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영상자료원으로 <아비정전>을 보러 갔다. 영화 시작 20분 전에 도착해서 늘 앉던 좌석을 받고 커피를 마셔야지, 했다.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내 계획의 무모함이 드러났다. 다음 회 <백발마녀전>까지 티켓은 매진이었고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이들이 로비를 둥글게 메우며 줄을 서고 있었다. 계단에라도 앉을 요량이었다. 장국영의 인기를 내가 너무 과소 평가했던 거다. 등받이 없는 통로에 앉아 영화를 보기에는 내 허리가 너무 부실해서 발길을 돌려 뜻밖에 <비념>을 봤다.

 

<지슬>을 본 터라 <비념>은 보겠단 의지가 전혀 없었지만 <비념>은 <지슬>이 좀 놓친 역사적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감독이 서양화 전공이라서 그런지 이 영화도 제주 영상 홍보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제주를 구석구석 담는다. 바람소리,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화면을 구성하는 감상적 전달법을 사용한다. 이런 화법이 처음에는 좀 답답했다. 언제 이야기를 하려고 영상만 내보내나 했는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제주의 사소한 일상적 풍광에 서서히 젖어들면서 역사적 슬픔에 조금씩 동화되는 효과가 있다. 4.3 사건부터 현재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논란까지를 절제하면서도 차분하게 요약한다. 제주에 십 수 번 갔지만 섬 전체가 슬픔이 묻어있는 곳인지 전혀 몰랐다. 지금 올레길로 알려진 곳 중 많은 곳이 피의 흔적을 깊숙이 간직한 곳이다. 제주를 평온한 휴양섬 정도로만 여겼왔던 터라 좀 충격적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의 입을 통해 본 제주는 삶의 터전일 뿐이다. 1946년이나 2012년이나 제주민한테 동급의 악몽이다. 4.3 사건 당시 일본으로 피난을 간 한 할머니의 말이 스산하다. "일본에서 못 살면 미국이나 중국으로 가야지 한국으로 가면 안 돼. 한국은 사람이 살기에 제일 나쁜 곳이야"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깊은 상처를 보여주는 말이다. 군사적 전략지로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말은 앞으로 제2의 4.3 사건이 일어날 잠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국가 방위가 누구를 위한 건지 의문을 던진다.

 

<지슬>이 겨울 하얀 풍경으로 서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비념>은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나는 영화 보는 내내 다음에 제주에 가면 다랑쉬 오름을 가 봐야지, 했다. 아마도 <지슬>에서 주민들이 숨어있고 말다리를 가진 청년이 죽던 곳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가 끝난 후에는 또 소비하는 인간으로 돌아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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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4-09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심플하고 좋네요. 저도 영화를 본 이후에는 늘 소비하는 인간으로 돌아오는 듯. 아니 가끔은 영화 보는 도중에도 소비하는듯..<지슬>에 대해 '씨네21'에서 비판적인 글을 읽었는데, 꽤 흥미롭더군요.

넙치 2013-04-10 17:52   좋아요 0 | URL
글 내용이 제가 짐작하는 게 맞는지 궁금하네요.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언제나 까기 좋은 편이라...

맥거핀 2013-04-11 13:20   좋아요 0 | URL
<지슬>에 가득한 이미지 중심의 숏들이 '영화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인 걸로 보입니다. 뭐 간단하게 말해서 영화는 사진집이 아니라는 얘긴데요...사실 이 글에서 말하는 '영화적'이란 것의 실체가 좀 두루뭉술하기는 합니다. 운동성? 혹은 <홀리 모터스> 같은데서 말하는 '모터'?

넙치 2013-04-12 22:30   좋아요 0 | URL
제가 짐작하는 거랑은 전혀 다른 형식적인 면이가 보군요. 들뢰즈가 말하는 운동성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 이미지를 아주 역동적으로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