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L`Amant (Paperback)
Editions du Seuil / 198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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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원서를 주문한 후, 다시 번역본 주문ㅡ.ㅡ; 책 상태는 바랜 거 외에는 좋음. 마치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단어 찾기 귀찮아서 미뤄뒀지만 간결하면서도 박진감있는 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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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 연기와 화면의 질감과 조명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배우들로 말할 거 같으면, 공유. 군대갔다 온 후 공유는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군대 가기 전에 예쁘장한 순정만화 남주인공 외모였는데 나이들면서 표정이 풍부해지고 눈빛도 그윽해지고 있다. 이런 거 보면 나이먹는 게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공유가 빛났던 장면은 뻔한 기차씬을 마감하고 경성역에 내렸을 때다. 의혈단을 일망타진하려고 기다리던 일본군들과 싸우는 씬이다. 잡히면 곧 죽음이라는 공포 속에서 말도 안 되지만 영화니까 일본군을 전멸시켰는데도 공유는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서 동료가 다가가도 모른 채 총을 쏘려고 한다. 그 순간 정말 정신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동료들이 공유를 붙잡고 한참을 흔든 후 공유는 동료의 얼굴을 알아보고 상황이 종료된 걸 깨닫는다. 이때, 눈에 핏발이 서 있고 시선은 공포와 광기로 차 있는데 공유 만세!하고 외치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으로 보인다. 특히 이중첩자인 이정출의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있는 구성이 많이 아쉽다. 밑도 끝도 없이 이정출의 정보가 드러나고 관객이 이정출의 정체를 알아차릴 즈음에도 이정출은 왜 그래야하만 했나에 대한 그럴듯함이 전달되지 못한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캐릭터인데 송강호의 연기가 (시나리오 탓이겟지만) 다른 영화에서만큼 빛나지 못한다. 아마도 감독이 이정출 캐릭터에 대한 숙고가 부족한 거 같고 그러다보니 송강호의 재능을 다 끌어내지 못한듯.

 

화면의 부드러운 질감과 조명의 사용은 렘브란트가 빛을 사용하는 방식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영화가 회화 특히 인물 초상화는 아니기에 이런 훌륭한 볼거리에도 별로 할 말이 없는 가벼운 오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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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조건 없는 사랑을 믿는 청년. 한 때 사랑을 했는지도 잊은 채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몇 번 반복하면서 세월과 함께 삶에 찌들어 사랑은 없다고 믿는 중년의 여자. 두 사람이 특별한 방식으로 만난다. 청년은 여자의 맞은 편 방에서 망원경 렌즈를 통해 일년 동안 여자를 만난다. 엿보다 사랑하게 되었는지 사랑해서 엿보게 되었는지 알수 없지만 여자대한 사랑이 점점 커져만 간다. 여자를 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여자집에 우유배달을 하다 청년의 고백은 폭로처럼 이어졌다. 여자는 청년의 방식에 불쾌와 경멸을 표현한다.

 

망원경 렌즈를 통해 보이는 여자의 삶은, 우리가 비루하다고 여기는 삶의 전형이다. 여자는 만나고 있던 남자한테 매달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잘못해서 식탁 위에 우유를 쏟고는 살기 싫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엎드려있는다. 어느 날에는, 청년이 보낸 가짜 우편환을 가지고 현금을 찾으려고 우체국에 뛰어오기도 한다. 누가 보냈는지 묻기보다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짜라는 사실에 분개하는 여자는 아마도 삶에 많이 지쳤고 세상에 어떤 희망을 품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안 하는 거 같아보인다.

 

짜증 가득해 보이고 때론 신경질적인 여자가 청년의 고백을 듣고 묻는다. "나랑 키스하고 싶어? 섹스하고 싶어?" 청년이 아니라고 하자 그럼 나한테 뭘 원하냐고 묻는다. 여자의 질문 속에서 여자의 삶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자의 인간 관계는 대체로 어떤 목적을 위해 이루어져 있고 청년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줄 모른다. 그래서 여자는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 청년을 대한다. 상대적으로 청정 세계에서 살던 청년은 수치심에 손목을 면도칼로 긋는다. 청년이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목숨까지 버리려는 행동에 메마른 영혼을 지닌 여자는 갑자기 잊고 있던 세계로 눈을 돌린다. 세상은 의도와 목적만으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으니까, 순수한 관계도 있었다는 걸, 여자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덧. 기억 속에는 변태 청년의 이야기쯤으로 남아있는데 오늘 보니까 <애정만세> 폴란드 버전 같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린 시절 느꼈던 감정을 잃어버리고 척박하게 살아가는 거 같음. 동요없는 평정심을 얻는 대신에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을 잃어버리며 사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무지 슬퍼서 영화가 끝날 때, 눈물까지 흘림.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같은 날, 같은 도시에서 태어난 두 여자의 이야기. 정치적 중의성은 배제하고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하는 반감 대신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살다보면 논리적으로 설명 안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 혹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불안과 자신이 뭘 원하고 찾는지도 모르면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찾는...자신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이렇게 불분명하고 어쩌면 실체가 없다가도 한순간에 퍼즐 조각처럼 일상에서 하나씩 등장하기도 하는 일이 아닌가.

