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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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감명깊은 책을 꼽으라면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물질과 빛에 관한>이론이다. 담담한 문체지만 행간에 많은 섬세한 감정들을 찾을 수 있다. 단편마다 눈에 띄는 사건이 없이 일상의 미세한 균열을 담아낸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족이든 애인든)와 헤어졌어도 일상은 똑같이 살아지고 살아간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개인적 활동동을 하고. 행위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가만이 들여다보면 행위를 하는 주체의 마음은 변한다. 사건(?)이 있기 전에 못 느꼈던 부재감, 상실감, 혹은 기득감을 인지한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인식하지 못했던 미세한 떨림의 결을 포착하는 일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파장이다.

 

2.

앤드루 포터의 영문판 소설을 검색하다가 <어떤 날들>이 번역된 걸 발견했다. 단편에 감동을 주는 작가의 장편은 힘이 좀 딸릴 때가 많아서 기대치를 좀 낮췄는데도 역시나 장편보다는 단편이 훨씬 좋다. <어떤 날들>도 장편이 아니라 중편쯤이었으면 아주 좋았을 거 같다. 플롯은 스릴러처럼 구성된다. 대학에 다니는 딸이 학우의 폭력 사건에 연류되면서 도망자 신세가 되고 그 딸의 행방불명으로 이혼한 부부, 그리고 게이인 아들이 각각 가족 구성원의 개체로서 어떤 입장으로 가족이란 테두리, 가족 내에서 역할을 더듬는다.

 

 

"엘슨은 이 모든 것이 현대인의 삶, 이 시대 가족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묘한 증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갈가리 찢어진 가족이 있고 아버지를 경멸하는 아들이 있고 욕실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전처가 있으며 딸은 감옥에 갈 가능성이 아주 큰 상황인데, 그런데도 자신이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사실에,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본인들은 깨닫지 못해도 그들이 자신을 의지한다는 사실에 단순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445)

 

소설을 읽으면서 가족이란 행복한 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행을 마주할 때 그 존재감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싶다. 행복의 영역은 각자의 영역이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운 부부의 관계가 이혼이란 결말을 맞지만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일정 부분 존재한다. 각자 다른 파트너,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정서적 유대를 이루지만  과거의 가족은 흩어졌어도 위기는 다시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다. 딸 클로이의 행방불명으로 부부,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아들은 클로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모인다. 아내 케이든스는 "평생 남편의 뒤를 따르느라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들" 속에 속했다. 아들은 성인이 되었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전에 누렸던 아들과의 친밀함이, 긴 대화가 그리웠다.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던 아들, 고등학교 때 함께 갔던 수영경기들, 경기 직전 항상 엄마에게 손을 흔들던 아들의 모습, 그리고 경기 후엔 항상 단둘이 저녁식사를 하러 가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395)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도 빛이 바랬다. 한때는 좋은 동반자였고 친구며 동료였던 사이이다. 딸 클로이의 행방불명으로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오랜 기간 의지했던 사이라는 걸 알게 되고 여전히 그렇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상황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한번 균열된 마음은 다시 이어붙이기 어렵고 딸 클로이는 부모의 곁을 떠나 사랑하는 이의 곁에 남기로 결심한다. 딸은 자신만의 가족을 꾸릴 것이다. 여전히 이들은 가족이지만 현재 또 다른 가족을 가진 과거의 가족이다. 가족이란 단위는 피보나치 수열처럼 확장되면서 정서적 교집합을 만들어 이따금씩 모여 과거 유대를 환기할 것이다.

 

3.

2주 전  토요일에 이종 사촌 동생 결혼식에 다녀왔다. 코 찔찔 흘리던(?) 동생이 서른 중반이 되어 결혼식장에 서 있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가족 사진을 찍고 피로연장에서 친척들과 자리를 잡았다. 어릴 적에 보고 왕래가 없었던 손위 사촌들, 그리고 삼촌. 삼촌, 숙모의 주름에서 나이를 실감하고 사촌들이 다 큰 아이의 엄마, 아빠란 사실에 놀라고. 같이 사는 우리 부모님한테도 내가 무슨 생각하며 지내는지 말 안 하는데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자리에 앉고 보니 가족이란 또 다른 가족을 만들거나 잃으면 이렇게라도 한번씩 모이는구나...

