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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토머스 F. 매든 지음, 권영주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호치민에 갔을 때였다. 수도 호치민에서 관광객이 의례적으로 둘러보는 곳이 모두 식민 문화의 유산이거나 전쟁의 흔적물들었다. 그닥 자랑스럽지 않은 과거의 역사일 터이지만 현재는 그 자랑스럽지 않은 문화유산이 관광 수입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아이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도 미국인이 쓰고 미국이 만든 영화를 통해서이다. 베트남인들은 베트남 전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호치민에서 베트남어를 모르는 나는, 베트남 출신의 작가가 썼지만 영어로 번역된 전쟁에 관한 소설 책 두 권과 사진 에세이집 한 권을 사왔다. 그 중 한 권은<전쟁의 슬픔Sorrow of the War>인데-우리나라에 번역되서 나온 것 같다-몇 페이지 읽다 말았다. 전장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끈적끈적하고 어두워서 읽으면서 우울해지는 탓도 있지만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책을 읽는 것은 두 배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 궁금증은 집중력이 필요하는 노동과 같은 독서를 참아내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베트남인들의 시각은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길게 서론을 쓴 것은 언어는 권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우리가 접하는 서양사 대부분은 서양인이 쓴 책이고 고로 서양중심주의 시각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의 시각은 서양중심적이다. 물론 20세기 후반부터 탈식민이라는 대안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서구 중심주의에 기초한 한 가지다. 이 책 역시 철저한 서구 중심주의다.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되기는 했지만 저자(십자군의 권위자란다)가 취하는 논조나 특히 결말은 그가 십자군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학문에 대한 애정은 존경하지만 그의 결론에는 동의하는 건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이 책이 쓰여진 이유는 아마도 2001년 9.11 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재인식을 위한 기반이 필요해서 인듯하다. 저자는 현대판 십자군 원정은 아니라고 펄쩍 뛰지만 이 책만으로 판단할 때 오랫동안 쌓인 깊은 골이 드러난 현대판 십자군 전쟁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목차에도 나와있듯이 십자군의 탄생에서 몰락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다. 우리가 아는 십자군은 5차 십자군 원정 중-소소한 원정은 빼고 대규모의-일부이다. 처음 십자군의 동인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어쩌면 순수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신앙과 이상주의라고 적고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십자군을 움직이기 위한 외적이고 물질적 요소들과 더불어 개인의 야망이 더해진다.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하지만 지휘자들이 겪는 왕권에 대한 욕심은 현대의 정치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결혼은 영토 지배권을 위한 거래였고 전쟁을 위해 세금을 걷고 등등..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본래의 의도는 변질되고 욕심과 야심만이 남아 퇴락해서 계몽주의자들을 깨어나게 했을 것이다.
십자군 원정이라고는 하지만 전쟁으로 그 참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고, 민심을 모으기 위해 말 잘하는 인물들이 순회하면서 설교를 했다. 십자군이 기독교를 통한 구원이란 헛것을 위해 전쟁을 한 건 19세기 민족주의를 위해 전쟁을 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오늘날에는 좀 더 눈에 보이는 것, 국익을 위해서 전쟁을 하지만 이 역시 어쩌면 허구의 실재일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섬뜩할 정도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차이점은 있을 것이다.
특히 궁금한 건 5차 원정을 감행한 이노켄트 교황의 의도이다. 대규모의 원정단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던 상황을 반전시킨 사람인데 그는 교황 재위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이 책에는 그 의도가 나와있지 않아 읽으면서 몹시 궁금했다. 그동안 머리속에 쭉 흩어져 있던 중세사 계보를 연결하는 데 유익한 책이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아민 말루프의 <십자군>을 읽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