는 지극히 사적인 물건이 돼서 공유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식구들마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 핸드폰에 내장된 카메라를 기본으로 일상 생활 쵤영용, 여행이나 특정한 목적을 위해 한 개인이 몇 대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흔해졌다. 그러나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카메라는 아주 희귀한 물건이었다. 지금의 월풀 욕조쯤 되는 희소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동네에 사진관이 많았고 졸업식이나 입학식에서는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출장 사진사들이 있었다. 또 아주 먼 기억 속에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들도 있었다. 이 사진사들은 사진 배경을 지니고 다녔다. 아무튼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같았다. 머리칼을 정갈하게 단장하고 제일 좋은 옷 까지는 아니어도 막 입는 옷이 아니라 외출복을 꺼내 입고 사진을 찍곤했다.  

카메라가 흔해진 요즘도 마찬가지다. 돌이나 백일 촬영, 아님 기념촬영을 하려면 메이컵을 하고 옷을 맞춰입고 스튜디오로 간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하는 기본적 의식은 과거나 현재나 변한 게 없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을 보고 실물보다 더 낫네, 안 낫네 논평을 한다. 즉 우리는 사진이 우리를 그대로 옮겨 놓는다고 믿지 않는 것 같다. 사진은 실물의 복제판일 뿐이지 원본이 될 수 없다는 근본적 믿음을 갖는다. 그리고는 이왕이면 실물보다 낫기를 갈망한다.  

사진이 이러할진대 회화와 같은 이미지에서 리얼리티를 따지는 일이 의미있을까, 하는 회의가 든다. 이 책은 회화나 사진 속에서 리얼리티의 실재와 오류를 짚어가는데 부질없어 보인다. 게다가 역사적 흐름을 이미지에서 찾아내려고 하는데 거대한 비바람 속에서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듯 하다. 사실 그림은 현실과 정반대를 꿈꾸는 인간의 상상력의 결과물일 때가 많다. 피터 브뢰뢰헬이 전쟁 중 민중이 곤궁했지만 속에서 풍요로운 사육제를 묘사한 그림이라든지 윌리엄 터너가 산업혁명 목격자였음에도 그의 그림은 자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그림을 그대로 받아들여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그림을 읽는 게 더 적절한 순서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림은 원래 역사적 사료로 쓰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진을 찍고 보관하는 심리와 비슷하게 제작되었다. 그림이 역사적 흐름이나 사회적 배경과 관련이 없지 않지만 역사가가 캐내야하는 증거물로는 부적절하다. 이미지는 그냥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써니 - Sunny
영화
평점 :
현재상영


기억은, 늘 그렇듯이, 판타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뇌 - Tormen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청춘은 불안한 게 전 세계 공통이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을린 사랑 - Incendi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종교나 이념은 인간이 필요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난 믿는다. 전쟁이 필요해서 종교나 이념을 만든 건 아니다. 모든 종교가 화해와 사랑을 기본 교리로 한 건 인간이 화해와 사랑을 갈망하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갈망이란 갖지 못한 혹은 갖기 힘든 대상에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신의 힘을 빌어 사랑과 화해를 추구하는 거 보면 인간은 사랑과 화해에 능숙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는 중동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전을 소재로 삼고 있다. 지난 겨울 모로코에 다녀와서 이슬람교에 급관심을 갖게 됐다. 외부자로서 바라본 이슬람교는 폐쇄적이고 맨날 전쟁이나 테러나 일삼는 교리를 지닌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는 그런 가르침을 한적이 없다. 오히려 수많은 암살과 싸움 때문에 이슬람교를 창시했고 기본 원리는 '놀랍게도' 평등이었다. 세부적 실천지침도 기독교의 지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다만 형식적 세부사항들이 그 문화에 조절되었을 뿐이다. 이슬람교가 과거 한 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던 이유도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는 원리였다.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의 불평등한 교리보다는 이슬람교의 교리가 훨씬 종교적 품위를 더 유지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인간의 평등 개념을 바꾸기 시작했다. 같은 종교인만 평등하고 같은 인종만 평등하다. 전쟁의 발단은 이 지점이고 인간은 종교가 태어나던 시기와는 다른 평등 개념을 선호한다. 이 영화는 종교적 이념이 얼마나 부질없는 지 나왈 마르완이란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인 한 여인의 비극적 일생을 들여다보며 성찰한다.  

2. 역사는 굵직한 사건의 물리적 기록이다. 아무리 비극적 전쟁도 사상자의 수를 적는 게 고작일 수 있다.  현재를 살고는 있는 기독교인들이 오래 전 십자군 전쟁이 뿌리고 거둔 비극의 깊이를 가늠하는 건 힘들다. 그러나 전체 역사에 녹아있는 개인의 역사는 시공을 초월하는 현재성이 있다. 나왈 마르완의 기구한 일생을 통해 종교전 혹은 전쟁의 참상은 비극의 깊이를 오감으로 상상하고 나아가 분노하고 자책하는 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다.   

3. 이 영화는 강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인간의 우둔함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반성하도록 이끈다. 보복이나 전쟁은 또 다른 보복과 전쟁을 낳는다. 비극적 역사의 산 증인이 나왈은 경험과 세월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닫고 아이들한테 관용과 포용은 좋은 일이라는 유언을 남긴다. "과거가 어찌됐건 현재 함께 있는 건 좋은 일"이라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나왈은 분명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아니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불행을 겪으면 담담해질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되니까. 보통 사람인 나는, 이성적으로는 용서와 관용이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 다른 나는 복수의 화신까지는 아니어도 받은 만큼 갚아줘야하는 게 당연하다고, 한편으로는 믿고 있다. 사람이 둘 중 절대적으로 어느 한 마음으로 기우는 게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무조건적'이란 말을 믿지 않기에 나왈이 보여주는 무조건적 관용 태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내 이성과 감정이 충돌하는 걸 지켜봐야하기에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불편했다.  

4. 이 영화는 좋은 영화지만 영화적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 반전을 향해 모든 인물이 움직이고 있다. 반전 부분에서 헉,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오지만 이 모든 걸 교차 편집에만 의존하고 있는 터라 영화가 다 끝난 후에는 조금 허탈하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