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스틸러가 출연한 영화들로 영어 공부를 했었다. 영어 리스닝 수업에서 강사가 커리큘럼으로 정하는 영화들이 벤 스틸러가 빙구로 나오는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였다. 그 후 벤 스틸러 영화는 쳐다보기도 싫었고 싫은 영화를 안 보는 일은, 내 의지대로 실행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며칠 전 차 안에서 배철수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듣다가 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고 배철수 씨와 김세윤 씨가 너무 재밌게 이야기해서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벤 스틸러가 감독이라니. 영화는 별 기대없이 본다면 괜찮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의 풍광만으로도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영화다. 다만 내 상태가 요즘 울증이라 삐딱해서 이 영화를 보고 좋다고 할 수 없을 뿐이다.

 

16년 간 <라이프>잡지에서 네거티브 필름 관리자인 월터. 온라인 커플 매칭 사이트에 올릴 프로필란에 가본 곳, 해본 것을 채울 수 없는 월터. 가끔씩 멍때리며 공상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는 소심한 월터. 그런 그가 폐간호 표지 사진 필름을 잃어버려서 그 필름을 찾아 갑작스런 모험을 한다. 어릴 적 아빠한테 받은 여행 일기장을 채우기 시작하고 그의 프로필은 모험심과 창의력으로 채워져 낯선 이성의 윙크를 한꺼번에 받는다. 내성적인 성격에 좋아하는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도 못했는데 짧은 모험을 마치고 월터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상상 속에서만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대화하는 법을 터득한다는 훈훈하고 착한 결말로 영화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이행한다. 벤 스틸러 감독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 영화적 짜임새나 상상으로 넘어가는 장면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영화적 판타지에 감동 할 수 없다. 해를 거듭할수록 여행은 허무만 남긴다. 출발 전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지루하면서도 설렘 한 스푼이 들어간 비행하는 시간, 그리고 다른 나라의 입국심사대를 빠져나가기 전까지만 일말의 판타지가 존재하는 게 여행이다. 여행지에서 낯선 언어에 맞닥뜨려 어디서 뭘 먹고, 어디서 자는 지와 같은 생존에 관련된 일을 해결하는 일은 잠시 모험가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요령이 생긴다. 낯선 언어에 둘러싸인 긴장도 며칠이 지나면 풀리고, 이 역시 요령이 생긴다. 그러면 슬금슬금 권태가 목덜미를 잡는다.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는 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인천 공항을 빠져 나오면 고향 냄새인 매케한 매연에 안도를 하는 건 잠시. 곧이어 바닥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처참함에 빠진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환경을 척척 개척하는 것 같은 착각에서 깨어나서 원위치로 돌려지면 월터가 여행 떠나기 전 보여준 소심한 캐릭터에 빙의하는 것 같다. 일상적 공간에 내 동안 일상은 다른 질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예전에는 존재했다. 요즘은 희망은 커녕 똑같은 익숙한 질서로 이루어진 공간에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여행이 주는 약발이 급격히 효력을 잃고 있다. 영화 속에서 월터의 모험보다는 멍때리며 공상하는 월터의 능력이 더 근사하게 보인다. 나도 멍때리며 공상하는 연습이라도 좀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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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1-0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 도시에서 낯선 환경을 척척 개척하는 것 같은 착각에서 깨어나서 원위치로 돌려지면 월터가 여행 떠나기 전 보여준 소심한 캐릭터에 빙의하는 것 같다.

이렇게 절묘한 표현을 .. ㅎㅎ
와 ~~ 넙치님. .정말 그래요. ㅠㅠ

한참 보고 멍하니 헛웃음만 나왔어요.. 너무 정곡이 찔려서 퍽 하는 느낌.. ~~



더군다나 마지막 문장.. ^^

요즘은 희망은 커녕 똑같은 익숙한 질서로 이루어진 공간에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여행이 주는 약발이 급격히 효력을 잃고 있다. 영화 속에서 월터의 모험보다는 멍때리며 공상하는 월터의 능력이 더 근사하게 보인다. 나도 멍때리며 공상하는 연습이라도 좀 해볼까.


그냥 엎드릴까봐요.. 넙치님.. ~~



넙치 2014-01-10 14:34   좋아요 0 | URL
해를 거듭할수록 여행이 생산적이 아니라 소모적이 돼버리는 거 같아 허무해요.ㅜ.ㅜ 새벽숲길님은 저와는 왠지 다를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