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일 낮 영상자료원에 가면, 황혼기에 접어든 분들이 친구랑 앉아 싸온 김밥을 먹으며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아마도 젊은 시절 영화를 사랑하셨을테고 나이들어서도 변함없이 영화를 사랑하시는 분들이시리라. 나이들어서까지 영화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분들이 많지는 않은데 내 세대 혹은 내 뒷세대는 좀 많아지지 않을까. 김밥 한 줄 싸서 아트시네마나 영상자료원에 가서 소일 삼아 영화를 보고 담소를 나누는 노년은 풍요로울 거 같다. 내가 꿈꾸는 노년의 삶 중 하나다.ㅋ

 

지난 주 토요일 무르나우 감독의 <파우스트>를 연주상영을 해서 자료원에 갔는데 20년대 무성영화가 매진일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저녁 약속을 해서 두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매진 직전이었고 남은 자리는 앞쪽 맨 구석 자리 밖에 없었다. 270석이 넘는 좌석이 매진이라니. 관객의 다양화로 다양한 영화 상영 전성기 때 살고 있는 게 무지 행복했다. 십 여 년 전만해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제한적이었다. 이제는 적극적 태도만 조금 가지면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다. 파리 뒷골목 소극장이나 뉴욕 골목 아트시네마가 안 부러운 서울에서의 삶이다.

 

2. 무성영화는 배우의 목소리 대신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흘러나와서 비극도 경쾌한 구석이 있다. 영화 기법적으로 이제는 당연한 장면들이라 아기자기하게 보이기도 하는 면이 있지만 음악도 무성영화를 귀엽게 보이게 한다. 게다가 연주상영은 극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스크린에 맞춰 연주자가 런닝타임 동안 쉬지 않고 연주하는데 영화가 왜 종합예술인지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상영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주자의 집중력에 감탄과 긴 시간 연주로 찾아올 피로에 애도를.

 

3. <파우스트>는 영화사적으로 독일 표현주의의 걸작 중 하나다. 세트 촬영에서 나온 기법상의 특징들이 표현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다. 미니멀한 세트, 조명이 발달하지 않았을 시기라 조명 뒤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와 흑백의 콘트라스트. 이런 특징들이 나중에 느와르 영화의 특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파우스트>에서 인상적인 점들은 집과 집 사이에 난 골목을 표현하는 회화적 기법이다. 역시나 미니멀하지만 인물이 밑에서 위로 걸어올라오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미리 앞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면 인물이 등장하기 전에 조명이 만든 그림자가 드리워진 벽을 잠시 볼 수 있는데 마치 요즘 사진술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당시 블록버스터였다. 세트에서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이 제한적이기도 해서 인물들의 복장이이나 분장(특히 메피스토)도 화제가 됐던 영화다.

 

4. <파우스트> 이야기 자체가 대서사시에 속하는 편이고 이 영화 역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책 속에 묻혀 젊음을 다 보낸 노인이 악마와의 계약으로 젊음을 얻는다. 욕망을 부추기는 게 젊음일까, 아니면 원래 사람의 마음이 하나를 얻으면 다른 걸 얻고 싶어하는 걸까. 아무튼 젊음을 얻고 나니 사랑을 얻고 싶은 파우스트.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마녀사냥을 당해 화형 당하는 걸 지켜봐야하는 고통을 안 후 파우스트의 깨달음. 우주의 보편적 진리, 모두를 웃게 만드는 건,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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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5-2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의 세트, 기법상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이아들의 전통? 이런걸 뭐라고 해야 할 까요? 넙치님.. 암튼.. 애네들의 특성 같아요. 요즘 저는 애네들 건축 스타일.. 맞다..스타일 ...
암튼.. 정말.. 웃음이 나와요.. ㅋㅋ

감탄도 하지만, 참으로 독일스럽다고 할까요..



아.. 영화관의 문화가 그렇게 달라졌군요.. ^^
저도 영화 하나 보러 서울아트시네마까지 달려가곤했는데..
한국 영화 .. 굉장히 높이 평가되고 있는다고 해요.. 유럽에서도요..

넙치 2014-05-27 01:03   좋아요 0 | URL
"이 아이들의 전통"ㅋㅋ
네. 저도 오랜만에 영화 보면서 참 비스마르크 공화국스럽다, 했어요ㅎ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이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일상에서 얻은 자연스러움을 표현했는데 대서양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호기심있게 바라본 거 구나..뭐 이런 잡생각을ㅋ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독일하면 쾰른과 라인강변이 떠올라요^^;

제가 느끼는 영화관을 찾는 관객층의 욕구와 변화라고 하겠어요. 근데 정말 관객층이 다양화되고 두터워진 건 진실인 듯해요. 예전에 여행다니면서 다른 나라 분위기를 몹시 부러워한 터라 더 눈에 들어와요. 요즘은 한국영화는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퀄리티라고 생각해요. 유럽인들 역시 유럽 밖 문화에 관심사를 찾는 이들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도 한국영화 평가에 한 몫하는 것도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