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가 역사를 다룰 때, 일반화가 꼭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화 되지 않은 역사 영화는 일반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에 관심있는 소수의 전유물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감독이 잠재적으로 의도한 역사적 인식에 대한 시선에 있어서 분명히 존재하는 미덕을 희미하게 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역사를 상세히 아는 이들한테 비판을 좀 받더라도 일반화는 어쩔 수 없고 본다. 근데 일반화를 할 때 그 선을 범주화하는 게 만만치 않다. 그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여러 영화들이 지나친 일반화로 휴머니즘으로 흐르거나 혹은 지나친 특수화로 역사에 대한 자각을 주지 못했다. <지슬>은 미학적으로도 빼어나게 비극적 한국 역사를 일반하고 성찰 영역까지 나아간다. 

 

2. 제주4.3 항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네이버 검색을 좀 해봤더니 지도부의 무능함에 분노가 끓어 오른다.  미군의 농간으로 1948년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영화는 두 그룹을 배치한다. 마을 공동체 주민 한 그룹,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 그룹. 군인 그룹을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명령에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지도부와 왜 비논리적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신병들이 있다. 신병과 마을 주민들은 모두 왜 자신들이 죽이고 죽어야하는 지 모른다. 차이점은 신병들은 상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을 강요받고 주민들은 군인의 정체성을 아주 추상적으로 받아들인다. 주민이 보기에 군인은 제복을 입고 총을 겨누기 전에 누군가의 아들이며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고귀한 생명체다. 주민 공동체가 갖는 이런 의식세계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잡아낸다. 작은 지방 마을에서 마을 구성원의 친밀함이 피난을 가고 작은 동굴에 모여 도라도란 나누는 담소 장면 속에 잘 나타난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렵게 가져온 감자를 서로 나눠 먹을 때, 이들은 한 집합으로 묶여 스크린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회화같은 이미지다. 각 개인의 얼굴을 잡을 때도 카메라가 둥글게 돌면서 한 사람씩 잡아내는 방식을 쓴다.

 

군인들을 담을 때 트랙인과 트랙 아웃, 아웃포커싱을 아주 인상적으로 사용한다. 트랙인/아웃은 고참들과 신병들의 경계를 말하는 듯하고 신참들의 내적 갈등을 아웃포커싱으로 표현다. 멀리서 아웃포커싱이 되면서 누군가 걸어와서 바로 우리 눈앞에 왔을 때야 포커스가 맞춰져 인물을 알아볼 수 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은유적 기술처럼 볼 수도 있겠다. 돼지가 굶어 죽을까봐 걱정하거나 집에 두고 온 딸, 노모에 대한 걱정을 하는 순박한 주민을 폭도로 규정하는 명령이 명쾌하다면 명령을 직접 집행하는 자들이 맞닥뜨리는 혼란을, 이런 식의 화면으로 잡아냈다. 아울러 짠밥이 쌓이면서 명령을 당연시하는 고참들의 악랄함이 대비된다. 주어진 상황을 잘 이용하는 파렴치한들이다. 이들이 살아있다면 이들부터 과거에 사죄해야하지 않나.  

 

영화는 전반적으로 굉장히 끔찍한 장면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비약해서 약간의 피와 결과만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서늘했다. 화면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목숨걸고 뛰는 장면에서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멀리서 보면 이들이 추격전을 하는지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지 헷갈릴 정도다. 반성과 성찰을 요청하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름다움 때문에 소비재가 돼 버리는 슬픈 운명에 종종 처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비극적 역사 이전에 감독이 만들어 낸 시각적 아름다움에 먼저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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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3-30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일반화와 특수화, 범주화의 문제는 알 것도 같고, 잘 모를 것도 같네요.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찍는가, 혹은 극영화로 하는가의 문제도 관련이 있을 것 같고, 과연 일반화가 어떤 식으로 가능할 것인가, 혹은 그게 사실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의 문제도 있을 것 같은데..아무튼 잘 모르겠습니다.^^

혹여 영화를 보게 되면 말씀해주신 트랙인/아웃, 아웃포커싱 같은 부분을 주의해서 보겠습니다. 이 영화가 아주 미학적이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글을 보니 이게 상당히 고도의 작업을 거친 결과물인 것 같군요.

넙치 2013-03-31 12:56   좋아요 0 | URL
정말 어려운 문제죠. 전에 맥거핀님이 다큐멘터리의 형식에 대한 고민을 썼던 글, 기억나요. 한때 제가 의문을 가졌던 문제기도 하구요. 다큐를 잠시 공부하는 동안 진보적 정치성향을 지닌 다큐가 그 형식마저도 급진적이다보니 올바른 정치성향을 대중에게 알리기 보다는 소수만 전유하는 걸 봤습니다. 내레이션과 화면은 기본적으로 불일치, 화면도 문서와 사진의 복잡한 배치로 독해해내려는 인내가 없으면 외면받을 수 있는 형식을 왜 택하나, 하는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습니다. 다큐 전공 샘 왈, 급진적 이데올로기를 평범하게 표현하기 거부하며 또 그런 기법에 익숙해지면 보편적 방법이 싱겁게 느껴진다고. 많은 똑똑한 사상가들이 읽기 편한 글을 지양하고 엉덩이 붙이고 뇌세포를 능동적으로 사용하길 요구하는 미로같은 문장을 생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거 같아요. 똑똑한 이들은 일반대중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평범한 대중이기에 대중적 화법이 더 설득력있다고 믿는 편이에요.물론 세부적 사항에서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보는 편이고요. 임철우 소설가의 <백년여관>이란 소설이 같은 사건을 소재로 다루었는데 구체화가 지닌 딜레마에 빠져 사건을 잘 전달은 하지만 일반 독자가 공감을 느끼기에 너무 지엽적이란 기억이 있어요.

이 영화는 그런 점을 잘 극복한 거 같아요. 극영화면서 살짝 다큐 느낌이 나는데 알려지지 않은 배우(전문배우인지 일반인인지 정보를 못찾았어요)와 제주 방언으로 이루어져서 극영화인데도 극영화란 느낌이 반감되더라구요. 게다가 흑백에 군더더기 없는 배경을 잡아내는 방식이 극영화와 다큐의 중간쯤 위치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요.

영화 본 후 감독에 관해 좀 찾아 봤더니 동양화 전공이란 말에 미학에 관한 모든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계산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감각이 아닐까, 뭐 이런.