 

가령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 속으로 들어가서 상념에 잠겼다가 불쑥 현실로 돌아와서 어떤 충족감 혹은 상실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오늘 오후 집에서 나갈 때 가을 바람에 나뭇잎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보면서 마음이 한없이 날아올랐다. 아트시네마에서 영화 두 편을 보고 나왔더니 찬란한 빛 대신 어둠이 내리고 맨다리에 닿은 바람은 차갑기만하고, 아트시네마 입구는 스산하고 전철역까지는 걸어서 3분 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걷는 동안 한없이 마음이 쓸쓸해지는게 베로니카가 이리저리 헤메는 기분이 이런건가 싶기도. 불과 반나절 동안 기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해 있고 두 다른 감정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물리적 실체가 바로 '나'라는 한 사람. 물리적으로는 이렇게 하나 일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 이중이 아니라 다중을 살고 있으니, 베로니카의 삶을 어찌 이해 못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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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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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에 이어서 연속 읽게 된 책이 사랑하는 이가 반정부 활동으로 감옥에 있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이가 감옥에 있는 시대는 어수선하고 보통의 소설 형식으로는 시대상을 담기에 적합하지 않은걸까. 이 소설 역시 독특하다. 아이다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한테 보내는 편지글 모음이고 남자는 그 편지에 자신의 생각을 적는다. 편지글은 묘한 힘이 있다. 빈 여백이 많아서 그 여백 사이를 독자가 상상으로 채우게 한다. 이 소설에서 아이다가 여러 가지 애칭으로 불리는 남자와의 관계를 유추하면 두 사람의 만남은 길지 않지만 격렬한 만남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진짜 습관-서로의 품안에서 잠드는 것만 빼면-이라는 게 생길 만큼 충분히 오랜 시간을 가져 보지는 못했어요. 네, 그 점에서 우리의 몸과 잠은 각각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죠."(181)

 

"지금 당신을 만져 보고 싶어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너무 오래 당신을 만져 보지 못해 이젠 쓸모없이 되어 버린 손처럼 보이네요."(88)

"이레네, 잘 자요. 꿈속에서 당신을 가질테니..."(189)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115) 이중종신형을 받아서 석방 가능성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결혼 신청을 하는 아이다가 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단 하나 뿐이에요, 당신과 나의 삶"(118)

 

그럼 두 사람을 이렇게 격렬한 그리움으로 데려다 주는 건, 두 사람이 영원히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시대상황일지도 모른다. 아이다의 편지는 연서로도 읽히지만 연서 안과 밖에 조각 정보를 얻어서 기워보면, 남자는 반정부활동을 했고 아마도 약사인 아이다도 그 활동에  어느 정도 가담하고 있다. 두 사람은 그러니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

 

"탈지역화. 단순히 노동력이 가장 싼 곳을 찾아 생산과 서비스가 이동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리잡은 지역들을 파괴해 전 세계가 무의미한 곳, 즉 단 하나의 유동성 시장이 되게 하려는 계획을 뜻한다."(36)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존 버거의 사상이 잘 드러난 말이다. 아이다가 보내지 않은 편지에 보면, 무력으로 마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려는 걸 상상케 하는 지점이 있다. 무력은 사실은 커다란 공포를 만들고 인간의 의지를 약하게 한다. 그래서 많은 독재자들이 무력을 이용하기도 하고. 하지만 무력은 두려움을 연료로 공급받아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한테 한없이 무력하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하지 않겠다는 무서운 결심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의지력이 필요할지를 계산해야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194) 탱크가 전진해오는데 피하지 않고 사람들이 탱크와 마주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말이다. 탱크는 결국 방향을 돌려 물러난다. "우리, 그들의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 다시 젊어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기억하며 흩어졌죠."(196) 뭉클한 묘사다. 두려움에 무릅을 꿇지 않고 옳지 않은 것과 맞서 싸우는 건 회춘이다...

 

제목이 발신자는 A인테 수신자는 변수 X이다. X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고, 세계 모든 곳에서 X의 삶이 현재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최악의 외부 상황에도 사랑은 싹트고 단단해진다. 척박함을 버티게 하는 건 개인의 긍정적 경험이라고, 존 버거는 말하고 싶은걸까. 아이다와 남자의 사랑이 사회 격동으로 변치않는 사회가 좋은 건지, 평온한 사회가 돼서 늘 함께 있어 서로를 싫증내는 사회가 좋은 건지...둘 다를 이루기엔 인간은 어리석은 걸까.