 

4.

만추다. 아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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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률 감독이 영화에서 계속 다루는 주제는 소외된 주변인의 삶이다.  <춘몽>은 지금까지와는 톤이 많이 다르다. 서늘한 톤에서 버티는 삶을 보여주고 고민하게 한 전작들에 비해 <춘몽>은 유머 코드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이 유머 코드라는 게 좀 석연치않다.

먼저 꿈을 다루는 방식을 보자. 아직 개발이 안 수색동에 동네 건달 삼총사가 있다. 일명 건물주로 통하는 종빈, 화려한 셔츠에 기지바지를 배까지 올려입는 익준, 임금을 강탈당해 1인 시위하는 탈북 이주자 정범. 그리고 그들의 여신 '고향주막'의 예리. 네 사람은 동네친구기도 하고 가족같은 연대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범이 못 받은 임금을 받아주려 애쓰고, 예리의 휠체어 탄 채 의식이 없는 아버지를 돌봐주기도 하고. 틈나면 넷은 모여서 술도 마시고 시시한 잡담을 한다. 친구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세 건달 삼총사한테 예리는 비현실적인 꿈, 여신의 위치다. 어느날 종빈은 예리한테 묻는다. 어떤 남자가 좋아? 예리의 대답은 정신과 몸이 건강한 사람이면 좋겠다였다. 그러자 삼총사는 모두 고개를 숙인다. 사실 대사는 하나도 유머러스하지 않지만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이 웃음의 실체가 나는 마뜩찮다. 물론 나도 웃었다.

나를 포함한 관객은 왜 웃나? 세 사람은 예리를 흠모한다. 하지만 예리는 세 사람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예리는, 삶은 달걀 껍질 까는 장면을 1분이나 보여주는 좀 어려운 영화를 보고 시를 외우고 책을 읽는다. 세 사람은 예리가 평범하다고 여기는 특성을 이미 갖지 못했다는 걸 영화 속 인물만이 아니라 관객도 동의하기에 웃음이 나온다.

종빈은 수색동 건너편 한국영상자료원이 있고 MBC가 있는 상암동을 "저쪽 동네" 혹은 "그쪽"이라고 표현한다. 옥상 위에서 보면 수색동과는 다른 때깔을 갖고 있고 뭔가 자본의 움직임을 내보인다. 그런 동네에서 영화를 공짜로 보여준다고 해서 삼총사는 예리를 따라간다. 여신 예리는 삼총사가 모르는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고 모르는 세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한다. 삼총사한테 예리는 '춘몽'이다.

예리는 삼총사한테 의리를 지키지만 내적 공허함은 그녀의 몫. 의식없는 아버지,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삼총사, 그녀를 좋아하는 한 동네 소녀, 그 누구도 예리의 꿈이 될 수 없다. 그녀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정신도 육체도 건강할 거 처럼 보이는 오토바이탄 남자의 사진이다. 길을 가다가 자신의 이상형인거 처럼 보여서 찍었다는, 아무 의미없는 사진이지만 또한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사진. 그러니까 예리는 자신이 속한 공간이나 세계를 밖의 것들에서 꿈을 꾼다. 영화, 책을 포함해서.

2

 장률 감독의 영화들이 내러티브가 친절한 편은 아니고, 이 영화 역시 말이 안 되는 부분도 많다. 신민아가 정범의 변심한 여자친구로 갑툭튀하고 오토바이남인 유인석이 고향주막에  갑자기 나타나고. 생뚱맞은데 꿈이라는 카테고리에 다 포함할 수 있다는 편리한 제목ㅎ

3

양익준 감독, 윤종빈 감독의 연기는 갑 중에 갑. 두 사람의 캐릭터가 이기호 작가 소설에 나오는 변두리 거주자들과 닯아있다. 영화를 보면 계속 이기호 소설들이 떠오른다. 코믹한데다 엉뚱함까지. 그들의 엉뚱함은 순진함에서 나오는데 순진하는 게 웃음 코드로 작용해서 웃는게 썩 유쾌하진 않다. 나는 우월한 입장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불편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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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장에 못 간지 3주나 된다. 바쁜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체력이 급속도로 저질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짬이 나면 주로 충전을 위해 주로 누워서 보내는 나날들ㅜ 오늘도 할 일은 산더미지만 뒤로 미뤄두고 백만 년 만에 자료원으로 향했는데 강변북로는 올 때 갈 때 모두 주차장 같았다. 가을은 축제의 달로 서울 시내가 온통 들썩인다. 도로는 주차된 차로 넘쳐나고. 극장 안은 계절이나 사람의 기분과는 무관한 아늑함을 선사한다. 좀 더 열심히 극장을 가야지.

