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빈 감독의 데뷔작<용서 받지 못한 자>부터 흥미롭게 보아 왔다. 데뷔작에서 보여준 어린 감독의 통찰력에 반했다. 어떤 감독이 말했다. 삶에 대한 통찰력은 학습되는 게 아니라고. 일정부분 동의 하는 면이 있다. 학습할 수 없는 통찰력을, 윤종빈 감독은 이미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스케일이 커지면서 감독의 장점인 섬세한 심리묘사가 조금 헐거워졌다. 그러나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가령, 하정우가 최민식을 부둣가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 있다. 클래식한 자동차가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차의 보닛을 왜곡되게 카메라 잡으면서 부둣가에 이른다. 부산이 아니라 쿠바 의 이름모를 골목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영화 제목도 소재도 클리쉐하다. 영화 전반부에서 감독이 왜 한물간 조폭 이야기를 다뤘을까..궁금해져갔다. "건달도 민간인도 아닌" 최익현이 조폭들 두목이 되기까지를 거슬러올라간다. 그 배경은 군부독재시절에 있다. 한 개인의 역사는 사회사를 비추는 거울 일 수 있다. 최익현의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통해 범죄가 판칠 수 있는 환경에, 영화는 접근한다.

 

최익현은 부산 세관출신이고 부정부패로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무수한 공무원들 중 일개 말단 직원이었다. 사직 후 공무원과 기관원들의 생리를 잘 아는 최익현은 능력을 발휘한다. 뇌물로 인맥을 쌓고 족보를 들춰 10촌이란 촌수까지도 활용한다. 뇌물과 족보로 쳐 놓은 그물에 사람들은 즐겁게 잡히며 유영한다.

 

최익현을 중심으로 건달계에는 두 인물이 있다. 조카뻘 되는 최형배와 최형배 똘마니었다가 세력을 확장해 일인자가 된 김판호. 최익현은 공무원들의 심리와 생리는 잘 알았지만 건달계 생리는 잘 모른다. 최형배V김판호는 건달계에 속한다. 주먹과 힘이 우선하는 동물의 세계에서 수컷이 영역 싸움을 하는 것같다. 이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감독은 주로 악을 다룬다. 인물들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악은 또 다른 악을 재생산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우리도 알고 있듯이 악으로 뭉친 인물들은 더욱더 승승장구한다. 영혼은 악으로 잠식당했고 구원은 요원해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 악은 엄청난 힘을 지녔다.

 

덧. 이 영화에서 내가 무휼로 알고 있는 조진웅이란 보석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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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들 -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내 삶의 작은 기적
윌리 로니스 지음, 류재화 옮김 / 이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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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집에 대한 욕심은 없는데 사진집에 대한 욕심이 있다. 그림과 사진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그림은 복제가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화집은 원본과 같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믿는다. 반면에 사진은 복제도 가능하고 배경도 회화와 달리 사실적이다. 디지털 시대에 회화가 시쯤 된다면 사진은 잡지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인쇄질에 상관없이 어디서든 펼쳐봐도 원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초기에 사진이 회화 장르를 무너뜨릴거라는 걱정도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회화와 사진은 결과물을 눈으로 감상한다는 공통점 외에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예술이다.

 

사실 이 사진집은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했는데 어떤 깨달음을 주는 사진집이다. 이제부터 그 깨달음을 조금 적겠다. 디지털 시대에 카메라는 아주 흔해졌고 어차피 카메라를 만지작거릴거면 결과물을 조금이라도 잘 얻어보겠다는 사심(?)이 있게 마련이다. 가끔 멋진 사진 블로그를 발견하면 넋 놓고 클릭질을 하기도 한다. 내가 넋을 놓게 되는 사진은, 보정을 사용하지 않거나 최소한만 사용한 사진이다. 어떤 사진은 카메라가 장착한 성능만을 뽐내는데 이런 사진은 마음을 잡아끌지 못한다. 8백만 화소로 찍은 야경에서 노이즈에 인상을 쓸 때도 있고 1천만이 넘는 화소에서 그런 노이즈가 없이 반들거리는 야경을 보면 침이 흘릴 때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진은, 기술적 성능이 해 낼 수 없는, 찍는 이의 그 무언가가 있을 때 훨씬 더 인상적이 된다. 이런 점에서 로니 윌리스의 사진집은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따뜻하게 알려준다.