 

 

존 버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을 독자한테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존 버거의 사계>를 보면 틸다 스윈튼이 존 버거의 집, 알프스 지역의 작은 마을 퀸시에 찾아간다. 두 사람은 생일이 같다. 11월5일 전갈자리ㅎ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다큐를 보면 존 버거의 집이자 작업실을 훔쳐볼 수 있는 것만으로 볼만하다. 시골 마을의 작은 집. 책상은 창을 향해 놓여있고 책상 오른쪽 벽은 아마도 그의 작업으로 짐작되는 그림과 글귀들이 가득 붙어있다. 그림은 그의 글처럼 단순 드로잉에 약간의 채색들이 주고 액자에 넣은 게 아니라 스케치북에서 쭉 떼어내서 테이프로 그냥 붙여놓았다. 틸다 스윈튼과 대화를 하면서도 손은 종이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선을 그리고 형태를 만들어서 급기야 틸다 스윈튼을 그린 그림을 완성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린 시절 가족 이야기로 이어진다. 틸다 스윈튼은 요리를 하고. 두 거물이 좁은 공간에서 일상적 일을 하면서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는 기쁨이 있다.ㅋ 모두 4편인데 첫 편만 그렇고 나머지는 책을 이미지한 느낌이라 흥미가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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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2년 처음 개봉 당시, 이 영화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깊은 의미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분석글로 받아들이고 알고있는 편이다. 오늘 스크린으로 몇 십 년 만에 다시 보니 명작일세. 중저음 목소리로 낮게 말하는 잔느 모로의 내레이션. 독특한 분위기의 제인 마치와 피칠갑하는 홍콩 느와르에 어울릴 법한 외모의 양가휘가 내뿜는 눈빛과 표정. 사이공 촐란과 사이공 근교(?) 빈롱 전경. 모든 것이 새롭다.

 

2.

15세 반이 된 프랑스 소녀와 서른 두살의 중국인 남자의 불꽃같은 사랑이 줄거리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이 담겨져 있다. 학교에서 외톨이인 소녀. 잘못된 투자로 가난해진 가정환경. 오빠는 아편 중독자고 동생은 어느 면에서 폭력적이고 수학 교사인 엄마는 커가는 사춘기 딸을 대할 줄을 모른다. 학교와 집의 폭력적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는 성적 쾌락. 십대 소녀의 성에 대한 호기심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소녀를 쾌락으로 내모는 건 소녀가 속한 곳에서 부적응자였던 탓이 크다.

 

백인 소녀가 동양인 남자를 만나는 걸 가족들은 수치스러워하면서도 남자의 돈에는 관대했다. 남자와 소녀의 가족이 고급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은 소녀가 어떤 폭력에 처해 있는지 잘 표현된다. 백인의 우월감에 동양인을 무시하지만 진수성찬 앞에서 엄마, 남동생, 오빠는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와서 코를 접시에 박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남자가 단지 소녀의 나이든 친구라는 뻔한 거짓말을 믿는 척하면서 식탐을 버릴 수 없는 이중성을 소녀는 버텨낸다.

 

소녀는 미래를 계획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남자와 식당에 나오면 소녀는 앞에 나온 음식을 열심히 먹고 남자는 원하지 않는 예정된 결혼에 대해 말한다. 소녀한테 남자의 결혼은 비현실적이었다. 남자는 소녀에 대한 감정이 점점 깊어지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버릴 용기가 없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결국 소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선택하는 남자. 소녀는 사랑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어렸고 남자는 가진 걸 버리기고 사랑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남자가 결혼한 후 소녀는 프랑스로 와서 누군가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깨닫는다. 자신이 남자를 사랑했는지 확신이 없지만 사랑을 잃었노라고. 그걸 깨닫는 순간 소녀는 울음을 터트린다. 사랑하는 이와의 결별은 눈물로 승화하는 의식을 필요로 한다.

 

3.

이십년도 넘은 영화가 재개봉되는 힘을 지닌 건 아무래도 장 자크 아노의 연출 덕분이다. 줄거리만 보면 자극적이고 막장 드라마인데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표현법에 있다. 배에서 만날 때, 소녀는 남자 모자를 쓰고 한쪽 다리를 난간에 기대어 있다. 신발을 클로즈업하는데 옷과 안 맞게 화려한 비즈가 있는 구두에 흙이 묻어있다. 소녀의 머리는 독립적이고 화려함을 꿈꾸면서도 진창을 피하지 않는 캐릭터다. 비포장 길에 스콜이 내리는 열대. 사방의 길은 흙이고 베드씬에서는 몸에 물인지 땀인지 반짝여서 습한 기운이 화면에서도 전해질 정도다.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미장센이 어수선하고 정돈과는 거리가 멀어서 소녀의 정신세계와 맞닿아 있다. 단정한 건 딱 하나, 남자가 옷맵시다. 남자의 빗어넘긴 머리와 단정한 옷은, 그가 자신의 영역을 나올 수 없다는 걸 암시한다. 혼란 속에서 시작된 성적 탐닉은 결국 사랑으로 기억된다. 먼 훗날까지 두 사람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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