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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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에 이어서 연속 읽게 된 책이 사랑하는 이가 반정부 활동으로 감옥에 있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이가 감옥에 있는 시대는 어수선하고 보통의 소설 형식으로는 시대상을 담기에 적합하지 않은걸까. 이 소설 역시 독특하다. 아이다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한테 보내는 편지글 모음이고 남자는 그 편지에 자신의 생각을 적는다. 편지글은 묘한 힘이 있다. 빈 여백이 많아서 그 여백 사이를 독자가 상상으로 채우게 한다. 이 소설에서 아이다가 여러 가지 애칭으로 불리는 남자와의 관계를 유추하면 두 사람의 만남은 길지 않지만 격렬한 만남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진짜 습관-서로의 품안에서 잠드는 것만 빼면-이라는 게 생길 만큼 충분히 오랜 시간을 가져 보지는 못했어요. 네, 그 점에서 우리의 몸과 잠은 각각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죠."(181)

 

"지금 당신을 만져 보고 싶어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너무 오래 당신을 만져 보지 못해 이젠 쓸모없이 되어 버린 손처럼 보이네요."(88)

"이레네, 잘 자요. 꿈속에서 당신을 가질테니..."(189)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115) 이중종신형을 받아서 석방 가능성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결혼 신청을 하는 아이다가 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단 하나 뿐이에요, 당신과 나의 삶"(118)

 

그럼 두 사람을 이렇게 격렬한 그리움으로 데려다 주는 건, 두 사람이 영원히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시대상황일지도 모른다. 아이다의 편지는 연서로도 읽히지만 연서 안과 밖에 조각 정보를 얻어서 기워보면, 남자는 반정부활동을 했고 아마도 약사인 아이다도 그 활동에  어느 정도 가담하고 있다. 두 사람은 그러니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

 

"탈지역화. 단순히 노동력이 가장 싼 곳을 찾아 생산과 서비스가 이동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리잡은 지역들을 파괴해 전 세계가 무의미한 곳, 즉 단 하나의 유동성 시장이 되게 하려는 계획을 뜻한다."(36)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존 버거의 사상이 잘 드러난 말이다. 아이다가 보내지 않은 편지에 보면, 무력으로 마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려는 걸 상상케 하는 지점이 있다. 무력은 사실은 커다란 공포를 만들고 인간의 의지를 약하게 한다. 그래서 많은 독재자들이 무력을 이용하기도 하고. 하지만 무력은 두려움을 연료로 공급받아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한테 한없이 무력하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하지 않겠다는 무서운 결심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의지력이 필요할지를 계산해야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194) 탱크가 전진해오는데 피하지 않고 사람들이 탱크와 마주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말이다. 탱크는 결국 방향을 돌려 물러난다. "우리, 그들의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 다시 젊어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기억하며 흩어졌죠."(196) 뭉클한 묘사다. 두려움에 무릅을 꿇지 않고 옳지 않은 것과 맞서 싸우는 건 회춘이다...

 

제목이 발신자는 A인테 수신자는 변수 X이다. X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고, 세계 모든 곳에서 X의 삶이 현재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최악의 외부 상황에도 사랑은 싹트고 단단해진다. 척박함을 버티게 하는 건 개인의 긍정적 경험이라고, 존 버거는 말하고 싶은걸까. 아이다와 남자의 사랑이 사회 격동으로 변치않는 사회가 좋은 건지, 평온한 사회가 돼서 늘 함께 있어 서로를 싫증내는 사회가 좋은 건지...둘 다를 이루기엔 인간은 어리석은 걸까.

 

 

존 버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을 독자한테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존 버거의 사계>를 보면 틸다 스윈튼이 존 버거의 집, 알프스 지역의 작은 마을 퀸시에 찾아간다. 두 사람은 생일이 같다. 11월5일 전갈자리ㅎ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다큐를 보면 존 버거의 집이자 작업실을 훔쳐볼 수 있는 것만으로 볼만하다. 시골 마을의 작은 집. 책상은 창을 향해 놓여있고 책상 오른쪽 벽은 아마도 그의 작업으로 짐작되는 그림과 글귀들이 가득 붙어있다. 그림은 그의 글처럼 단순 드로잉에 약간의 채색들이 주고 액자에 넣은 게 아니라 스케치북에서 쭉 떼어내서 테이프로 그냥 붙여놓았다. 틸다 스윈튼과 대화를 하면서도 손은 종이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선을 그리고 형태를 만들어서 급기야 틸다 스윈튼을 그린 그림을 완성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린 시절 가족 이야기로 이어진다. 틸다 스윈튼은 요리를 하고. 두 거물이 좁은 공간에서 일상적 일을 하면서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는 기쁨이 있다.ㅋ 모두 4편인데 첫 편만 그렇고 나머지는 책을 이미지한 느낌이라 흥미가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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