 

"이런 사진들을 보면 내가 일상 속에, 일상적인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바로 그것이 나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나는 무엇도 지어낼 수 없다. 그냥 존재하는 것,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관심을 끄는 것과 함께 있을 뿐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런 사진들은 신비한 면은 없지만 그 정확한 순간 속으로, 순수한 감정 속으로 온전히 나를 빠지게 만든다. 가만히 멈춰서서 되찾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85-85)

 

20세기 사진술은 망원이나 아웃 포커싱 등등, 요즘 우리가 성능 좋은 카메라에서 기대하는 기법보다는 회화적 이미지가 강했던 거 같다. 전체적 프레임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전후경을 피사체와 조화시키는 방법, 그리고 자연광을 이용하는 방법이 거의 초기 사진술이다. 내 아날로그적 감성은 초기 사진술이 지닌 이런 방법에 무릎을 꿇곤한다. 이 사진집이 특별한 이유는, 작가가 그 사진을 찍을 때의 정황을 잔잔하게 말하는데 그 정황이 마치 동영상처럼 머리속에서 펼쳐지면서 사진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빛, 그리고 작가 자신이 우연히 그곳에 있으면 그 장면을 포착한 시선이 결합한 결과가 바로 사진이다. 신문사나 잡지사가 선택하지 않은 사진이지만 자신이 뽑은 컷, 그러니까 B컷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진보다는 작가가 말한 그날의 빛과 장면 속에 함께 들어가 있는 것같은 환상을 불러온다. 작가가 되찾고 싶은 순간으로 보는 이를 안내하는 사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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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f 2014-02-04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좀 참고할게요..
 
존 러스킨의 드로잉
존 러스킨 지음, 전용희 옮김 / 오브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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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관찰자적 시선을 통한 자신만의 인지를 발달시키는 사람이 예술가다. 모든 예술가들한테 필요한 도구는 손이다. 화가는 붓을 자신의 손처럼 다루는 사람이고 악기를 연주하는 이는 악기가 손이고 사진가한테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민첩한 손이고 작가한테는 언어를 활자화하는 손이다. 영역은 달라도 어떤 경지까지 오르는 방법은 동일하다. 연습 밖에 없다.

 

드로잉 입문서인데 꼭 드로잉이 아니라도 글을 읽다보면 실천적 행동 지침이 관찰에서 나오며 면밀한 관찰 후 손을 빠르고 가볍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라고 한다. 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글을 쓰기 위한 작법서나 사진을 찍기 위한 메뉴얼과 접점을 발견했다. 뭉뚱그려서 상황을 언어로 묘사하는 건 좋은 글이 아니며 카메라의 피사체 역시 구체적일 때 의미있는 컷이 나올 수 있다. 어떤 예술 영역이든 기본기를 건너 뛰고 풍부한 표현력을 기를 수 없다.

 

러스킨이 시키는 건 돌멩이 하나를 택해서 완전히 외울 수 있을 정도까지 돌멩이를 그려보는 것이다. 돌멩이의 질감을 외울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시간을 가지고 관찰을 했다는 말이다. 많은 글, 그림, 사진들이 있지만 어떤 작품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과거로 흘러가고 또 어떤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오래 기억 속에 살아있다. 오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작품을 보면 뭔지 모르지만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그게 색감일 수도 있고, 전체 분위기 일수도 있고, 또는 전체와 무관한 어느 한 지점일 수 있다. 이런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작가들은 기억해 두었다 일부러 작품을 찾아보게 된다. 이 말은 작가가 다른 작품에서 어떤 시선을 가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나온다.

 

일반적으로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연습을 한다면, 모두 예술적 삶을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에서는 상대성이나 다양성을 강조하는데 예술과 철학이, 원래 한 뿌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 화가란 추상적 미를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자신만의 눈으로 포착한 것만을 담아내는 아주 구상적 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일반인 눈에는 보이는 구상과 화가의 눈에 보이는 구상이 다를 뿐이다. 모든 예술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술은 곁에 두고 배울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한테도 유용하고 그림을 배우고 있지만 무언가 막혀있을 때다. 또 그림 감상을 취미로하는 사람한테도 좋다. 그림 감상은 미술사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는데 그림을 미술사 속에서가 아니라 그림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시선을 갖도록 도와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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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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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형식적 면에서 큰 감동이 있다. 글과 그림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감동과 오락은 과잉이 필수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마르잔 사트라피는 미니멀한 묘사로 디즈니에 맞설 수 있다. 아이들용이어서 단어수가 작지만 화자 마르잔이 겪는 혼란과 갈등을 묘사하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긴 시가 단어를 적게 사용해도 그 느낌은 소설보다 훨씬 강렬할 수 있으니까 적은 단어로 심리 묘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지 못한 건, 나만의 고정관념일 수 있겠다.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시리아...무식한 말이지만 모두 한 묶음처럼 보인다. 서양인들이 북한과 남한을 헛갈려하듯이=.=; 중동 지방 국가들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을 헤아리기보다는 미디어가 알려 온 오일, 테러, 억압과 독재로 이들 나라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미디어가 이끄는대로 아주 모범적으로 세뇌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중동을 바라보는 관점의 각도가 이동을 한다. 망원 렌즈를 이용해 이들 나라 전체적 이미지에서 그곳에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아웃 포커싱 시키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정치적 사건이 중요하게 다가오게끔 묘사한다.