2.
<자객 섭은낭>은 몹시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개봉관에서 상영시간이 오묘해서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영화. 무협 없는 무협영화. 허우 샤우 시엔의 영화니 대충 짐작은 했다. 영화 내내 산수화를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자작나무 숲에서 두 여인이 대결하는 씬은 박진감이 아니라 느린 템포를 택하고 그럼으로써 파생된 우아한 정서를 전달한다. 인물의 물리적 행동이 아니라 심리적 고뇌와 그로 인한 피로감을 오롯이 전달한다. 하지만 허우 샤우 시엔 감독이 잘 안 사용했던 느린 카메라 패닝이 눈에 띄는 영화. 정말 천천히 카메라가 돌아가지만 결국에 감독이 애정 하는 것은 롱테이크. 수묵 산수화가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해두자.

3.
줄거리는 한 마디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정략결혼을 한 남자 탓에 도인한테 보내져서 자객으로 거듭난 섭은낭. 그녀의 검을 쓰는 솜씨는 도인의 경지에 이르지만 인간의 따뜻한 심장을 버리지 못한다. 자객의 검은 무정한 도구고  심장은 장애물. 섭은낭은 심장을 제거하기 위한 미션을 받는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아마도 사랑했을 전계안을 죽이라는 명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섭은낭은 아무 감정 없던 남자의 아이도 너무 귀여워서 죽이지 못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한때 사랑했던, 그리고 아마도 현재도 사랑하는 남자를 어떻게 제거할까.

감독은 전계안이 첩한테 하는 이야기를 통해 전계안과 섭은낭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의 마음, 특히 한. 때. 사랑했을 두 사람의 마음을 잘 묘사한다. 어떤 감정은 말로 변환되는 순간 산화되어 산산이 부서진다. 감정보다는 감정의 찌꺼기만 상대한테 전달될 수 있다. 섭은낭과 전계안, 두 인물은 이런 인간 감정의 본성을 잘 아는 인물이다. 섭은낭의 임무는 한계 안에게 칼을 꽂을 기회가 여러 번 있지만 행동을 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전계안이 자신에 관한 하는 과거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이 커플과 섭은낭 사이에 마음의 벽처럼 작용하는 커튼 역할을 하는 얇은 천이 있다. 한번 변심한 마음에 대한 서운함 내지는 분노는 커튼의 두께가 아무리 얇아도 허물어질 수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섭은낭의 최대 결점은 뛰는 심장. 그녀는 자객의 자격을 갖추는데 실패한다. 사랑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일편단심도 심장의 부적절한 온도 탓이다. 이 영화가 무협영화가 아니라 절절한 사랑 이야기라는 걸 말해주는 이유이다.

4.
배경이 8세기인 이야기이지만 나는 좀 삐딱하게 봤다. 섭은낭이 주체적 인물인데 반해 전계안은 (좋게 말해) 수동적 인물이고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다. 환경에 잘 적응하고 여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니면 헤아릴 태도도 없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인물이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성찰하지 않는 인물로 허우 샤우시엔 감독이 이런 인물을 왜 창조했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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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제주 매거진 인 iiin 2016.가을호 - 마당 깊은 집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엮음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잡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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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시선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지만 내게 시선이란 게 있나, 하는 자문을 하게 하는 잡지. 일 때문에 필요해서 보게 되었지만 배울게 많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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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활 - 11호 - 2016년 가을 혁신호
말과활 편집부 지음 / 일곱번째숲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특집은 재미나게 읽었는데 그 외에는 지루함. 한때 형용돈죵 팬픽 덕질을 했던 입장이라 팬픽 분석글은 많이 재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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