 

중동의 가부장적 체제하에서 여성들을 억압을 다룬 영화를 여러 편 본 적이 있다. 이전에 봤던 영화들은, 여성이면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 억압을, 표현했다. 중동 여성에 대한 정체성보다는 세계 여성과 제3세계를 지배하는 전근대적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 있고 너무 익숙해서 보고도 흘려 넘기게 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잔 사트라피의 글은 다르다. 한 소녀가 성인로 성장하면서 소녀를 둘러싼 가족과 관습을 소녀의 시각으로 봤다. 소녀의 시각은 보편성보다는 중동, 이란이란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두드러진다. 전쟁을 묘사하지 않았지만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이란의 독재 속에서 종교를 내세워 억압당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있다. 특히 여성에 대한 끔찍한 법적 규제는 바로 제 삼자들이 알고 있는 바인데 미디어는 규제를 받는 여성들의 고통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다룬 적이 없는 거 같다. 미디어는 대개 폭격의 규모와 사망자 수를 집계한다.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의 규모는 계량할 수 없기도 하지만 미디어 컨텐츠가 다루기에는 아주 추상적이다. 복장까지 심한 규제를 받는 사람들의 불편함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이 책은 이런 추상적인 걸 구체화한다.

 

길에서 여성을 쳐다보는 남자는 벌금형을 받거나 벌금을 내지 못하면 채찍으로 맞을 수 있는데 이런 웃지 못할 법을 강요하는 게 이슬람교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독재자들이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독재자는 사람들한테 공포를 조장해서 판단력과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조건적 복종만을 강요한다. 마르잔은 십대 초반에 오스트리아에서 학교를 다니지만 다시 테헤란으로 돌아온다. 마르잔은 오스트리아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서구화된 것이 아니라 인권에 대한 정당한 요구를 하는 영혼의 소유자다. 여러 다른 그룹의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소녀는 늘 자신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하는 의식있는 여성으로 성장한다. 소녀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억압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본주의자로 순응하게 된다. 그러나 억압에 저항하는 사람 역시 순응주의자만큼 많다. 그래서 세상은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조금씩 변한다. 이런 걸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아랍 문화권에 대한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준 책이다. 서구인 동양에 대해 맹목적 오리엔탈리즘을 동원하듯이, 아랍 문화권에 대해 지닌 내 유아기적 로망은 베일을 예쁘게 드리워 놓았다. 간결하게 서술된 한 소녀의 성장기는, 게슴츠레한 시선을 거두고 차도르와 히잡 속에 갇힌 여자들의 몸과 마음이 겪는 실체를 들여다보게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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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깡패 같은 애인 - My Dear Desperado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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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줄거리를 읽고 비디오 클립을 봤을 때 안 봐도 될 거 같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요즘 한국영화는 나를 극장으로 이끌지 못한다.-_-; 소재와 구성만 보면 식상하다. 88만원 세대 여자와 찌그러진 건달 남자. 이런 구성이라면 대충 머리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 티격태격하다 순애보로 발전하는 그저그런 멜로 영화겠거니...

 

영화는 고정관념을 비껴간다. 동철과 한세진의 관계가 티격태격하는 건 맞지만 두 사람이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한 걸 알려주는 목적이 아니다. 두 사람은 그저 옆방 세입자로 딱 세입자의 거리를 유지한다. 라면 값 2500원도 받아내는 동철을 보면 옆방 여자한테 폼 잡거나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어보인다. 남자가 여자한테 보이는 애정은, 일종의 동료 의식 혹은 연대 의식이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거 없는 남자가 역시 가진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취직 못하는 이유를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고 말했듯이. 남자는 여자 뿐 아니라 미래가 열려있는 십대가 자신과 닮은 삶을 사는 걸 원치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한편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 못한 길에 대해 로망을 가지고 있다. 동철 역시 자신이 잘 아는 바닥 세계보다는 다른 세계에 대한 로망이 있다.

 

동철은 별 볼 일없는 여자를 취직시키는 데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로를 세운다. 여자는, 가장 좋을 때 남자친구를 만났고 가장 힘들 때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동철(연인으로서는 아니지만)을 만났다. 같은 세입자로 이어지는 친분은 세입자 딱지와 함께 영원히 과거 속에 기억 한자락으로 자리잡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 멜로 드라마의 진정한 변화는, 라스트 씬에 있는 것 같다. 주인공 남녀는 이별을 한다. 그리고는 다시 만나고 거기서 끝난다. 동화처럼(그렇담 고전으로 회귀가 아닌가?). 결말을 관객을 위해 열어둔다.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할지 말지는 관객의 마음이다. 감독들은 정말 관객을 위해서 결말을 열어두었을까? 무언가를 책임지기 두려워서 두 사람을 다시 출발선상으로 되돌려놓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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